45장 너는 큰 일을 경영하지 말라
5네가 너를 위하여 대사를 경영하느냐 그것을 경영하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그러나 너의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로 생명 얻기를 노략물을 얻는 것 같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
45장은 하나님께서 바룩에게 하신 내용입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다”(3)고 탄식하는 바룩에게 “너는 대사(大事)를 경영(經營)하지 말라”(5)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바룩이 탄식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대사를 경영하지 말라” 하심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의 절대주권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제 사 년에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예레미야의 구전대로 이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니라 때에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에게 말하여 가로되”(1).
45장은 “여호야김 4년”에 임한 말씀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36장 1절과 부합합니다. 그렇다면 “유다 땅에 거하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고 예레미야와 바룩까지 영솔하고 애굽으로 내려온 지금의 시점으로부터 약 20년 전 이야기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36장에 기록하지 않고 여기에 기록케 하신 의도가 무엇일까?
① 먼저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다”(3)고 말하는 바룩의 고통과 슬픔이 무엇일까 하는 점부터 생각해보아야만 할 것입니다. 3절 한 절 속에는 “슬픔, 고통, 탄식, 피곤”이라는 말로 가득합니다. 이는 박해로 인한 일신상의 고통과 슬픔도 포함이 될 것입니다만, "바룩"이 안고 있는 고통은 다름 아닌 바울이 겪었던 그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에게도 동족 유대인들로 인하여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롬 9:2)이 있었다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구전하는 것을 받아 기록하면서 바룩에게는 고통과 슬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내용이 좋은 소식이 아니라 멸망을 당하게 된다는 심판의 경고였기 때문입니다.
② 바룩의 슬픔과 고통은 “탄식”으로 표출이 되고 있는데 그것은 불가피하게 하나님의 하시는 일(경영)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이러한 의문은 하박국 선지자에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들어서 유다를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시자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자를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합 1:13) 하고 어찌하여 보다 악한 바벨론은 심판하시지 않고 유다 만 심판하시느냐고 이의를 제기했던 것입니다. 즉 “대사를 경영”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이 후에 바벨론도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고 대답하셨던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사도 바울에게도 이러한 난제(難題)가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롬 9:4-5) 합니다. 그런 그들에 의하여 그리스도가 배척을 당하고, 그리하여 선민 이스라엘이 버림을 당하게 되다니, 이것이 풀 수 없는 난제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난제를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해결했던 것입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롬 9:20) 합니다. 바룩의 탄식도 이러한 탄식이었을 것입니다.
③ 바룩의 심사를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보라 나는 나의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나의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이러하거늘”(4) 하고 절대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말씀하시면서 이어지는 46-50장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열방을 심판하실(헐고, 뽑으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바룩의 슬픔과 탄식에 대한 답변인 셈입니다.
④ 그러므로 “네가 너를 위하여 대사(大事)를 경영하느냐”(5상) 하고 물으신 것을 바룩이 자신을 위하여 어떤 은사나 무슨 지위를 탐한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것을 하나님께서 “대사”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또한 상황으로 보더라도 바룩이 그런 것을 구할 시점이 아닌 것입니다.
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건설”이라는 대사를 마치 바룩 자신이 이루어 나가고 있는 양, 그리하여 모든 책임을 자기 두 어깨에 메고 있는 것처럼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네가 너를 위하여”(5상)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위하여” 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셈입니다.
⑥ 이점은 다윗 언약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려하자 하나님께서는 “네가 나를 위하여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삼하 7:5) 물으시면서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세워주겠다)”(11)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33:2) 하십니다.
⑦ 그러므로 “그것을 경영하지 말라”(5중) 하십니다.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도 하나님이시오, 택한 그들을 심판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드시려는”(18:4) 계획을 갖고 계시다(경영)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룩은 자기 자신이 “경영주”인 양 슬픔과 고통과 탄식을 한 몸에 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경영주에게 쓰임을 받는 종들은 하라는 대로 믿고 순종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⑧ 바룩의 “탄식과, 경영”은 주의 신실한 종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인 것입니다. 제게도 그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산기슭을 거닐면서 성경을 읽고 있던 나는 성령의 조명하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읽고 있던 본문이 로마서 4:4-5이었는데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 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일하고 품값 받듯 하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거저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경험은 나로 하여금 복음에 미친 목사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 후로 에베소서를 통하여 “영광스러운 교회”를 보게 해주셨습니다. 몇 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역사하시지 않는 것 같았고, 섬기는 교회의 모습은 영광스러운 교회를 닮은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망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때 창세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을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온 세상의 염려를 너 혼자 걸머지고 있는 양 걱정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건설은 네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것이다. 그 후로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롬 3:4) 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성경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 이정표가 책들을 펴낸 순서(로마서 강해, 영광스러운 교회, 창세기 파노라마)이기도 합니다.
⑧ 하나님께서는 바룩에게 이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36장에 기록되지 않고 ㉠ 예루살렘은 멸망을 당하고, ㉡ 성전은 불타고, ㉢ 형제들은 포로로 끌려가고, ㉣ 자신들은 애굽으로 끌려온, 한 줄기 빛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인 지점, 45장에 기록되게 된 것입니다.
⑨ 하나님께서는 바룩에게 한가지 보장을 해주십니다. “내가 너로 생명 얻기를 노략물을 얻는 것 같게 하리라”(5하) 하고 “생명” 즉 구원을 보장해주십니다. 이 말씀은 예레미야서에만 네 번(21:9, 38:2, 39:18, 45:5)이나 나오고 있는 핵심적인 주제 중 하나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 말씀이 가장 구체적으로 나타난 39장 18절, “내가 단정코 너를 구원할 것인즉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네 생명이 노략물을 얻음같이 되리니 이는 네가 나를 신뢰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39:18) 하신 말씀을 통해서 볼 때, ㉠ 다른 사람들이 멸망을 당하는 중에서도 구원하여 주시겠다 는 뜻입니다. ㉡ 그렇게 하심은 너에게 무슨 공로(행위)가 있어서가 아니라 나를 신뢰한 믿음으로 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 노략물, 그렇습니다. 그것은 값없이 거저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구원”, 이것이 바룩에게 돌아갈 분깃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