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파 이하응의 난초그림
완당이 귀양에서 풀려난 것을 누구 못지 않게 좋아한 이는 석파 이하응이었다. 그는 완당의 강상시절에 난보를 얻어 막 난초 그림에 취미를 붙이고 있었다. 그런지 얼마 안 되어 완당이 북청에 유배되니 이 난초 그림 교습은 중단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석파는 난초그림을 열심히 연마하여 완당이 어서 풀려나 난초 그림을 지도해 주길 바랐다.
완당은 석파가 난초 그림에 더욱 열중하여 대성하기를 바랐다. 완당은 석파에게 부지런히 난을 치라고 이렇게 편지한 것이 있다.
수일 이래로 천기가 비로소 아름다우니, 정히 이때가 난을 칠 만한 기후입니다. 붓을 몇 자루나 소모하셨는지, 바람결에 우러러 생각합니다.. 갖추지 못합니다.
석파의 난초 그림이 완당을 얼마나 본받았는가는 난맹첩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완당이 이상적에게 그려준 묵란과 훗날 석파가 그린 묵란을 비교해보면 이 대담한 구도의 난초 그림들에서 서로 통하는기를 느낄 수 있다. 석파는 어느날 자신이 그린 난초 그림을 완당에게 보내 품평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완당은 석파의 멋진 난초 그림을 보고는 감격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보여주신 난폭에 대해서는 이 노부 도 의당 손을 오므려야 하겠습니다. 압록각 동쪽에는 이만한 작품이 없습니다. 이는 내가 좋아하는 이의 면전에서 아첨하는 말이 아닙니다.
완당과 석파의 교류는 완당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고, 완당의 가르침은 난초뿐만 아니라 글씨에까지 미치게 되니 석파는 완당 서파의 빼놓을 수 없는 후계자라 할 수 있다.
김정희 노안당 현판
운현궁 사랑채에 걸려 있는 현판으로, 완당이 석파를 위해 써주었다고 씌어 있다.
완당 노년의 명작 가운데 하나다.
저는 초목 같은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이 어느덧 70세가 되어 맵고 쓴 고통이 갈수록 지리하기만 한데.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아도 추하게 느껴지니, 남들이 나를 보면서 반드시 구역질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토록 후한 대접을 받으니, 그늘진 산골짜기에 따뜻함이 이른 것 같습니다. 이렇게 황량하고 춥고 적막한 곳의 누추한 집에 그 누가 말 한마디나마 전해주겠습니까.
예서가 아주 좋아서 의당 난그림과 쌍미를 이루어 지붕 머리에 무지개를 꿰는 기이한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다.
이리하여 석파는 완당에게 난을 배워 일가를 이루었고 또 예서에서도 대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