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성의 외곽
주변은 소규모 전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고 부러진 깃대 위에서 까마귀가 신나게 울어대었다. 병사들이 지나가길 기다리며 승냥이들은 탐욕스러운 혓바닥을 낼름거렸다.
삼백 명 정도의 오나라 병사들은 대열을 정비하고 부상자들을 부축했다.
장흠과 주태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문득 하늘을 보던 장흠이 입을 열었다.
"이봐, 유평."
"음, 뭔가?"
장흠은 칼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를 소매로 스윽 닦아내며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말했다.
"요즈음 이 피비린내 맡는 게 싫어지는군."
주태는 별 것 아니라는 듯 툭 내뱉었다.
"그러면 나한테 맡기라고. 내 자네 몫까지 적들의 머리통을 날려주지."
"내 말은 그게 아니야."
주태는 비가 올 것 같은 하늘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장흠에게 돌렸다.
"그러면?"
"자네는 전쟁이 뭐라고 생각하나?"
전쟁이라면 이골이 난 사람들이다. 주태는 오늘 따라 궁상 떨어대는 친구의 머리상태를 의심하고 싶었지만 소신 껏 자신이 생각하는 전쟁의 정의에 대해 말해주었다.
"인간 도살장이지."
"뭣하러 이 짓을 하는 걸까?"
장흠의 목소리에는 회한에 차 있다. 주태는 버릇처럼 대도의 날을 볼에 부벼대며 말했다.
"이유? 자네 전쟁에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는가? 그것 참 의외로군."
"무슨 뜻인가?"
"전쟁에 이유 따위는 없어. 민중의 안정, 정의, 태평성세는 유비나 조조같은 자들이나 떠들어대는 소리지. 다들 자신의 잇속과 권력, 명예를 위해 싸워."
"자네는 민중의 안정, 정의, 태평성세를 위해 싸우는 게 아니군? 주군께서는 민중의 안정, 정의, 태평성세를 말하시는데도?"
"그건 나와는 무관해. 주군은 다만 나의 바램을 위한 수단이다."
"천하를 얻으려는가?"
대역죄라 불릴 만한 말들이 오갔지만 둘 모두 신경쓰지 않았다.
주태가 희미하게 웃었다.
"공혁, 자네는 내가 대망을 꿈꾸는 것 같은가?"
"그러면 자네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 건가? 돈? 권력? 명예? 여자?"
"여자? 푸훗, 자네도 알겠지만 나는 이 나이 먹도록 아내도 맞지 않은 사람이야. 명예? 나같은 해적출신의 놈과는 어울리지 않는군. 권력? 그랬으면 해적두목이나 계속 했을 것이야. 돈? 글쎄, 여기서 나오는 봉급보다 거대 상단 하나 터는 게 많이 남을걸?"
장흠은 자신의 친구를 바라보았다. 주태는 풀어헤쳐진 긴 흑발을 묶었다.
"나는 동료와 부하를 위해 싸우지! 또 내 바램, 그러니까 해안경비가 되기 위해서 싸우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 것이지만 듣는 이는 그렇지 못했다. 장흠은 푸훗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자네 위치라면 충분히 해안경비보다 높지 않은가?"
"난세이다 보니 내 무용에 해안경비를 시켜달라고 해봤자 이렇게 살육장에 내몰기나 하니 어찌 해안경비가 되겠는가? 그러니 주군이 죽어서는 않되는 거지."
"기가 막히는군."
"기억 않나는가? 애시당초 우리가 백부에게 귀순할 때 나는 그에게 '당신의 부하가 될 터이니 이 난세가 끝나면 내 소원 한 가지를 들어달라'고 했어."
"굳이 해안경비는 뭐란 말인가?"
주태의 표정이 씁쓸해졌다.
소나기마냥 쏟아부으면 후련하련만 비는 신경이라도 긁어대는 듯 조금씩 추적추적 내렸다. 한참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주태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제기랄, 나만 두고 뒈져버린 빌어먹을 우리 형의 소원이야."
주태가 형과 단 둘이 자랐다는 걸 아는 장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죽기 직전, 병색이 짙은 형이 구걸해서 얻어 온 썩은 사과를 내 손에 쥐어주며 그렇게 말했어. '나는 네가 해안경비병이었으면 좋겠구나'라고."
그때 저만치 빗속을 뚫고 한 병사가 달려왔다. 장흠이 나서서 물었다.
"무슨 일이냐?"
병사는 엎어지듯이 한쪽 무릎을 꿇고 헉헉거리며 말했다.
"본대가 위험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선성이 도적 떼들에게 포위되었습니다!"
주태도 퍼뜩 병사를 바라보았다.
"주군은?"
"위험하십니다."
선성으로 향하는 비탈길
주변은 협곡이고 길은 급격했다. 선성은 오천 여 도적 때에게 포위되었고 그 포위를 뚫고 전진하는 삼백 여 기의 기병들이 있었다. 그들의 선두에는 머리를 뒤로 묶은 긴 흑발의 주태와 그 옆의 장흠이 그들을 이끌었다.
비는 이내 쏟아붓듯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선성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육안으로 확인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주태는 이를 악물었다.
"육시랄, 내가 해안경비가 되지도 못했는데 죽으면 않 된단 말이다!"
그는 말에서 뛰어내려 산길을 기다시피해서 올라갔다. 장흠이 말리려 했으나 이미 주태는 나무들에 가려 보이질 않았다. 그도 따라가고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았으나 군사들을 통솔할 장수는 한 명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는 병사들을 돌아보았다.
'동료와 부하들을 위해 싸운다고?'
창을 움켜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가자, 형제들이여! 그대들의 선두에는 늘 내가 있을 것이며 항상 너희들의 방패가 되어줄 것이다!"
와아아아!!
"비켜라, 잡종들아!"
주태는 대도로 앞에 걸리적거리는 적들을 쓸어버리며 성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섬뜩한 예리함을 느끼며 고개를 젖혔다. 창날이 그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주태는 자신을 향해 창을 내지른 도적의 배에 대도를 박아넣고 비명을 지르는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빠각!
도적의 몸이 추욱 늘어지면서 마치 꼬치처럼 주태의 대도에 꿰었다. 주태는 대도를 털어내 시체를 내팽개친 뒤 종횡무진으로 날뛰면서 손권을 찾아다녔다. 그가 손권을 발견한 것은 손권의 마지막 호위병이 도적들의 창에 난자당하는 순간이었다.
"빌어먹을 새끼들! 호위병이라는 것들이 이런 잡종들한테 당하는가?"
주태는 몸을 날려 공중에서 손권을 포위한 도적들을 향해 떨어져내렸다.
콰앙!
엄청난 대도의 무게 때문에 주태가 다리를 디딘 곳이 푹 꺼졌다. 몇몇 도적들은 창으로 그의 대도를 막아보았으나 그 힘을 당해내지 못해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오, 유평!"
"주군, 내 뒤를 따르시오. 네 걸음 밖으로 벗어나면 나도 책임 못지니 바짝 붙는 게 좋을 거요!"
신경이 곤두 선 주태의 말투는 주군에게 하는 것 치고는 꽤나 건방졌으나 손권은 이 순간만큼은 주태가 미륵불로 보였다.
주태는 '잡종'들을 어마어마한 대도로 쳐내며 성문을 향해 돌진했다. 손권은 그의 말대로 주태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다가오는 적들을 고정도로 베면서 뒤따랐다.
피융!
손권에게 화살이 날아오자 주태는 위험을 말해줄 겨를도 없이 왼 팔을 뻗었다.
팍!
주태의 왼쪽 팔에 화살이 박혔다. 그는 신음하나 내는 법 없이 오른손만으로 대도를 휘둘러 기세 좋게 달려오던 기병의 허리를 절단내었다. 순간 창 한 대가 주태의 허벅지에 푸욱 박혔다. 주태는 창을 떨리는 왼손으로 뽑아버리고 욕을 내뱉으며 도적의 목을 날려버렸다.
절뚝거리며 성문 가까이 도달하자 주태는 손권을 내던지듯이 성문 밖으로 밀쳐내고는 대도로 땅을 짚고 숨을 골랐다.
"잡종새끼들!"
그 와중에도 그의 눈빛은 '잡종'들을 압도했고 온 몸에 피를 흠뻑 뒤집어 쓴 주태에게 달려드는 간 큰 도적들은 얼마 없었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북소리와 함께 주태를 향해 화살비가 날아들었다.
"그거 아느냐, 잡종들아! 이길 자신이 없으니 뒤에서 화살이나 퍼붓는 놈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개새끼란 거!"
그는 넓은 대도를 방패처럼 앞으로 내밀고 있다가 화살비가 뜸해지자 몸을 일으켰다.
"이 대가리를 뽑아다 밑구녁에 처박아버릴 놈들아! 나는 육시랄 내 형의 소원을 들어주기 전까지는 않죽어! 아니, 못죽어!!"
파죽지세로 병사들을 향해 돌진한 주태가 대도를 휘둘렀다. 동시에 다섯 명이 피떡이 되어 날아갔고 나가떨어지는 병사들에 밀려 도적 떼는 파도마냥 출렁하고 밀려났다.
하지만 주태는 많이 지친 상태라서 대도를 늘어트리고 잠시 헉헉거려야 했다. 그때 한 용감한 도적이 주태의 팔을 끌어안았다. 주태는 욕설을 내뱉으며 도적을 머리로 들이받았다.
빠각!
도적의 투구가 박살나며 그 용감한 도적은 그 자리에서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다. 주태는 이마에서 피를 줄줄흘리며 쓰러진 도적에게 대도를 찔러넣으려다가 등이 시원하다고 느꼈다.
물론 시원함은 지지는 듯한 통증으로 바뀌었다.
도적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주춤거리는 주태의 온 몸에 창을 쑤셔넣었다.
"잡종들아, 내가 죽을 것 같으냐!"
주태는 피를 울컥 토하면서 대도를 한 바퀴 휘저었다. 병사들이 창대를 놓치며 허리가 절단되어 날아갔다. 온 몸에 창을 대롱대롱 메달고 있는 주태의 모습에 도적들은 기가 질렸다. 그는 하나 둘 창들을 뽑아버리고 달려드는 병사들을 계속 내려쳤다.
그때 함성이 일면서 장흠이 이끄는 부대가 도적들을 덮쳤다. 주태 하나만으로도 기가 질렸던 도적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대열이 흐트러져 소수의 오나라 병사들에게 밀렸다. 다시 손권이 정보와 한당의 원군을 이끌고 들이쳐 도적들을도륙했다.
장흠은 말에서 내려 주태를 부축하고 그의 상처를 보며 기겁했다.
"이 미친 친구! 어쩌자고 이런 건가?!"
"내가 말 않했던가? 나는 해안경비 되기 전에는 못죽네."
주태는 씨익 웃으며 왼손 엄지를 치켜올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에.. 그러니까 재밌었으면 좋겠다는 제 말은... 웃기다는 게 아니라 여러 모로 감동을 받건 어쨋건 좀 인상깊고 읽으시는 분들의 감수성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 그리고 '이 미친친구!' 보다 '이 대가리를 뽑아다 밑구녁에 처박아버릴 놈들아'가 더 멋집니다 -_-;
첫댓글 너무 슬프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주태 죽은 거 아닌데요? 과다출혈로 기절.. ;;
근데? 후속작편 없나여?
위에 [단편]이라고 써놨는데 ;;
잼따... 연개소문전은 언제 연제하실생각?
ㅎㅎ 내일 올릴 생각 ;;
주태 재밌나요? 슬픈데 특히 장흠의 한마디 이 미친친구!
에.. 그러니까 재밌었으면 좋겠다는 제 말은... 웃기다는 게 아니라 여러 모로 감동을 받건 어쨋건 좀 인상깊고 읽으시는 분들의 감수성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 그리고 '이 미친친구!' 보다 '이 대가리를 뽑아다 밑구녁에 처박아버릴 놈들아'가 더 멋집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