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나전사(朝鮮之螺鈿社)’와 한국 근대 나전칠기-III
노유니아 도쿄대학 인문사회계연구과 Corresponding Author : junias00@gmail.com
참고 : 이 논고는 국립문화재연구원, 문화재, 2016, vol 49, no 2.통권 72호, pp.122-141(20pages)
글을 나누어 싣는다.
2. ‘조선나전사’의 제작활동
그렇다면 조선나전사에서는 실제로 어떤 작품을 제작하고 있었을까. 팜플렛 「동양정화 조선미술 나전칠기 안내」와 『다카오카 상공안내(高岡商工案内)』 등에 실린 광고 등을 종합하면 판매 품목으로는 장식장, 벼루, 상자, 향로, 향합, 손님용 탁자, 화로, 소반, 담배갑, 경대, 필통, 그릇, 꽃병, 젓가락, 가구 등 생활용품 전반을 아우르고 있었으며, 기성품 이외에 손님의 기호에 맞춰 주문제작을 받기도 하였다. 품목으로 보면 칠기의 종류나 형태는 일본인이 사용하는 일본식이었지만 거기에 시문한 나전의 기법과 양식은 조선식이라는 점이 특징이었다. “취미와 실용을 겸하는”, “제작주장, 고급예술의 민중화! 제조에서 바로 고객으로!” 등의 문구에서, 일반적으로 고가품에 속했던 나전칠기의 문턱을 낮춰 일반 가정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대중적인 물건들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팜플렛에는 제작품의 5대 특색으로 “소지(榡地)의 구조가 견고하고 탁월함, 나전의 색과 광택이 매우 선명하고 화려함, 의장도안은 조선식으로 우아함, 순정의 생칠을 사용하여 변색과 벗겨짐이 없음, 칠이 두텁고 아름다워 고상하고 우아함”을 들고 있다.
조선나전사의 제작활동을 파악하기 위해서 또 하나의 실마리가 되는 것은 관설 전람회 출품(이하 ‘관전’으로약칭) 기록이다. 당시 일본에서 열렸던 공예와 관련된 관전의 도록을 검토한 결과, 1921년부터 1934년까지 매년 관전에 참가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표 1), 특히 1921, 1922년의 『농상무성공예전람회도록』에서는 전성규의 이름이 등장한다. 1921년에는 기무라가 도안을 담당하고, 전성규가 제작 및 출품했으며, 이듬해인 1922년에는 기무라가 도안한 것을 전성규가 제작, 조선나전사의 명의로 출품하였다. 1923년 이후부터는 도안과 제작의 구별을 하지
25 간사이 건축계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건축가 타케다 고이치(武田五一)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1920년부터 1932년까지 교토제국대학의 교수로 재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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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 조선나전사와 기무라텐코의 관설 전람회 출품 기록
전람회 연도 작품명 출품지출품자명의 판매가
第9回農展 1921(大正10) 六角嵌線古代唐草螺鈿漆器 富山県木村伊三次郎(案) 全成圭(作)(出) 16.50
第10回農展 922(大正11) 螺鈿モクチョン紋様乱匣 高岡市 木村伊三次郎(案) 全成圭(作)朝鮮螺鈿社(出) 12.50
第11回農展 1924(大正13) 螺鈿牡丹鳳凰火鉢 螺鈿十二支菓子皿 高岡市木村伊三次郎 125.10
第12回商工展1925(大正14) 手文庫形古代唐草 螺鈿莨セット 富山県 県木村天紅 48.50
第13回商工展1926(昭和元年) 扇子形珍菜、会席膳土器形武蔵の野銘々盆 富山木村天紅 65.12
第14回商工展1927(昭和2) 山海の幸螺鈿二段卓 草花螺鈿莨セット ばら螺鈿菓子鉢
唐草螺鈿天平式大卓 睡蓮螺鈿菓子器 富山 富山木村天紅
第18回商工展1931(昭和6) 睡蓮螺鈿菓子器 富山 木村天紅 25
第19回商工展1932(昭和7) 螺鈿睡蓮 菓子鉢 螺鈿黒\猫 乱箱 富山 木村天紅 16.50
第21回商工展1934(昭和9) 星空螺鈿喰籠 富山 木村天紅 35
第5回新文展 1942(昭和17) 三彩花菱文夾紵手篋 東京 木村天紅
第6回新文展 1943(昭和18) 乾漆夫婦石 東京 木村天紅 藤井素彦,
2012, 「富山県関係者 農展·商工展出品目録(稿)」 『高岡工芸史料』을 참고하여 필자 작성.
않은 채 전부 기무라의 명의로 출품하였다. 1922년 5월에 전성규가 귀국한 이후 다른 조선인 장인의 이름을 올리고 있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기무라가 직접 제작까지 전부 도맡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기무라가 회사를 해산한 이후 작가로 전향하기는 하지만 건칠 기법의 제작에 주력하였던 것으로 보아 나전기법에 숙달하지는 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도록에서 사진이 확인되는 작품은 총 4점으로, 이 중 제10회 농전(1922) 출품작인 <나전목촌문양상자(螺鈿モクチョン紋様乱匣)>은 가쿠슈인대학 사료관 소장의 <중국고사나전상자(中国故事螺鈿乱箱)>(사진 8)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益智圖』26의 그림을 본따 만든 것이다.27 그러므로 가쿠슈인대학 사료관의 작품 역시 기무라의 도안을 토대로 전성규가 제작을 담당했을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목촌’이라는 문양의 이름이 기무라의 한자를 한국어 발음대로 표기한 것이라는 점이다. 28 중앙시험소 재직 당시 조선의 신


사진 8. <중국고사나전상자(中国故事螺鈿乱箱)>와 뒷면에 붙어있는 조선나전사 상표(가쿠슈인대학 사료관 소장).
26 중국에서 1862년 개발된 탄그램의 한 종류(정사각형을 칠교판보다 더 많은 15조각으로 잘라 만들었기 때문에 십오교판설이라고도 부른다)를 가지고 만든 전
6권의 퍼즐 문제집. 1878년 출판.
27 吉廣さやか, 2015, 「学習院大学史料館蔵 朝鮮関連螺鈿漆器三点とその時代―寺内正毅の螺鈿細工奨励から朝鮮之螺鈿社、学習院教材まで―」 『学習院
大学史料館紀要』 第21号, 学習院大学史料館, p.26.
28 이에 관해서는 가쿠슈인대학 사료관 학예원 요시히로 사야카씨와의 대화 속에서 힌트를 얻었다. 작품과 자료를 실견하는 과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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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9. <나전모란봉황화로(螺鈿牡丹鳳凰火鉢)>(農商務省, 1924, 『第11回農商務省工芸展覧会図}録』).
사진 10. <흑칠나전세공팔각화로(黒漆塗り螺鈿細工八角火鉢)>라는 명칭으로 일본 야후 옥션에 2014년 11월 30일 출품되었던 작품.
<사진 9>와 동일한 작품으로 보인다.
문기사에는 기무라의 본명 기무라 이산지로의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어 한글 ‘목촌이삼차랑’이라고 표기하고 있기도 하다. 장방형의 덮개가 없는 얕은 상자 형식의 이 작품은 테두리와 바닥 부분에 나전 장식이 시문되어 있는데 실톱을 이용한 주름질의 사용이 보이지 않는다. 일본에서 구할 수 있었던 박패(얇은 자개)가 아니라 조선의 후패(두꺼운 자개)를 사용하고 있어 나전장식의 입체감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바로 다음 회인 제11회 농전(1924)에 출품한 작품 <나전모란봉황화로(螺鈿牡丹鳳凰火鉢)>(사진 9)부터는 실톱을 이용한 주름질의 사용이 눈에 띈다. 관전에 출품된 작품의 현재 행방을 알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운이 좋게도 조사 과정에서 이 작품과 동일한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 최근 한 인터넷 옥션에 <흑칠나전세공팔각화로(黒\漆塗り螺鈿細工八角火鉢)>(사진 10)라는 이름으로 출품되어 낙찰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은 팔각의 화로에 흑칠을 하고 마찬가지로 후패를 사용하여 모란과 봉황의 문양을 한 면씩 번갈아가며 시문하고 있는데, 이 문양은 실톱을 이용해 오려낸 것으로 보인다. 실톱의 등장 시점이 전성규가 귀국한 이후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그 외에 현전하는 작품으로 최근 도야마현 지방의 한옥션에 출품되어 낙찰된 조선나전사 제작의 <나전 카이세키젠(螺鈿会席膳)>(20매 1조)(사진 11)이나 기무라가 직접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건칠 작품 <나전귀와모양화병(螺鈿鬼瓦模様花瓶)>(사진 12)이 있다. 두 작품 모두 후패를 사용하고 있다. 카이세키젠은 일본의 식생활과 관련된 것으로, 조선이었다면 소반을 사용했을 것이다. 일본 생활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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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1. 「조선나전사 제작(朝鮮之螺鈿社作) <나전 카이세키젠(螺鈿会席膳)>」라는 명칭으로 도야마현의 한 옥션에 2014년 12월 출품되었던 작품.

12. 기무라 텐코, <나전귀와모양화병(螺鈿鬼瓦模様花瓶)> (社団法人日本漆工協会 1981: 27).
에 맞춰 후패를 조선식으로 세공한, 이른바 절충양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 역시 실톱을 이용한 주름질 기법이 구사되어 있다. 20매나 되는 카이세키젠에 같은 도안의 나전을 시문하기 위해서, 한 번에 같은 문양을 많이 오려낼 수 있는 새로운 주름질이 매우 편리했을 것이다. 기무라의 건칠화병 역시 일본전통의 건칠 제작기법 위에 조선식으로 나전을 세공한 절충양식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여기에 시문된 문양에 응용된 기법에 대한 설명으로 “특히 독특한 맛이 있는 할패 기법은 가장 인기를 끌었다”29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조선중기에 유행했던 타찰법을 이용한 것이다. 기무라는 이 기법을 조선 전통의 기와 문양과 도깨비 문양에 응용하여 조선나전사 제작품에도 즐겨 넣었다. 기무라가 도야마현 지방에 위탁 판매한 광고의 사진 속에서도 이와 같은 문양을 넣은 작품들을 찾아볼 수 있다.
IV. ‘조선나전사’가 한국 근대 나전칠기에미친 영향
1. 실톱의 도입과 주름질 기법의 혁신
1) 실톱의 발견과 도입
전성규는 다카오카에서 금속세공용 실톱을 나전을 오리는데 사용하는 것에 착안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금속세공용 실톱은 미국과 독일에서 1890년대부터 사용되기 시작되었다.30 이것이 정확히 언제부터 일본과 한국에 도입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며 전성규가 다카오카에 가기 이전부
29 社団法人日本漆工協会, 1981, 『日本漆工(高岡漆器特集号)』, p.91.
30 Spiel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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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 한국에서 이미 실톱을 사용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대로 조선나전사의 관전 출품작에서는 전성규의 귀국을 전후로 실톱을 이용한 주름질의 흔적이 보이기 때문에 전성규의 증언이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다카오카에서 실톱을 발견하게 된 데에는 다카오카가 동기의 산지로 유명한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원래 이 도구는 금속 세공에서 투조(透彫)기법에 널리 사용되는 도구로, 선각(線彫)으로 오려낸 모양과 비교해서 더 화려하고 부드럽게 나오는 장점이 있다. 이러한 실톱을 자개를 오릴 때 이용하기 시작함으로써 주름질의 혁신을 가져온 것이다. 가위를 사용해서 오릴 경우에는 유연성이 없는 자개가 부러지기 쉬웠고, 한 장씩 작업하기 때문에 작업시간이 오래 걸리는 등의 단점이 있었다. 실톱으로는 나전을 여러 장 아교로 겹쳐붙인 후 옆에서 켜가며 오려내기 때문에 섬세한 곡선 표현이 가능해지고 작업시간도 단축된다. 그렇다면 다카오카에서는 나전작업에 실톱을 사용하고 있지 않았던 것일까. 이에 대해 다카오카에서 현재 나전칠기의 생산규모가 가장 큰 무사시가와 공방(武蔵川工房)의 무사시가와 요시노리(武蔵川義則)씨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조선 나전칠기에 사용되는 자개는 대략 0.3 mm에서 0.4mm 정도로 두껍기 때문에 가위로 자르기 어려운 반면, 다카오카 및 일본에서 사용하던 자개는 0.1mm의 얇은 박패이기 때문에 가위나 송곳, 작은끌(鑿刀)로도 간단히 오려낼 수 있어 굳이 실톱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으며 오늘날의 작업에서도 실톱을 사용하지 않는다”31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한국에 방문했을 때 구입했다며 상사기(끊음질하기 위해 나전을 가늘게 썰어내는 기계)를 보여주기도 했지만, 실톱은 쓰지 않는다고 했다. <전통공예 다카오카칠기 협동조합>의 임원을 맡고 있는 다른 장인도 “1970~80년대에 한국에 여러 번 다녀왔다. 실톱으로 나전을 자르는 것을 신기하게 지켜봤다. 대단했지. 겨드랑이에 계란 한 개를 끼고 그것을 떨어뜨리지도, 깨뜨리지도 않을 정도의 힘을 주고 오려간다고 하더군”32이라고 증언하였다.
이러한 이야기를 종합해서 필자는 전성규가 독자적으로 실톱을 나전을 오리는 데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들이 기무라의 제안을 받아 다카오카로 향하지 않았더라면 실톱의 발견은 없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나전 기법의 발달 역시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을지 모른다. 조선나전사의 설립이라는 선행 사실과 한국 근대 나전칠기에서 보이는 주름질 기법의 발달이라는 결과가 비록 인과관계에 놓여있지는 않지만, 전성규의 다카오카행으로 인해 실톱이 나전칠기에 도입되기 시작했고 주름질 기법이 근대 나전칠기의 지배적인 기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