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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초기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에는 서옥제라는 고유의 결혼 풍습이 있었다. 혼인이 결정되면,신부의 집에서는 자기 집 뒤에 조그만 집(서옥-사위의 집)을 짓는다. 사위될 사람이 저녁에 신부의 집 문 밖에서 자기 이름을 대고 꿇어앉아서 신부와 함께 자겠다고 간청한다. 간청하기를 두세 번 하고 나면 신부의 부모가 비로소 허락하고 서옥에서 자게 한다. 이 때 신랑은 돈과 비단을 내놓는다. 이렇게 혼인을 한 후 아이를 낳아 아이가 크게 자란 후에 신랑의 집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이것은 여성의 집안이 훨씬 우위에 놓인 결혼제도이다. 그런데 5세기 이후의 기록들에 보면 혼인을 할 때 재물이나 폐백을 드리지 않았고, 재물을 받는 자가 있으면 이것은 딸을 종으로 팔았다고 해서 몹시 부끄러운 것으로 여긴다고 했다. 아울러 남녀가 서로 사랑하면 바로 결혼했으며,이럴 때 남자의 집에서 돼지와 술을 보내면 그만이고 재물을 보내서 맞는 예가 없다고 한다. 이같은 풍속에 대해 중국인들은 고구려 사람들이 음란한 것을 숭상한다고 생각했다. |
또한 고구려의 무덤에 많은 부장품이 있다고 외국인들이 알 정도여서 역대로 도굴꾼들이 기승을 부렸는데, 특히 모용선비족은 296년에 서천왕릉을 도굴하려 했다가 실패했고, 342년에는 미천왕릉을 파헤쳐 시신과 무덤 속에 있는 역대의 보물을 거두어 가기도 했다. 이런 도굴꾼 때문에 광개토대왕이 무덤을 지키는 수묘인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던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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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식류 고구려인이 즐겨 먹었던 곡식은 지역적인 특성상 조와 콩이 대표적이었고 보리,밀,기장,수수 등도 먹었다.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은 물론 요동반도와 간도 지방에서도 쌀이 재배된 만큼 귀족들을 중심으로 쌀밥을 먹기도 했다. 식사법은 쌀 이전에 유래된 보리나 조, 수수 등은 낟알이 단단하여 쉽게 익지 않았고, 이 때문에 가루를 내어 토기에 물을 붓고 가열함으로써 죽을 만들어 먹는 방법으로 식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토기는 물러서 장시간 음식을 넣고 가열하면 흙 냄새가 베어 좋은 식기가 될 수 없다. 이러한 토기의 단점을 보완한 것이 시루였으며, 시루로 곡물을 찌는 방법이 고안되었다. 안악3호분 벽화에 그려진 주방그림에서 시루로 음식 만드는 모습이 이런 변화를 보여준다. 또한 디딜방아로 곡식을 으깨는 장면과, 약수리고분 벽화에 키질하는 장면이 있어 곡식류가 고구려인에게 가장 중요한 식량이었음을 알게 된다. 고기류 중국의 [수신기(搜神記)]라는 책에는 맥반(貊盤)이라는 식탁과 맥적(貊炙)이라는 음식이 귀족 집안과 부잣집에서 즐겨 잔치에 나오는 그릇과 음식이라는 기록이 전해진다. 여기서 맥적은 불고기 요리의 전신으로 고구려의 대표적인 고기 음식이라고 여겨진다. 채소류, 기타 고구려에서 재배된 채소로는 부루와 아욱이 전해진다. 부루는 천금채라고 하며 수나라에서도 그 종자를 얻으려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밖에 쑥, 무, 배추 등을 재배했다. 문헌에는 남아있지 않지만, 김치도 먹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물론 고추가 들어있지 않은 소금에 절인 배추나 아욱일 것이다. 초기에는 단지 채소를 소금에 절여 먹었지만, 후기에 들어서는 양념으로 마늘, 파, 생강이 곁들여진 것으로 추측되며, 겨울이 춥고 긴 고구려에서도 김치는 필수적인 음식이었다. |
의복 형태 벽화에 그려진 사람들은 왕, 귀족, 신선, 승려, 도사, 무사, 악공, 춤꾼 등 다양한 사람들이 그려져 있지만, 의복형태는 크게 3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두루마기와 저고리, 둘째는 바지, 셋째는 치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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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불교를 수용함으로써 초부족적인 부족국가의 사상체계를 확립하고 율령을 반포함으로써 국가조직과 관료체제를 정비하였다. 또한 불교의 도입으로 불교예술이 일어나고 중국 등의 외래문화를 수입하여 고구려의 독특한 예술형태를 구축하였다. 고구려의 장군총, 무용총, 각저총, 수렵총 등에서 발견된 벽화에서 선의 묘사나 색채의 조화는 생동감과 박력을 느끼게 하고 말을 탄 무사의 모습은 용맹스러운 고구려인의 패기에 찬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무용총과 동수묘에서보이는 무용하는 모습과 관현악을 연주하는 그림으로 보아 전문 무용가와 음악인이 독립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춤의 내용 고구려는 제천의식으로 10월에는 천신에 대한 감사와 기원의 추수감사제로 전 국민적 거룩한 행사인 동맹이 있었다. 이밖에도 성신과 사직신에게 각각 제사를 지냈다. 동맹을 비롯하여 여러 신들에 대한 국가의 제사에는 반드시 음악과 무용이 그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1949년 안악군에서 발굴된 제3호 분묘, 동수묘 벽화를 살펴보면 주인공이 수레를 중심으로 취타악대와 말을 탄 관원들과 장기수, 검무를 추는 자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군중의 행렬 중에서 의식 무용이 연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분의 후실 벽화를 보면 가야금과 같은 악기와 긴 퉁소를 연주하는 악사들의 반주에 맞추어 다리를 꼬면서 춤추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때부터 왕실에서는 서역의 문화와 교류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밖의 문헌에 의하면 지서무, 호선무 및 고려무가 당나라의 궁정에서도 연희되었음을 전하고 있다. 거기에서 한 사람의 남자 무용수가 느린 음악에 맞추어 넓은 소매를 휘날리면서 춤추는 모습이 마치 큰 새가 하늘을 나는 것 같다고 하였다. 호선무는 한 무녀가 커다란 공 위에 올라서서 몸을 날렵하게 움직이면서 뛰고 돌고 하는 것이 순수한 무용이라기보다 묘기에 가까운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당시 고구려 무용의 자세한 형태는 알 수 없으나 문헌상에 나타난 것을 보면 질적, 양적으로 세련되고 동작에 있어서도 풍부한 표현으로 독무로부터 2인무, 3인무, 7인무 등 많은 춤 종류가 있었고 춤사위가 합리적으로 체계가 잡혀 머리 중국과 일본에까지 가서 연희하였다. |
첫댓글 말을 타고 달리기에 편리한 복장의 바지와 저고리 폭이 좁고 두루마기로 앞을 여민 복장으로 가무를 즐기는 그 당시 생활 풍속도를 볼수있는 고구려 고분벽화, 교과서에서 본 기억이 남아 잇습니다,신께 기원과 감사의 의식을 치루던 그 풍습들이 광활한 대지를 지배할수잇었던 원동력은 아니였는지 생각해봅니다.
고구려의 각종 풍습이 참 재미납니다. 활발한 고구려인의 생활모습 잘 보구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