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ew York 미국 동부의 주. 인구 : 18,169,100명(1998년 현재, 백인:74%, 흑인:16%, 히스페닉:12%, 아시아인 4% 2위) 면적 : 49,576 Square Mile=13만 7304㎢( 30위) 58개의 COUNTY 로 구성되어 있음. 1776년의 미국독립선언과 함께 주가 되었다. 90년까지 주도는 뉴욕시였다. 1825년 에리 운하가 개통되어 허드슨강과 에리 호수가 연결되고 철도의 부설에 따라 뉴욕시와 시카고, 서부가 이어져 이 루트의 연변에 트로이, 스키넥터디, 유티카, 시라커스, 로체스터, 올버니등의 대도시가 생겼다. 1960년대 까지는 최대의 인구를 가진 주이기도 했다. 대서양 연안의 미들스테이츠 가운데 하나이다. 북쪽은 온타리오 호와 캐나다의 온타리오·퀘벡 주와 경계를 이룬다. 동쪽은 버몬트·매사추세츠·코네티컷 주와 접하고, 남동쪽 끝은 대서양과 접한다. 남쪽 경계는 뉴저지·펜실베이니아 주이고, 서쪽 경계는 펜실베이니아 주, 이리 호, 온타리오 호, 캐나다의 온타리오 주 등이다. 주도는 허드슨 강가에 있는 올버니이다. 뉴욕 주에는 원래 2종류의 주요 인디언 집단들이 살았다. 알공킨어를 사용하는 모히간족과 먼시족이 있었고, 모호크·오나이다·오넌다가·카유가·세네카족 들로 이루어진 이로쿼이족 연맹이 있었다. 이들 이로쿼이족은 프렌치-인디언 전쟁(1756~63) 때 영국인들을 지지했다. 이 지역은 헨리 허드슨이 그의 이름을 딴 허드슨 강을 탐험(1609)한 뒤 네덜란드의 식민지로 처음 개척되었다. 네덜란드인들은 1624년에 포트오렌지(지금의 올버니)를 건설했고, 1625년에 뉴앰스터댐을 건설했다. 1664년에 영국인들이 뉴앰스터댐을 지배하게 되자 뉴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763년 프렌치-인디언 전쟁에서 프랑스가 영국에 패배하자 뉴잉글랜드 지방 사람들이 뉴욕으로 활발히 이주하기 시작했다. 미국 독립전쟁이 일어날 때쯤에 이곳의 인구는 16만 3,000명에 달했다. 독립전쟁 때는 새러토가 전투를 비롯해 수많은 전투가 뉴욕에서 벌어졌다. 뉴욕 주는 미합중국 헌법을 승인한 11번째 주였다. 1810년경에 뉴욕은 가장 많은 인구가 사는 주가 되었고 이미 제조업·무역·운송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다. 뉴욕 주는 지형학적으로, 여러 지역으로 구분된다. 그중 애팔래치아 고원은 주 면적의 반을 차지하는 가장 넓은 지역으로, 허드슨 계곡에서부터 서쪽으로 뻗어 주의 남쪽 경계 및 서쪽 경계에까지 이른다. 이 지역 내에 캐츠킬 산맥, 핑거 호, 델라웨어 강 유역 등이 있다. 허드슨모호크 저지대는 허드슨 강을 따라 북으로 올버니 시까지 뻗고, 거기서 모호크 강을 따라 서쪽으로 펼쳐진다. 이리-온타리오롤랜즈로 알려진 고원지대는 애팔래치아 고원 북쪽과 모호크 계곡의 서쪽에 걸쳐 있다. 이 지대는 오대호의 남쪽 연안을 따라 펼쳐져 있으며 서쪽에는 애디론댁 산맥이 있는데 산맥 남쪽에 있는 애팔래치아 고원과는 지질구조가 다른 노년기 고원이다. 월평균 기온은 뉴욕시티가 12℃로 가장 높고, 레이크플래시드가 4℃로 가장 낮다. 주 전체에 걸쳐 날씨가 흐린 편이어서 맑게 갠 날이 드물다. 연강수량은 810~1,140㎜이다. 캐츠킬 산맥 부근이 강우량이 가장 많고 이리·온타리오 저지대가 가장 적은 지역이다. 버펄로와 워터타운 동쪽지역에는 드물게 많은 눈이 내린다. 식민지시대부터 뉴욕 주의 성장은 주로 이민에 기인한다. 20세기말 현재 뉴욕 주 사람들 8명 가운데 1명이 외국 태생이다. 흑인이 전체 인구의 1/8 이상을 차지하며, 라틴 아메리카계 사람들도 거의 1/10 가량 된다. 주에서 중요한 비중을 갖는 소수집단인 푸에르토리코계는 대부분 뉴욕시티에 산다. 뉴욕 주는 1970~80년에 인구가 줄어든 몇 안 되는 주들 가운데 하나이다. 같은 시기에 뉴욕시티의 인구는 10% 이상 줄었다. 그러나 인구밀도는 여전히 높다. 1970년에 캘리포니아 주가 뉴욕 주를 앞질러 인구가 가장 많은 주가 되었다. 뉴욕 주의 경제는 국가 경제활동에서 대단히 큰 비중을 차지한다. 큰 몫을 담당하는 분야로는 도·소매업, 금융·보험·부동산, 교통·통신·공익 사업, 제조업, 건설, 행정 등이 있다. 농업소득의 주요원천은 낙농제품과 소 사육이다. 주요작물은 건초·옥수수·사과·감자 등이며 주요광물은 돌·모래·자갈·아연, 소금 등이다. 제조업에 종사하는 인구비율은 계속 감소하고 있지만 제조업으로 인한 부가가치 총액은 여전히 전국적으로 높은 편이다. 버펄로는 중공업이 발달했고 로체스터는 사진, 광학기구 제조업이 발달했다. 시러큐스는 1차 금속제품, 기계, 종이제품이 발달했고 유티카롬은 기계, 1차 금속제품 제조업이 성하다. 허드슨 계곡과 모호크 계곡은 전부터 주의 주요 교통로였으며 허드슨 강과 모호크 강은 이리 운하의 기초였다. 이 강들의 계곡들을 거쳐 버펄로와 시카고에 이르는 뉴욕센트럴 철도가 지나며, 최근에는 뉴욕 주 고속도로가 같은 방향으로 건설되었다. 이리 운하를 현대적으로 바꿔 계승한 뉴욕 주 바지 운하는 미국에서 가장 큰 내륙수로체계이다. 뉴욕 항은 미국 최대규모의 항구로 전체 수입물량의 약 1/10을 담당하고 버펄로와 옥던즈버그 무역항과 더불어 전국 무역액의 30%를 담당하고 있다. 뉴욕시티의 수송로 체계의 길이는 약 1,200㎞이다. 뉴욕시티 대도시권에는 3개의 국제공항이 있다. 주 전체에 걸쳐 광대한 도로망을 갖추고 있으며 철도망도 잘 짜여져 있다. 뉴욕시티는 미국 금융의 중심지이고, 전국의 주요 주식거래소가 시내에 있다. 시는 미국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한데 패션, 극장, 텔레비전 방송, 음악의 여러 유행들이 이곳에서 생긴다. 또한 뉴욕시티는 오랫동안 뉴스 매체의 세계적인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 국제연합이 이곳에 있다. 그러나 문화 및 문화 관련활동이 뉴욕시티에 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버펄로와 로체스터에 유명한 예술박물관들과 뛰어난 교향악단들이 있다. 로체스터에 있는 이스트먼 음악학교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쿠퍼스타운에는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이 있다. 또 교육의 기회도 풍부하다. 뉴욕주립대학교는 1784년에 설립되었으며 세계에서 가장 폭넓은 교육기회를 제공하는 종합대학교 가운데 하나이다. 〈뉴욕 타임스 New York Times〉는 미국 내에서 높이 평가받는 신문이다.
| ||
Yonkers
미국 뉴욕 주 남동부 웨스트체스터 군의 시. 면적은 46.6㎢, 인구는 19만 6800명(2001)이다. 허드슨 강 동쪽 연안, 뉴욕시티 브롱크스 북쪽 구릉지대에 있다. 한때 맨해튼 인디언의 주요촌락인 나페카마크였던 이곳은 1639년 네덜란드서인도회사의 소유가 되었다. '대지주'에 해당하는 명예칭호인 '데 욘케르'로 알려져 있었던 아드리안 반 데르 동크가 1652년 이 토지를 불하받아 콜렌동크 장원을 세웠다. 그 뒤 1682년 프레더릭 필립스가 이 땅을 매입하여 저택을 지었다(저택은 후에 용커스 시청사로 쓰임). 이 저택은 필립스의 증손자가 미국 독립전쟁 때 영국을 지지했다 하여 정부에 몰수되었고, 지금은 주립사적지가 되었다. 용커스(1778 설립) 내의 번창하는 농촌 마을이었던 이곳은 1849년 철도로 뉴욕시티와 연결되었으며, 1854년에는 오티스 엘리베이터 공장이 세워졌다. 1874년 옛 용커스의 남부지역이 나중에 브롱크스가 된 지역에 합쳐졌다. 지금은 엘리베이터·기중기·화학약품·케이블·전자부품·의류 제조업과 인쇄업·출판업 등이 발달되어 있다. 1886년에 세인트조지프신학대학이 설립되었고, 1961년에 엘리자베스시튼 초급대학이 설립되었다. 1888년에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골프 클럽 중의 하나인 세인트 앤드루스 골프 클럽이 이곳에서 조직되었다. 허드슨 강 지역 박물관에는 지역 예술품과 과학전시품이 전시되어 있다. 1855년에 자치체가 되었고 1872년에 시가 되었다.
| ||
Buffalo
미국 뉴욕 주 북서부 이리 군의 군청소재지(1821)이며 통관항. 인구 29만 2428명 이리 호의 동쪽 끝(나이애가라 강으로 흘러들면서 좁아지는 곳)에 있으며 뉴욕 주에서 2번째로 큰 도시로 대도시권을 형성하는 중심도시이다. 버펄로를 중심으로 하는 이 도시권은 나이애가라폴스·노스토너완다·록포트·래커와나·토너완다 등의 시들과 애머스트·햄버그·치크터와가·랭커스터·웨스트세니카 등의 읍으로 이루어진다. 이곳은 지형적으로 허드슨 모호크 계곡과 오대호 분지를 잇는 동서 교통로의 교차점이다. 일찍이 프랑스의 모피사냥꾼들과 예수회 선교사들이 이곳을 방문했다. 1679년 라살공(公) 르네 로베르 카블리에가 '그리퐁'이라는 배를 건조했던 곳이 바로 이곳 나이애가라 강둑 위이다. 1758년 샤베르 종케르의 지휘하에 프랑스 교역소가 세워졌으나 이듬해에 폐소되었다. 1780년 영국의 보호 아래 있던 세니카 인디언들이 이 지역에 정착했다. 1803년 네덜란드토지회사의 조지프 엘리콧이 이 읍을 설계했다. 뉴앰스터댐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일반적으로 버펄로라고 부름) 1812년 전쟁 당시 인구는 1,500명이었다. 그후 나이애가라 변경지대의 미군작전본부가 되었다. 1813년 영국군의 공격으로 불탔으나 재건되어 1816년 버펄로 자치체로 인가되었다. 지명의 기원은 논란거리인데 이곳에 버펄로(들소)가 살지 않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이 지역의 버펄로 강을 가리키는 프랑스어 보 플뢰브('아름다운 강'이라는 뜻)의 잘못된 발 음으로 보여진다.1818년 버펄로에서 오대호 상류에 띄운 최초의 증기선 '워크온더워터'가 건조되었다. 1825년 이리 운하가 완공되면서, 이곳은 놀라울 정도의 경제호황을 누리게 되었고, 이민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 1832년 시가 되었을 당시 인구는 1만 명에 이르렀다. 남북전쟁 기간 동안 서부가 확장되면서 서부와의 교역이 급속히 증대되었다.시장과 교역로를 위해 필요한 철도가 이곳에 집중되었다. 조선소, 제철·제강소, 포장육 공장, 제분소, 철도차량 산업 등이 발전했다. 1890년대 나이애가라의 수력발전 전기를 이용하게 되면서 매우 다양한 산업들이 성장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버펄로는 세인트로렌스 수로의 주요항구가 되었다. 뉴욕 주 바지 운하의 종점이고 주요 철도 중심지이며 도로의 교차지점이기도 하다. 이곳을 통해 엄청난 양의 곡물·석회석·석탄·철광석·목재·석유·자동차 등이 수송된다. 온타리오 주의 토론토-해밀턴 산업지구와 연결되는 미국의 주요관문으로 미국-캐나다 교역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1927년에 '미국·캐나다 평화 100주년'을 기념해 양국간에 평화의 다리가 개통되었다. 이 다리는(나이애가라 강을 넘어) 캐나다 온타리오 주의 이 라항과 연결된다.버펄로는 2명의 미국 대통령의 본거지였다. 1881년에 시장에 당선되었던 그로버 클리블런드와 밀라드 필모어가 그들이다.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은 1901년 이곳에서 열린 팬아메리카 박람회 참석중 암살되었다. 암살된 매킨리 대통령의 뒤를 이어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취임선서를 한 곳인 앤슬리 윌콕스 맨션은 1966년에 국립사적지로 지정되었다. 매킨리 기념비와 시청(1932), 연방정부 청사들이 눈에 띄는 나이애가라 광장은 이곳의 중심지이다. 1846년 이곳에 뉴욕주립대학교가 설립되었고 1867년에는 스테이트유니버시티오브뉴욕대학이 설립되었다. 이외에 캐니시어스(1870), 듀빌(1908), 미데일(1937), 디먼(1947), 디먼 칼리지(1948), 빌라마리아(1960), 트로케어(1958) 등의 대학과, 이리지역사회대학(1946)이 있다. 또 버펄로는 핵·항공우주과학·의학연구 등을 위한 중심지로 정평이 나 있다. 문화시설로 잘 알려진 곳은 올브라이트-낙스 미술관, 역사박물관, 과학박물관, 클라인한스 뮤직홀(버펄로 교향악단 소재), 1965년에 세워진 전문극장인 스튜디오 아레나 등이 있다. 리치 스타디움은 빌스(미식축구팀)의 홈구장이자 브레이브스(농구팀)와 세이버스(아이스하키팀)의 기념 경기회관이다.
Syracuse
미국 뉴욕 주 중부 오넌다가 군의 군청소재지(1827)이며 시. 인구 :152,215(1998) 오넌다가 호의 남쪽 끝에 있으며 올버니 시와 버펄로 시(237㎞ 서쪽)의 중간지점에 있다. 한때 오넌다가 인디언과 이로쿼이 인디언 동맹의 본거지였다. 1615년 탐험가인 사무엘 드 샹플랭이 이곳을 방문했고 1651년에는 라디송 공(公) 피에르 에스프리가 모호크족의 포로로 있을 동안 이곳을 찾았다. 1654년 예수회 선교사로서 이곳에 온 시몽 르 무안 신부는 유럽인으로는 최초로 이곳에 염호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염호들은 나중에 소금산업의 기초가 되었다. 1655~56년 이 근처에 포교 본부와 생트마리드간넨타아 요새가 세워졌다. 그러나 습지에 자리잡았기 때문에 여름에 질병이 도는 일이 흔한데다가 적대적인 인디언들과 부딪쳐야 했으므로 초기 정착에 어려움이 컸다. 1786년 이프레임 웹스터는 오넌다가 강이 오넌다가 호로 흘러드는 어귀에 무역소를 설치했다. 이른바 '오넌다가 군의 아버지'라고 하는 에이사 댄포스가 1788년에 제재소와 제분소를 설립했다. 뉴욕 주는 인디언과의 협정으로 염호의 관리권을 얻었는데 1797년 이후 염전은 식염추출업체에 임대되었다. 웹스터스랜딩·설라이나·게디스 등 3개의 자치체가 생겼다. 1820년 웹스터스랜딩에 세워진 우체국의 이름은 시칠리아에 있는 고대 그리스 도시의 이름을 따서 시러큐스로 명명되 었다.시는 1825년 완공된 이리 운하와 1830년대 개통된 철도를 발판으로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했다. 시러큐스는 설라이나를 흡수했고 1886년에 게디스를 병합했다. 1870년까지 전국에서 필요한 소금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생산되었다. 그후 소금산업이 쇠퇴하자 시는 경제의 다양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현재 이곳에서 생산되는 제품은 도자기, 약품, 제트 기관 및 전기기계·냉난방장치·라디오·텔레비전·전자장비 등이다. 시러큐스는 뉴욕 주 중부의 도매거래지이기도 하다. 1870년에 설립된 시러큐스대학교, 1946년 설립된 러모인대학, 1961년 설립된 오넌다가지역사회대학, 1872년 설립된 뉴욕업스테이트메디칼센터주립대학교, 1911년에 설립된 환경과학대학·임학대학, 1896년에 설립된 에버슨 예술박물관 등이 시내에 있다. 또한 1841년 이래 뉴욕 주 박람회가 시러큐스 시에서 개최되어왔다. 남쪽으로 10㎞ 떨어진 곳에 오넌다가 인디언 보호구역이 있다. 오넌다가 레이크 공원에는 솔트 박물관과 생트마리드간넨타아 요새의 유적지가 있다. 1825년 자치체가 되었고 1847년 시가 되었다.
Rochester
미국 뉴욕 주 북서부 먼로 군의 군청소재지(1821)이며 공업도시. 면적은 93㎢ 인구는 21만 9773명이다. 제너시 강이 온타리오 호로 흘러 들어가는 곳에 있는, 세인트로렌스 수로의 항구이다. 버펄로에서 동북동쪽으로 114㎞ 떨어져 있다. 아이언더쿼이트·그리스·브라이턴(가장 큰 읍들)을 포함하는 대도시권의 중심지이다. 이들은 게이츠·칠리·피츠퍼드·페링턴·헨리에타·펜필드·웹스터와 함께 주로 주거지역이며, 공업지역인 곳은 얼마 되지 않는다. 1789년에 제너시 강 폭포변에 정착촌이 형성되었다. 그 폭포는 에비니저 앨런이 세운 제분소의 동력원이었는데 그는 세니카족 인디언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제공한다는 조건하에 40㏊의 토지를 양도받았다. 그러나 그 모험은 실패로 끝났고, 너새니얼 로체스터 대령, 윌리엄 피츠휴 대령, 찰스 캐럴 소령(모두 메릴랜드 출신)이 앨렌의 땅을 샀다. 1811년 로체스터는 부지(敷地)를 팔려고 내놓았고, 1817년에 로체스터빌(1822년에 축약)로 되었다. 풍부한 수력전기, 이리 운하(1825), 철도와의 연결(1839) 덕분에 1840년대 무렵에는 제너시 강 유역의 밀 생산에 기반을 둔 제분공업이 번창하게 되어, 일찌감치 급속도로 발전한 서부 도시들 중의 하나(인구 2만)가 되었다. 1860년대에 시작된 의류·신발 산업은 남북전쟁에서 비롯된 수요에 자극받아 대량생산 방법들을 신속히 개발해내었다. 제분업자들이 서쪽의 미네소타로 옮겨가고 난 후, 도시는 묘목사업으로 방향을 돌려 종자와 관목들을 우편주문 판매하는 사업의 기수가 되었다. 1890년대에는 조지 이스트먼, 존 제이콥 바우시, 헨리 롬 같은 공업가들이 사진·광학·정밀기계들을 개발했다. 오늘날은 사진복사 기계와 온도계, 공작기계, 사무기기, 유리로 안을 댄 철제 탱크, 치과장비와 전기설비 등을 포함한 다른 전문생산품들이 경제를 살찌우고 있다. 또 주변의 비옥한 과일·야채농업 지대를 위한 가공·유통·선적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1916년 제너시 강의 양 둑을 따라 온타리오 호까지 뻗은 길고 가느다란 땅이 도시에 추가되었다. 1931년에 이르러 로체스터 항구는 오대호와 대양의 선적을 취급할 수 있을 만큼 발전했다. 도시는 1840년대 '로체스터 영(靈)의 소리'로 알려진 일련의 교령회(交靈會)로 세계의 주목을 끌었던 강거릿 폭스와 케이트 폭스의 고향이다. 1847년 흑인노예제도 폐지론자인 프레더릭 더글러스가 그의 반(反)노예주의 논문 〈북극성 North Star〉을 이곳에서 출판했다. 로체스터는 도망친 노예들의 탈주로인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의 종착지였다. 초창기 여성 선거권론자인 수잔 B. 앤소니도 1866년에서 1906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그녀가 살았던 집이 보존되어 있으며 그녀는 마운트호프 묘지에 묻혀 있다. 로체스터대학교(1850 설립, 이스트만 음악학교를 포함)·로체스터기술공과대학(1829)·로버츠웨슬리언대학(1866)·내즈러스대학(1924)·세인트존피셔대학(1952)·먼로지역사회대학(1961)이 이곳에 소재한다. 콜게이트-로체스터 신학교는 1850년에 로체스터신학교로 설립되었다. 문화기관으로는 교향악단, 미술관, 천문관, 조지 이스트먼 하우스의 국제사진박물관 등이 있다. 하일랜드와 제너시 계곡을 비롯한 도시의 공원들은 원예전시로 유명하다. 매년 5월에 열리는 로체스터 라일락 축제가 유명하다. 1817년에 자치체가 되었고 1834년 시가 되었다.
Long Island
미국 뉴욕 주 남동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섬. 면적 4,463㎢, 인구 6,861,474명 대체로 코네티컷 주 남부 해안과 나란히 뻗어 있으며, 북쪽에 있는 롱아일랜드 해협을 사이에 두고 코네티컷 주와 마주보고 있다. 롱아일랜드의 서쪽 끝은 뉴욕 시 항구의 일부를 이룬다. 이 섬은 4개의 군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서쪽에서 동쪽으로 킹스·퀸스·나소·서퍽 군이 나란히 있다. 킹스 군은 뉴욕 시의 독립구인 브루클린 자치구이기도 하며, 퀸스 군은 퀸스 자치구이다. 롱아일랜드의 서쪽에 해당하는 1/3 지역은 대부분 뉴욕 시에서 계획 없이 무질서하게 뻗어나가며, 확장된 도심과 교외로 이루어져 있다. 반면 동쪽의 2/3는 여전히 부분적으로 농촌의 특성을 지니고 있고, 대부분 지역이 평탄하고 기름진 농토와 긴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롱아일랜드는 허드슨 강 어귀에서부터 동북동쪽으로 190㎞ 뻗어 있다. 너비는 19~37㎞이며, 이 섬의 동쪽 끝은 2개의 폭이 좁은 반도로 나누어져 있다. 북쪽 반도는 길이가 40㎞이며 오리엔트 곶에서 끝나고, 남쪽 반도는 길이가 64㎞로 롱아일랜드의 동쪽 끝인 몬톡 곶에서 끝난다. 이 섬의 북쪽 해안을 따라 플러싱·리틀넥·맨해싯·콜드스프링·헌팅턴·스미스타운·포르제퍼슨 만 등이 있다. 롱아일랜드의 남쪽 해안에는 사주(砂洲)와 모래톱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데, 이것들이 자메이카 만을 포함한 몇몇 만들을 바다로부터 보호해준다. 이런 모래띠가 어떤 지점에서는 작은 섬을 형성할 정도로 넓어지기도 하는데, 이중 몇 군데는 인기있는 해수욕장이 되었다. 로커웨이·롱·존스·오크아일랜드 해변 등이 이렇게 해서 생긴 것들이다. 파이어아일랜드 또는 그레이트사우스 해변으로 불리는 길다란 반도는 파이어아일랜드 국 립 해안을 이룬다.유럽인들이 정착하기 전에는 주로 델라웨어족 인디언들이 이 섬에 살고 있었다. 원래 플리머스사가 관할하는 지역의 일부였으나 1635년에 찰스 1세가 스털링 백작 윌리엄 알렉산더 경에게 소유권을 넘겨준 것으로 여겨진다. 영국의 소유권 주장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네덜란드 서인도회사가 소유한 지역의 일부가 되었다. 이 회사는 1636~60년에 브뢰켈렌(브루클린)·아메르스포르트(플랫랜즈)·미도우트(플랫부시)·니우위트레흐트(뉴위트레흐트) 등을 세웠다. 한편 영국 개척자들은 사우샘프턴(1640)·사우솔드(1640)·헴스테드(1644)·그레이브젠드(1645)·플러싱(1645)·뉴타운(1655)·자메이카(1656) 등의 읍을 세웠다. 뉴네덜란드와 뉴잉글랜드 연합식민지 사이에 체결된 하트퍼드 조약(1650)에 따라 오이스터 만에서 대양까지 경계선이 그어졌으며, 그 선의 서쪽은 네덜란드, 동쪽은 영국의 소유가 되었 다.1664년 3월 찰스 2세가 요크 공작에게 하사한 지역중에 롱아일랜드가 포함되어 있었고, 그해 8월 영국은 뉴앰스터댐과 네덜란드 영토를 정복했다. 롱아일랜드는 요크셔 주의 일부가 되었고, 1665년 3월 헴스테드에서 공표된 법에 따라 통치되었다. 1683년에 군제(郡制)가 도입되어 서퍽·퀸스·킹스 군 등이 생겼다. 미국독립전쟁 당시 롱아일랜드는 국왕파(영국지지파)와 애국파(독립지지파) 양쪽 모두의 활동중심지였으며, 해안지역은 사략선(私掠船)과 군대의 침략을 받았다. 이 섬은 전쟁중 식량과 목재의 주요공급지였으며, 롱아일랜드 전투는 1776년에 벌어진 첫 전투였 다.1884년 그린포트와 연결되는 롱아일랜드 철도가 완공됨에 따라 시장출하용 채소재배지역의 중심지가 되었고 그 생산품은 뉴욕 시로 보내졌다. 어업·포경업·굴양식업 등이 여전히 주요산업이지만, 19세기 후반기에는 뉴욕의 부유층에게 인기있는 해수욕장이 되었다. 거대한 사유지와 저택들이 북쪽 해안을 따라 세워졌고, 뉴욕 시 동쪽에 있는 남쪽 해안을 따라 수많은 여름휴양객을 위한 호텔들이 세워졌다. 오늘날 이곳은 코니 섬, 존스 해변 등과 이 섬에 있는 다른 많은 해변·항구·요트장·골프장·초원지대 등으로 인해 여름마다 수백 만의 방문객이 찾아오는 휴양지가 되었 다.뉴욕 시가 20세기에 계속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롱아일랜드의 인구도 급격히 증가했다. 특히 나소 군과 서퍽 군의 인구는 나중에 안정되긴 했으나 1950년과 1970년 사이에 각각 2배, 4배로 불었다. 수십만의 롱아일랜드 사람들이 매일 뉴욕 시로 통근하지만 섬 자체도 제조업의 중심지가 되어가고 있다. 비행기와 전자장비 제조업이 특히 중요한 산업이다. 롱아일랜드 철도는 섬의 남·북 해안 양쪽뿐만 아니라 섬의 중심부까지 연결해주며 미국 내에서 가장 많은 통근자를 수송한다. 자동차와 지하철이 통과하는 몇 개의 주요다리와 터널을 이용해 고도로 발달된 효율적인 고속도로망이 맨해튼과 뉴욕의 다른 자치구들을 섬과 연결해준다.
Albany 미국 뉴욕 주의 주도(1797)이며 올버니 군의 군청소재지(1683). 인구:시 94,305명. 뉴욕 시에서 북쪽으로 230㎞ 떨어져 있으며 허드슨 강가에 있다. 트로이와 스케넥터디를 포함하는 대도시권의 중심부이며, 수심이 깊은 허드슨 강 수로의 북쪽 종착지이자 통관항이다. 또 대서양으로 향하는 배와, 뉴욕 주 바지 운하를 거쳐 서쪽의 오대호로 향하는 배가 서로 교차하는 곳이기도 하다. 1609년 '반달호'를 타고 북서항로를 찾아 항해중이던 헨리 허드슨이 올버니 근처의 모래톱에 닻을 내렸다. 1614년 현재의 올버니 항의 일부인 캐슬아일랜드에 내소 요새가 세워졌다. 내소 요새는 네덜란드연합회사의 교역장이 되었다. 1624년 일단의 왈론인들이 캐슬아일랜드 근처에 포트오렌지를 세우고, 첫 영구정착지인 베베르웨이크를 건설했다. 1629년 네덜란드서인도회사는 암스테르담 출신 상인인 킬리안 반 렌셀라르에게 베베르웨이크를 포함한 강 양안의 영토를 양도했다. 새로운 사유지는 렌셀라르스웨이크로 개칭되었고, 이곳에 많은 식민지 개척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1652년 네덜란드서인도회사 식민지의 총독인 페테르 스토이베산트는 베베르웨이크를 자치체로 만들어 렌셀라르가(家)로부터 독립시켰다. 1664년 9월 24일 포트오렌지가 영국에 함락되었고, 나중에 제임스 2세가 된 요크-올버니 공작을 기려서 올버니로 개칭되었다. 1686년 7월 22일 영국인 총독 토머스 던건이 올버니를 시로 인가했다.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곳이며, 포트프레더릭이 건설되어 이곳은 식민지시대의 주요도시가 되었다. 1695년에 200가구에 불과했던 주민이 1790년에 실시한 최초의 미국 인구조사 때는 3,498명으로 늘어 있었고, 이어 1850년경에는 5만 763명으로 늘었다. 네덜란드식 이름을 가진 거리가 많고, 매년 5월 워싱턴 공원에서 튤립 축제가 열리는 점 등은 시가 아직도 네덜란드의 색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1689년 초기의 식민지 대표회담의 하나가 올버니에서 열려 상호방위체계가 논의되었다. 1754년에는 역사적으로 그보다 더 중요한 의의가 있는 올버니 회의가 열렸는데, 식민지 대표자들이 참여한 이 회의에서는 벤저민 프랭클린이 제시한 '식민지 연합안'을 채택했다. 이 회의를 바탕으로 '1765년 회의'와 1774년의 '대륙회의'가 열렸다. 올버니에는 일찍이 1783년부터 개척 이주민들이 정착하기 시작했으며, 이미 모피교역 중심지로 자리를 굳히고 있던 올버니는 서부를 향해 떠나는 마차들의 주요 출발준비 지점이 되었다. 1825년 이리 운하가 개통되고 1831년 철도가 건설되면서 이 도시를 통과하는 교통량이 늘었으며, 올버니는 미시간 준주(오대호 상류지방)로 향하는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편 시는 지금도 정치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이다. 공업분야에서는 제지·공작기계·펠트·금속제품 등의 제조업이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1919년에 건설된 공항은 미국 최초의 민영공항 가운데 하나이다. 1932년 올버니 항에 외국 선박들이 드나들게 되면서 시는 해양산업의 중 심지가 되었다. 시에는 네덜란드 식민지시대 양식, 조지 왕조 양식, 프랑스 고딕 복고양식 등으로 지어진 훌륭한 건축물들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건물로는 1700년경에 세워진 크레일로 요새가 있다. 리처드 셔크버그가 이곳에서 〈양키 얼간이 Yankee Doodle〉를 썼다고 전하며 현재 주립사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스호일레르 맨션, 히스토릭 체리힐(1787:렌셀라르가의 저택이었음), 올버니주립은행(1803), 옛 네덜란드 교회(1799), 시청(1883), '프랑스 성곽' 양식의 주의회 의사당(1871~91), 세인트피터 미국성공회 교회(1859) 등도 전통적인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건물들이다. 원래 올버니 아카데미의 건물이었던 조지프 헨리 기념관은 1815년에 완공된 것으로, 역시 역사적 건축물에 속한다. 시의 중심부는 의사당 공원 맞은편에 있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광장이다. 광장 주변에 정부종합청사, 뉴욕 주립박물관을 비롯한 문화시설과 회의장소 등이 있다. 시에는 다양한 고등교육기관들이 있다. 1884년에 설립된 뉴욕주립대학교 올버니 분교를 비롯해 올버니의과대학(1839), 법과대학(1851), 약학대학(1881), 더들리 연구소 등이 포함되는 유니언대학교의 전문교육기관들이 있다. 세인트로즈대학(1920)·세인트메리대학(1958) 등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설립한 교육기관들도 있다. 그밖에 올버니 실무학교(1857)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