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선장, 1항사와 함께 야간에 뭐 재미있는 것이 없을까하고, 시내로 들어갔다.
한참 두리번 거리며 걷고 있는데 웬 청년 하나가 와서 "재미있는것에 데려다 주겠다"
면서 따라오라해서 한참 따라가니까 어석한 구석으로 가면서 "잠깐만 기다려라"
하면서 사라짐과 동시에 건장한 청년 3명이 우리를 둘러 쌓는게 아닌가 나는 "뛰자"
고함치면서 냅다 골목을 달리다 뒤돌아 보니 선장이 3명에게 잡혀서 몸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놈들 사람 잘 못 만났지, 그 때 선장은 태권도 유단자로 몇사람을
혼자서 제압할 수 있었다. 그 때 그놈들은 선장이 차고 있던 '로렉스'시계을 빼앗으려
했던 것인데, 1항사와 내가 선장 있는 곳으로 달려드니 그들은 도망을 했다.
그곳을 빠져나오면서 우리 셋은 '선원들한테 조심하라고 해놓고, 우리가 챙피 당할뻔 했다'
면서 웃었다. 그때 그곳 케이프타운은 밤에는 총기 사고가 거의 날마다 일어난다고 했다.
하기야, 지금도 우리돈 5만원이면 권총을 산다니 치안은 취약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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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그 유명한 희망봉(希望峰)과 테이블마운틴이 있다. 산 정상이
하느님의 식탁 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으로 정상이 평평하다.
지각변동에 의해 바다 속에 있던 땅이 육지로 솟아 난 것이라한다.
산정상에는 기괴한 돌과 동.식물이 가득하다. 해발 1,098m로 작은
산인데 1929년에 설치된 케이블카를 이용하여 정상까지 가거나 하이
킹코스가 있지만 우리는 시간도 없고하여 1항사와 나는 택시와 걸어서
산 중턱까지만 조금 올라가 보기로 했다. 우리가 가던날은 하필 안개로
사진이 선명하지 않았다.
케이프타운은 남아연방의 입법기관인 의회의 소재지이며, 금융, 관
광의 도시이며 분위기는 유럽풍이다. 이 도시는 남아연방 제1의 도시
요하네스버그 보다 더 유명하다. 1652년 4월 네델란드 동인도회사가
아시아 무역의 보급기지로서 건설하며 처음에는 네델란드어로 카프
스타트(Kaapstad)라고 하였으나, 그후 영국계 식민 활동의 기점이
되었다. 백인 전용으로 세운 케이프타운대학, 유색인 전용으로 세운
서케이프타운대학 을 비롯하여 각종 전문학교, 박물관, 미술관, 도서
관, 식물원, 동물원 등이 있다 정비된 항만시설이 있는 외에 항공로,
철도, 도로 등 의 기점을 이루는 교통상의 요지로 여름철에는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기후는 온대의 지중해성 기후로 1월 평균기온 섭씨
20.3도, 겨울 섭씨 11.6도 이며, 연간 강수량 526mm로 겨울(우리북
반구는 여름) 5-8월에 비가 많다. 주민의 약 35%가 백인이며 유럽풍
의 대도시 경관을 이룬다. 케이프타운까지 직항편이 없으므로 홍콩,
싱가포르 등을 경유해 요하네스버그로 입국해야 좋다. 홍콩경유하는
경우 인천-홍콩 구간 약 3시가 반, 홍콩-요하네스버그 약 13시간, 요
하네스버그-케이프타운은 국내선으로 약 2시간이 소요된다.
사진: 다음에 올리겠습니다.
선원생할 8, 더반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홍수환선수가 소리친 ‘더반’
1497년 크리스마스때 그 유명한 탐험가 폴투칼인 바스코다가마가 유럽에서 인도로 항해
하다 상륙하여 ‘Natal'로 명명하기 전 까지는 기록에 거의 없었던 지명이다.
1824년 이 항구의 해도를 만들고 ‘포트나탈’, 1835년 케이프식민지 총독 벤저민 더반경
의 이름을 따 더반(Durban)으로 개명되었다.
세계의 주요상업항구로 손꼽히는 더반 항구는 1855년에 개발되기 시작했다
광물, 석탄, 설탕, 옥수수 등이 수촐 되며, 석유를 정제하여 송유관을 통해 요하네스버그
로 공급한다. 제 1차 세계대전이후 초고층 빌딩과 다층건물들이 세워져 현대적대도시로
도시인구는 약 70만명 면적 약 300평방키로미터 이며 기후는 일년 내내 온화한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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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반에 체항 하는 동안 내가 본 것은 더반항에 엄청나게 큰 대형 일본 화물선에(벌크선)
설탕을 며칠을 두고 적재하는데 처음에는 흙을 싣는 줄 알았다. 누런 설탕을 석탄 싣듯이
솓아 붓는 장면이 흡사 황토 흙을 싣는 것 같았다. 정말 더반은 설탕 수출의 기지라는 것
이 실감 났다.
그 당시 남아연방은 인종차별이 심해 공원에 가면 흑백의자가 따로 있었다. 백인용은 흰
색으로 앞쪽에 있고 흑인용은 초록색의자로 뒤쪽에 있었다. 식당, 공연장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인종에 따라 출입이 통제 되고 있었다.
더반은 1967년 후반기 우리 수산개발공사의 인도양기지가 되었다. 우리배(월미 312호)는
대서양의 라스팔마스 기지에서 인도양의 더반기지로 옮기게 되어 긴 항해 끝에 더반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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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RBAN 입항 1967. 7.xx일 출항 1967. 7. 31 입항 1967. 9. 7
TAMATAVE 입항 1967. 10. 7, 출항 1967. 10. 9
PORT LOUIS 입항 1967.12.7 출항 1967. 12.20
DURBAN 입항 1968. 1. 23 출항 1968. 2. 8 귀국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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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반은 우리의 기억에 생생한 홍수환 선수가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홍선수의 어머니 “그래, 수환아, 대한국민 만세다” 당시 현장 생 중계로는 최초인
국제전화로 모자간의 대화는 그 후 시중의 유행어가 되었다..
4顚5起의 기적 이룬 홍수환 선수
글쓴이 : 복어촌 2008. 6. 18.
프로복싱이 스포츠 경기 중 최고의 인기 종목으로 떠올랐던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슈퍼
스타는 세계 챔피언이 된 프로 복서였다. 양대 프로복싱단체(WBA와 WBC)가 인정하는
세계 챔피언 자리에 처음으로 오른 우리나라 복서는 1966년 세계 주니어 미들급을 제패
한 김기수였다. 홍수환은 고교 2학년 때 챔피언 김기수를 동경하며 권투도장을 찾았다.
1974년 7월 4일 남아연방 더반의 적진으로 들어가 벌어진 세계 밴텀급선수권 쟁탈전에서
도전자 홍수환은 챔피언 아놀드 테일러를 쓰러뜨리고,김기수에 이어 두 번째 챔피언이 됐다.
<대한국민 만세>는 전화를 연결한 어머니 황농선 여사가 방금 세계챔피언이 된
현지의 아들에게 감격에 북받친 목소리로 “그래, 수환아, 대한국민 만세다”라고 한말에서
유래된다. ‘대한민국 만세’가 본딧말인데 방송 중계를 통해 함께 감동을 나눈 사람들의
입을 타고 그 시대의 유행어가 됐다.
그 무렵 세계 챔피언이 되어 돌아 온 복서의 위상과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환영 카퍼
레이드와 시청 앞 환영 군중대회를 보면 실감할 수 있다. 꽃다발로 목을 두른 홍수환과
어머니 황농선 여사가 공항을 출발한 오픈카를 타고 시청 앞 시민환영 행사장으로 가는
동안 거리는 “대한국민 만세‘의 함성이 이어졌다. 당시 홍수환은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일
등병이었다.
필자는 그때부터 홍수환의 전담 취재기자로 1977년 11월 27일 파나마의 복싱 영웅
카라스키야를 4전5기로 제압하고 돌아온 후까지 꾸준히 활동을 취재했다. 지금은 헤어졌지만
첫 부인과 결혼을 앞두고 연애중일 때도 처음 기사화해서 화제를 모았던 기억이 새롭다.
워낙 빅 스타였던 탓으로 여걸이었던 홀어머니 황농선 여사와 당시 학생인 동생 홍수철
(나중에 가수로 활동)도 이름이 알려진 명사 대접을 받았다.
그토록 화려했던 영웅에게도 시련과 방황의 시절이 다가왔다. 지금은 재결합의 부부가
되었지만 가수 옥희와의 스캔들로 조용하던 가정이 흔들리기 시작해 결국 나중에 첫 부
인과 헤어졌고 집안의 튼튼한 중심이었던 어머니도 타계했다. 그는 한때 팔자에도 없는
알래스카 등지를 떠돌며 모진 시련을 겪었다. 1950년 5월생이니 회갑도 멀지 않았다. 지
금은 복싱 해설도 하고 관련 단체 활동도 하며 원로 체육인사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
다. 그의 뒤를 이어 수없이 쏟아져 나온 챔피언들이 화려한 ‘영웅의 전설’을 안고 어딘가
에서 살고 있지만 뚜렷하게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인물은 많지 않은 것 같다.
홍수환의 트레이드마크는 역시 ‘4전5기의 신화’다. 2회전에서 살인적이라는 KO펀치를 얻
어맞고 4차례 다운되었으나 3회전에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식의 저돌적인 인파이팅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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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선원생활하며 다녔던 아프리카 각도시/항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