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천안군의 관아터는 지금의 오룡동 중앙초등학교 자리에 있었고 그 옆엔 정자 수선정(水仙亭)이 있었다. 못가에 수풀이 우거지고 활터가 있었으며 못 가운데 언덕을 만들어 운치있게 꾸몄는데 불행하게도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소진되었다고 한다. 후에 민영이 천안군수로 부임하여 이축하고 백사 이항복을 찾아가 기문을 받았다. 한국지명총람 천안시편에는 수선정 터가 사직동 15번지로 소개하였다. 이 기록에 의하면 "연못에 대어서 그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는데 일제시대 때 정자를 헐어서 남쪽에 옮겨 세웠다가 없어지고 지금은 초석만 남았다."고 하였다. 지금은 거리 이름만 전한다.
손곡 이달(李達) <수선정>
四月池塘荷葉生, 사월 연못에 연꽃이 피고
水欄斜照倒微明. 물속 난간 비스듬히 새벽빛 누웠다.
連村下里新楊柳, 연촌 아래 동네에는 버드나무 새로운데
多少江南別離情. 강남에선 얼마나 이별의 정 나눌까.
사직동 중앙시장 밑에 조그만 남산공원이 있는데, 일제 말기에 이곳에 신사를 세웠다. 즉 수선정의 정자를 헐어서 신사를 세웠다고 한다. 지금도 남산공원에 올라가면 헌금한 일본인의 이름이 새겨진 돌을 볼 수 있다.
요즈음 제철을 맞아 새 주인을 기다리는 각종 채소, 야채 모종
천안의 상징 '횃불 낭자'
삼거리초등학교 앞에 세워진 한국전쟁 천안지구 전몰미군 추모비
1950년 7월 8일 미군 34연대장 대령 마틴이 구성동 광산 동네에서 국도를 따라 내려오는 북한 탱크에 2.36인치 바주카포를 발사하는 순간, 북한 탱크에서도 8.5밀리포로 응사하여 마틴 대령은 현장에서 즉사하고 북한 탱크도 파괴되었다. 지휘관의 죽음과 막대한 손실로 지휘 체계가 흔들린 미군은 밤 8시부터 10시까지 도리티 고개에 있던 포병의 엄호 포격으로 후퇴하였고 7월 8일 천안은 마침내 인민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그때 사망한 미군을 추모하고자 이 거리 이름을 '마틴 거리'라 부른다. 이 비를 세운 장소가 마땅치 않다.
천안박물관을 지나면 삼거리.
길손들의 수호신 거북바위
이곳이 한양, 전라, 경상으로 갈라지는삼남대로 갈림길 삼거리다. '삼거리'라는 명칭은 조선 초부터 '삼기(三岐)'로 표기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천안의 역원 가운데 "삼기원(岐院) 고을 남쪽 6리에 있다"고 기록하였고, 조선 후기 지리지 <여지도서> 제언조에 '삼기제언(三岐堤堰)'이 기록되었다. 삼기원은 천안삼거리 옆에 위치하였는데, 구성초등학교 국도변 마을과 거리를 원거리라 부른다. 이곳엔 삼남에서 오르내렸던 무수한 명인들의 전설과 민요가 전한다.
조선 후기 판소리 <춘향전>에도 천안삼거리가 등장한다. 어사가 된 이몽룡이 서울을 떠나 남원으로 내려가는 노정을 살펴보면 "천안삼거리 숙소하고, 도리티 얼른 넘어 김제역마 갈아타고, 덕평, 원터, 활원, 광정리며 모란(毛老院) 금강 얼른 건너 공주감영에 들어가서---"라는 구절이 있다. 춘향을 얼른 보고싶은 마음에 내려오는 노정을 그냥 이름 정도만 적어두고 주변의 경관 따위는 적지 않았다. 이몽룡은 성환역, 신은역 지나 천안삼거리에서 하룻밤 자고, 김제역(세종시 소정면 대곡리 역말)에서 역마를 갈아탔다. 이 길을 이몽룡의 '금의환향 로드'라고 부르고 싶다.
천안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몇 가지 된다. 독립운동, 호두과자, 능수버들, 삼거리 등. 그중에 유명한 전설이 유봉서와 능소 이야기, 박현수와 능소의 러브스토리가 유명하고 천안시에는 매년 흥타령을 축제를 열고 있다.
천안삼거리 흥
능수야 버들은 흥
제멋에 겨워서
휘늘어졌구나 흥
에루화 좋다 흥
성화가 났구나 흥
세상만사를 흥
생각을 하며는 흥
인생의 부귀영화가
꿈이로구나
에루화 좋다 흥
성화가 났구나 흥
은하작교가 흥
꽝 무너졌으니 흥
건너갈 길이 막연이로구나 흥
에루화 좋다 흥
성화가 났구나 흥
공산지규는 흥
무심히 울어도 흥
그리운 회포는
저절로 나누나
에루화 좋아 흥
성화가 났구나 흥
천안여고와 선문대 사이에 야구장을 짓느라 야산을 깎아내고 있다.
선문대를 지나 도리티 고개로
당선생이 언제부터인지 깃발을 잡았다.
도리티 삼거리 도착. 이곳부터 목천읍이다. 이곳 삼거리에는 세갈레 길이 있으며 주막과 마방이 있었다고 한다. 목천군 서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도리티리, 신성리, 삼층리, 신곡리 일부를 병하하여 신성리의 성자를 따서 삼성리(三省里)라 하고 목천면에 편입되었다.
잠시 다리쉼하며
육교를 지나 잠시 하천길로 빠진다.
밭 한가운데의 봉분? 무덤인가? 샘터인가?
도장리(挑長里)를 지나서. 목천군의 서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할 당시 관동 진지리, 신기리, 장평리, 도전(挑田)리 일부를 병합하여 도전리의 도자와 장평리의 장자를 따서 도장리라 하고 목천면에 편입되었다.
소사리로 빠지다. 목천군 서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소사리, 산곡리 일부, 도전리 일부, 천안군 소동면 소시리, 전의군 북면 역리 일부를 병합하여 소사리(所仕里)라 하고 목천면에 편입되었다. 이곳은 예전에 천안군, 목천군, 전의군, 풍세현 4개현의 경계에 있다.
이곳부터는 연기군 소정면 대곡리(大谷里)다. 지금은 세종특별자치시로 편입. 대곡리는 4개구로 구성된다. 1구는 궁리라 하는데 사는게 궁색해서, 혹은 궁답(宮畓)이 있어서 궁리라 한다. 1구는 맹골인데 맹꽁이가 많아서 혹은 맹씨가 살아서 그리 부른단다. 3구는 황골인데 원래 사람이 살지 않았던 곳인데 고등리 사람들이 들어와 마을을 형성했다고 한다. 4구는 대사동(한절골)인데 지금은 전통민속마으로 지정되어 있다. 옛날에 큰 절이 있어서 한절골[한적골]로 불리다가 한자로 표기하면서 대사동(大寺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곳 대곡리 역말에 예전의 김제역(金蹄驛: 세종자치시 소정면 대곡리)이 있었다. 판소리 <춘향전>에 나오듯이 이몽룡이 김제역에서 역마를 바꿔타고 광덕면 원터[院德]에서 하룻밤을 유숙했다.
이 길이 천안시내버스 700번이 지나다니는 코스다.
국도변에 세워진 김교현 자선비. 지나가는 행인이 없어 그가 누군지 물어보지도 못했다.
소정면 대곡4리에 자리한 신라 시대의 삼층석탑. 통과!
학교말길의 만물상.
소정면사무소
소정면사무소가 개청한 역사는 짧다. 18년 정도. 개청 15주년 기념하여 소정면향토지를 발간했다.
소정초등학교. 1937년 3월 15일 소정공립보통학교로 첫발을 내디뎠다.
소정다방. 들어가보고 싶다.
오늘의 식사 장소 소정쉼터 도착. 이곳은 옛날 소정리역 터다. 신역사는 아래쪽에. 이곳이 '길다방' 터다.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 정안 밤막거리와 곁들여 포식하다.
소정리역 신청사 앞에서. 역사가 아담하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에 기차가 상행 한 번, 하 행 한번, 두 번 정거한다고. 따라서 역장 한 명만 근무해도 될 터인데, 화물 취급 때문에 대여섯 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군사적 목적이 앞섰던 일제의 철도 건설 과정에서 조선인들은 집과 땅, 묘지를 무상으로 빼앗겼고 반항하는 사람에겐 공사 현장에서 총살시켰다고 한다. 당시의 반일 감정은 철도 정거장 습격으로 이어졌다. 1900년대 초반에 의병들은 경의선의 일산역, 경부선의 소정리역을 파괴했다. 1904년 7월부터 1906년 10월까지 2년에 걸쳐 철도와 관련해 처형당한 조선인은 사형 35명, 감금 및 구류 46명 등 257명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진다.
1998년 당시 아담한 소정리역. 이 구역사는 2004년3월 30일 새벽에 전기누전으로 화재가 발생하여 불타버렸다.
소정리역 연혁
1906년 1월 20일 : 영업 개시
1907년 9월 20일: 의병의 공격으로 역사 소실
1942년: 역사 신축
1976년 5월 20일: 소화물 취급 중단
1985년 10월 30일: 군 전용선 개설
1993년 4월 15일: 승차권 차내 취급역으로 지정
1999년 12월 27일: CY(컨테이너 야드) 조성 완료
2002년 8워 25일: 역사 개보수 완료
2004년 3월 30일: 화재로 역사 소실
2005년 1월: 역사 재건축
역사에 비치된 향토지. 들고오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참다.
배를 든든히 채우고 다시 발길을 재촉하다.
군사시설 보호구역이란 팻말이 박혀 있어 의아했는데 바로 옆에 유류부대가 있다.
석재 파는 곳에 비가 넘어져 있길래 쳐다보았더니 부총리를 지낸 나웅배가 쓴 김창원 추모비다. 김창원이 누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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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원의 생애
1917년 8월 6일 충남 공주에서 출생하여 조치원에서 초교를 다닌 뒤 일본에서 상업학교(和歌山縣 商業學校)를 졸업하였다.
한국전쟁 이전에 일본인이 경영 했던 대전의 조선리연항공기 기계 회사를 인수 했다. 이 공장은 일본 군용차와 전투기 부속품을 만들던 곳이며 공주에서 출생 했던 일본수상 다나까가 청년 시절 근무 했던 업체였다
김창원은 조선리연공장을 한국리연공업사로 이름을 바꾸고 자동차 엔진 부속품을 만들어 미8군과 국군창설 이전의 우리 국방경비대 차량용으로 납품 하는 기회를 얻어 군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사업을 늘려 갈 무렵 한국전쟁이 발발 하였다
한국전쟁 후 군납을 받는 육군병기창과 폐차 된 미군용차를 불하 하는 미8군 보급창이 부산에 들어서는 바람에 김창원은 피난을 갔던 부산으로 1954년에 공장을 옮겼다. 부산으로 온 김창원은 부산 전포동에 있던 미군 모터풀(정비소)을 불하 받아 그 곳에 공장을 세운 뒤 부속품을 만드는 한 편 군용차와 민간차의 수리 제작사업을 하였다.
1955년 군용차량의 엔진을 재생시키고 드럼통을 펴 미니 승합차를 만드는 신진공업사를 설립, 기반을 닦은뒤 1965년 신진자동차 공업(新進自動車株式會社)을 설립해 일본 도요타자동차와 기술제휴로 국내 최초의 본격 승용차인 '신진 코로나'를 생산하면서 국산 자동차를 보급하여 자동차 공업을 일으켰고, 일약 재벌의 대열에 합류했다.
코로나가 큰 인기를 얻으면서 급성장한 신진은 1969년 정부의 권유로 적자투성이였던 한국기계(現 대우중공업)를 인수하면서 사세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한국기계공업주식회사(韓國機械工業株式會社)를 설립하고 책임, 경영을 하다가 형 김제원(金濟源)에게 경영권을 넘겨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한국이연공업주식회사(韓國理硏工業株式會社) 전무를 역임하였고, 신진관광주식회사(新進觀光株式會社) 대표이사, 한국자동차검사협회(韓國自動車檢査協會)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코리아파이스공업주식회사 회장, 주식회사 거화(株式會社巨和) 회장 등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71년 언론에도 관심이 많아 경향신문사(京鄕新聞社) 회장을 역임하였다. 엔진공장 설립 등에 따른 차입금부담에 합작선인 도요타의 철수 등 악재가 겹쳐 부실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72년 미국 GM과 기술제휴를 맺고 재기를 노렸으나 후발업체인 기아, 현대 등과의 치열한 경쟁에서 고전을 면치못한 끝에 계열사를 대우, 삼성 등에 차례로 넘겨주었다.
또한 체육 분야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맡아 체육발전에 이바지하기도 하였는데, 대한탁구협회 회장, 대한체육회(大韓體育會) 부회장 등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73년 대한탁구협회 회장 재임중 제32회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여자부 최초로 세계를 제패한 공로로 국민훈장 무궁훈장(國民勳章 無窮勳章)에 서훈(敍勳)되었다.
주한튀니지 명예총영사를 역임하고, 신진학원 이사장, 재단법인 신진장학회(新進奬學會) 이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제도화하여 실천한 훌륭한 경제인이며 동시에 사회사업가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은탑산업훈장·대한민국체육공로상(大韓民國體育功勞賞) 등을 받았다.
1996년 5월 1일 오후5시 서울 삼성의료원에서 숙환으로 향년 80세로 별세하여 충남 천안공원묘지에 안장하였다.
추모비가 왜 여기에 있는지?
운당리 기찻길 옆 실개천
이름이 재밋다. 황금누들 못자리/
피뢰침까지 장식한 함석 오각정.
느티나무와 기차
구제역의 아픈 기억이 떠오른다.
광덕면 행정리(杏井里) 입성. 본래 천안읍에서 멀다하여 원이면(遠二面)이라 하였다가 광덕산의 이름을 따서 광덕면이라 개명하고 행촌리와 구정리의 이름을 따서 행정리라 하였다.
소주로 갈증을 달래다.
광덕 지구, 무학 지구에 천안추모공원이 자리하여 이곳엔 형형색색의 조화를 파는 가게들이 있다. 소설가 정비석 선생, 친일파 연구가 임종국 선생들이 이곳에 잠들어 계시다. <소나기>의 작가 황순원 선생도 이곳에 계시다가 경기도 황순원문학관이 개관하면서 그쪽으로 모셔갔다.
첫댓글천안삼거리.....어릴 때부터 들어왔떤 그 이름. 능수버들과 호도과자. 출장갔다가 오는 아버지, 옆방 아저씨가 사다주시던 호도과자는 단연 천안의 명물이었죠. 삼거리가 한양 전라 경상의 갈림길이었군요. 아무 생각없이 들었는데. 자세한 길 설명 금세 잊어버리겠지만 문단을 반복해서 읽어 보았습니다. 금의환향길 좋습니다. 밭에 온통 영어로 쓰여 있는 KCC의 글귀가 한심하다고 해야 할 지.......
민산님의 글과 사진은 항상 우리의 눈과 마음을 밝고 맑게 해줍니다! 그저 따라가기에 바쁜 저로서는 도보후기를 읽고 보며 다시걷는 참 기쁨을 맛 봅니다!! 새로운 기록을 세워 기쁘고요 같이해주신 당선생님,민산님,불계님,잉크님,다함꼐님, 재행무상님, 해원님,섬집님,스마일리님, 모든 길벗님들께감사드립니다^.^ 특히 야간의 아름다운 천안을 접 할수 있게해주신 민산님 고맙습니다!!
첫댓글 천안삼거리.....어릴 때부터 들어왔떤 그 이름. 능수버들과 호도과자.
출장갔다가 오는 아버지, 옆방 아저씨가 사다주시던 호도과자는 단연 천안의 명물이었죠.
삼거리가 한양 전라 경상의 갈림길이었군요. 아무 생각없이 들었는데.
자세한 길 설명 금세 잊어버리겠지만 문단을 반복해서 읽어 보았습니다.
금의환향길 좋습니다.
밭에 온통 영어로 쓰여 있는 KCC의 글귀가 한심하다고 해야 할 지.......
시골의 경관을 심하게 해치는 광고, 선전, 입간판들 모두 걷어내야 합니다.
민산님의 글과 사진은 항상 우리의 눈과 마음을 밝고 맑게 해줍니다! 그저 따라가기에 바쁜 저로서는 도보후기를 읽고 보며 다시걷는 참 기쁨을 맛 봅니다!!
새로운 기록을 세워 기쁘고요 같이해주신 당선생님,민산님,불계님,잉크님,다함꼐님, 재행무상님, 해원님,섬집님,스마일리님, 모든 길벗님들께감사드립니다^.^
특히 야간의 아름다운 천안을 접 할수 있게해주신 민산님 고맙습니다!!
차근히 알려주신 천안의 역사와 길..새벽까지 망설이다 기어이 놓코만 길.. 저길위에 있었던들 이리 다 느끼고 담았을지?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따라가봤습니다..감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