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문화동 성당 25주년사에서 중에서 발췌
[1] 청주교구의 변천사
1) 청주교구의 개관
청주교구에 천주교가 들어온 것은 유신박해(1801) 이전부터라고 전하고 있으나 대부분 박해를 받아 피해 다니며 숨어서 옹기를 굽는 등 순교의 신앙은 처절하리만치 우리 교구 내 지역 곳곳에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신앙의 자유가 어느 정도 허용되던 1882년 무렵 이후 곧바로 여기저기에 공소가 생겨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일로 그 이후 교세가 날로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맨 처음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에서 1896년 10월 1일에 부이용(Bouillon. 임가밀로)신부가 감곡본당(甘谷本堂, 舊長湖院本堂)을 설립함으로써 우리 교구의 첫 본당이자, 충주 교현 본당의 모태가 된 첫 본당이 고고성을 울리었던 것이다. 그 후 1906년 5월 20일에 옥천에 이어서 괴산의 고마리(후에 폐쇄) 그리고 1932년에 청주(현 수동본당)에, 1940년에는 제천(현 남천동 본당), 5년 후인 1945년 해방되던 해 11월 15일에 충주(구 야현, 현 교현본당)에 본당이 차례로 설립되었다.
8.15 광복과 혼미한 정국은 말할 것도 없고, 남북이 분할되고 교회 안팎으로 당하는 시련 속에서 당시 선교에 대한 어려움이 너무 크게 되자, 당시 서울 교구장이던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는 교황청의 인가를 받아 1953년 9월 1일자로 충청북도를 서울교구의 감목대리구로 하고, 해방전까지 평양교구에서 선교 활동을 했던 메리놀(Maryknoll)외방선교회로 하여금 이 지역을 맡아 선교토록 하였다.
노주교는 1953년 9월 16일 메리놀회 총재 윌시(Walsh) 주교와 함께 감곡성당으로 가서 6·25때 군종 신부로 제주도의 포로수용소에서 공산군 포로들을 위해 크게 공헌했으며, 당시 감곡 성당 주임신부로 봉직하고 있던 파디(Pady) 야고보 신부를 감목대리로 임명하였다.
메리놀 외방 선교회에 위임된 1953년 당시 5개 본당에 신자수 8천여 명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격세지감이지만 그 이후 메놀리 선교회 신부님들의 눈부신 활동으로 6·25동란 이후 피폐된 이 지역민에게 위안과 희망과 용기를 심어 주며 비약적인 교회의 성장을 이룩하게 된다.
이처럼 발전된 성장을 기반으로 1958년 6월 23일에 청주 대목구로 독립하고, 파디신부는 이해 9월 16일에 미국에서 주교 성성식을 가졌다.
1962년 3월 10일에는 한국 교회에 교계제도가 설치되어, 1962년 7월 25일 파디 주교의 착좌식이 청주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초대 청주교구장 파디 주교가 교구에 탄탄한 기틀을 만들어 놓고 1970년 6월 25일 고령으로 교구장을 사임하고,서울교구 소속 정진석 니꼴리오 방인신부가 제2대 청주교구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1970년 10월 3일 노기남 대주교의 주례로 성성식을 가짐으로써 우리 교구는 한국인 주교 아래 괄목할 만한 성장을 위해 제 2의 도약의 시기를 맞게 된다.
이때 청주교구의 관할 지역은 단양군과 제천군을 제외한 충청북도 일원의 5,767km²에 달하는 지역을 담당해 왔다.
2) 한국교구 정식교구로 승격
1962년 3월 10일 교황 요한 23세는 한국 교회에 교계(敎階) 체제를 성립하여 서울, 대구, 광주를 대교구로 그 때까지 교황청 직할 대목구(代牧區)이던 11개의 교구를 정식 자치 독립 교구로 승격시켰다.
교황 요한 23세는 한국에 3개 관구를 설정하고 전국 각 대목구를 자치교구로 승격시켜 그 관구에 속하도록 반포하였다.
청주교구는 이 새 교계 체제에 따라 대구관구에 소속케 되면서 파디 주교의 착좌식이 1962년 7월 25일에 이루어 졌다.
이로써 우리 본당이 소속된 교구가‘청주교구’로 완전 자치 독립케 되었으며, 정진석 주교가 제2대 청주교구장으로 재임한 기간은 1970년 6월 25일부터 1998년 4월 3일까지 약 27년 10개월 동안이었다. 그 동안 청주교구는 각각의 특징을 지니는 세 시기 안에서 성장과 변모를 거듭해 왔다.
·첫 번째 시기인 1970년대는 청주교구의 사목 제2기요, 한국인 사제 사목기가 시작된 때였다.
·두 번째 시기인 1980년대는 재정 자립을 이룸으로써 새로운 사목을 지향해 나갈 수 있게된 교구 정착 혹은 안정의 시기였다.
·세 번째 시기인 1990년대는 교구 성장의 기반이 확립된 시기였다.
1998년 5월 30일 교황청에서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98년 4월 3일자로 제2대 청주교구장 정진석(니콜라오) 주교를 제13대 서울대교구장 겸 평양교구장 서리로 임제1편 한국 천주교회와 청주교구의 역사 109 명함’에 따라 대주교로 승품된다는 사실을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정진석 대주교는 1998년 6월 28일 내덕동 주교좌 본당에서의 송별미사를 끝으로 정들었던 청주를 떠났고, 이튿날 명동 주교좌 성당에서 서울대교구장 착좌식을 가졌다.
청주교구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1999년 6월 3일 배티성지 장봉훈(가브리엘) 신부가 제3대 청주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었다. 정진석 대주교가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된 지 1년 2개월 만이었다. 그 결과 1998년 6월 29일부터 교구장 직무 대행체제로 이어져 온 교구 사목은 1년 동안의 과도기를 마치고 새 교구장 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다.
참고로 2011년 12월 31일자 청주교구 교세 통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신자수 152,919명 본당수 76개소 공소 56개소
교구성직자 173명 수도회사제 13명 한국인수녀 504명
한국인수사 82명 남자수도단체 5개소 여자수도단체 22개소
병원 2개소 유치원 11개소 중학교 1개교
부랑인수용소 1개소 고등학교 2개교 특수학교 4개교
대학교 1개소 사회복지시설 71개소 성지현황 3개소
3) 충주지방의 천주교 전래 약사(청주교구 승격까지)
⦁1756-1801 : 이승훈 북경에서 예수회소속 드그라몽(Louisde Gramont) 신부에게 “베드로”로 세례
⦁1754-1786 : 이벽등, 천진암 강학회(1779-1784)가 열림
⦁1785년 봄 김범우(도마:1785년 순교) 집(명동)에서 주일 참례 지냄
⦁1791(신해), 1801(신유)양 박해
⦁1831. 9.9. : 그레고리오 16세의 교칙-교황대리감목구(대목구) 설정. 초대교황대리 감목 브위기애르
(Brusuiere: 소련) 임명
⦁신유(1801), 기해(1839), 병오(1846), 병인(1866)년 박해 1만 명 이상 순교
⦁1876 : 미국, 영국, 독일, 불란서와 한·일 수호조약 체결로 외국신부 및 선교사 입국
⦁1888 : 성 바오로회 수녀 4명 입국
⦁1893 : 임가말로(1869-1974. 묘지 : 감곡 성당) 신부 입국(1869~1974)
임신부 이천, 청주, 문경, 충주 방향에서 전교함
임신부 당시 민비가 거주하던 감곡면 매괴여자상고 토지와 매산 구입
⦁1896. 10. 1 : 민비거처 집을 성당으로 사용
⦁1947. : 임신부님 47년간 사목하신 후 감곡에서 선종(문지-감곡 성당)
⦁1920. 8. : 고마리(증평) 본당 신설
⦁1932.10. : 청주 수동(구 북문로)본당 신설
⦁1940. : 제천 남천동 본당 신설
⦁1945.11.15. : 충주 교현동 본당 신설
⦁1953. : 감곡대리구 설정 및 파 야고보 신부 임명
⦁1960.1.1. : 충주 제2지현동 본당 신설
⦁1962.3.10. : 청주교구 승격
[2] 충주시의 지리적 역사적 배경
1) 충주시의 지리적 역사적 배경
충주는 지리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충청북도의 북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쪽으로 제천시,서쪽으로 음성군, 남쪽으로 괴산군과 경북 문경시, 북쪽으로 강원도 원주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강원도 오대산에서 발원하는 남한강과 속리산에서 발원하는 달천강이 탄금대 합수머리에서 만나 서울로 흘러가 서해로 들어간다. 또 내륙 분지의 지형으로 4계절이 뚜렷하고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가 큰 편이다.
한편, 충주는 역사적으로 볼 때 기원전 3~4세기경에 마한의 땅에 속해 있었으며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영토 확장을 위한 각축장이 되었으며 백제의 영토로 있을 때는 낭자곡성, 고구려 장수왕 때는 국원성, 신라 경덕왕 16년(757)에는 중원경이라 불리웠다. 고려 태조 23년(940)에는 중원경을 충주부로 개칭하면서 '충주' 라는 지명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몽고의 침입 때는 충주산성 방호별감이었던 승병장 김윤후가 70여일의 전투에서 몽고군을 격퇴시킨 곳으로 유명하여 이를 계기로 충주는 국원경(고려시대 고종 41년(1254)으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충렬왕 3년(1277)에는 충주성을 개축하면서 성벽 일부에 화려한 연화문을 조각 축조하였다. 이를 계기로 예성(蘂城)이라 불렀다.
조선 태조 4년(1395)에 충주는 충청도의 감영으로서 관찰사를 배치하였으며 조선 고종 33년(1896)에 지방관제를 개편하여 전국을 13도로 나눌 때 충청북도가 되면서 충주가 도청 소재지가 되어서 충주에 관찰사를 두었다. 조선 순종 3년(1909)에 교통이 불편한 것을 이유로 도청 소재지를 청주로 이전하면서 충주군으로 불리게 되었다.
1914년 충주군 읍내면(17개 동)으로 개칭되었으며, 그리고 1917년 충주군 읍내면이 충주면으로 개칭하여 오던 중 1956년 7월 8일 법률 제389호에 의하여 충주읍이 시로 승격 되면서 충주시를 제외한 지역을 중원군(13개면)이라 불리어오다 1995년 1월 1일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분리된지 약 40년 만에 다시 충주시와 중원군을 통합하여 충주시로 개편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행정구역상 충주는 1읍 12면 26개 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면적은 983.95㎢이고 인구는 약 21만 명이 된다. 26개 동 중에서 문화동은 구 시청을 중심으로 면적은 0.98㎢로서 충주시 전체 면적의 0.1%를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