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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읽었던 이방인은 가짜다!”
한 인터넷 게시판에서 <이방인, 알베르 카뮈> 오역 논란을 접한 것은 3주 전이었다. 얼굴 없는 번역가가 불문학의 대부 김화영 선생을 겨냥한 오역 시비가 이번 논란의 주 내용. 이정서라는 필명의 번역자가 주장하는 바는 심플하다. 지금껏 우리 문학계, 특히 번역계에 지붕 같은 노스승이 번역한 ‘이방인’의 번역은 오역투성이이며 그의 권위로 인해 그 사실이 한번도 수면위로 떠오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카뮈가 탄생시킨 ‘뫼르소’가 아닌 김화영이 만들어낸 ‘뫼르소’를 진짜라 믿으며 읽어왔다는 것.
한때 장 그르니에 <섬>을 읽으며 불문학의 매력에 빠졌던 나로서는 김화영 선생과 관련된 이번 기사를 당황스럽고도 흥미로운, 두 대립되는 감정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비록 불어나 영어 실력이 일천해 그 시비에 뛰어들지는 못하지만 문학 생산자 못지않게 중요한, 아니 어쩌면 더욱 중요한 문학 소비자로서의 권리와 목소리를 다듬어보고 싶었다.
먼저 이 사태를 접하며 맨 처음 들었던 감정은 ‘반가움’이었다. <이방인>을 다섯 번 이상 읽어온 독자로서 언제나 명쾌하게 잡히지 않는 ‘뫼르소’에 대한 이해가 어쩌면 나의 섬세하지 못한 문학적 감수성과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일종의 기대와 위안이랄까.
역자 이정서에 의하면 <이방인>의 뫼르소가 그렇게 여러운 인물도 복잡한 인물도 아니라고 단정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얇은 작품을 지루하고 재미없는 작품으로 오해하는 이유를 정확하지 않은 번역 탓이라 주장하는데, 그의 말대로 새로운 이방인, 뫼르소를 만나게 된다면 작품이 가지는 무거움과 어려움은 해결되는 것일까 궁금하다. 아닌게 아니라 내게도 이 작품에는 꼭 한번 속시원히 풀어보고 싶은 모호한 장면, 난해한 부분들이 있는데.
첫째, 뫼르소의 성격에 대한 것. 1부의 뫼르소를 읽어보면 감정적 영역에서 굉장히 건조한 인물이다.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의 태도나 주변인물들과의 만남들을 지켜보아도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인물임에 분명하다. 회사에서의 승진이나 사랑, 우정을 대하는 그를 보면 그가 과연 감정적 정서적 가치판단 기준이 있는 사람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언제나 지금 여기, 벌어지는 상황들에 대해 그때그때 반응할 뿐이다. 그런 그가 여섯 달 동안의 재판과 감옥생활을 통해 그 누구보다 뜨거운 인물로 변한다. 낯선 뫼르소의 모습을 보며 어디에 그처럼 완고한 고집과 신념이 숨어있었는지 당황하게 되는 것이다. 1부의 냉소적이기조차 한 뫼르소가 2부의 어떤 타협에도 꺾이지 않는 뜨거운 뫼르소로 변하게 되는 원인은 무엇일까. 여러 주장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내게는 여전히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둘째, 이 작품의 트래이드마크인 한 문장, ‘태양 때문에 죽였어요!’. 이 대목은 작품 내에서도 우발적 살인이야 의되된 살인이냐를 놓고 공방을 벌일만치 논란의 중심에 선 대목이다. 사실 이 부분이야말로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며 동시에 아주 꼼꼼하게 다시 읽기를 반복하게 하던 장면이다. 하지만 아무리 읽어도 그 대목은 여전히 간단하게 언급되어 있을 뿐 그 어디에도 뫼르소가 저지른 아랍인 살해행위를 이해할만한 단서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니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뫼르소가 어떤 심정으로 살인을 저지르게 됐는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독자인 나로서는 그의 행위를 우발적 살인으로 보지만 자신의 살인행위와 대면하는 2부의 뫼르소를 보면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태양 때문에 죽였다는 그의 주장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사실 2부의 재판 과정을 통틀어 피해자 아랍인에 대한 사연도, 자신의 살인행위에 대한 뫼르소의 생각이나 감정도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오로지 재판과정, 소란스럽고 엄숙한 체하며 진행되는 재판과정의 지난한 상황만 있을 뿐이다. 뫼르소가 자신의 죄과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지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우발적 살인이야, 의도한 살인이냐를 따지는 것은 주인공 없는 드라마를 보는 것이나 같다. 여기서 세 번째 의문이 끼어든다. 죽음에 대한 뫼르소의 입장 좀더 확장해 카뮈의 입장은 무엇일까. 이 질문이 세 번째 의구심이다.
이 작품에서 무엇보다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죽음>이라는 키워드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시작해 타인(아랍인)의 죽음, 나아가 자신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과정 속에서 과연 뫼르소는 타인들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궁금해 진다.
뫼르소 자신의 죽음에 대한 열망은 카뮈의 저서 <시지프스 신화>의 첫 줄로 설명될 수 있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시지프 신화 中
뫼르소는 자신의 생에 끼어든 죽음,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며 처음으로 죽음, 즉 삶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참으로 오랜만에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는 왜 인생이 다 끝나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가졌는지, 왜 생을 다시 시작하는 놀음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도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결국 카뮈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생의 허무가 아닌 생의 열정이 아닐까 잠정적 결론을 지었다. (이 작품은 내 평생을 걸쳐 계속해 다시읽기를 시도할 것이며 그 때마다 조금씩 그 결론이 달라질 것이기에.) 결국 우리는 치열하게 살아내는 것만큼이나 치열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 이 둘 중의 선택 사이에 놓여있을 뿐, 삶과 죽음을 영원히 소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내세를 위해 신에 복무하는 것도, 이미 진행된 죽음을 애도하는 것도 나아가 알 수 없는 미래를 대비하며 사는 것 모두가 죽음에 매달려 진짜 생에 집중해 살아가지 못하는 태도다.
이 사실을 뫼르소는 좁은 감옥에 갖혀서야 발견하게 되었고 자신과 타인의 다름을 인지하게 된다. 처음으로 자신과 타인을 낯선 눈으로 회고함으로써 삶과 죽음에 관한 어떤 진실에 눈뜨게 된다. 삶에 의미, 진실 따윈 없다는, 우리는 누구나가 죽음이라는 실에 매달린 인형일 뿐, 그 사실로부터 한치도 벗어날 수 없다는 그 진실. 그 결과로 그는 삶에 대한 자신의 운용권, 결정권, 삶의 기회를 남김없이 사용할 수 있는 소진권을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는데 사용하기에 이른다.
“부조리의 인간은 자신이 지금까지 자유롭다는 가정에 얽매인 채 그 환상을 먹으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이 그에게는 속박이었던 것이다. 자기 인생에 어떤 목표를 상정함으로써 그는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의 요청에 순응했고 그리하여 스스로 자유의 노예가 되었다” - 시지프 신화 中
하지만 어리석은 독자의 의문은 쉬이 풀리지 않는다. 그러면 아랍인, 타인의 죽음은? 자발적 죽음이 아닌 타인에 의한 원치 않는 죽음에 대해 뫼르소는, 카뮈는 어찌 생각하는가. 어차피 죽을 목숨, 어떤 계기로 죽든 상관없다는 것인가? 작품 속 아랍인의 죽음에 대한 의미는 그 어디에서도 설명하지 않는다. 카뮈 식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삶에 ‘의미’란 게 무어 있겠냐마는 그나마 우리가 가진 생에 대한 결정권을 채 사용하지도 못하고 죽임을 당하는 그런 수많은 죽음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방인>에서 그리고 있는 재판과정은 분명 한 생명의 죽음에 대한 애도와 그로 인한 부당함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 아닌 것은 명백하다.
사실 타인에 의한 죽음은 사회적 체제나 구조적 문제, 정치학적 죽음과 연결되기 마련이다. 카뮈 역시 알제리 식민지 상황 하에서 인간대접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던 당시 아랍인들에 대한 인권의식이 희박했던 것일까? 사회적 현상보다 개인에게로 향해 있는 카뮈의 철학적 관심사의 한계일까.
이런 세 가지 의문이 모두 번역의 문제일까. 이정서라는 필명의 번역자의 말대로 나는 지금껏 분명하지 못한 뫼르소를 만나왔기에 이런 혼돈과 혼란의 와중을 헤맸던가. 만약 사실이 그렇다면 나는 이정서의 새로운 <이방인>을 팔 벌려 환영할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은 대중적 작품을 앞에 두고 쩔쩔 매는 내 모습에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거니와 작품을 읽어도 풀리지 않았던 모호함에 대한 핑계거리를 찾은 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입맛에 맞다고 무조건 새로운 번역본을 환영하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다. 이미 '오역이다'는 시비로 시작한 논란이기에 논란의 주장대로라면 어느 한편은 '잘못된 번역'일텐데 독자인 입장에서는 그 진위를 판단하기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독자인 내가 직접 프랑스 원전을 살펴볼 실력이 안된다면 또다시 이정서의 번역이 맞는지에 대한 누군가의 감수가 필요할 텐데 그것은 또 누가 검증할까. 결국 이러한 논란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독자의 불신만을 양산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김화영 선생 번역의 신성불가침을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이정서가 익히 말했다시피 김화영 선생은 분명 권위 있는 번역자요 영향력 있는 불문학자다. 설령 그 어떤 번역상의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그가 가진 명성과 학자적 이력에 감히 도전할 사람이 있겠냐는 문제제기 또한 충분하게 수긍한다. 번역과 관련된 학계의 어처구니 없는 노동력 착취와 가로채기 등을 나역시 들어보지 못한 것이 아니다. 전문적 소양도 자격도 없는 이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성의없는 번역, 직업윤리 따위는 개나 줘버린 번역, 제자의 번역을 가로채 자기것이라 버젖이 이름 올리는 행태 등. 분명 폐쇄적인 도제식 학계가 만들어낸 웃지 못할 사연들이 번역서를 사이에 두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게 현실임을 감안할 때, 이정서의 용기는 한편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이번 이정서가 제기한 주장이 바로 앞에서 말한 '도제식 학계 관행'과 얼마나 연관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이번 시비가 김화영 이름 세 글자와 상관없이 같은 작품을 두고 한 번역자가 기존의 번역자를 공격하는 형국이고 보니, 오역을 주장하는 근거가 객관적인지에 대해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원작에 두 버전이라. 번역문학도 문학일진대 어디까지가 잘못된 번역이고 어디까지가 표현상 허용가능한 번역인지 그 '객관적' 기준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결국 원작의 의미와 메시지을 얼마나 충실하게 담았느냐의 문제일텐데, 자신이 번역한 작품이 기존 작품보다 더 낫다며 스스로 공표하고 나서니 어딘가 아구가 맞지 않는다.
국내에도 2011년 <이인>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연세대 불문학과 이기언 교수의 이방인이 존재한다. 그 역시 오랫동안 카뮈를 연구해 온 불문학자이지만 지금의 오역논란처럼 힘주어 기존 작품을 비방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정서의 주장대로 이기언 교수 역시 김화영의 권위에 눌렸기 때문일까.
번역이란 것이 번역자 스스로의 직업적 양심과 윤리에 따라 최선을 다해 번역하고 근거를 설명할 수 있다면 그 소임을 다했다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즉 이번 논란인 '잘못된 번역'이라는 틀 자체에 애초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번 논란으로 인해 기존에 있어온 명백히 '잘못된 번역'들과 해석의 미묘한 차이에 의한 '다른 번역'의 문제가 한꺼번에 같은 얼굴-잘못 되었다, 틀렸다-로 다가옴으로써 더 큰 혼란을 주는 느낌이다. '대한민국 대표 번역가의 잘못된 번역'이란 프레임에 빠져들고 보니, 다른 번역서들에 대한 불신까지 덩달아 가중시키고 있는 느낌이다.
사실 이번 논란의 정확한 명칭은 <오역이냐 이역이냐> 즉 '잘못된 번역'이냐 '다른 번역'이냐 쯤이 아닐까. 번역이 서로 다르다면 어떤 근거로 인해서인지 해명하고 독자의 판단에 맡기면 될 텐데, '잘못된 번역'이라는 프레임 때문에 독자는 기존 번역서 마저 의심하게 되고 자꾸만 검증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독서토론 강사로서 지금껏 많은 사람들에게 ‘끌리는 대로’ 읽기를 권해 왔다. 세간의 평이 어떻든, 작품성이 어떻든 일단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내 마음이 만나는 이야기를 느끼라고 강조해 왔다. 내 식대로 말하자면 김화영의 뫼르소든, 이정서의 뫼르소든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내가 만난 내 뫼르소가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문학계에 불고 있는 <이방인> 사태가 '다른 번역'이 아닌 진정 '잘못된 번역'의 문제라면 이런 독자중심주의 읽기로 잠재워질 성질의 것일까.
독자가 스스로 문학을 해석하고 평가할 때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번역을 요구할 권리가 있고 완성도 있는 번역서를 읽을 권리가 있고 자부해 왔다. 그런데 이번 번역논란을 바라보며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심정이다. 원전의 문장들을 놓고 시비가 붙다보니 무엇이 잘못인지 끼어들 자리도 없거니와, 독자는 이국의 언어를 해독할 지적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였다는 사실 앞에서 새삼 한없이 초라하게 움츠러드는 것이다.
지금껏 고급독자를 자처하며 문학을 내 방식대로 능동적으로 읽고 해석하며 삶의 철학을 키워왔다 자부했는데 어쩌면 그 기본부터가 오역으로 얼룩졌을지도 모른다는 황당함과 불쾌함. 그러고 보니, 독자인 내 입장에서 이번 사태를 통해 얻은 것은 원서를 척척 읽어내지도, 논란이 불거지는 시비에 한자리 끼지도 못하는 지적 열등생의 위치확인과 세상 모든 번역서에 대한 의구심 딱 두 가지다.
이쯤되면 오히려 이정서라는 신예번역가가 원망스러운 심정이다. 시비를 정확히 가릴 수 없는 사안에 간판급 스타를 겨냥해 이슈를 만들어내고 결국 독자들에게 선택하라는 셈인데, 독자 입장에서 과연 합당한 선택이란 게 있을 수 있을지. 차라리 처음부터 나의 이방인은 김화영의 이방인과 이런 점에서 다르게 해석했고 그 이유는 무엇이다라는 '다른 번역'의 문제로 넘어갔다면 독자 역시 충분히 자신의 관점에 따라 작품의 다름을 음미할 수 있었을 터인데, '잘못된 번역'이라는 논란으로 포문을 열다보니 독자의 소외감과 열패감만을 키운 듯하다. '다른 번역'이 아닌 '잘못된 번역'이라는 프레임이 의도된 것인지 표현상의 차이인지, 판을 벌인 이정서의 의도가 진짜 뫼르소를 독자에게 소개하기 위해서인지 알 수가 없다.
누구의 이방인이 카뮈의 이방인인지 가늠할 수 없는 상태에서 또다른 숨겨진 의도는 없는지. 이 논란이 이쯤에서 유야무야 가라앉는다면 번역서 불신이라는 지금의 내 트라우마는 누가 책임질 것인지. 책을 팔아먹기 위한, 노골적인 비방을 수단으로 한 노이즈마케팅이라 자위한다해도 번역문학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성실과 책임, 신뢰의 암묵적 약속을 강하게 흔들어놓은 이번 논란에서 내가 받은 충격과 의심은 쉬 가지 않을 듯하다.
차라리 이번 논란이 기성 번역가의 번역에 대한 성찰과 반성으로 시작된 이슈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지워지지 않는 지금 내 머릿속에는 <잔혹한 책읽기, 강대진 글, 작은이야기, 2004 펴냄>라는 한권의 책이 떠오른다.
서양 고전과 신화에 관한 오역과 오류를 지적하는 비평집으로 우리말로 번역된 책들에서 서양고전과 신화에 대한 언급들이 제대로 옮겨져 있는지 알아보고 그 결과를 살펴본 이 책은 이러한 작업을 통해 번역의 올바른 지침을 제안하고, 서양고전과 신화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한다.(출판사 소개)
책의 제목에 혹해 얼마나 잔혹하게 읽는지 눈으로 확인해 보고자 사들인 책인데, 오역 비평에 관한 책이었다. 내용 자체가 워낙 여러 번역서들을 다루고 있어 읽어보지 못한 책들이 꽤 되고 또한 지엽적인 문장들을 다루고 있어 완독을 하지는 못했지만 저자의 열정과 진정성에 책값이 아깝지 않은 책이었다. 저자 강대진은 책을 내며 자신의 입장과 위치, 언급가능한 범위, 한계 등을 끊임없이 주지하고 있다. 누군가를 겨냥하는 것이 아닌, 보다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번역을 위한 사회적 분위기 조성과 자기성찰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내 경우 이 책에 등장하는 조셉 캠밸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중점적으로 읽었는데 캠벨의 이 유명한 책을 읽어본 사람이면 누구나 경험해보았을 그 어색한 문장들에 대한 미안함이 다소나마 보상되어지는 느낌.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적이 당황스럽게 이렇게까지 디테일하게 추궁해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이번 이방인 논란과 비교해 생각해 보면, 진정한 오역시비는 이쯤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자신의 맨얼굴을 드러내고 직접 대면하는 진정성과 그 태도에서 느껴지는 학자로서의 책임의식과 그로 인해 자연스레 전달되는 신뢰의 감정. 이 책을 덮으며 했던 생각이 아직도 또렷하다. 번역이란 작업이 굉장히 어렵고도 힘겨운 작업이라는 점, 그러한 작업을 거쳐 내 손에 들어왔을 책들에 대한 소중함과 역자에 대한 고마움. 살아있는 자정능력을 확인한 듯한 안도감과 든든함.
왜 그 책을 통해 느낀 감정을 이번 논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걸까. 이번 논란의 승자는 누구이며 패자는 누구인가. 누구를 위한 논란이며 시비인가. 이 시비는 어떤 점에서 생산성 있는 시비인가. 나의 관점에서는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은 시비인 듯하다. 물론 이런 시비를 통해 또다른 이득을 얻는 집단도 있겠지만.
독자는 양질의 번역서를 읽을 권리가 있다. 이 권리는 어떤 이유에서라도 훼손되어서는 안된다. 출판사는 장사속이 먼저가 아닌 독자를 우선해야 한다. <양질의 서적>이라는 믿음이 흔들려 버린 출판시장에서 이득을 볼 사람 누구인가. 역자도 독자도 출판사도 그 누구도 승자가 아니다. 모두가 패배하는 게임이다. 역자와 독자, 출판사는 긴밀하게 엮인 유기체다. 함께 성장할 수도 파멸할 수도 있는 운명공동체다. 지금의 논란은 우리를 성장의 길로 인도하는가 다함께 패배하는 길로 인도하는가. 독자인 한 사람으로서 내 가슴에 켜진 불신의 전등을 확인컨대, 모두에게 생산성 있는 논란은 아닌 듯하다.
출판계의 기근이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요즘이다. 이번 논란으로 더 이상 상처받는 ‘독자’가 생기지 않기를, 번역서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의심이 깊어지지 않기를, 출판사업이 한낱 장사치의 돈벌이 품목으로 비쳐지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첫댓글 난콩님! 우선 반가워요.^^ 저 또한 흥미롭게 지켜보는 사건이네요. 뭔가 투명하지 못하다는 느낌 말고는 더 할 말이 없었는데...혹시 이정서 번역본은 읽어보셨어요? 님 정도면, 두 번역본을 다 읽어본 독자의 입장을 충분히, 시원하게 말해줄 것 같은데! 저는 출판사가 책 광고하며 내놓은 선정적인 문구가 몹시 거슬렸어요. 완전히 새로운 것이 어디있으며 또 완벽하게 부정당해야하는 것은 어디있을까 싶은. 그 점이 영 찜찜했네요. 우리만 읽기에는 많이 아까운글이다 싶은! 고마워요, 난.콩. 님!
글은 며칠전에 써두었다가 올렸는데 지금 마음이 어수선해서 다시 내릴까 하던 참이었어요...ㅠ.ㅠ 나라가 어찌 돌아가려고 이러나요?
이번 오역논란에 대한 이정서씨가 올린 글은 모두 보았는데 돈주고 사기 아까워 도서관에다 신청해 놓았어요. 읽고 비교하는 게 맞을텐데... 어차피 불어를 모르는 사람 입장에서 어떤 잣대로 어느 작품에 손을 들어야할지 모르기는 마찬가지일 거 같아 그냥 철저한 독자입장에서 이 사태에 대해 써봤어요. 암튼 읽어는 볼 예정이에요.
글을 올려놓고도 왜 나는 이렇게 '검증'에 꽂히는가 찜찜하더라구요. 그점을 생각하다보니 '오역이냐 이역이냐' 문제가 떠오르게 되고, 논란의 출발이 '오역'에서 시작하다보니 '검증'에 꽂혔구나 싶었어요. 해서 다시 '오역'이라는 문제에다 시선을 두고 수정해 보았습니다.
이 사건(?!)을 바라보는 독자로서 할수있는 발언을 충분히 했다고 생각해요. 논리적이고 설득력있어요.
좀더 분명해진 느낌. 알라딘에서도 갑론을박하던데, 공개적으로 밝혀도 좋겠다는.
몇 군데 틀린글자는 반드시 수정해야겠지요^^
마지막단락, 정의니 하는 말은 저는 좀과하다는 느낌.
두 단락 중 앞부분이 없어도 충분하지않을까한다는!
@수수꽃다리 네 감사합니다~ 수정해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