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생활을 꿈꾸며 광주에 왔는데
증언자 : 양치정(남)
생년월일 : 1949. 7. 10(당시 나이 31세)
직 업 : 무직(현재 양돈업)
조사일시 : 1988.10
개 요
광산군 삼도에서 농삿일을 하다가 광주에 노점상 일자리를 알아보려고 올라와 5월 20일 관광호텔 앞에서 공수부대원에게 이유 없이 구타당했다.
광주에 도착하자 불길한 소문이
1980년 전에는 나는 서울에서 조그마한 한식 식당을 경영하였다. 먹을 것을 장사하면 손해볼 것은 없다 하여 식당을 하였는데 의외로 수입이 좋지 않아 폐업을 하고 말았다. 그러고 나니 특별한 기술이나 배운 것이 없어 마땅히 할 만한 일이 없었다. 시골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지만 어렸을 때부터 농삿일을 배우지 않은 나는 도시에서 생활하고자 하였다. 그렇지만 식당을 그만두고 나니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아내의 작은아버지가 계신 전남 광산군 삼도로 내려왔다. 처숙부의 농삿일을 틈틈이 도와주다 광주에서 노점상이라도 해보려고 1980년 5월 19일 광주에 올라왔다. 이때 광주시내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어떤 상태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광천동 시민아파트에 처가가 있었기 때문에 식구가 함께 올라와 처가로 갔다. 광주에서 노점상을 해보려 한다고 했더니 장인, 장모님께서 지금은 광주시내가 어수선하니 천천히 알아보라고 하셨다. 공수부대가 시내에 투입되어 여자 유방을 잘랐다는 소문을 듣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경상도 공수부대가 광주 시민을 모조리 죽인다고 했다고 했다. 처가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나서 시내에 나가려고 하니 차가 다니지 않았다.
목숨만 살려주시오
20일, 점심을 먹고 나서 충장로까지 걸어나갔다. 걸어가면서 어떤 종류의 노점상을 할까, 그리고 어디에서 차려야 할 것인가 등을 머리 속에 그리며 갔다. 그런데 거리가 온통 최루탄과 깨진 돌조각들로 가득하였다. 시민들이 이리저리 모여다니며 공수부대와 대치하여 투석전을 벌이고 있었다. 도로변에 시민들이 상가 사이사이로 숨어다니며 금남로의 투석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점상은 아예 찾아 볼 수도 없었고 상가들도 모두 셔터를 내려버렸다.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돌을 날라주는 사람도 있었다. 군인들이 시민들을 마구잡이로 달려들어 연행해 가지는 않았다. 몇천 명의 시민들은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곤 하였다. 나는 화니백화점을 거쳐 관광호텔 쪽으로 갔다. 노점상을 하려면 식구가 살 수 있는 가정집이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먼저 방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어찌나 많고 도시 전체가 최루탄 등으로 어수선한지 어디를 어떻게 찾아야 할 지 막막하기만 했다. 길도 잘 모르는 나는 무조건 관광호텔 쪽으로 올라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장 심하게 싸운 곳이 이곳이었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간 것이다.
어느 순간 계엄군 서너 명이 내게 달려들더니 곤봉으로 어깨를 쳤다. 무릎에 피가 쏟아지는데도 온 전신을 두들겨팼다. 또한 머리를 총개머리판으로 찍었다. 몸 이곳저곳 찢어진 곳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무어라고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하였다. 무조건 살려달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너무나 갑자기 당한 일이라 아무 경황이 없었다. 공수부대원은 나를 끌고 가려고 하였다. 나는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렇게 끌려가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목숨만 살려주시오. 나를 끌고 가지 말아주시오." 하고 하소연을 했다. 그래도 한참을 끌고 가는가 싶더니 금남로 2가 쪽에서 나를 내팽개쳐버리고 가버렸다. 아마도 시민들이 몰려드는 것을 보고는 그들과 대치하기 위해서 서두르느라 그런 것 같았다. 내게는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때부터는 빨리 공수부대가 없는 곳으로 빠져나가야 살 수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시내를 빠져나오기 위해 안감힘을 썼다.
제대로 걸을 수가 없어서 기어서 골목길 사이사이로 해서 태평극장 쪽으로 갔다. 태평극장 앞에서 한숨을 돌리고 시계를 보니 오후 4시를 조금 지나고 있었다. 시계유리는 깨지고 초침만 움직이고 있었다. 태평극장을 지나 광주천변으로 해서 광천동까지 기어가다시피 해 겨우 처가로 돌아왔다.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빨리 왔으면
21일 양동에 있는 김광록 외과로 가서 물리치료를 받았다. 돈이 풍부하지 않아 3일간만 치료받았다. 그 이후부터는 단방약이라는 것을 구해 먹거나 전신에 찜질을 했다. 뇌를 크게 다친 것은 아니었으나 기억력이 상당히 감퇴되어 제대로 생각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한창 생활전선에서 뛰어야 할 때인데도 몸이 마음같지 않다. 지금은 노점상은 아예 포기하고 시골로 내려가 돼지를 키우고 있다. 날씨가 흐리기만 해도 온몸이 쑤시고 아파 아무 일도 못 할 때가 많다. 한번 싸워보 지도 못하고 이유 없이 당한 것을 생각하면 너무 억울하다. 그렇다고 내놓고 하소연한다고 누가 들어주는 것도 아니어서 속으로만 골병을 앓아야 한다.
선량한 시민을 함부로 짓밟은 정권은 어떤 명분을 내세우든지 그대로 방치해 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희생자들에게 보상은 반드시 해야 할 것이다. 세상은 갈수록 살기가 어렵고 힘들다. 없는 사람은 언제까지 빼앗겨야만 하는 것인지 ...... 이제는 두 눈 뜨고 다녀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빨리 평화스럽게 살 수 있는 좋은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조사정리 양홍진)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