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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계시록!(15) : 좁은 마음을 깨뜨려라!”
+ 본 문 : 요한계시록 7장 9절 - 12절 (신약 406쪽)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 지어다. 아멘!
요한계시록 6장에서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나 누가 능히 서리요.”라는 질문에,
그 대답으로 오늘 본문 7장에서 세상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무서운 심판과 핍박이 와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이 확신을 주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모두의 마음에 늘 흘러넘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종말이 와도 하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책임지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선포하겠습니다. “나는 택함 받았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장자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나의 복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를 책임지십니다. 아멘!”
지금 우리가 함께 나누고 있는 요한계시록 7장을 분석해 보면, 크게 두 파트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절부터 8절 말씀까지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메시지를, 우리의 관점으로 기록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9절부터 17절 말씀까지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해 하늘 교회의 관점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 대해서 전반부에서는 “인 침 받은 십사만사천” 이라는 숫자로 설명하고,
후반부에서는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 라는 표현으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설명합니다.
그 중에서 “십사만 사천” 이라는 숫자에 대해서 여러 해석이 있는데,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과거적인 해석입니다. 과거적 해석은 “십사만 사천” 이라는 숫자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지키려다가 순교한 성도들의 수라고 주장하는 해석입니다. 이 같은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하나님의 인 치심을 받을 정도면,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열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해석은, 미래 또는 세대주의적인 해석입니다. 이 해석은 인 침을 받을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를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각각 만 이천 명씩 인 침 받는 자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의 특징은, 구원 받은 십사만 사천 명이 모두 다 유대인들이라고 생각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단들은 이 주장을 바꾸어 십사만 사천의 숫자를, 자기들의 교리를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세 번째 해석은, 상징적인 해석입니다. 고대인들은 숫자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 4장에 나오는 이십사 장로를 구약의 교회를 상징하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신약의 교회를 상징하는 열두 사도의 숫자를 더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처럼 상징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이처럼 “십사만 사천” 을 구약의 교회를 상징하는 열두지파와 신약의 교회를 상징하는 열두 사도,
그리고 “많다. 충분하다.” 는 뜻을 가진 ‘1,000’ 이라는 숫자를 곱해서 나온 상징적 숫자로 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받은 신구약의 모든 교회, 모든 성도들을 상징하는 숫자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해석 중에서 성경학자들은, 세 번째 상징적인 해석을 지지하는 경우가 가장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말하는 이 세 가지 해석 중에서, 어느 해석이 가장 정확한지는 하나님만 아십니다.
요한계시록 7장이 이렇게 해석과 이해가 어려운 장이긴 하지만, 유난히 많은 은혜를 받는 것은,
그 엄청난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보호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오늘 본문 9절, 10절 말씀이 우리에게 엄청난 감동을 줍니다. 다함께 큰 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그 누구도 셀 수 없는 엄청난 무리들이 일어나, 그 구원을 기뻐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광경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읽고 또 읽다보면, 너무나 생생하게 우리를 압도합니다. 그러면서 한탄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크고 놀라우신 분인데, 그 크신 하나님을 하나님의 장자요. 하나님의 자녀인 나는,
왜 이렇게 작고 초라하고, 바라보는 눈이 왜 이렇게 좁고, 왜 이렇게 좁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까?”
이건 저만의 탄식이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탄식이 심령 깊숙이에서 터져 나와야 합니다.
이러한 탄식을 통해서 나 자신을 돌아보고, 크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성품을 우리 모두가 본받아서,
지금보다 훨씬 크고 넓은 눈을 가지고, 먼 곳을 바라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요한계시록 7장에서, 우리가 꼭 기억하고 회복해야 할 것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포용하는 넓은 마음의 회복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구원 받은 백성들이,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를 이루어 주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면서 베드로후서 3장 9절 말씀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한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아멘! -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한없이 넓고 크십니다.
우리 모두가 다 이 하나님의 크고 넓으신 사랑의 마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게 된 것 아닙니까?
만약 하나님이 우리처럼 속 좁은 분이셨다면, 저와 여러분은 이미 저주를 받아 이 땅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크고 넓으신 사랑의 마음으로 철없는 우리를 기다려주시고, 품어주시고, 오래 참아주시고,
그 크신 은혜로 말미암아 오늘의 저와 여러분이 있게 되었으니 감격 아닙니까? 그래서 감사 감사합니다.
일찍이 사도 바울도 이것을 깨닫고, 자기의 모습을 뒤돌아보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6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조롱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핍박할 때에도 오래 참아주심으로,
내가 멸망당해 죽지 아니하고 구원받았다.’ 는 감격이 항상 사도 바울의 마음에 살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로 더 중요한 사실은, 사도 바울이 그 구원의 감격의 물꼬를 자기를 핍박하고,
조롱하고, 미워하여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을 품었고, 그 품은 사람들에게로 연결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 안에서도, 바울을 질투하여 모함하고 끌어내리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주님이 주신 넓은 마음과 오래 참으심을 본받아, 그런 사람들까지도 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똑같이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크고 넓은 마음으로 품어주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에 그 큰 사랑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게 속이 좁습니까? 나와 조금만 달라도 비판하고 비난하고 용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한 형제요 자매가 된 우리가, 서로 헐뜯고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서로 품어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를 배제의 시대 – 내가 제일 잘 났고, 나 아닌 사람들을 배제하는 시대입니다.
국회의원 선거가 끝났습니다. 3당 모두 하는 짓들이 정치하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화합은 하나도 없습니다. 포용도 없습니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오직 나와 내 당밖에 없습니다.
백석대학교의 이우제 교수는 스캇 맥라이트가 쓴 “배제의 시대 – 포용의 은혜” 란 책을 인용하여,
제멋대로 살아가는 타락한 인간들이 모인 이 시대를 “배제의 시대”라고 부른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이와 반대로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한마디로 “포용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포용의 은혜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오늘 본문 9절에서는 하나님의 택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포용의 은혜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보좌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수많은 무리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걸 아십시오. 우리는 이미 이 하나님의 포용의 은혜를 받았고,
지금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가 받은 포용의 은혜를 나누어야 합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까지도,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그 영혼이 주께 돌아오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얻는 진리를 사수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팔고, 부인하는 자들에게도 관용하고, 불쌍히 여기고, 포용하는 주님을 닮아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당시 죄인 취급을 받았던 세리와 창기까지도, 포용하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셨습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의 크고 넓은 마음을 우리도 닮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품어야 합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또 다른 덕목은 구원의 감격입니다. 여러분 안에 이 구원의 감격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 10절 말씀입니다.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 나는 이 장면이 정말로 감격스럽습니다. 능히 셀 수 없는 구원 받은,
엄청난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리를 지어 일제히 큰 소리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엄청난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리를 지어 일제히 큰 소리로 구원해 주신 하나님 은혜를 찬양한 내용을 보면,
우리의 구원이 어디에서 왔다고 찬양합니까?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서 왔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왔다고 찬양합니다. 나의 잘나고, 유능하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태도에서,
구원이 나는 것이 아니라 자격 없는 나를 향한 주님의 십자가, 거기서 구원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이것은 예수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 되심을 인정하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구원에 대한 감격입니다.
우리는 이 구원의 감격을 회복해야 합니다. 인간적으로는 우리가 너무 외로운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구원받은 감격은 내 안의 모든 외롭고 쓸쓸한 감정들을, 완전히 쓸어버리는 능력이 됩니다.
내 생애 가장 외로웠던 때는 1972년, 서울 광장동에 있는 장로회신학대학에 다닐 때였습니다.
방학이 되자 함께 공부하던 분들이 다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저는 기숙사에 남아 있었습니다.
청승맞게 기숙사에 남아 그 긴 석 달 동안, 대화를 나눌 사람이 전혀 없이 그렇게 살았을 때입니다.
그렇다고 신학교 1학생이었기 때문에, 교회 사역도 하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정말로 외로웠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나면, 예배의 감격 때문에 모든 외로움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목사가 된 지금, 예배 인도자로 이렇게 강단에 섰지만, 그때의 예배감격만 못합니다.
그때보다 지금이 모든 면에서 훨씬 더 안정되고 인정받는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때만큼 뜨거운,
구원의 감격이 회복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여러분들도 지금 예배의 감격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배가 살아나고 구원의 감격이 내 안에서 요동칠 때에, 모든 어두운 감정이 사라질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또 한 가지는, 이 구원의 감격이 이웃에게로 점점 확산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9절, 10절에서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녀들이 구원의 감격을 기뻐 찬양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1절, 12절 말씀을 다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 지어다. 아멘!
오늘 본문 9절과 10절에서,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들이 모두 다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자,
그 기쁨이 옆에 있던 천사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천사들이 큰 소리로 화답하면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올려드렸습니다. 이 장면을 묵상할 때마다 가슴이 벅찰 날이 많을 것입니다.
어떤 성도의 너무나 감동이 되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하나님! 제 인생을 변화시킨 예배입니다.
제가 너무나 믿음이 연약했을 때에, 주님이 살아 계시다고 내게 증거 해 주신 것은 예배였습니다.
하나님! 나로 하여금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증거 해주신 이 예배가, 다른 그 누군가에게도 생명을 살리며,
영혼을 변화시키는 예배가 되어, 예배를 통해, 주님이 살아 계심을 체험하고 증거 하게 하옵소서!”
여러분! 아멘입니까? 이 기도가 바로 오늘 본문 9절과 10절의 자기에게 임한 예배의 감격과 찬양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살아계심을 체험하는 예배의 감격이 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예배드리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하나님의 임재와 살아계심을 체험하는 예배의 감격이, 흘러넘쳐,
생명을 살리고, 영혼을 변화시키는 예배가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게 바로 예배 회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9절과 10절의 구원의 기쁨과 감격의 은혜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11절과 12절의 생명을 살리고, 영혼을 변화시키는 예배가 회복되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먼저 내가 구원의 기쁨이 회복되고, 생명을 살리고, 영혼을 변화시키는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무슨 일에나 먼저 세상이나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오래 참으심으로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감격하는 믿음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회복된 심령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때,
우리의 그 감격이, 절망적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가족, 직장동료,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로,
흘러가서 그들의 마음이 치유되고, 그들에게서 어두움이 사라지고 밝은 은혜가 임하게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저와 여러분 곁에 울고 있는 사람들, 좌절하고 낙심한 사람들에게,
저와 여러분 안에 회복된 벅찬 구원의 감격이 흘러갈 수 있도록, 작은 사랑의 섬김을 베풀어서,
오늘 본문 말씀처럼 구원의 기쁨이 회복되고, 생명을 살리고, 영혼을 변화시키는 은혜가 임하여,
힘든 오늘을 향하여 축복을 선포하며 힘 있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