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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춘 학술심포지엄 주제발표]
이 글은 지난 2009년 10월 21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렸던 ‘박시춘 학술심포지엄’의 주제 발표, 전문(全文)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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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별로 본 작곡가 박시춘 선생, 삶과 음악의 재조명 & 재평가
글 l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1. 우리나라 가요사에 있어 고유명사가 아닌 대명사 격인 이름, 박시춘
‘박시춘’이란 이름은 우리나라 가요사에 있어서 고유명사가 아니라 대명사 격인 이름이다.
작곡가 박시춘, 그리고 가요1세대 작곡가들인 전수린, 손목인, 김해송 등의 등장은
마침내 우리나라에서 민요의 자리에 대중가요가 대신 자리하게 되는
신문화의 새 장(章)이 열렸음을 의미한다.
박시춘 선생이 남긴 3천 여곡에 달하는 노래와 악상은
근대 한국 대중가요의 초석이자 근간을 이루고 있고
실제로 옛 가요 전문 프로그램인 KBS-1TV '가요무대‘에서
8백회 기념으로 펴낸 ‘가요무대 100선집’에는 박시춘의 곡이 무려 15곡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80년대에 mbc가 조사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 20선’에 무려 6곡이 포함되었을 정도다.
시대의 격동기를 관통하며 국민들로부터 여전히 애창되어온 그의 노래는 이렇듯
여전히 한국인의 가슴 속에 살아 있다.
‘한 나라의 문화를 가장 빠르게 이해하려면 먼저 그 나라 국민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를 배우라’는 말이 있다.
그러한 점에서 박시춘 선생, 그리고 그가 남긴 노래는 바로
우리나라를 알리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이기도 한 셈이다.
박시춘의 첫 작곡 데뷔곡은 1935년 8월에 발표한 '희망의 노래(홍개명 사/김창배 노래)'다.
시춘(是春), 이 이름의 의미는 '늘 봄'이라는 뜻.
작곡 데뷔작 ‘희망의 노래’ 제목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는 이어 일제시대, 그 암울한 시대에 민족의 애환을 달래준 ‘애수의 소야곡’,
광복의 기쁨을 노래한 ‘럭키 서울’,
남북 분단의 아픔을 그린 ‘가거라 삼팔선’,
그리고 6.25 한국전쟁 당시에 발표된 ‘전우야 잘 자라’를 비롯해
당시 피난민들에게 삶에 대한 용기와 희망을 북돋워준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
일제 강점기로부터 8.15 광복, 6.25 한국전쟁을 거쳐 전쟁이 휩쓸고 간 잿더미 위에서
그 상흔을 복구하려는 50, 60년대 우리네 궁핍했던 삶의 현장에 이르는 격동기에
이 노래들은 격동기를 관통, 시대의 아픔을 함께 했다.
특히 어려울 때일수록 힘이 되어준 이 노래들은 지친 국민들에게 전해주는 일종의 응원가였다.
박시춘 선생은 대중가요의 힘이 얼마나 큰 지를 잘 알려주신 분이기도 하다.
▲ 민족의 격동기와 함께 시대의 아픔을 어루만져준 작곡가 박시춘. 시대의 감성을 가장 잘 표현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2. 유년시절, 풍류 속에서 자라며 예인 기질 눈떠
박시춘, 본명 순동(順東).
1913년 10월 28일, 경남 밀양에서 출생했다.
선친 ‘남포’는 밀양에서 5백 섬지기 지주이자 가무(歌舞)를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는 '권번(券番)'을 운영했던 분으로
특히 당대의 명창 송만갑, 이화중선, 이동백 등과 어울릴만큼 국악에 조예가 깊었다.
특히 구전으로 불리던 '밀양아리랑'의 가락을 채보, 지금의 형태로 정리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이렇듯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았음직한 음악적 유전 인자,
그리고 철나기 전부터 풍류 속에 자랐던 성장 배경이
그의 예인 기질을 일찌감치 눈 뜨게 했을 것임이 충분히 짐작된다.
이것이 그의 멜로디 속에 우리의 민요가락이 지속적으로 발견되는 이유이고
또 우리 전래의 전통가락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해 ‘한국적 트로트’라는
박시춘만의 멜로디를 완성한 단초이기도 하다.
어린 순동, 즉 박시춘 선생이 보통학교 1학년 때 부친이 타계, 한순간 가세가 기운다.
그러나 이후 우리 가요계에 대명사로 우뚝 선 선생의 위치가 그러하듯
이 소년은 유년시절부터 남달랐다.
어느 날 어린 순동은 한 카페에서 들려오는 유성기 소리에 발을 멈춘다.
처음 듣는 이 신기한 소리에 매료된 소년은
결국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매일 듣기 위해 카페에서 잔심부름을 거들기 시작했고
또 공짜로 영화구경을 하기위해 영화전단지를 뿌리고 다니는 등 음악광, 영화광이었다.
훗날 박선생은 이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통해서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가난의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결국 이 소년은 불과 열두 살 때 카페 주인을 따라 어머니 몰래 고향을 떠나면서
험하고 긴 음악여정을 시작한다.
열네 살 되던 해부터는 전국을 돌며 영화를 상영하는 순업대를 따라 다니며
낮에는 북을 치고 밤에는 영사기를 돌렸고
또 쉬는 동안을 이용해 나팔, 바이얼린 등 악기를 익히며 유랑극단에 적응해나갔다.
떠돌이 순업대 생활 중 많은 가요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당시 시에론레코드사에서 문예부장을 맡고 있던 이서구, 강사랑, 이봉룡 선생
그리고 박영호 선생 등을 알게 되면서 결국 작곡가로 입문,
당시 조선 최대 음반사인 오케레코드 전속작곡가로 발탁되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대표곡 ‘애수의 소야곡’을 비롯해 ‘꼬집힌 풋사랑’, ‘눈 오는 네온가’, ‘항구마다 괄세더라’,
‘울며 헤진 부산항’, ‘서귀포 칠십리’ 등의 서정적인 멜로디부터
‘왕서방 연서’, ‘총각진정서’, ‘세상은 요지경’ 같은 만요,
그리고 ‘신민요 풋난봉’, ‘산호빛 하소연’ 등 신민요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노래들을 발표,
손목인, 김해송과 함께 오케레코드 3대 작곡가로 자리매김, 달러박스로 부상하며
전성기를 구가한다.
이 무렵 오케레코드를 통해 음반으로 발표한 곡은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도 현재 280 여 곡이 넘는다.
당시 열악한 환경을 감안한다면 대단히 왕성한 활동을 펼친 것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또한 당시 무대에서만 불리어지던 노래들까지 합친다면 곡수는 그보다 훨씬 많아질 것이다.
이러한 우리 가요 초창기의 소중한 자료들도 더 늦기 전에 발굴, 채보해서
우리 가요사를 제대로 복원해야 함도 중요한 연구 과제라고 생각된다.
그러한 점에서 결국 우리 가요사 연구의 끝은 ‘박시춘 작곡 총목록집’이 아닐까, 여겨질 정도다.
특히 박시춘 선생의 대표곡으로 사랑받고 있는 노래, 나라 잃은 슬픔을 탄한 명곡 ‘애수의 소야곡’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참고로 이 노래의 원곡은 ‘눈물의 해협’으로 처음 발표된 노래다.
이 노래 또한 당시 나라 잃은 슬픔을 극명하게 노래하고 있다.
참고로 ‘눈물의 해협’의 가사는 이렇다.
현해탄 초록물에 밤이 나리면
임 잃고 고향 잃고 헤매는 배야
서글픈 파도 소리 꿈을 깨우는
외로운 수평선에 깊어 가는 밤
임 찾어 고향 찾어 흐른 지 십년
몸이야 시들어도 꿈은 새롭다
아득한 그 옛날이 차마 그리워
물 우에 아롱아롱 님 생각이다
꿈길을 울며 도는 파랑새 하나
님 그려 헤매이는 짝사랑인가
내일을 묻지 말고 흘러만 가랴
님 없는 이 세상에 기약 풀어라
(김상화 작사, 박시춘 작곡, 1936년, 시에론레코드사)
▲ 민요, 재즈, 트로트 등 다양한 장르를 선보였던 30년대 활동기록, 조선악극단 공연광고.
선생은 작곡 활동 뿐 아니라 '조선악극단(朝鮮樂劇團-Okeh레코드사의 직영 단체)'에서
‘아리랑보이스’를 결성, 현경섭, 송희선, 김해송 (玄警燮 宋熙善 金海松), 이복본 등과 함께
중창과 판토마임, 그리고 악기 연주를 겸한 여흥을 무대에서 펼쳐 보일 정도로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아울러 전국 각지는 물론 멀리 만주로까지 이어지는 공연활동을 통해
고향을 잃고 떠도는 민족의 설움을 보다듬어 주었다. 이러한 활동은 이후 더욱 빛을 발한다.
3. 광복, 그리고 이념의 혼란기
우리의 말과 노래도 함께 해방된 1945년 광복.
광복 이후 최초의 히트가요라 불리는 ‘신라의 달밤’,
그리고 남북 분단의 아픔을 그린 ‘가거라 삼팔선’, ‘고향초’ 등이 이때 만들어진다.
‘신라의 달밤’은 본래 일제 강점기 당시에 처음 만들어진 노래로 원곡의 제목은 ‘인도의 달밤’이었다.
무대에서만 불리어지던 이 노래는 ‘이제 광복도 되었으니까 우리 것을 되찾겠다.’는 의지로
작사가 유호 선생을 통해 가사와 노랫말을 바꾼 뒤 신라를 배경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바로 이 노래는 일제에 의해 잃었던 우리의 역사와 말을 되찾기 위한 의지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열악한 시대에 펼쳐보였던 음반 취입광경. 지휘자는 박시춘 선생.
이 ‘신라의 달밤’의 히트를 계기로 박선생은 직접 럭키레코드사를 설립한다.
럭키 1호 음반인 '신라의 달밤'을 시작으로 '유호-박시춘-현인' 콤비가 탄생하고
'고향 만 리'-'비 나리는 고모령'-'럭키 서울' 등을 잇달아 히트시킨다.
‘고향초(송민도)’, '낭랑18세(백난아)' 등도 모두 이 시기에 발표된 노래들이다.
▲ 직접 설립한 럭키레코드 사옥 앞에서. 박시춘과 콤비를 이뤄 활동하던 현인(왼쪽)과 유호, 당시 음반광고 전단지.
당시 우리나라 음반 산업은 일본 레코드사들이 모두 철수한 뒤라서 이 땅은 말 그대로 불모지였다.
물자 부족으로 인한 열악한 환경 또한 매우 어려웠다.
당시 함께 럭키레코드사 문예부장으로 있던 작사가 유호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박선생은 심지어 참기름 짜던 압축기에 일본인이 버리고 간 음반을 고물상에서 수거해 판을 찍었다고 한다.
일본SP음반 위에 압축기를 눌러 판을 찍어냈기 때문에 바늘이 몇 바퀴 돌다보면 그루브, 즉 홈이 닳아
노래 도중에 갑자기 일본노래가 튀어나오기도 했다는 우스갯소리도 생생히 전한다.
보통 사람들이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이러한 땀과 열정은 지금의 한류로 성장하게 된 우리 가요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광복 이후 47년 5월, JODK (이후 중앙방송국, 현 KBS)의 전속악단의 상임 지휘자를 맡기도 했고
가수 남인수와 함께 만든 '칠천국(七天國)', 그리고 ‘은방울쇼' 단체를 구성해 전국 순회공연을 다닌 것도 이 무렵으로
박선생은 광복과 더불어 비로소 자신의 의지를 한껏 펼친다.
보통 박시춘 선생은 한 시대에 걸쳐 1인 몇 역, 그 이상의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우리나라 최초로 기타독주음반을 발표했던 박시춘 선생이 남긴 작곡 악보집들.
4. 진중가요로 전환, 전, 후방에 함께 울려 퍼진 노래들
‘좋은 군가는 대포소리에도 지지 않는 예술적 무기’
1950년, 한국전쟁 와중에도 그의 창작열은 불꽃처럼 빛을 발한다.
전 국토의 4분의 3이 전쟁터로 변하고 전 국민이 전쟁터로, 또 피난민으로 내몰리던 이때
연예인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모두들 군예대에 들어가 ‘군번 없는 용사’로 병사들과 함께 전쟁터를 누볐다.
박시춘 선생은 이때 국방부 정훈국 직속의 문예중대 2소대장과
제주도 모슬포에 위치한 육군 제1훈련소 군예대장을 맡아 활동했다.
전쟁 중에도 그의 창작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육군 제1훈련소가'를 비롯해 ‘전우야 잘자라', ’승리의 노래‘, ’님 계신 전선' '전선야곡' 등을 발표,
군의 사기를 높였고 아울러 전쟁터에 가족을 떠나보내야 했던 가족들이 심정을 노래에 담았다.
이러한 노래들은 일선과 후방의 연대감을 고취시키면서 포성소리와 함께 한반도에 넘쳐흘렀다.
‘좋은 군가는 대포소리에도 지지 않는 예술적 무기’임을 증명해보인 이 진중가요들은
전쟁에 상처 입은 국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었다.
악풍도 크게 변한다.
이전 박시춘 선생의 가락은 매우 서정적이고 또 만요적인 요소가 가득했다면
이 무렵은 진중가요를 통해 힘차고 남성적인 변화한 것.
불과 몇 년 차이로 박시춘 음악은 시대상황에 따라 변화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박시춘 선생은 노래를 만드는 데 늘 의미를 부여했다.
광복을 기념해 복고풍으로 만든 노래 '신라의 달밤',
해방의 기쁨을 노래한 '럭키 서울',
그리고 한국전쟁 중에 만들어진 ‘전우야 잘자라’ 등이 그렇듯
제주 모슬포의 육군제1훈련소 시절에는 '제주도 온 김에 이곳에 노래하나 떨어뜨리고 가자'며
작사가 유호선생과 의기투합해 만든 노래가 ‘삼다도 소식’,
그리고 잿더미 위에서 삶에 대한 위지를 심어준 ‘굳세어라 금순아’,
피난 수도 부산을 떠나며 만든 노래가 '이별의 부산 정거장'이다.
이 노래들은 모두 역사의 현장에서 생생히 기록된 문화유산들이다.
한국사의 비극을 노래로 증언한 우리 근대사의 소중한 유산이기도 하다.
이 노래들은 당시 어느 신문해설이나 삐라 문구보다도 현장이 살아 숨 쉬는 빛나는 대중문화의 산물인 것이다.
군 위문을 위해 155마일 전선을 스물일곱번이나 누비는 등
‘총 안든 군인’, '군번 없는 지휘관'으로써 군사기 고취에 큰 공헌을 세웠던 박시춘 선생은
이후 종군연예인공로패, 문화공보부장관 공로상(1967년),
제6회 대한민국 연예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해방 전 남인수, 해방 후 현인’으로 일컬어지며 박시춘 선생과 함께 콤비를 이뤄 활동했던 가수들의 음반들.
5. 영화에는 반드시 주제가가 있어야 한다는 등식 만들어
전쟁의 상흔이 채 가라앉지 않았던 50년대 후반.
1958년에는 오향영화사를 설립한다.
특히 '오향'은 제작하는 영화마다 영화주제가를 삽입, 영화음악의 또 다른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남성 넘버원', '오부자의 노래', '가는 봄 오는 봄' 등이 그 것으로
이를 계기로 영화에는 반드시 주제가가 있어야 한다는 등식을 제시하기도 했다.
전 가족이 영화에 출연하는 기록을 남긴 '딸 칠형제’를 비롯해,
'가는 봄 오는 봄', '청춘쌍곡선' '오부자' ‘육체의 길’ 등으로 승승장구하던 영화사는
'장미의 곡(曲)' 개봉 날 터진 4.19로 인해 관객동원에 실패하면서 촬영소가 부도가 나는 등
악재가 겹치면서 몰락, 장충동 집을 팔아 빚을 갚아야 했고
급기야 연탄불을 피워 유서를 쓰는 소동까지 벌어지는 가슴 아픈 일화도 있었다.
70년대 들어 이후 산업화와 세태 변화를 잘 묘사한 대중문화의 기록자로 남을 업적은
영화주제가 '돌지 않는 풍차' 그리고 '일자상서' '너 하나만을' 등의 히트곡을 마지막으로
그는 이후 본격적으로 창작인들을 위한 권익보호 활동에 앞장선다.
6. 음악적 선구자, 가요인들의 권익을 위해 앞장
▲ 70년대 월남위문공연 중 한 컷.
우측은 음악과 함께 평생 반려자가 되어주었던 부인 김예비(영화배우 당시 예명 김현숙) 여사.
광복 후 방송국 경음악 단장, 63년 10월에 창립된 연예협회 초대 이사장,
한국가요작가동지회장 등 그는 음악활동 외에도
연예계의 권익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또한 1982년에는 대한민국 대중가요계 인물로는 처음으로 문화훈장 보관장을 수여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만큼 음악 실력이 탁월했고 사회적 영향력과 공헌도가 높았으며
동시에 수많은 대중가요인들의 추앙을 받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만년에는 녹내장으로 시력을 잃고 4년의 세월을 보냈는데
자연히 바깥출입이 부자유스러웠지만 원로작사가, 작곡가들의 모임인 '한국가요작가동지회'에 참석하면
특유의 해박한 '풍류적 객담'으로 모든 이들을 즐겁게 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대중들, 특히 작가들과 얼마나 따뜻한 교류를 갖고 지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는 아무리 간단한 가락이라도 되씹어보고 다시 다듬고 하는 진지한 태도로 작품에 임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특징 중 하나는 노래의 멜로디, 물론 노래의 전주나 간주에도 세심하게 신경을 쓴다는 것.
노래가 주는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 전주곡이라고 늘 강조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전해진다.
아버지의 길을 따라 버클리음대에서 작곡을 전공한 막내아들 박재정씨는,
‘아버지 노래의 특징은 완벽하고 짜임새 있는 곡 구성’이라며
‘전주나 간주에까지 완벽하게 형식을 갖췄기 때문에 편곡이 특히 어렵다’는 점을 토로하기도 했다.
실제로 박시춘 선생은 편곡을 제3자에게 맡기더라도
반드시 세심한 부분까지 본인이 마지막 손질하고 다듬는 작곡가였던 그는
1996년 6월30일 저녁 조용히 눈을 감는다.
그의 영결식은 '사단법인 한국연예인장'으로 치러졌다.
▲ 한국작가동지회 회원들과의 한 때. 우측은 평생동지였던 반야월 선생과 박시춘 선생.
7. 우리 민족의 가슴에 영원히 울려 퍼질 박시춘 가락
온 국민에게 사랑받는 그의 노래들은 비교적 최근에 와서도
'낭랑 18세', '세상은 요지경', '봄날은 간다', '신라의 달밤’, ‘굳세어라 금순아’ 등이 꾸준히 리메이크,
또다시 히트될 정도로 박시춘 선생의 멜로디와 화성, 리듬감에서 보여준 탁월한 재능은 세대와 시대를 초월한다.
사회적 관심에서 멀어진 적이 없을 정도로 시대의 아픔과 함께 해온 그의 노래,
한국인들만의 정서를 묶은 가락을 찾기 위해 평생을 바친 인물,
그가 남긴 주옥같은 노래들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대중예술의 소중한 유산이다.
그가 없는 한국 대중예술, 그리고 그의 노래가 없는 우리 가요사를 말할 수 없다.
이렇듯 시대의 흐름을 국민들과 함께해온 선생의 업적이 결코 헛되지 않게 평가되어지길 바란다.
아니 평가, 그 이전에 그가 남긴 노래들은 곧 우리 국민들과 함께 해온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 회갑기념, ‘작곡생활 42주년 공연, 박시춘 Show 대연예제전’ 프로그램. (1973. 10. 17~20, 대한극장)
(우측) 밀양 생가에 세워진 박시춘 흉상. 그 이름 ‘봄날’ 같이 늘 살아있는 가락으로 세상을 노래했다.
선생은 73년10월 17일부터 나흘간 대한극장에서 가진
‘회갑기념, 작곡생활 42주년 공연-박시춘 Show 대연예제전’ 무대에서 이러한 말을 남겼다.
“나의 이 노래를 기꺼이, 그리고 영원히 사랑했던 이 땅의 국민들께 드립니다.”라고.
박시춘 선생은 우리 가슴에 영원히 남을, 국민작곡가다.
-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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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을 읽는데, 10분쯤 걸린것 같습니다..
상세한 내용으로 박시춘 선생님에 대한 그의 업적을 새롭게 발견하게 됩니다.
천상병 시인처럼 천진스러운 어린이같은 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넵, 제가 헌중님의 귀중한 시간 10분을 빼앗은 셈이군요.^^
전 행사장에서 이 거 발표하는데 30분이 걸렸습니다만... ㅎㅎ
한국 락음악에 신중현님이 계시다면 트롯가요엔 박시춘 선생이시죠. 아마도 영향력을 따지면 박선생님이 더 크실듯...
올해가 박시춘 선생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때문에 올해 크고작은 기념사업이 기획, 진행되고 있고
아울러 이 내용을 볼 수 있도록 공유해달라는 관계자들의 요청을 받고 먼저 이곳에 올렸습니다.
관심에 감사드립니다...요, 늘...
아주귀한자료입니다
감사합니다.
음..순동..선생님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시자 춘자가 늘 봄이라는 뜻이었군요
박선생님은 가셨지만 남기신 많은 노래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입으로 늘 남겨지게 되겠지요...
탄생 100주년을 맞아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고 위로하시며 선생님의 하신 그 모든 음악적 성과들을 박성서님의 글로 알게 되고
고마운 마음을 담습니다.
올해 '박시춘 선생 탄생 100년'을 맞아 갖가지 행사가 기획 중입니다.
싱어송라이터협회(회장 백순진)다 주최하는 헌정공연도 그중 하나입니다.
손 잡고 함께 가시죠, 들꽃님.^^
그분의 업적을 박선생님의 글로 알게 되고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네요.
예전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귀에 익은 많은 곡들이 박시춘선생님의 귀한 곡들이군요.
대중가요의 기록과 증언으로 하나하나 알아가는 귀한 시간 갖습니다 고맙습니다.
예전같음 ㅎㅎ총명?해서 금방 볼수있던 글도 이젠 오랜시간 공들여 봐야해요~아마 저는 10분도 훨씬 더 본것 같어요~~
참 좋았습니다^^
전 요즘 '봄날은 간다'를 입에 달고 삽니다,요.^^
저는 고향만리가 계속 머릿속에 맴돌고 있읍니다.
고향만리, 전선야곡, 비내리는 고모령... 이 노래를 군대에서 처음 배웠는데
지금까지도 군에서 '불멸의 보초가'로 불린다는 사실에 가슴이 뭉클...^^
유명한 곡들이 모두 박시춘님의 곡이네요.
이렇게 많은곡을 작곡 하신줄 몰랐습니다.
정말 국민 작곡가 이시네요~~^^
대한민국의 격동기와 함께 시대의 아픔을 어루만져준 분이죠.
시대의 감성을 가장 잘 표현한 인물로 그의 가락은 언제까지나 우리 국민들과 함께 하리라 생각됩니다.
박시춘님과 그당시 어려운 한국 사회를 그래도 한번 살아보자라는 희망을 심어준 많은 가수,배우님들의 노력과 열정이 오늘을 있게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박성서님의 해설 들은 우리가 몰랐던 많은 부분을 또 알게 해 주시는 말 그대로의 준론 이십니다.
에구구, 늘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