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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신부님은 탐정》
## 제103화 ― 「이도현이 숨긴 편지」
### ― 전하지 못한 마지막 부탁 ―
은솔경찰서 형사과 복도에는 오래된 종이 냄새가 떠돌고 있었다.
십일월의 첫 월요일이었다. 창밖으로는 늦가을 비가 내리고 있었고, 경찰서 뒤편 은행나무에서는 마지막 잎들이 젖은 보도블록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도현 형사는 책상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아, 정말. 이걸 언제 다 정리하라는 거야?”
그의 앞에는 낡은 서류상자 세 개가 놓여 있었다.
경찰서 내부 시설을 보수하면서 오래된 개인 보관함을 비우라는 지시가 내려온 것이다. 십 년 넘게 사용하지 않은 물건은 정리하고, 보존할 필요가 있는 자료는 정해진 절차에 따라 별도로 관리하라는 내용이었다.
문제는 이도현의 보관함이었다.
그 안에는 오래된 수첩, 고장 난 손전등, 낡은 넥타이, 경찰학교 시절 사진, 그리고 주인을 알 수 없는 열쇠까지 들어 있었다.
후배 형사 정우석이 옆에서 웃었다.
“선배님, 보관함이 아니라 박물관인데요?”
“시끄러워. 다 쓸모가 있는 물건들이야.”
“그럼 이건 뭡니까?”
정우석이 손잡이가 부러진 머그잔을 들어 보였다.
“그건…….”
이도현은 잠시 생각했다.
“언젠가 고치려고 했지.”
“언제가 십오 년 전입니까?”
“정 형사.”
“예.”
“자네는 오늘 할 일이 없나?”
정우석은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이도현은 다시 상자를 뒤졌다.
그러다 맨 아래에서 작은 철제 과자통 하나를 발견했다.
뚜껑에는 오래전에 유행했던 과자 상표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통을 집어 들었다.
순간 손끝이 멈췄다.
이것을 여기에 넣어 두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뚜껑을 열자 낡은 손수건과 흑백사진 한 장, 그리고 누렇게 변색된 편지봉투가 나왔다.
봉투에는 단정하지 못한 글씨로 이름 하나가 적혀 있었다.
‘정미란 씨에게.’
이도현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 이름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였던가.
스물한 해 전이었다.
그는 봉투를 꺼냈다.
오른쪽 아래에는 작은 갈색 얼룩이 남아 있었고, 봉투 입구는 이미 오래전에 뜯겨 있었다.
이도현은 조심스럽게 접힌 편지를 펼쳤다.
종이는 여러 번 접었다 펴서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첫 문장은 짧았다.
미란 씨.
그날 일은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이도현은 더 읽지 못했다.
오래전 한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되살아났다.
“도현아, 이것 좀 꼭 전해 주겠니?”
그리고 그 뒤에 이어졌던 마지막 부탁.
“내가 직접 가면 그 사람이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거야.”
이도현은 편지를 다시 접었다.
창밖에서는 비가 조금씩 굵어지고 있었다.
그는 철제 과자통을 한참 바라보다가 낮게 중얼거렸다.
“아직도 여기 있었구나.”
그날 오후, 이도현은 오래된 편지를 외투 안주머니에 넣고 은솔성당으로 향했다.
“신부님! 오늘도 점심 안 드셨지요?”
사제관 부엌에서 박복례의 목소리가 울렸다.
김맑음 프란치스코 신부는 서재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먹었습니다.”
“뭘 드셨는데요?”
“사과 하나요.”
“그게 점심이에요?”
“제법 큰 사과였습니다.”
박복례는 국자를 내려놓았다.
“신부님, 사과가 아무리 커도 밥이 되지는 않아요.”
“알겠습니다. 지금 먹겠습니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고 이도현이 들어왔다.
“신부님 계십니까?”
박복례가 반색했다.
“형사님, 잘 오셨어요. 우리 신부님이 또 점심을 안 드셨다니까요.”
이도현이 외투를 벗으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제가 감시하겠습니다.”
“형사님도 식사하고 가세요.”
“감사합니다.”
김맑음 신부가 웃었다.
“형사님은 저보다 어머니 말씀을 더 잘 들으시는군요.”
“신부님도 좀 배우십시오.”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 앉았다.
박복례가 따뜻한 콩나물국과 고등어구이를 내놓았다.
이도현은 평소보다 말이 적었다.
김맑음 신부는 친구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형사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표정이 좋지 않으신데요.”
“오래된 물건을 정리하다가 좀 피곤해졌습니다.”
김맑음 신부는 더 묻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고 박복례가 시장에 간 뒤, 두 사람은 서재로 자리를 옮겼다.
그제야 이도현이 외투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맑음아.”
“응.”
“이거 좀 봐.”
김맑음 신부는 봉투를 받아 들었다.
“편지네.”
“응.”
“아주 오래된 것 같은데.”
“스물한 해 됐어.”
김맑음 신부는 봉투 앞면을 읽었다.
‘정미란 씨에게.’
그는 봉투를 뒤집어 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들었다.
“도현아, 이 편지를 왜 아직 가지고 있어?”
이도현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전해 주려고 했어.”
“그런데?”
“그 사람을 찾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지.”
“무슨 뜻이야?”
이도현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그 여자는 내가 찾아갔을 때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어.”
김맑음 신부는 편지를 내려놓았다.
이도현이 말을 이었다.
“이 편지를 내게 맡긴 사람도 지금은 없어.”
“누구였는데?”
“강인호라는 사람이야.”
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내가 경찰이 되기로 마음먹게 만든 사람이기도 하고.”
스물한 해 전, 이도현은 스물아홉 살이었다.
경찰이 되기 전이었다.
군 복무를 마치고 여러 일을 전전하던 그는 은솔시 외곽의 자동차 정비업체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 무렵 은솔시에는 작은 교통사고 하나가 있었다.
시내버스가 골목에서 후진하던 중 길가에 세워 둔 손수레를 들이받은 사고였다.
다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손수레에 실려 있던 채소 상자가 쏟아졌고, 이를 피하려던 어린아이가 넘어져 팔을 다쳤다.
사고 자체는 크지 않았다.
문제는 그 뒤에 벌어졌다.
버스 운전기사 강인호는 사고 당시 자신이 뒤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회사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나왔다.
당시 버스 뒤편에서 손수레를 끌고 있던 여자, 정미란이 갑자기 길로 뛰어들었다는 것이었다.
회사 측은 정미란에게 사고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목격자들의 진술도 엇갈렸다.
누군가는 여자가 먼저 손수레를 밀었다고 했고, 누군가는 버스가 너무 빨리 후진했다고 했다.
결국 정미란은 자신이 사고를 일으켰다는 소문에 시달렸다.
그녀는 은솔시장에서 작은 채소가게를 운영하던 사람이었다.
사고 뒤 손님들이 줄어들었고, 일부 상인들은 그녀에게 손해를 배상하라고 요구했다.
강인호는 처음부터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회사가 제출한 사고 경위서에는 다른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가 뒤늦게 경위서 내용을 문제 삼았을 때는 이미 회사 내부에서 사고 처리가 끝난 뒤였다.
이도현은 그 일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강인호가 그의 정비업체에 버스를 맡기러 왔다가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도현 씨, 내가 분명히 뒤를 제대로 안 봤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왜 회사에서는 여자분 잘못이라고 합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강인호는 답답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쓴 경위서가 아니라니까요.”
이도현은 당시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들었다.
회사와 운전기사 사이의 다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며칠 뒤 강인호가 다시 찾아왔다.
그는 작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도현아.”
그때부터 강인호는 이도현을 동생처럼 대하고 있었다.
“부탁 하나만 하자.”
“뭔데요?”
“이 편지 좀 전해 줘.”
봉투에는 ‘정미란 씨에게’라고 적혀 있었다.
“직접 전해 주시면 되잖아요.”
강인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분이 나를 만나려고 하지 않아.”
“왜요?”
“내가 자기 잘못이라고 말한 줄 알고 있어.”
“그럼 사실대로 설명하세요.”
강인호는 씁쓸하게 웃었다.
“말이라는 게 참 이상하더라. 한번 잘못 전해지면 아무리 바로잡으려고 해도 듣지 않는 사람이 생겨.”
그는 봉투를 이도현의 손에 쥐여 주었다.
“내가 직접 가면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거야. 그러니 네가 대신 전해 줘.”
이도현은 마지못해 편지를 받았다.
“알았어요. 내일 가볼게요.”
“고맙다.”
강인호는 그날 유난히 피곤해 보였다.
“그런데 도현아.”
“예?”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말이야.”
“예.”
“누군가 한 사람만이라도 끝까지 들어 주면 좋겠어.”
이도현은 웃었다.
“형님은 무슨 말씀을 그렇게 심각하게 하세요?”
강인호도 웃었다.
“그러게. 내가 요즘 생각이 많다.”
그것이 이도현이 기억하는 강인호의 마지막 부탁이었다.
며칠 뒤 강인호는 지병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이도현은 장례식에 다녀온 뒤에야 편지를 떠올렸다.
그는 정미란을 찾아갔다.
하지만 채소가게는 이미 문을 닫은 뒤였다.
주변 사람들은 정미란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다.
이도현은 편지를 전하지 못했다.
그 뒤로 봉투는 그의 서랍 속에 남았다.
“그때 나는 참 무책임했어.”
이도현이 말했다.
김맑음 신부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
“내일 가겠다고 했는데 며칠이나 미뤘거든.”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핑계야. 귀찮았던 거지.”
이도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편지 하나 전하는 게 뭐가 어렵다고.”
김맑음 신부는 봉투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경찰이 되기로 했어?”
“그 일 하나 때문만은 아니야.”
이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됐지.”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는 사람들이 왜 억울한 일을 겪는지 몰랐어. 누군가 사실을 확인해 주면 될 것 같은데, 정작 아무도 끝까지 확인하지 않는 일이 있더라고.”
김맑음 신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네가 확인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구나.”
“그랬던 것 같아.”
이도현은 웃었다.
“그런데 막상 경찰이 되고 보니까 세상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더라.”
김맑음 신부도 미소 지었다.
“그건 나도 알아.”
그는 다시 봉투를 집어 들었다.
오래된 종이의 가장자리를 살피던 그의 손이 멈췄다.
봉투 뒷면에는 작은 글씨가 남아 있었다.
너무 희미해서 얼핏 보면 종이의 얼룩처럼 보이는 글씨였다.
김맑음 신부는 안경을 고쳐 썼다.
“도현아.”
“왜?”
“이거 본 적 있어?”
그가 봉투의 왼쪽 아래를 가리켰다.
이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뭐가?”
“여기. 아주 작게 글씨가 있어.”
이도현은 봉투를 창가로 가져갔다.
햇빛에 비춰 보자 희미한 글씨가 드러났다.
‘은솔시장 뒤편, 미란상회 옆집.’
이도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옆집?”
김맑음 신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게 왜?”
“수신인이 정미란 씨라면 굳이 ‘미란상회 옆집’이라고 적을 이유가 있을까?”
이도현은 봉투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러네.”
“그리고 이건 주소가 아니라 전달할 장소를 따로 적어 놓은 것 같아.”
김맑음 신부는 잠시 생각했다.
“도현아, 이 편지는 네가 생각했던 그 사람에게 보내는 것이 아닐지도 몰라.”
이도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슨 소리야?”
“정미란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한 명이 아닐 수도 있잖아.”
“하지만 그때 사고 당사자가 정미란이었어.”
“그래. 그런데 강인호 씨가 편지를 전해 달라고 한 정미란 씨도 반드시 그분이라는 증거는 없지.”
이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스물한 해 동안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다음 날, 김맑음 신부와 이도현은 은솔시장을 찾았다.
시장 골목은 많이 변해 있었다.
낡은 천막은 새 차양막으로 바뀌었고, 예전 채소가게 자리에는 휴대전화 판매점이 들어서 있었다.
박복례가 함께 나섰다.
“은솔시장 옛날 이야기는 제가 좀 알지요.”
김맑음 신부가 웃었다.
“어머니, 든든합니다.”
“그런데 신부님.”
“예?”
“시장에 왔으면 장도 좀 봐야겠어요.”
“그럼요.”
“오늘 저녁은 무국 끓일 거니까 무 두 개만 들어 주세요.”
김맑음 신부는 순순히 장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이도현이 낮게 말했다.
“맑음아, 너는 사건 조사하러 왔냐, 장보러 왔냐?”
김맑음 신부가 대답했다.
“둘 다.”
“참 효율적이네.”
박복례는 오래된 건어물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여기 사장님이 시장에서 사십 년 넘게 장사하셨어요.”
가게 주인 배순옥은 일흔이 넘은 여성이었다.
박복례를 보자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복례 씨, 어쩐 일이에요?”
“옛날 사람 하나 찾으려고요.”
“누구?”
“정미란이라는 분 기억하세요?”
배순옥은 잠시 생각했다.
“미란이?”
“예.”
“어느 미란이?”
이도현과 김맑음 신부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어느 미란이라니요?”
배순옥이 말했다.
“옛날에 여기 정미란이 둘 있었잖아요.”
이도현의 눈빛이 달라졌다.
“두 사람이요?”
“그럼요. 채소가게 미란이하고, 그 옆에서 수선집 하던 미란이.”
박복례가 손뼉을 쳤다.
“아이고, 맞다! 나도 이제 생각나네.”
김맑음 신부가 물었다.
“두 분 모두 성함이 정미란이었습니까?”
“그렇다니까요. 그래서 시장 사람들이 채소 미란이, 수선 미란이라고 불렀어요.”
이도현은 봉투를 꺼냈다.
“그럼 수선집 하던 분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배순옥은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분도 오래전에 은솔을 떠났지.”
“어디로 가셨습니까?”
“정확히는 몰라요. 다만 딸이 있었어요. 그 딸이 나중에 시장에 한 번 찾아온 적이 있지.”
김맑음 신부가 물었다.
“그분이 강인호라는 버스 운전기사를 아셨습니까?”
배순옥은 놀란 듯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강 기사?”
“예.”
“그 사람을 왜 찾는데요?”
“오래된 편지 때문입니다.”
배순옥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그럼 수선집 미란이한테 보내는 편지일 거예요.”
이도현이 물었다.
“어떻게 아십니까?”
“강 기사가 수선집에 자주 왔거든.”
“무슨 일로요?”
배순옥은 뜻밖의 대답을 했다.
“그 집 딸 때문에요.”
수선집을 운영하던 정미란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정수연.
사고 당시 열한 살이었다.
그날 버스가 손수레를 들이받는 순간, 넘어져 팔을 다친 아이가 바로 정수연이었다.
이도현은 그제야 오래된 사고 기록 속에 있던 아이의 이름을 떠올렸다.
그는 사고 당사자인 채소가게 정미란만 기억하고 있었다.
다친 아이가 누구의 딸인지까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배순옥이 말했다.
“수연이는 그때 팔을 다친 뒤 한동안 학교도 못 갔어요. 강 기사가 미안하다고 자주 찾아왔지.”
“그랬군요.”
“그런데 아이 엄마가 처음에는 강 기사를 만나 주지 않았어요.”
김맑음 신부가 물었다.
“왜 그랬습니까?”
“버스회사에서 아이가 갑자기 길로 뛰어들었다고 했거든요. 아이 엄마는 자기 딸이 잘못한 것처럼 말하는 게 너무 속상했던 거지.”
이도현은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이제야 편지의 첫 문장이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그날 일은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그것은 채소가게 정미란에게 보내는 사과가 아니라, 다친 아이의 어머니에게 전하려던 말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확인할 것이 남아 있었다.
김맑음 신부가 물었다.
“수연이라는 아이가 지금 어디 사는지 아십니까?”
배순옥은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다만 몇 년 전에 시장 상인회에 연락한 적은 있다고 들었어요.”
박복례가 말했다.
“그럼 상인회에 가보면 되겠네요.”
이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김맑음 신부는 봉투를 다시 살폈다.
“잠깐만.”
“왜?”
“아직 이상한 게 있어.”
그는 봉투의 오른쪽 아래를 가리켰다.
갈색 얼룩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이었다.
“이게 단순한 얼룩이 아닌 것 같아.”
이도현이 자세히 보았다.
희미하게 찍힌 원형 자국이었다.
그 안에는 작은 글씨가 남아 있었다.
‘은솔정비 3호.’
이도현의 표정이 달라졌다.
“이건…….”
“아는 표시야?”
“내가 일하던 정비업체에서 쓰던 고무도장이야.”
“왜 편지봉투에 찍혔을까?”
이도현은 한참 생각했다.
“강 형님이 편지를 맡길 때 정비업체 사무실에 있었으니까 묻었을 수도 있지.”
김맑음 신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어.”
그러나 그의 눈길은 봉투 안쪽으로 향했다.
편지를 꺼내자 작은 종이 조각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두 사람은 동시에 내려다보았다.
종이는 오래되어 거의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거기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사고 당일 운행기록은 3호 차량 정비대장에 남아 있음.’
이도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게 왜 여기 있지?”
김맑음 신부가 물었다.
“그때 운행기록을 확인했어?”
“아니.”
“왜?”
“버스회사에서 이미 사고 경위서를 제출했다고 했으니까.”
김맑음 신부는 조용히 말했다.
“그럼 아직 확인하지 않은 기록이 하나 남아 있었던 거네.”
은솔정비는 십오 년 전에 문을 닫았다.
당시 업체를 운영하던 사장은 이미 은퇴해 다른 지역에서 살고 있었다.
이도현은 경찰 신분을 앞세워 사적인 옛 기록을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옛 사장에게 연락해 사정을 설명하고, 개인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남아 있는지 물었다.
다행히 사장은 오래된 장부 몇 권을 보관하고 있었다.
“이도현?”
전화기 너머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도현이 아니냐?”
“예, 사장님. 오랜만입니다.”
“네가 형사가 됐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늙었지, 뭐.”
옛 사장은 웃었다.
“그런데 스물한 해 전 정비대장을 찾는다고?”
“예.”
“무슨 일인데?”
이도현은 강인호와 편지 이야기를 간단히 설명했다.
그러자 옛 사장은 잠시 침묵했다.
“강 기사…….”
“기억하십니까?”
“기억하지.”
“그분이 사고 뒤에 정비기록을 남겼습니까?”
“그랬던 것 같다.”
이도현은 숨을 죽였다.
“혹시 장부를 볼 수 있을까요?”
“찾아보마.”
이틀 뒤, 옛 사장이 은솔경찰서로 택배를 보냈다.
안에는 오래된 정비대장 복사본과 짧은 편지가 들어 있었다.
도현아.
그때 네가 일하던 정비업체에서 쓰던 장부다.
강 기사가 사고 뒤 차량 상태를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던 기억이 난다.
이제라도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도현은 장부를 펼쳤다.
사고 날짜가 적힌 페이지를 찾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3호 차량. 후진 경고음 장치 작동 불량.
사고 전 운전기사 점검 요청 기록 있음.
부품 교체 필요. 회사 측에 통보.
이도현은 숨을 멈췄다.
그 아래에는 당시 정비 책임자의 서명이 있었다.
사고가 나기 전부터 후진 경고 장치에 문제가 있었다는 기록이었다.
강인호가 자신의 부주의를 인정했던 것과는 별개로, 차량 결함도 사고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도현은 오래된 장부를 한참 바라보았다.
“이걸 왜 몰랐지…….”
김맑음 신부가 옆에서 말했다.
“그때는 네가 정비업체 직원이었잖아.”
“그래도 이 장부를 본 적이 있었을 텐데.”
“봤더라도 사고와 연결해서 생각하지 못했을 수 있어.”
이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강 형님은 알고 있었던 거야.”
그는 편지봉투를 들어 보였다.
“그래서 이 기록을 남기려고 했던 거고.”
김맑음 신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 기록만으로 사고 책임을 모두 판단할 수는 없어.”
“알아.”
“그래도 적어도 그날의 상황을 다시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는 되겠지.”
이도현은 편지를 바라보았다.
그가 스물한 해 동안 전하지 못했던 것은 단순한 사과 한마디가 아니었다.
누군가 억울하게 떠안았던 책임을 바로잡을 수 있는 실마리였다.
정수연을 찾는 데에는 한서윤 기자가 도움을 주었다.
은솔시장 상인회에 남아 있던 연락 기록을 통해 정수연이 몇 해 전 어머니의 옛 가게를 정리하러 왔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상인회 관계자는 정수연의 동의를 받은 뒤 연락을 이어 주었다.
정수연은 현재 청주에서 작은 문구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도현은 전화를 걸기 전 한참 동안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
김맑음 신부가 물었다.
“긴장돼?”
“조금.”
“형사가 전화 한 통 하는데?”
“범인한테 전화하는 것보다 어렵네.”
김맑음 신부가 웃었다.
“그럼 내가 옆에 있어 줄까?”
“됐어.”
이도현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수연 씨 되십니까?”
“네. 누구세요?”
“저는 은솔경찰서 이도현이라고 합니다. 오래전 강인호 씨를 알고 지냈던 사람입니다.”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강인호 아저씨요?”
“예.”
“그분을 어떻게 아세요?”
이도현은 천천히 설명했다.
“제가 경찰이 되기 전에 함께 일하던 정비업체에 자주 오셨습니다.”
“그렇군요.”
“혹시 스물한 해 전 버스 사고 기억하십니까?”
정수연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조용히 대답했다.
“기억해요.”
“그때 강인호 씨가 어머니께 전하려던 편지가 있습니다.”
“편지요?”
“예.”
“그런데 왜 이제야…….”
이도현은 눈을 감았다.
그 질문이 나올 것을 알고 있었다.
“제가 제때 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변명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잠시 뒤 정수연이 말했다.
“어머니는 그 편지를 기다리셨어요.”
이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강 아저씨가 언젠가 사실을 설명해 주겠다고 하셨거든요.”
“그랬군요.”
“그런데 아저씨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어요.”
이도현은 손에 힘을 주었다.
“어머니께서는 지금…….”
“살아 계세요.”
이도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네?”
“어머니는 지금 저와 함께 살고 계세요.”
그 순간 이도현은 자신이 오래전 잘못 알고 있었던 사실을 깨달았다.
세상을 떠난 사람은 채소가게를 운영하던 정미란이었다.
수선집 정미란은 살아 있었다.
스물한 해 동안 그가 끝났다고 생각했던 부탁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었다.
정미란은 일흔여섯 살이었다.
청주의 작은 아파트 거실에서 그녀는 이도현과 김맑음 신부를 맞았다.
허리는 조금 굽었지만 눈빛은 맑았다.
정수연이 어머니 옆에 앉았다.
“엄마, 이분이 강인호 아저씨 편지를 가지고 오신 분이야.”
정미란은 이도현을 바라보았다.
“강 기사 편지요?”
“예.”
이도현은 두 손으로 봉투를 내밀었다.
“너무 늦었습니다.”
정미란은 봉투를 받아 들었다.
오래된 종이를 쓰다듬는 손끝이 조금 떨렸다.
“이걸…… 이제야 보는군요.”
그녀는 편지를 펼쳤다.
안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미란 씨.
그날 일은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수연이가 다친 것도, 시장 사람들이 수군거린 것도 당신 탓이 아닙니다.
나는 운전기사로서 뒤를 충분히 살피지 못했습니다. 그 책임을 피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사고 전에 차량의 후진 경고 장치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회사에 알렸고, 정비를 요청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회사가 작성한 경위서에는 내가 하지 않은 말이 들어갔습니다.
수연이가 갑자기 뛰어들었다고 내가 말했다는 부분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 아이는 손수레에서 쏟아진 채소를 피하려다 넘어진 것입니다.
내가 직접 찾아가 설명하고 싶었지만, 당신이 나를 만나기 어려워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를 씁니다.
혹시 이 편지가 늦게 도착하더라도 꼭 알아주십시오.
나는 수연이를 탓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미란 씨가 아이를 잘못 돌본 것도 아닙니다.
사고는 어른들이 책임져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날 다친 아이가 자신을 탓하며 자라지 않기를 바랍니다.
강인호 올림.
정미란은 편지를 다 읽고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정수연이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엄마.”
정미란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강 기사가 우리 수연이 잘못이라고 말했다는 줄 알았어요.”
이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알려졌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찾아와도 만나지 않았지요.”
정미란은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이런 말을 남겼군요.”
그녀는 눈가를 닦았다.
“내가 그때 얼마나 원망했는지 몰라요.”
김맑음 신부가 조용히 말했다.
“그럴 만한 일을 겪으셨습니다.”
정미란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한 번은 이야기를 들어 볼 걸 그랬어요.”
이도현이 말했다.
“어르신 잘못이 아닙니다.”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제가 편지를 제때 전했더라면…….”
정미란이 그를 바라보았다.
“형사님.”
“예.”
“그때 몇 살이셨어요?”
“스물아홉이었습니다.”
“그럼 아직 젊었네요.”
“…….”
“젊은 사람이 모든 일을 다 알 수 있나요?”
이도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정미란은 편지를 조심스럽게 접었다.
“물론 편지가 늦게 온 건 서운하지요.”
그녀는 이도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가져와 줬잖아요.”
그 말에 이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정수연이 조용히 말했다.
“저도 어릴 때는 제가 사고를 낸 줄 알았어요.”
김맑음 신부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랬습니까?”
“네. 사람들이 제가 갑자기 뛰어나왔다고 했거든요.”
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서 엄마한테 미안했어요.”
정미란이 딸의 손을 꼭 잡았다.
“네 잘못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알아, 엄마.”
정수연은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제는 정말 알 것 같아.”
거실에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불편하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닫혀 있던 문이 조금씩 열리는 듯한 시간이었다.
이도현은 정미란에게 정비대장 복사본도 보여 주었다.
그는 기록의 의미와 한계를 함께 설명했다.
오래된 장부에는 차량 결함에 관한 정비 요청이 남아 있었지만, 그 기록만으로 당시 사고의 모든 법적 책임이 확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고는 이미 오래전에 처리되었고, 관련 자료도 상당수 사라진 상태였다.
정미란은 장부를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걸로 이제 누가 잘못했는지 다 밝혀지는 건가요?”
이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강인호 씨가 사고 전에 문제를 알렸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편지에는 수연 씨를 탓한 적이 없다는 본인의 말이 남아 있습니다.”
정미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됐어요.”
이도현이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더 알아보고 싶으시면 도와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정미란은 편지를 가슴에 안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 말이 제일 고맙네요.”
그녀는 편지의 한 문장을 다시 읽었다.
사고는 어른들이 책임져야 할 일이었습니다.
“우리 수연이가 어릴 때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정수연은 어머니의 손등을 가만히 쓸었다.
“엄마, 이제 괜찮아.”
정미란은 딸을 바라보았다.
“그래. 이제 괜찮다.”
그녀는 이도현에게 물었다.
“강 기사님은 좋은 분이셨나요?”
이도현은 잠시 생각했다.
“완벽한 분은 아니셨습니다.”
정미란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자기 잘못을 남에게 떠넘기고 싶어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도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누군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려고 하셨습니다.”
정미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좋은 분이셨네요.”
그녀는 조용히 덧붙였다.
“사람이 완벽해서 좋은 게 아니라, 잘못한 일을 바로잡으려고 해서 좋은 거겠지요.”
김맑음 신부는 그 말을 마음속에 오래 담아 두었다.
은솔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차창 밖으로 늦가을 들판이 지나갔다.
수확이 끝난 논에는 볏짚 단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먼 산에는 붉은 단풍이 조금 남아 있었다.
이도현은 평소보다 천천히 운전했다.
김맑음 신부가 물었다.
“무슨 생각해?”
“강 형님 생각.”
“응.”
“그분이 편지를 맡길 때 내가 조금만 더 관심을 가졌더라면 어땠을까 싶어.”
김맑음 신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때의 너는 그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겠지.”
“그랬어.”
“하지만 지금은 알잖아.”
이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잠시 뒤 그가 말했다.
“맑음아.”
“왜?”
“내가 경찰이 된 이유를 너한테 제대로 말한 적 없지?”
“없어.”
“그때는 내가 무슨 대단한 정의감이 있어서 경찰이 되려고 한 줄 알았어.”
“그랬어?”
“응. 억울한 사람을 도와주고, 잘못한 사람을 잡고, 그런 일을 하고 싶었거든.”
김맑음 신부가 웃었다.
“좋은 이유인데.”
“그런데 오늘 생각해 보니까 조금 달라.”
“어떻게?”
이도현은 운전대를 고쳐 잡았다.
“나는 그때 편지를 전하지 못한 사람이었어.”
“…….”
“누군가 부탁한 작은 일 하나도 끝까지 해내지 못했지.”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래서 다음에는 누군가의 말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아.”
김맑음 신부는 친구를 바라보았다.
“도현아.”
“응.”
“그럼 너는 이미 그때부터 형사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네.”
이도현이 웃었다.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고.”
“왜?”
“그때는 수사보다 자동차 엔진을 더 잘 알았거든.”
김맑음 신부도 웃었다.
“지금은?”
“지금은 사람 마음이 자동차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걸 알아.”
김맑음 신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아.”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이도현이 말했다.
“그런데 너는 신부가 왜 됐냐?”
김맑음 신부가 그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응. 나만 이야기했잖아.”
김맑음 신부는 잠시 생각했다.
“나는…….”
그는 창밖의 들판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돌아올 수 있는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아.”
이도현이 웃었다.
“역시 신부님다운 대답이네.”
“너는?”
“나는 길 잃은 사람 찾아다니는 사람이 됐고.”
“그렇네.”
두 사람은 잠시 웃었다.
이도현이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꾸 사건 현장에서 만나는 거구나.”
김맑음 신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런데 부탁 하나만 하자.”
“뭔데?”
“앞으로는 사건 현장에 나보다 먼저 도착하지 마.”
김맑음 신부가 웃었다.
“그건 장담 못 하겠는데.”
“김맑음.”
“응?”
“너 정말 신부 맞냐?”
“맞아.”
“그럼 기도는 성당에서 하고 수사는 경찰한테 맡겨.”
김맑음 신부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나는 사람을 만나러 다니는 것뿐이야.”
이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이 제일 무서워.”
그날 저녁, 은솔성당 사제관에는 또 한 번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박복례가 김맑음 신부의 외투를 정리하다가 주머니에서 오래된 종이 조각을 발견한 것이다.
“신부님!”
“예?”
“이건 또 뭐예요?”
김맑음 신부가 종이를 받아 들었다.
정비대장을 살피면서 적어 둔 메모였다.
“아, 그거요.”
“또 사건이에요?”
“아닙니다. 다 끝난 일입니다.”
박복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요?”
“예.”
“그럼 오늘 저녁은 제시간에 드시겠네요?”
“그럼요.”
박복례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오늘은 특별히 갈비찜 했어요.”
김맑음 신부의 얼굴이 밝아졌다.
“갈비찜이요?”
“예.”
“어머니,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으십니까?”
“형사님이 전화하셨어요.”
“도현이가요?”
“네. 신부님이 오늘 수고하셨으니까 맛있는 것 좀 해드리라고요.”
김맑음 신부는 잠시 놀랐다.
“그랬군요.”
박복례가 웃었다.
“그런데 형사님도 오신대요.”
“예?”
“본인도 수고하셨으니까 같이 먹겠다고요.”
김맑음 신부는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도현이답네요.”
그때 현관문이 열렸다.
이도현이 들어왔다.
“신부님, 저녁 준비됐습니까?”
박복례가 반갑게 말했다.
“어서 오세요, 형사님.”
김맑음 신부는 친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형사님, 오늘은 수사하러 오신 겁니까, 식사하러 오신 겁니까?”
이도현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둘 다 아닙니다.”
“그럼요?”
“오래된 사건의 마무리를 축하하러 왔습니다.”
박복례가 웃었다.
“그럼 갈비찜부터 드세요. 축하는 배부르게 해야지요.”
세 사람의 웃음소리가 사제관 안에 퍼졌다.
며칠 뒤, 이도현은 경찰서 개인 보관함을 완전히 비웠다.
낡은 물건들은 정리했고, 오래된 수첩과 사진은 집으로 가져갔다.
철제 과자통도 더는 경찰서에 두지 않기로 했다.
그 안에는 이제 편지가 없었다.
편지는 마침내 주인에게 돌아갔다.
대신 그는 작은 종이 한 장을 넣어 두었다.
정미란이 손수 적어 준 짧은 글이었다.
형사님.
늦게 온 편지라도 받는 사람이 살아 있다면, 그 편지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고맙습니다.
정미란 드림.
이도현은 그 글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이 실패한 부탁 하나를 가슴에 품고 살았다.
편지를 제때 전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의 마음속에서 작은 돌처럼 남아 있었다.
경찰이 된 뒤에도 그 돌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건을 해결할 때마다 누군가의 억울함을 풀어 주고 싶었지만, 정작 자신의 오래된 잘못은 바로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스물한 해가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
그가 실패했다고 믿었던 일은 완전히 끝난 일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잘못된 사람을 찾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아낸 것은 오래된 봉투에 남아 있던 작은 글씨였다.
‘미란상회 옆집.’
그동안 수없이 보았으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읽지 않았던 글씨.
이도현은 종이를 조심스럽게 접었다.
그리고 철제 과자통을 닫았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김맑음 신부였다.
“왜?”
“도현아, 바빠?”
“왜 또?”
“잠깐 물어볼 게 있어서.”
“뭔데?”
“너 혹시 옛날 은솔시장 사진 가지고 있니?”
이도현은 눈을 감았다.
“김맑음.”
“응?”
“설마 또 사건이야?”
“아니.”
“정말?”
“응. 이번에는 성당 어르신들 사진 전시회 준비야.”
이도현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 건 최 사무장님하고 하면 되잖아.”
“그런데 네가 옛날 사진을 많이 가지고 있을 것 같아서.”
이도현은 책상 위 철제 과자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알았어. 찾아볼게.”
“고마워.”
“대신 조건 하나.”
“뭔데?”
“사진 속에서 수상한 사람 발견해도 나한테 전화하지 마.”
김맑음 신부가 웃었다.
“그건 사진을 봐야 알지.”
“야!”
전화기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도현은 결국 따라 웃었다.
창밖에서는 늦가을 햇살이 경찰서 마당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철제 과자통을 서랍 안에 넣었다.
이번에는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미 끝낸 일을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자신이 앞으로도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를 마음속에 새겼다.
누군가의 부탁은 때로 아주 작은 말 한마디로 시작된다.
그러나 그 말을 끝까지 들어 주는 일은 한 사람의 삶을 바꿀 만큼 중요할 수 있다.
이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 끝에서 정우석 형사가 그를 불렀다.
“선배님! 새 사건 들어왔습니다!”
이도현은 외투를 집어 들었다.
“무슨 사건인데?”
“시장 근처에서 분실물이 발견됐답니다.”
“뭔데?”
“낡은 금반지 하나요.”
이도현은 걸음을 멈췄다.
“금반지?”
“예.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뭐가?”
정우석이 말했다.
“반지를 물고 온 게 고양이랍니다.”
이도현은 잠시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제발…… 김맑음만 모르고 지나가라.”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그의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화면에는 익숙한 이름이 떠 있었다.
김맑음 신부.
이도현은 한숨을 쉬었다.
“또 시작이군.”
그는 전화를 받았다.
“왜, 맑음아?”
전화기 너머에서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현아, 우리 성당에 고양이가 이상한 걸 물고 왔어.”
이도현은 두 눈을 감았다.
은솔시의 평범한 하루가 또다시 조금 특별해지고 있었다.
― 제103화 끝 ―
## 다음 편 예고
### 제104화 「고양이가 가져온 반지」
#### ― 기다림에도 주인이 있을까 ―
은솔성당 마당에 나타난 길고양이 한 마리가 낡은 금반지를 물고 온다.
반지 안쪽에는 희미하게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영원.’
처음에는 누군가 잃어버린 결혼반지라고 생각하지만, 은솔시에서 반지의 주인을 찾던 김맑음 신부는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다.
반지의 주인은 결혼한 적이 없는 일흔여덟 살의 노인.
그런데 노인은 반지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한다.
“그 반지는 내가 버린 겁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김맑음 신부는 노인의 집에서 발견한 오래된 달력에 이상한 표시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매년 같은 날짜에 그려진 작은 동그라미.
그리고 그 아래 적힌 한 문장.
‘올해도 오지 않았다.’
오래전 결혼을 약속했지만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두 사람.
그들 사이에는 누구도 알지 못했던 마지막 약속이 남아 있었다.
제104화에서는 고양이가 물고 온 반지 하나를 통해 오랜 기다림과 오해, 그리고 노년의 두 사람이 간직해 온 아름다운 사연이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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