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나선 목소리들
1. 입체적 하모니
상상력에 기반한 소설 속 사건들이 본질상 비현실적이라고 할 때 이
것은 두 가지 측면을 환기한다. 먼저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가 철저히
작가의 의도하에 구성된 이야기라는 점이 그것이다. 창작 주체인 작가
의 입장에서 본다면 소설은 직선적인 시간 위에 존재하는 평면의 완성
물이 아니라 일정한‘구성’을 거친 입체적 조합물일 수밖에 없다. 따라
서 소설 속 사건을 바라보는 데에는 현실의 사건을 접할 때와는 근본적
으로 다른 차원의 시선이 필요하게 되고 바로 이것이 소설 전체를 비현
실적 구성물로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바로 여기서 이와 다소 상반되어
보이는 또 다른 측면이 야기된다. 그것은 작가의 의도가 미치지 않는
범위를 내포하고 있는 소설의 자율성이다. 입체적 구조물로서의 소설
이 그 자체로 창작 주체의 의도를 가장 잘 반영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면, 이와 동시에 그것이 가진‘입체성’은 불가항력적으로 작가의 의도
를 비켜가는 관점과 시선들 모두를 수용하게 되기 때문이다. 일찍이 바
흐친이 제시한 ‘다성성(polyphony)’ 역시 소설의 이러한 특징적 양상
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바흐친에게 도스토
옙스키의 작품을 중심으로 한 일종의 분류적 기준이기도 했으나 분명
한 것은 그가 소설 장르 자체를 대화의 장으로 파악했다는 점이다. 이
처럼 소설은 작가의 의도에 따라 구성된 동시에 다수의 목소리나 의식,
세계관들이 작용하는 것이 가능한‘비현실성’을 띠게 된다. 잊지 말아
야 할 것은 이러한 비현실적 공간에 대한 고려를 통해‘작가와 주인공’
의 관계로 소설을 보는 좁은 시선에서 벗어나‘나와 타자’가 관계를 맺
는 것이 가능한 장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난 계절의 소설들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입체적’인식을 눈에 띄
게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나 기교 차원의 보편화
적 측면을 넘어 최근 주체와 타자의 관계를 둘러싸고 우리 문학의 새로
운 가능성을 탐색해보고자 지속되어 온 노력의 작은 결실로 여겨진다.
그리고 한편, 21세기의 첫 10년을 흘려보낸 지금 우리의 문학을 둘러
싸고 있는 사회적 환경에 대한 작가들의 위기의식도 알 수 있게 해준
다. 앞에서 언급한‘다성성’이 당시 유일한 담론이었던 사회주의 문예
미학에 의해 위협받는 민중성과 개별성들을 복원하고자 한 바흐친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지금의 우리 소설들은‘다수
의 목소리’에 대한 억압을 내면화시키는 현실에 부단히 맞선 결과물들
이다.
2. 얽힘과 풀림의 현장
근대사의 각종 질곡을 경험한, 그리고 그것이 아직 현재형인 우리나
라이지만 세계적인 공감대와 겹쳐진 작품을 선뜻 떠올리기는 쉽지 않
다. 이것은 우리 역사 속에서 벌어진 갈등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보편성을 가진 역사적 탐구의 방식을 가로막는 편향된 결론이 내재되
어왔던 우리의 현실을 반영하기도 한다. 정지아는 이런 현실에서 우리
역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였던 6·25를 작품 활동의 중심에
두고 천착하는 보기 드문 작가이다. 그의 인식은 전쟁이라는 사건과 또
거기서 파생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인연의 갈래들을 모두 어루
만지면서 그 뿌리에까지 도달하고 있다. 따라서 정지아의 작품 이면에
흐르고 있는 서사적 물줄기들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자연스럽
게 우리의 현대사를 관통하면서 그 이면에 유폐되어 왔던 목소리들을
만나게 된다. 심지어 전쟁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은 작품들의 경
우에도 작가가 배치한 서사적 흐름은 동일한 경험을 제공한다.
「숲의 대화」『( 문학동네』, 2011년 가을호)는 소재나 주제 등 여러 측
면에서 정지아가 발표해 온 작품들의 연속선상에 있다. 그러나 그간의
작품들에서 과거의 역사적 시간들이 회상 장면으로 등장하면서 역사의
풍랑을 헤치고 나온 인물들의 현재진행형인 모습들을 부각시키고자 사
용되었다면, 이 작품에서는 현재의 인물과 과거 인물 간의 직접적인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소설을 통해서 역사 속에 묻
혀버린 목소리들을 살려내는 데 집중해 온 작가가 이 대화를 통해서 보
다 직접적으로 그 의도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인물, “젊은이”와 “늙은 영감(운학)”은 과거
비슷한 또래의 주인과 종 관계였다. 역사적 풍랑 속에서 “스물 넷”이었
던 젊은 주인은 종에게 “나는 프롤레타리아, 새로운 세계의 주인”이라
는 말을 남기고 자신의 신념을 따라 ‘입산’을 한 뒤 죽은 자이다. 운명
이 갈리고, 죽음으로 인해 그렇게 끊어질 것 같았던 이 둘의 인연은 그
러나 다시 한 여인으로 인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결국 운명을 뛰어넘어
대화를 나누게 된다. 이렇게 현실에서는 당연히 일어날 수 없는 죽은
자와 산 자의 대화이지만, 작가는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구성을 배제하
고 오히려 그 둘의 대화 장면을 통해서 전체적인 이야기들을 마치 자연
스러운 일인 듯 풀어나간다. 그리고 서로 다른 신분처럼 고정된 것이라
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그들 간의 감정이나 처지가 사실은 얽힌 인연만
큼이나 뒤섞여 있었음이 대화를 통해서 밝혀진다.
미웁든…… 했소. 혀도 나는…… 고맙기도 했소.
나도…… 그랬니라. 니가 고맙고, 미웁기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암것 가진 것 없는 내가…… 미웁기도 했소? 되련님 겉
은 사램이 나헌티?
그들이 보여준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이나 태도들은 그저 특수한 시대
가 만들어낸 렌즈를 통했을 때 다르게 보인 것일 뿐, 갈등이나 미움 모
두 그대로 우리 삶의 면면들을 구성하는 것들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
다.“ 어차피 하나뿐인 목숨”이라는 같은 운명 앞에서,“ 아끼지 않고 버
려”야만 할 것이라는 생각도, 반면에 하나도 버리지 않고“아껴 살펴야
할 것”이라는 생각도 모두 틀릴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보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장소 그 자체
이다.“ 한 재 잣나무 숲, 열십자 모냥의 바우”근처인 이곳은 형태적 상
징만으로도 이미 억압과 대립을 넘는 만남의 장소이다. 그리고 내용상
으로도 이곳은 ‘도련님’이 자신을 따라 산으로 들어와 아이를 가진 ‘순
심이’를 살리기 위해 ‘운학’에게 보내면서 헤어지던 마지막 장소이고,
그렇게 ‘운학’에게 가 평생을 같이 한 ‘순심’이 유골을 뿌려달라고 유
언을 한 장소이며, 이제‘운학’에게는 아내의 자취라도 느끼기 위해 매
일 들르는 장소이기도 하다. 결국 이 작품의 배경은 세 명의 등장인물
들 각자의 사연이 맺혀 있는 동시에, 이들과 같이 굴곡진 세월을 살아
온 모든 이들의 사연이 얽히고 풀어지는 한바탕 굿판이 된다. 그리고
여기서는 ‘도련님’의 사랑과 신념도, ‘순심이’의 사랑과 현실도, ‘운
학’의 사랑과 의리도 모순되지 않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순전
한 가치 그대로 녹아든다. 이는 바흐친이 지적한 대로 권위적이고 엄격
한 가치들을 모두 전복하고 이완시켜 집단적이고 민중적인 것으로 탈
바꿈하는‘카니발’의 모습 그대로이다. 이렇게 정지아의 작품 속에는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다성적 목소리가 만들어낸 교향악으로 넘쳐흐른
다.
3. 출발, 그 믿음에 관하여
정지아의 작품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처럼, 단선적인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배제된 목소리들을 복원하고자 하는 서사적 흐름은 천운
영의 작품「우니」『( 현대문학』7월호)에서도 엿볼 수 있다. 며느리인
“독골댁”과 후취로 들어와 오히려 며느리보다 나이가 어린 시어머니인
“과촌댁”간의 관계로 바뀌어 고스란히 반복된다. 특히 함께 나선 ‘꽃
놀이’길에서 발생한 우연적인 일들이 두 인물의 지난했던 삶을 반추
시키고 결국 식욕과 성욕이 뒤섞인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이들의 삶은
따로, 또 같이 긍정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와 같은 ‘입체적 인식’을 젊은 작가들의 서사 구성
단계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비록 정지아나 천운영의 작
품에 드러나 있는 것과 같은 역사적 흐름을 고려하고 있지 않는 경우에
도 말이다. 때로 최근의 소설들에서 쉽게 보이는 이른바 ‘무중력 공간’
의 비/탈역사적 인식에 대한 우려도 물론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비
판은 오히려 소설을 단순히 역사에 후행하는 것으로 보는 관점에서 비
롯된 것으로도 여겨진다. 어쩌면 우리는 소설을 통해 역사를 인식하고
나아가 서사적 구성을 통해 세계관을 표출하는 작가들, 즉 어떤 것보다
도 선행하는 장르로서의 소설을 통하여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보다 적
극적인 작가들과 함께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는 이것을 안보윤의 장편소설『오즈의 닥터』(자음과모음)와 최진영의
장편소설『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한겨레출판)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깨지고 상처난 조각들의 아픔과 그리고 그것이 모였
을 때 만들어내는 다양한 빛깔의 아름다움까지.
안보윤은 자전소설을 의뢰받은 자리에서「안」『( 문학동네』, 2011년
가을호)을 통해 자신의 소설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보
다 명확히 보여준다. 그에게 소설은 다양한 자기자신과의 만남과 헤어
짐이 반복되는 장소이다. 작은집에서 학대받고 자라다가 다시 엄마와
함께 살게 되었으나 역시 보살핌을 받지 못하던 ‘안(?)’, “ 미완성소설”
을 건네고 알 수 없는 이유로 돌아선 ‘안(?)’, 가난 속에서도 밝은 성격
으로 노래를 부르던 ‘안(?)’과 그녀가 입은 상처들. 결국「안」은, 그리
고 안보윤의 “이야기”는 이 같은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 속에서 “수많은
안들”을 통해 구성된다.
여기 수많은 안들이 있다. 안을 사랑하는 안. 안을 멸시하는
안. 안을 종용하는 안. 검거나 희고 풀뿌리처럼 낮거나 자작나
무처럼 높은 안. 옹송그렸던 안이 일어선다. 작은 구덩이를 파
김장독 파묻듯 안을 하나씩 쑤셔넣는다. 사랑하는 안. 그러나
다시는 안에게 돌아오지 않을 안의 이야기를.
보다 중요한 사실은 기법적 차원에서부터 감지된 이 같은 인식이 이
야기를 구성하고 완결시키는 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
을 향해 열려 있다는 점이다. 이는 최진영의「엘리」『( 문학동네』, 2011
년 가을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엘리」는 “사바나를 누비던 ” 코끼리 ‘엘리’를 키우는 “스물여덟 살”
남자가 털어놓는 8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소제목까지 정확히
달려 있는 그 이야기들은 ‘연애, 꿈, 가족, 사랑’에 관한 것 들인데, 정
확히 말하자면 그것들의 실패담이다. 키가 “169센티미터”인 주인공을
마주쳤을 때 “대한민국 남자 평균보다 오 센티미터”가 작다는 생각 외
에는 아무 느낌이 없거나, 어느 날 “백 점”짜리 시험지를 들고 온 주인
공을 보고도 “칭찬”보다는 “시골 학교에서 일등 해봤자 우물 안 개구
리”일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서 걱정이 먼저 드는 우리들의 사고방
식으로는 말이다. 또한 기존의 사고방식과 질서 안에서 던져지는 지극
히 합리적인 질문들에 주인공은 마땅한 대답을 찾지도 못한다.
내가 “사랑해”라고 말했다면 여자애는 십중팔구 이렇게 되
물었을 것이다. “얼마나?” 그 순간 가늠할 수 없는 내 사랑은
수치화의 틀 안에 갇히는 것이다. 혹은 이렇게 되물었을 수도
있다. “ 정말?” 그 순간 절대적이던 내사랑은 참과 거짓의 이분
법이 존재하는 저속한 세상으로 곤두박질친다. 되묻지 않고, 이
렇게 대답했을 수도 있다. “나도.” 그럼 오직 나만 느낄 수 있
던, 질문도 대답도 없이 완전했던 그것은 굉장히 흔해빠진 것이
되어버린다. 사랑에 대한 질문과 대답은 언제나 허무하다. 꿈에
관한 대화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꿈에 관대하지 못하다. 무언
가가 되고 싶다고 말하면, 그거 되려면 되게 어렵고 힘들다던
데, 라는 말부터 늘어놓는다.
결국 주인공에게는 ‘코끼리’가 유일한 대화 상대이며, 위에서 인용
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화가 완성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
다. 그러나 여전히 “뿌우우우”와 “뿌에에에에에엑!”만이 오고가는 대
화는 우리의 눈에 우스꽝스럽거나 과대망상의 장면으로 여겨진다. 그
리고 그 대화의 끝에 코끼리와 아프리카에 가기 위해서 준비물로 “리
코더와 실로폰”을 챙기는 것 역시 이치에 맞지 않는 일로 보인다. 아
니, 그 코끼리를 타고 아프리카로 가려는 계획 자체가 소설 전체를 비
현실적인 것으로 만든다. 정말 동네에서 코끼리를 키운다는 것이 가능
한 일일까? 그리고 그 코끼리를 타고 “밤에만 이동”해서 아프리카에
당도할 수 있을까?
밤중에 한적한 길을 걸어가는 어마어마한 덩치의 코끼리를
보더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진짜라고 믿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나와 엘리를 충분히 의심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내 꿈을 의심하
고 내 진심을 의심했듯.
결국 이 작품에 등장한 새로운 방식의 대화는 주인공을, 그리고 저
마다의 ‘코끼리’를 기르고 있는 이들 모두를 “믿음에 관한 이야기”로
이끈다. 사랑하는 여자친구와의 대화가 오히려 파국으로 치달았던 것
과는 전혀 다르게 말이다. 코끼리를 타고 아프리카로 가는 일이 비현실
적이고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현실적인 기준
으로 도달한 성공의 이면에 감추어진 불안과 의심을 걷고 스스로의 믿
음으로 출발하는 여정임이 분명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만큼 우리
소설은 수많은 목소리들을 억압하는 현실에 대해 보다 높은 면역력을
가지게 된 것 또한 틀림없는 일이다.
남승원 ------------------------------------------------------
1974년 서울 출생.
경희대학교 강사. 2010년『서울신문』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