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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합창워크숍 서칭페스티벌(Searching Festival) 원문보기 글쓴이: 하찬송
21세기 한국문화와 회중찬송
이상일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I. 서론
문화는 이 세상에 편만한 공기처럼, 비록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에 존재하여 영향을 미친다. 그리스도인도 세상 안에 있기 때문에 문화의 영향을 받는다. 세상과 자신을 단절시켜 문화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으려는 이들도 있지만,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을 세상에서 데려가시지 않고 오히려 세상으로 보내시며(요 17:18),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삶을 살라고 명령하신다(마 5:13-16). 그런데, 분별없이 세상에 살다가는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향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문화는 그 영향력이 광범위하고 강력하며, 자연스럽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 있되 세상에 속하지 말 것을 거듭거듭 말씀하신다(요 15:9; 17:14-16). 바울도 같은 내용의 권고를 우리에게 강한 어조로 전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여기에 “세대”로 번역된 “αἰών”이라는 헬라어 원어를 문맥상 “문화”로 번역할 수도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 세상의 문화와 같은 모양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이 시간 우리는 21세기 한국문화와 그것이 한국교회의 회중찬송에 미치는 영향(주로 부정적인 면)을 분석하고, 회중찬송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자 한다. 범위를 회중찬송으로 국한하는 첫째 이유는, 회중찬송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찬양대의 합창이나 오르가니스트의 독주에 비해 음악적으로 수준이 낮을지라도, 4세기 이후 천 년이 넘게 공식적으로 예배 시간에 금지됐다가 16세기에 이르러서야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회복된 회중찬송은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음악이다. 둘째 이유는, 회중찬송이 예배에 있어서 가장 심한 논쟁의 대상과 갈등의 원인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교회음악 학자나 음악사역자들 사이에도 논쟁이 심하고, 이 문제로 인해 갈등을 겪는 교회들도 많이 있다. 예배자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주는 기능을 해야 할 회중찬송이 오히려 예배자들을 갈라놓고 예배가 전쟁터가 되는 현실은 참으로 안타깝다. 한국문화의 분석을 통해 우리는 오늘날 한국교회 회중찬송의 현실을 새로운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되고, 회중찬송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II. 21세기 한국문화의 특징
21세기 한국문화의 특징을 고찰하기에 앞서 ‘문화’에 대한 정의를 내릴 필요가 있다. 영국의 인류학자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문화’를 크게 세 가지로 정의한다. 첫째, “지적, 정신적, 심미적인 계발의 일반적 과정”을 일컫는 데 ‘문화’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둘째, “한 인간이나 시대 또는 집단의 특정 생활방식”을 가리킬 때에도 사용되고, 셋째, “지적인 작품이나 실천행위, 특히 예술적인 활동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 특강에서 사용될 ‘문화’의 개념은 위의 세 가지 정의 중 두 번째 것에 가깝다. 즉, 오늘날 한국인의 생활 방식(가치관이나 정서 등의 정신적 영역), 한국 사회의 풍조를 일컫는다. 그러나 이 또한 너무 광범위하다. 이 시간 그것을 모두 다룰 수가 없고, 한국교회의 회중찬송에 영향을 미치는 문화의 몇 가지 모습만 살펴보겠다.
1. 개인주의
불과 3-40년 전만 해도 가족이나 이웃끼리 함께 하는 시간이 오늘날보다 훨씬 많았다.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거나 놀이를 즐길 기회가 많았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점차 핵가족화 되고,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자가용이 일반화되면서, 함께 모일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이러한 현상을 가속화 시킨 것이 과학기술문명의 발달이다.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요인으로 미디어의 발달과 인터넷의 보급을 들 수 있다.
국내 텔레비전 보급률은 벌써 오래 전에 거의 100%에 이르렀고, 두 대 이상을 가진 집도 이제 50%를 넘게 되었다. 개인용 컴퓨터도 일반화되었고, 노트북까지 합쳐 두 대 이상 가진 집도 많다. 거실에 있는 큰 음향기기를 통해 함께 음악을 듣는 모습은 이제 보기 어려워졌고, 각자 MP3 재생기 등을 이용해 이어폰을 끼고 자기가 듣고 싶은 음악을 듣는 이들이 많다. 휴대용 멀티미디어 재생기와 게임기가 점차 보급되면서 혼자 어디서든 심심하지 않고 재미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1994년에 처음 우리나라에 보급된 인터넷은 그 후 폭발적으로 발전하여서, 2005년에 우리나라는 전 세계 국가 중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 1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무선으로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는 곳이 점점 늘어나서, 노트북이나 휴대전화 등을 이용해 어디서나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인터넷의 세계는 텔레비전이나 기타 멀티미디어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무궁무진하다. 특히 젊은 층에는 정보 획득뿐만 아니라 여가 활동, 커뮤니케이션 등을 위해서 거의 필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미디어의 발달과 인터넷의 보급은 우리를 서로에게서 점차 멀어지게 한다. 심지어 한 공간에 있어도 각자 자기만의 세계에 빠지는 모습을 우리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지하철을 타 보면, 나란히 앉아 있어도 누구는 휴대전화를 누르고 있고, 누구는 이어폰을 끼고서 음악을 듣고, 누구는 휴대용 멀티미디어 재생기를 통해 영화를 감상한다. 함께 있지만 혼자 있다(together alone). “바로 옆에 얼마나 많은 다른 이들이 있는지에 관계없이 따로따로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들 수 있는 도구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사람들이 같은 시간에 한 자리에서 한 가지 일을 할 필요가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개인주의 문화는 함께 모여서 같은 일을 하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도록 한다.
개인주의 문화의 폐해 중의 하나가 친밀감의 부재이다. 함께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서로 대화하는 시간이 짧아졌다. 미국의 어느 연구 결과에 의하면, 미국인들은 배우자와 하루 평균 4-5분 정도 대화하고 자녀와는 겨우 30초 정도만 대화한다고 한다. 자녀는 자녀대로 부모는 부모대로 미국 사회보다 더 바쁘게 사는 한국인의 가정은 이보다 시간이 더 짧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가정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모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대화의 시간이 짧아졌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친밀감을 쌓을 기술을 점점 상실해 가는 듯하다. 그러나 친밀감이 부족한 사회이기에 오히려 더 친밀감을 원한다.
2. 소비주의
이어령은 우리나라를 “국민소득 1만 달러밖에 안 되는 국민이 소득 5만 달러의 나라보다 더 흥청망청하게 써대는 소비의 나라”라고 꼬집었다. 이는 한국인이 유달리 소비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생산자 쪽에서 광고를 통해 소비를 부추기기 때문이다. 소비자는 눈치를 채지 못할 수 있는, 아니면 소비자가 눈치를 채지 못하게 하면서 영향을 미치는, 광고의 전략을 통해서 소비주의의 특징을 세 가지만 살펴보겠다.
1) 자기중심주의
광고에서는 소비자가 그 상품을 살 만한 자격이 있다고 부추긴다. 그리고 그 상품을 사면 즉시 만족하게 될 것이라고 보장한다. 이러한 메시지를 듣게 되면 소비자는 주인이 되고 왕이 된 것처럼 느끼게 된다. 자기가 모든 선택의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선택의 목적은 다름 아닌 자기만족이요 자기필요의 충족이다. 그래서 자기중심적 사고가 머릿속에 깊이 자리 잡게 된다.
텔레비전은 가장 영향력이 큰 광고 매체이다. 한국인은 모든 매체 중에서 텔레비전을 가장 높이 신뢰하며, 하루 평균 3시간 가까이 시청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텔레비전을 통해 알게 모르게 듣게 되는 메시지가 무엇일까? 미국의 한 연구자가 텔레비전의 수많은 게임 쇼와 토크 쇼와 시트콤과 광고를 오랜 기간 연구하여 얻어낸 핵심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지금 당장 바라는 것뿐이다. 당신 마음대로 하라.” 한국의 텔레비전도 마찬가지이다. 매일 이런 메시지가 사람들을 세뇌시키며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2) 새것주의
광고는 소비자들이 현재 사용하는 상품이 옛것이고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인식을 심어주며 그들로 하여금 새것을 사도록 부추긴다. 새것을 사도록 하기 위해 현재 가진 것에 대해 불만족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새것을 사면 계속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잠시뿐이다. 그것도 곧 옛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계속 불만족을 느끼면서 새것을 추구하는 것이 광고를 통해 형성되는 소비자들의 체질이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결코 채워지지 않을 만족감을 좇는 것이다.
한국인은 세계 어느 나라 사람 못지않게 새것을 선호한다. 특히 디지털 제품의 소비에서 이러한 문화가 두드러진다. 한국은 디지털 신제품에 대한 적극적 초기 수용자(early adopter) 층이 세계에서 가장 두텁다고 한다. 신제품이 나오면 이에 대한 정보를 빨리 입수하고 나서 소득과 필요에 상관없이 바로 사는 행위를 반복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다. 한국인이 새것을 누구보다 빨리 찾는다는 말은 그만큼 현재의 것에 대한 불만족과 싫증을 빨리, 그리고 쉽게 느낀다는 말이다. 현재의 것을 구식이라고 여겨 가치를 낮게 여기며 쉽게 바꾸거나 버려버린다는 말이다. 세상이 급변하고 새것이 쏟아져 나오면서 그 주기는 점점 빨라진다.
3) 취향의 문제
시간이 갈수록 상품이 다양해지고 있다. 30년 전만 해도 라면의 종류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2007년 현재에는 시중에서 판매되는 라면의 종류가 160여 가지나 된다고 한다. 음료수도 종류가 굉장히 다양해졌다. 소비자들은 자기 취향에 따라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선택한다. 음악에 있어서도 사람마다 취향이 분명해서, 각자 좋아하는 음악 양식이 있고 싫어하는 음악 양식도 있다. 랩 음악은 좋아하는데 클래식 음악은 싫어하는 이가 있고, 국악은 좋아하는데 헤비메탈 음악은 싫어하는 이가 있다.
취향은 사람마다 다를 뿐 아니라 세월이 지나면서 변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예전에는 금기시되었던 것이 이제는 취향의 문제로 여겨져서 용인되는 것들도 있다. 배꼽을 드러내는 옷을 입는다거나 남자가 귀걸이를 하는 것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그런데 취향에 따른 선택의 범위가 점차 확대되어서, “도덕이나 윤리, 종교나 정치, 이 모든 것들이 이제는 취향에 따라 ‘선택 가능한 것’이 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서양의 여러 나라처럼 우리나라에서도 동성애나 성전환을 점차 취향의 문제로 여기려는 이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것은 전통적인 진리나 가치관의 절대성을 부인하고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며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포스트모던 사회의 일면이다.
3. 감성주의
한 신문사에서 광복 60주년을 맞이해 1945년에서 2005년까지의 60년을 몇 개의 기간으로 나눠 각 기간의 특징을 문화 키워드로써 설명했는데, 2000년대를 “개인이라는 영토의 확장, 취향과 감성의 발달로 요약되는 상상력의 시대”라고 제목을 붙였다. 21세기 문화의 특징 중 하나로 감성의 발달을 꼽은 것이다.
일찍이 1995년에 1인당 국민소득이 만 천 달러를 넘어선 한국은 1990년대 말의 외환위기를 극복한 후 21세기를 맞이하면서 본격적으로 감성을 중시하는 사회로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소비시장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제 소비자들은 양과 가격과 품질 못지않게 감성의 만족을 중시하여 상품을 구매한다. 기업들은 이러한 추세에 발맞춰 감성적인 디자인의 개발에 힘쓰고 감성적인 마케팅 전략을 펼친다. 요즘의 광고는, 그것이 전자제품이든 자동차든 음료수든 아파트든 기업이든 대통령 후보든, 감성에 호소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제는 감성이라는 말이 마케팅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분야에도 결합되어 사용되고 있다: 감성 농업, 감성 과학, 감성 건축, 감성 목회, 감성 행정, 감성 정치 등. 오늘날 한국사회는 감성사회라 부를 만하다.
III. 21세기 한국교회 회중찬송이 지향해야 할 점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몇몇 중요한 용어를 먼저 설명할 필요가 있다. ‘회중찬송곡’(congregational song)은 공예배에서 회중 전체가 함께 부르는 모든 형태의 노래를 포함한다. ‘찬송가’(hymn)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현재 한국교회의 찬송가책에 실린 노래를 지칭하는데, 찬송가책에 수록되지 않은 모든 회중용 노래를 포함하는 큰 개념으로서 이 용어를 사용하겠다. ‘현대 예배곡’은 오늘날 대중음악 양식으로 작곡된 회중찬송곡을 일컫는다. ‘현대 예배곡’ 중의 일부가 21세기 찬송가(2006)에 포함되어서(예를 들면 38장 “예수 우리 왕이여”) 찬송가와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지만, 전통적인 찬송가와 비교되는 새로운 회중찬송곡 부류를 일컫는 말로 이 용어를 사용하겠다.
1. 공동체성
회중이 함께 찬송하는 것 자체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이 된 믿음의 공동체’라는 것을 보여 주고, 함께 찬송할 때에 회중의 마음이 하나로 모인다. 그러나 우리는 회중이 다 함께 모여 같은 노래로 찬송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 이유를 먼저 살펴보고 나서, 어떻게 그 장애물들을 뛰어넘어 공동체성을 이루어갈 수 있을지 설명하겠다.
첫 번째 장애물은 개인주의이다. 공예배는 성별, 나이, 배경, 취향, 심지어 인종과 언어가 다른 사람들까지도 함께 모여 같은 일을 하는 것이고, 그 일 중에 회중이 가장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일이 회중찬송이다. 이 일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함께 찬송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몸으로서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고, 한 형제·자매라는 의식이 꼭 필요하다. 그러나 평소 혼자 자기 세상에 빠져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 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만 듣고 부르던 이들에게는 이러한 의식이 부족하다. 그들은 왜 자기에게 친숙하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노래도 함께 불러야 하는지 그 이유를 깨닫지 못한다.
두 번째 장애물은 자기중심주의이다. 소비자가 왕이요 판단과 선택의 주인이라고 부추기며 즉각적인 만족을 보장하는 소비문화에 물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예배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소비자의 마음을 가진 자들은 회중찬송을 하나의 상품이나 서비스로 생각하여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고, 앞에서 인도하는 자나 연주하는 자를 생산자로 보고 평가한다. 옷을 사러 어느 가게에 들어갔다가 자기 마음에 드는 옷을 찾지 못하면 망설이지 않고 다른 가게로 발을 돌리는 것처럼, 그들은 회중찬송이-물론 이것 때문에만은 아니겠지만-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교회로 옮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의 만족이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함께하는 회중찬송에 장애가 되는 또 한 가지는 한국 사회의 세대 차이다. 미국의 로널드 잉글하트(Ronald F. Inglehart)가 지난 1995년에 세계 43개국을 대상으로 세대 간의 가치관 차이를 사회과학적으로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한국 사회가 가장 큰 세대 차이를 보였다.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초고속 성장에 따른 생활환경의 변화(1950년대 빈곤, 1960-1970년대 독재적 개발, 1980년대 중진국 진입, 1990년대 마이카시대), 역사적 경험(해방, 6.25, 광주 5.18, IMF)의 차이, 그리고 인터넷 사용의 차이”로 인해서 정서, 가치관, 이념, 취향 등이 세대마다 다르다. 안타깝게도, 이 세대 차이는 21세기에 들어서 더욱 커지고, 그 간격은 점점 좁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한 조사에 의하면, 청소년은 랩, 힙합이나 클래식을 더욱 즐겨 듣지만 성인은 국악이나 성인 가요를 더욱 즐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세대 간에 음악 취향이 다르고 회중찬송곡의 음악 양식이 중세음악으로부터 21세기 록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해진 오늘날에는, 여러 세대가 함께 모여 한 노래를 부르기가 쉽지 않다.
이상에서 살펴본 개인주의, 자기중심주의, 세대 차이라는 장애물이 있는 상황에서 현재 여러 교회에서 선택하는 해결책은 취향에 따라 예배를 나누는 것이다: ‘전통적인’ 예배와 ‘현대적인’ 예배(소위 ‘열린예배’). 이 두 가지 예배의 가장 큰 차이는 회중찬송에 있다. 전자는 주로 찬송가를 사용하고, 후자는 주로 현대 예배곡을 사용한다. 각각의 음악 양식에 따라 전자는 주로 오르간이나 피아노를 반주 악기로 사용하고, 후자는 주로 드럼과 전자 악기를 사용한다. 또한, 전자에 찬양대(choir)가 있다면, 후자에는 찬양팀(praise team)이 있다.
그러나 예배를 음악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은 예배를 상품화하는 것이고 예배 참석자들을 소비자로 보는 것이다. 마르바 던이 지적했듯이, “사람들이 각자 선호하는 음악 스타일에 따라 [예배를] 구매하도록 만든다면 그들이 [소비주의] 심리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훨씬 적어진다.” 소비주의 심리에서 벗어나도록 교회가 힘쓰지 않으면 예배 참석자들로 하여금 예배의 중심이 하나님이시며, 자기의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어렵다. 또한, 그들에게 형제사랑, 이해와 포용, 자기희생, 상호복종이라는 성경의 중요한 덕목들을 가르치기 어렵다.
예배를 음악 취향에 따라 둘로 나누는 것은 교회 공동체에도 해롭다. 그러한 교회는 한 교회 이름 아래 한 건물을 사용할 뿐이지, 사실은 두 개의 교회나 마찬가지이다. 같은 건물에 여러 개의 영화관이 있는 복합영화관과 유사하다. 이들은 함께 모여 찬송하기가 시간이 지날수록 어려워진다. 함께 부를 노래가 없기 때문이다. 젊은 층이 나이가 들어도 장년 예배에 흡수되기 어려울 것이다. 교회의 미래를 생각하면 이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이다.
성경은 예배를 취향의 문제로 여기지 않는다. 음악 취향에 따라 예배를 나누는 모습은 구약의 성전예배에서나 신약의 초대교회 예배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천국에서는 어떤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계 7:9, 표준새번역) 성도들이 함께 찬송할 것이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연합의 모습이다. 그 모습을 보기만 해도 감동할 것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같은 한국인끼리도 함께 찬송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천국에서의 찬송에 동참할 수 있을까?
음악 양식을 둘러싼 세대 간의 갈등에 대해 워렌 위어스비(Warren W. Wiersbe)는 충고한다: “나이 든 세대와 젊은 세대가 모두 겸손히 주님께 순종하며 서로에게 배우겠다는 자세를 가져야만 [분열과 혼란을] 해결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로 만드신 것을 둘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 서로 이해하고 받아줌으로써 뜻을 같이하여“한 마음과 한 입으로” 찬송해야 한다(롬 15:5-7). 예수께서는 우리가 하나 되기를 위해 마지막까지 기도하셨다(요 17).
우리는 교회를 친목단체가 아닌 가족 공동체로 이해해야 한다. 바람직한 가족은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해심과 인내심을 갖고 서로를 끌어안고, 서로에게 자기를 맞추며 하나 됨을 지킨다. 가정의 밥상을 생각해 보자. 서로 입맛이 다르다고 해서 밥상을 따로 차려 먹는다면 그것이 바람직한 가정의 모습이겠는가? 내가 평소 좋아하지 않던 반찬이나 처음 보는 반찬이 차려졌더라도, 건강을 위해서 정성스레 만들어진 것이니 감사함으로 맛있게 먹는 것이 옳다. 그러나 가족 중의 어떤 이가 어느 반찬을 잘 못 먹는다고 해서, 왜 이런 음식도 못 먹느냐고 비판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된다(롬 14:3).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돼지고기나 복숭아를 가족 중의 누구가 전혀 못 먹는다고 비판할 일인가? 그리고 밥상을 차리는 이는 어느 한 사람의 입맛에 잘 맞는 음식만을 차리지 말고 모든 사람의 입맛을 고려해야 하고, 모두가 잘 먹는 음식을 찾거나 개발해야 한다.
이 밥상의 비유를 회중찬송에 적용하여 생각해 보자. 우선, 내가 평소 좋아하지 않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노래가 있더라도 그것이 교회 공동체의 다른 이에게 의미가 있고 도움이 된다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젊은 세대는 나이 든 세대의 음악이 어렵고 구시대적이라는 선입관을 버리고 좋은 찬송가를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하고, 나이 든 세대 또한 젊은 세대의 음악이 어렵고 시끄럽고 가볍다는 선입관을 버리고 좋은 현대 예배곡을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몇 년 전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는 오늘날 십대와 어른들 사이에 점점 심해져 가는 언어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어른들은 십대들의 말을 배우고 십대들은 어른들의 말을 배우자는 운동을 펼친 적이 있다. 그래서 출연자들이 어느 주에는 십대들의 말을 배우고, 다른 주에는 어른들의 말을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교회의 공동체성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회중찬송에 있어서도 이러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면 각자의 음향 취향도 점점 넓어질 것이다. 또한, 누가 어떤 노래를 들어본 적도 없고, 잘 따라하지 못하고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비판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을 이해하고 격려해 주어야 한다.
회중찬송곡을 선정하고 인도하는 이는 회중을 섬기는 목회자의 마음을 갖고서 회중의 형편과 전통을 잘 파악한 후, 회중 모두가 한입으로 찬송할 수 있는 곡, 공동체의 연합에 도움이 되는 곡을 골라야 한다. 젊은 세대는 다 찬송가를 싫어하고 나이 든 세대는 현대 예배곡을 다 싫어할 것이라는 선입관을 버리고, 모든 세대가 좋아할 만한 찬송가와 현대 예배곡을 개발하고 그것들을 레퍼토리로 쌓아가야 한다. 이러한 노력과 더불어 가장 중요하고 꼭 필요한 것이 교육이다. 서로 음악 취향이 다르고 정서가 다른데도 왜 함께 예배해야 하는지, 내가 좋아하지 않는 곡도 왜 공동체를 위해서 불러야 하는지, 예배와 찬송의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 회중을 교육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은 힘이 들고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교회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서 지금부터라도 시도해야 할 가치 있는 일이다.
2. 다양성
공동체성과 연결된 것이 다양성이다. 공동체가 하나 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회중찬송곡을 불러야 한다는 점을 앞에서 설명하였다. 회중찬송에 있어 다양성을 추구해야 하는 다른 이유들을 설명하기 전에, 그것에 장애가 되는 현대문화의 영향과 교회의 잘못된 결정을 살펴보겠다.
첫 번째 장애물은 앞 장에서 설명한 새것주의이다. 현대 소비문화에 물든 사람들은 현재 가진 것에 대해 불만족을 느끼도록 학습 받고,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만족을 위해서나 다른 사람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계속 새것을 찾는다. 이러한 경향은 대중가요시장에도 잘 드러난다. 몇 달 전만 해도 엄청난 인기를 끌던 노래가 지금은 대중으로부터 잊히고 새로운 노래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대중가요처럼 그렇게 수명이 짧지는 않지만, 현대 예배곡도 이러한 속성을 띤다. 몇 년 전에 한국교회를 휩쓸었다고 할 정도로 사랑받던 노래가 요즘은 잘 불리지 않는다. 말 그대로, 불꽃처럼 살다가 사라진다. 새것주의자들은 음반이나 집회 등을 통해 새 노래를 공급받고 나서 그것을 배우고 보급하는 일에 열심을 낸다. 이런 이들에게 찬송가는 아주 옛날 것이다. 대부분 백 년 넘은 곡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찬송가가 자기한테 맞지 않다고 생각하여 쉽게 버린다.
두 번째 장애물은 개인의 편향된 생각이다. 즉, 어느 특정 부류의 회중찬송곡만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개인의 취향이나 소신으로 말미암아 굳어진 이 편향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어떤 이는 성경에서 “새 노래로 찬양하라.”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최근의 노래만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옛날의 찬송가를 부르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새 노래를 주시는 성령님의 역사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역설하는 찬송 인도자도 있다. 어떤 이는 찬송가가 아니면 부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듣지도 않는다. 이처럼 편향된 생각을 가진 이들이(특히 목회자나 중직자나 찬송 인도자가) 교회에 있을 때, 그 교회의 회중찬송곡은 다양해지기 어렵다.
세 번째 장애물은 특정 양식의 회중찬송곡만 사용하기로 교회 차원에서 결정해 버리는 것이다. 찬송가만 부르는 교회들도 많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현대 예배곡만 부르는, 소위 ‘열린예배’를 시도하는 교회들에 대해 살펴보겠다. 윌로우크릭 교회와 함께 한국의 이러한 교회들에 큰 영향을 미친 교회가 바로 새들백교회이다. 20세기를 변화시킨 최우수 신앙 도서로 선정된 그의 책 목적이 이끄는 교회(The Purpose-Driven Church)에서 새들백교회의 릭 워렌(Rick Warren)은 자기 교회가 왜 찬송가를 부르지 않기로 전략적 결정을 내렸는지 설명한다. 그는 모든 이들의 음악 취향에 맞추기 위해 다양한 음악을 사용했던 초창기의 시도가 실패였다고 판단하고, 교인들이 원하는 회중찬송곡에 대한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고 한다. 그 결과에 따라 교인들의 취향에 맞는 음악을 사용했더니 일 년도 안 되어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고 기록한다. 이러한 철학과 전략은 결과적으로 대성공이었을지언정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사람을 끌기 위한 수단으로 예배와 음악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비신자를 전도하려는 열정은 좋지만, 하나님의 기쁨이 목적이며 음악을 선택할 때에도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최우선 관심 대상이어야 한다는 예배의 본질을 훼손시켰다. 둘째, 특정 음악 양식이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끌 것이라는 잘못된 신념 때문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음악을 우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셋째, 다양성의 하나님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이런 교회들은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입맛을 조사하여 그 입맛에 맞는 회중찬송곡을 고르지만, 정작 찬양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은 입맛이 아주 다양하시다!”
다양성의 하나님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 바로 창조 세계이다. 하나님께서는 고래와 코끼리처럼 큰 동물뿐만 아니라 멸치와 딱정벌레처럼 작은 동물도 만드셨다. 딱정벌레만 해도 그 종류가 삼십오만 종이 넘는다. 이 세계를 다양하게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따라 우리의 회중찬송곡도 다양성을 추구해야 한다. 오순절에 기도하던 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여러 방언으로 말한 사건의 상징적 의미는, 하나님께서 “세계의 수많은 언어로 된 음악을 듣기 원하시며 놀라우리만큼 다양한 음악으로 찬양에 찬양을 거듭하는 음악을 듣기 원하신다.”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하의 음악뿐만 아니라 아마존 원주민의 단순한 음악도 기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에베소서 5장 19절과 골로새서 3장 16절에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라고 권면하신다. 이 구절에 대한 학자들 간의 일치된 해석은 없지만, “시”는 시편을 비롯한 구약의 찬송시를 말하고, “찬송”은 초대교회 당시에 새로 만들어진, 주로 그리스도와 관련된 찬송시를 일컫고, “신령한 노래”는 성령에 충만하여서 즉흥적으로 흘러나오는, 자유롭고 장식적인 기쁜 정서의 노래를 뜻한다고 필자는 해석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다양한 형태의 노래들이 실제로 초대교회 당시에 불렸다는 것이고, 다양한 회중찬송곡의 사용을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다는 것이다. 신약시대 교회는 수백 년, 수천 년 전의 시편을 버리지 않았다. 여전히 그 옛 노래들을 사용하면서 자기 시대에 새로 만들어진 노래들을 추가해 갔다. 이것이 성경의 교훈이다.
우리에게는 지난 이천 년간 축적된 회중찬송곡의 보물이 있다. 게다가 지금도 계속 새것들이 추가되고 있다. 이 풍성하고 귀중한 보물이 우리에게 유산으로 전해진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다. 새 보물이 좋다고 옛 보물을 송두리째 버리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행동이다. 이와 반대로, 옛 보물만으로 만족하여 새 보물을 포기하는 것도 현명하지 못한 행동이다. 분별력을 갖고 “새것과 옛것을”(마 13:52) 그 보물창고에서 꺼내 회중과 함께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 시대와 지역과 음악 양식에 있어서도 다양성을 추구해야 한다. 다양한 회중찬송곡을 부르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을 선정하는 이가 특정 음악의 형식에 집착하지 않고, 예배 순서에 적합하면서도 탁월한 음악을 찾으려는 자세와 그런 음악을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이 점에 대해 토마스 롱은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많은 교회들은 교회음악을 하나의 스펙트럼으로 여깁니다. 한쪽 끝은 교회 음악이고, 다른 쪽 끝은 팝 음악입니다. 이쪽 끝은 바하의 고전이고, 다른 쪽 끝은 록 음악입니다. 그들은 이 스펙트럼 위에 세로로 선을 긋고는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는 음악입니다. 이것들이 바로 우리 교회가 수용할 수 있는 찬송입니다.” 그러나 창조적인 교회는 세로로 선을 긋지 않고, 가로로 된 선을 긋습니다. 선의 위쪽은 훌륭한 것이고, 선의 아래쪽은 하찮은 것입니다. 훌륭한 전통 찬송곡이 있고, 하찮은 전통 찬송곡이 있습니다. 훌륭한 록 찬양 음악이 있고, 하찮은 록 찬양 음악이 있습니다. 교회가 물어야 하는 것은 “어느 주어진 시점의 예배 순서에 있어 무엇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음악 형태인가?”입니다. 교회가 정직하게 이 질문을 던진다면, 시간이 지난 후 그 결과는 폭넓은 음악 장르의 포용과 다양한 악기와 연주방법이 될 것입니다.
3. 감성과 이성의 균형
감성의 만족을 중시하는 현대문화의 영향을 받아, 요즘에는 이성에 호소하기보다 감성에 호소하는 광고 기법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경향이 회중찬송에도 나타난다. 제가 섬겼던 어느 교회의 찬양팀원들에게 “하나님을 찬송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질문했더니, 다섯 명 중의 네 명이 자기 감성과 관련된 대답을 했다: “찬송할 때 마음이 평안해지기 때문에,” “찬송할 때 은혜를 가장 많이 받고 하나님을 가까이 느끼기 때문에” 등등. 그러나 찬송의 이유는 하나님의 성품과 행위 때문이다. 하나님이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기 때문에 우리는 찬송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찬송을 명령하시기 때문에라도 우리는 찬송해야 한다.
회중찬송의 초점이 자기 감성에 맞춰지면, 감성의 만족, 다른 말로 하면, ‘감동’이 회중찬송의 목적이 될 수 있다. 감동이 있으면 참된 찬송이요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한 것이고, 감동이 없으면 그렇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감동을 참된 찬송과 하나님의 임재의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다. 감동이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임재하신다. 감동이 없어도 찬송해야 한다. 반면에, 감동이 있다고 반드시 참된 찬송인 것은 아니다. 감동을 목적으로 삼는 이는 감성을 자극하는 곡을 선호하기 때문에, 전통적인 찬송가처럼 지성적인 곡을 좋아하지 않는다. 가사에 있어서도,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 객관적인 내용보다는 주관적이고 체험적인 내용을 선호하기 때문에 감상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기쁘고 빠른 노래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한 예로, 필자가 섬겼던 교회에 온 어느 부흥 강사는 찬송가책에서 느린 노래를 다 빼야 한다고 주장하며, 빠른 노래를 선호하고 느린 노래도 빠르게 불렀다. 심지어, 장송곡과 같은 찬송가를 부르는 교회는 빨리 죽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이도 있다. 이들은 모두 기쁘고 빠른 노래와 참된 찬송을 혼동하고 있다. 예배에서는 조용한 노래, 느린 노래, 슬픈 노래도 필요하다.
모든 교회와 목회자는 감동이 있는 회중찬송을 바랄 것이다. 그런데, 회중의 감동을 강조하고 그것을 목적으로 삼으면 회중찬송의 본질을 망각할 수 있다. 다음은 통합측 장로교단이 발행한 문서의 일부분이다:
삶에 지치고 고통으로 찌들린 성도들이 예배시간에 활력적인 찬양을 통해 새로운 삶의 용기를 얻고 일주일 내내 쌓였던 스트레스를 풀어내고 하나님의 임재를 감동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찬송가가 많이 작곡되어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회중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회중찬송의 목적도 아니고, 음악에는 회중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험하게 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지도 않다. 회중찬송에서 하나님 없이 음악 자체로 말미암아 감동하는 것과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해럴드 베스트(Harold M. Best)의 말처럼, “음악으로부터 오는 감동이 하나님을 향한 이전의[저자의 강조] 정열과 연결될 때 우리는 진실로 감동하게 된다.” 오르가니스트를 포함한 회중찬송 인도자는 인위적인 조작 기법을 이용해 회중으로 하여금 감동을 경험하게 하려고 하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음악을 잘 알고 경험이 많은 자는 회중의 감성을 고조시키는 방법을 안다. 전자 음향을 크게 하거나, 점점 빠르게 부르거나, 일부분을 계속 반복해 부르거나, 마지막 부분에서 상투적으로 조를 올려서 부르는 것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면 감동 없이 찬송해야 하는가? 감동을 죄악시하거나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자제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참된 찬송은 우리의 감성도 동반한다. 다만, 감성에 치우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감성의 만족을 찬송의 목적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찬송의 대상과 목적은 하나님이어야 한다. 나의 느낌보다는 하나님의 성품과 행위를 노래해야 한다. 그리고 감성과 이성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바울은 말한다: “나는 심령으로 찬미의 노래를 부르는 동시에 이성으로도 찬미의 노래를 부르겠습니다”(고전 14:15, 공동번역). 보다 지성적이고 하나님 중심의 객관적 내용을 주제로 하는 전통적인 찬송가가 이러한 이유 때문에라도 필요하다.
IV. 요약과 결론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회중찬송도 문화의 영향을 받는다. 교회 또한 세상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중찬송에 영향을 미치는 문화의 특징을 파악하고, 회중찬송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한국교회 회중찬송에 영향을 미치는 21세기 한국문화의 특징으로 크게 세 가지를 살펴보았다. 첫 번째 것이 개인주의이다. 예전보다 함께 모일 기회와 시간이 줄어들었고, 미디어의 발달과 인터넷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각자 따로따로 자기의 세계에 빠지는 경향이 심해졌다. 두 번째 특징은 소비주의이다. 자기가 모든 선택의 주체가 되고 자기 만족과 자기 필요의 충족을 목적으로 하는 자기중심주의, 현재의 것에 불만족을 느끼며 결코 채워지지 않을 만족감을 좇아 계속 새것을 추구하는 새것주의, 모든 것을 취향의 문제로 여기는 것이 소비주의의 모습이다. 세 번째 특징은 감성주의이다. 합리적인 이성보다는 감성을 중시하여 결정하며 감성의 만족을 추구한다.
21세기 한국문화의 특징을 살펴본 후에, 이러한 문화가 회중찬송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고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살펴보았다. 지향해야 할 첫 번째 것이 공동체성이다. 개인주의, 자기중심주의, 그리고 극심한 세대 차이로 말미암아 교회 공동체가 함께 찬송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졌지만, 형제사랑, 이해와 포용, 자기희생, 상호복종의 마음으로 하나 됨을 지켜야 한다. 두 번째는 다양성이다. 새것주의, 개인과 교회 전체의 편향된 생각에서 벗어나 다양성의 하나님을 따라 우리의 회중찬송곡도 시대, 지역, 음악 양식 면에서 다양해져야 한다. 세 번째는 감성과 이성의 균형이다. 회중찬송에서도 초점이 자기 감성에 맞춰져 감성의 만족을 목적으로 삼는 경향이 있음을 주의하고 감성과 이성의 균형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예배에서 회중찬송이 중요하듯이 그 담당자도 중요하다. 고귀한 시간 ‘낭비’에서 마르바 던은 예배를 계획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이가 부족한 것에 대해 슬퍼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듣는 법을 배우고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교회의 예배를 연구하며, 새로운 음악과 양식을 탐구하며, 성경 본문을 깊이 공부하며, 신학적으로 생각하며, 더 나은 질문을 던지며, 리더로 사람들과 충분한 대화를 나누는 것 등은 예배 계획을 잘 세우기 위해 반드시 노력해야 하는 부분이다.
회중찬송을 계획하는 이에게도 이러한 노력이 필요하다. 회중찬송에도 전문가가 필요하다. 준비가 안 된 부교역자나 청년에게 맡길 일이 아니다. 회중찬송의 활성화를 위해 한국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새로운 노래나 악기가 아니다.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회중찬송을 계획하고 인도하는 “자신의 일을 거룩하고 목회자적인 소명으로 취급하는 분별력 있고, 기도로 충만하고, 기쁨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이들이 한국교회에 많이 나타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