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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동
벌말[平洞]화평동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벌판에 마을이 형성되어 벌말이라고 부르던 것을 한자화하여 평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화촌동(花村洞, 花村)곶(串)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곶마을’이라 부르던 것이 부르기 쉽게 ‘꽃마을’이 되고 다시 한자화되어 화촌, 화촌동이 되었으리라 추정된다.화평동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화촌동과 평동을 병합하여 그 마을 이름의 첫 자를 따서 지은 합성 지명이다. 화촌동은 지형이 꽃처럼 생기거나 마을에 꽃이 많아서 비롯된 마을이름이 아니고 곶(串)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곶마을’이 되고 곶마을은 부르기 쉽게 ‘꽃마을=화촌(花村)=화촌동(花村洞)’이 되었다고 보여진다. 아마도 마을 주변이 옛날 고잔리(古殘里)로 그 지명유래는 ‘곶의 안쪽마을’에서 유래되었음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리고 화평동에서 으뜸된 마을이 있는 평동(平洞)은 벌판에 마을이 있어 ‘벌말’이라고 부르던 것을 한자화 한 것이다.【사진】화평교 확장공사(1960년대)구름다리 화평동에 있는 다리.배다리 옛날 조수가 경동 앞까지 밀려와 이곳에 밑으로 배가 지나갈 수 있게 다리를 만들었는데 거기서 유래한다. 지금은 다리를 놓았던 자리에 경인철도의 철교가 놓여 있다.수문통 갯골이 배다리까지 뻗어와 화평동과 송현동 일대에 수문을 만들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다.참외전 거리 현재의 동인천역에서 배다리에 이르는 거리를 말한다. 옛날에 배다리 갯골 변에서 참외를 늘어놓고 팔았다 하여 붙여졌다.화평교(花平橋)수문통에 놓은 다리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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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외田路)
인천광역시 남구 숭의동 숭의 삼거리에서 출발하여 인천광역시 남구청과 숭의 시장 사거리를 경유하여 인천광역시 중구 송월동 제물량로 교차점까지 연결되는 도로. | [명칭 유래] 옛 참외밭 거리라는 지역을 통과하는 도로에서 연유하여 참외전로라고 부르게 되었다. [제원] 참외전로는 연장 3,35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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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말[新村洞]화수동에 새로된 마을로 신촌동이라고 부르며 화수동과 만석동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화도(花島)화수동에서 가장 큰 마을로 지형이 꽃과 같다거나 꽃이 많아 붙여진 땅이름이라고 해설하기도 한다.화수동(花水洞)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신촌리(新村里), 화도동(花島洞-화도진), 수유리(水踰里)를 병합하여 세 마을 이름 첫 자를 따서 신화수(新花水)라 개칭한 합성 지명이다. 신촌은 새로 생긴 마을로 새말, 새마을, 신기 등으로 불리우며 수유리는 옛날 바닷물이 넘어 들어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무네미, 물넘이말이라고도 불리운다. 화도(花島)는 마을 지형이 꽃과 같다거나 꽃이 많아 붙여진 땅이름이라고 해설하기도 한다. 한편 화수동은 화평동, 만석동과 함께 인천부 다소면 고잔리(古殘里) 소속마을이었다. 고잔은 ‘곶(串)의 안쪽마을’을 뜻하는데 1902년 제물포지역이 개항되고 호수가 늘어나면서 마을이 발전되어 곶(串)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곶마을’이 되고 곶마을은 부르기 쉽게 꽃마을 또는 화촌(花村), 화촌동이 되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또 이 마을이 섬처럼 보여 ‘곶섬’이 ‘꽃섬’이 되고 다시 한자로 ‘화도(花島)’로 변천되었다고 보인다. 따라서 화수동의 지명은 화촌동과 수유리의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합성지명으로 곶(串)과 관련 있는 마을이름이라 할 수 있다.【사진】화도진지 쌍우물 무네미 어귀에 쌍으로 있던 우물.화도고개 화도에서 화평동으로 넘어가는 고개.화도진터[花島鎭址]화수동 화도 마을 일대에 있는 화도진의 터로 고종 16년(1879)에 설치하였고 1988년에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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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동
솔고개 송현동에서 가장 큰 마을.송현동 소나무가 많은 고개였으므로 솥고개 또는 한자로 송현(松峴)이라 하였다. 솥고개는 다른 말로 솔재, 송치(松峙)라고도 부르는데 송치의 ‘치’자는 ‘산우뚝할 치’자이므로 대체로 높은 고개에 붙은 고개이름이다. 이후 발음이 변화되어 송티, 솔티라고도 부르는데 동구의 송현동은 낮은 고개이므로 지금은 솔고개 또는 송현이라 부른다.수문통(水門桶)수문통에 있는 마을로 현재 송현3동 지역이다.절굴 절이 있었던 마을이라고 해서 절굴이라고 한다.똥고개 송현동 외곽 바닷가에 시내 분뇨차들이 분뇨를 폐기하면서 붙여진 그 앞의 언덕을 가리키는 이름이다.만수산, 수도국산 인천시의 식수를 대주는 못이 있어 흔히 수도국산(水道局山)이라고도 부른다. 1910년 12월 1일 개설하였으며 인천상수도개발기념비가 세워져 있다.성제동약물터, 약우물터 약물터로 성제동(誠齊洞) 또는 약우물터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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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말, 바깥 송림 송림 바깥쪽 마을을 바깥 송림이라고도 부른다.샛골[間谷, 鳥谷]송현3동에 있는 마을로 간곡(間谷), 조곡(鳥谷)이라고도 불리는데 간곡은 ‘사이골 ⇒ 샛골 ⇒ 간곡’으로 바뀐 것으로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또 조곡이라 이름한 것은 ‘사이=새’를 조류인 새[鳥]로 표기한 것이다. 송림3동 동산고교 앞에서부터 공설운동장으로 향하는 언덕 일대를 가리켰다.송림동 본래 수도국산으로 불리우는 만수산 일대에 소나무가 많았으므로 송림(松林) 또는 송림동이라 하였다.신촌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 그대로였다.안송림 송림동 안쪽에 있는 마을.활터고개[弓峴]송림동 활터고개에 있는 마을이라 궁현(弓峴)이라고 불렀다. 본래 일본 절(대헌고등학교)이 있었던 부처산에서부터 조선후기에 활터에 있었던 활터고개까지로 심한 구릉지였다.만수산(萬壽山)주민들이 산에 올라가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관습이 있어 송림산에 붙여졌던 이름이다. 송림산은 송림동과 송현동의 뒷산, 흔히 수도국산이라고 부르는 곳이다.매화지(梅花址)송림동의 전주 이씨 가문 출신으로 참판과 관찰사를 지낸 이만영(李晩永)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세운 매화당(梅花堂) 앞의 연못자리에서 유래한다.부처산 송림5동에 있는 산으로 산에 일본절이 있었다. 그 산비탈에 부처골이 있다.음나무고개[楡峴]활터고개 동쪽에 있는 고개로 커다른 느릅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유현이라고 부른다.장승거리 장승이 서 있던 자리이다. 송림동 입구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확실한 장소는 알 수가 없다.쥐뿌리 산기슭이 마치 쥐처럼 생겨 붙여진 지명이다. 지금의 송림동과 화평동의 경계가 되는 지역을 가리킨다.팔십팔개소 산에 88개의 부처를 모셔놓은 불당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지금 도원고개 위 예루살렘 교회가 있는 산이다.활터고개[弓峴], 헐떡고개 활터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는 헐떡고개라고도 부른다. 송림동 재능대학 앞 도로를 가리킨다. 고개가 활처럼 휘어져서 붙여졌다고도 하고 이곳에 활터가 있어서 붙여졌다고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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괭이부리[猫島]만석동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서쪽에 있는 산부리가 고양이처럼 생긴 섬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바다를 메워 육지가 되었다.만석이 마을 양곡 만 석이 저장되는 야적장이 있었던 마을이다. 바다에 연해 있었다.수유리(水踰里), 무네미 화수동, 만석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수유, 무네미라고 부른다. 바닷물이 넘어 들어왔다고 하여 물넘이 ⇒ 무너미 ⇒ 무네미’가 되었고 다시 한자로 수유, 수유리라고 의역된 것이다.작약도[勿淄, 舞雉]괭이부리 북서쪽에 있는 섬으로 본디 이름은 물치, 무치였다. 작약도는 일제 때 붙인 이름이며 외국인들은 보아제섬 또는 우디아일랜드라고도 불렸다. 외세의 침입으로 작약도의 이름도 다양해졌으며, 천혜의 아름다운 지형과 수목으로 덮여 있는 피서지로 유명하여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팔경원지(八景園址)서해의 풍광을 보기 위해 일본인이 괭이부리에 조성했다는 유람지를 가리킨다.호랑이굴 묘도 안에 괭이부리 근처에 있는 굴. 어느 봄날 마을 부녀자들이 나물을 캐러 괭이부리산으로 갔다가 굴을 하나 발견하였다. 굴안에 호랑이 새끼 3마리가 있었다. 그들은 호랑이 새끼가 귀여워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미 호랑이가 나타나 으르렁 거렸다. 이에 놀란 부녀자들은 혼비백산하여 나물바구니와 수건 등을 버리고 집으로 도망쳤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에 그들이 놓고 온 바구니와 수건 등이 마을 입구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호랑이가 제 새끼를 해하지 않아 고맙게 여기고 가져다 놓은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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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영초등학교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b0353&logNo=220478466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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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 복숭아밭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1946년 1월 1일 인천부 도원동으로 명명 1957년 1월 1일 인천시 도원동으로 명칭 변경 1968년 1월 1일 인천시 중구 도원동 1981년 7월 1일 인천직할시 중구 도원동으로 개칭 1995년 1월 1일 인천광역시 중구 도원동으로 개칭 도원동 광성중학교 광성고등학교 중앙여자상업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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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의동
숭의동(崇義洞)은 구한말까지 인천부 다소면에 들어 장사래말(마을)이라 불렸던 곳이다. 지금은 모두 복개되고 건물들이 들어서 전혀 알아볼 수가 없지만, 192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이 일대는 바닷가였고 갯벌이 넓게 퍼져 있었다. 그 사이로 기다란 개천이 하나 흘렀는데, 그 개천이 길고 또 꾸불꾸불 흐르는 모양이 뱀같아서 장사래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장사래말은 1903년 비슷한 뜻의 장천리(長川里)로 바뀌었다가 1906년에는 여의리(如意里), 장천리, 독각리(獨脚里)로 나뉘어졌다. 여의리는 이 마을에 있던 한 절에서 소원을 빌면 ‘뜻[意]대로 [如] 된다’고 해 붙은 이름이라는 얘기가 있는데, 받아들이기 어려운 설명이고 그 유래가 여전히 분명치 않다. 독각리는 지금도 ‘독갑다리’라는 이름이 남아있으며, 외나무다리를 뜻하는 ‘독각(獨脚)’에서 유래했다는 등 몇 가지의 해석이 있다.어쨌든 장사래말이나 독각리 모두가 이곳에 다리를 놓아야 건널 만한 개천이 흐르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여의리와 장천리, 독각리는 1914년 부천군으로 편입되어 합쳐져 장의리(長意里)가 되는데 이는 장천리와 여의리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이 장의리가 광복 뒤인 1946년 1월 전의 이름과는 관계없이 숭의동이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되었는데, ‘숭의’는 당시 광복을 경축하면서 ‘옛 신령들을 숭상해 뜻을 이루자’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말뜻은 좋았는지 모르나 결국 이전의 역사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이름을 갖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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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남구 도화동의 지명유래
2006.07.29. 12:18
조회 2,319
도화동은 원래 다소면 베말, 일명 쑥골, 도마다리라 불리우다가 1903년 8월 인천부가 동리명을 확정할 때 화동, 도마교리였던 것을 1914년 3월 1일 부천군이 신설되고 다소면과 주안면이 통합되어 다주면이 된 직후 인천관할 동리의 변동이 있을 때, 1914년 11월 20일 도화리로 개칭되었으며, 1937년 1월 15일 정회규정 제정 시행시 일본식 정명 앵정으로 개정하였다가 1946년 1월 1일 해방 직후에 도화동으로 개칭하였다. '화동'이란 벼마을을 뜻하며 일명 쑥골이라 불리웠고, 도마교리란 경인도로가 개설될 때 '말이 지나 다니는 다리마을'이라는 뜻이고, 도화리란 도마교리의 '도'자와 화동이랑 '화'자를 따시 지은 이름이다.
▶ 못머리말
'연못이 있는 마을' 이란 뜻이다. 수봉산의 옛 이름이 수봉산이 없다. 수봉산을 둘러싸고 있는 도화동은 우물이 많았다고 전한다. 그래서 수봉산이란 뜻도 물에 둘러싸여 있는 산이란 뜻이다. 옛날 수봉산 주위의 도화동에는 논이 많이 있었는데, 이 우물의 풍부한 물을 이용해서 농사를 지었다. 이곳의 옛이름도 다소면이었는데, 이 역시 우물이 많은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 도마다리말
도화동은 원래 다소면 베말, 일명 쑥골이라고 불리우다가 뎡인도로가 개설될 때 말이 지나 다니는 다리가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도마다리말'이라고 했다. 이 도마다리말이 도화동의 뿌리가 된 것이다.
▶ 신계동
6.25전쟁은 인천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는데, 인천상륙작전 등의 사건도 많았지만 북한이 가까운 관계로 특히 인천항과 가까운 황해도에서 배를 타고 인천항으로피난민이 많이 내려왔다. 이 갈 곳이 없었던 6.25 피난민들이 비교적 북녘의 고향과 가까운 인천에 정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피난민들이 여러 곳에 정착했는데, 그 중 '신계동' 이 피난민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며 새로운 마을을 개척한 대표적인 마을이다. 신비골이라고도 불렀다.
▶ 메기골말
물이 많이 나오는 우물과 연못이 도처에 있었던 도화동인지라, 이러한 연못에는 메기가 많이 서식하였던 관계로 메기골 마을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이밖에 청주골말, 다랭이말, 자골말 등이 있었으며, 골짜기로는 각골, 수봉골 등이있었다. 또 고개로 뱀고개, 달강재, 차돌고개 등이 있었다.
▶ 숫골
도화동의 수봉산 둘레에는 많은 우물이 있어 농사짓기에 좋은 곳이었으며, 비가 오는 장마철에는 물기가 많아 나막신을 신고 다녀야 할 만큼 '물이 많은 골짜기'란 뜻으로 숫골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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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봉산
먼 옛날, 수봉산은 북구의 계양산과 같이 바다에서 떠 들어와 이곳에 위치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그러한 연유로 원래 산이름은 <水봉산>이었는데, 어느 사이엔가 현재의 한자 명칭 <壽봉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마 옛날 이 산의 주위가 바다나 바닷가였기 때문에 생긴 전설이었을 것이다. 수봉산은 주안산의 한 줄기로서 산줄기 외에는 3면이 평지로 옛날 에는 바닷물이 그 주위를 넘나들어 물속에 있는 것같이 보였을 것이다. 해발 104m 의 아담한 구릉인 수봉산은 옛날 다소면 관할이었는데, '다소'란 다수가 변한 말로 이 지역에 물웅덩이가 많아 농사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또 수봉산기슭에는 <다랭이>라는 마을이있는데, 이는 다남의 뜻으로 이 산의 정기가 좋아서 남자가 많이 태어났다고 한다. 1972년, 자유공원 서쪽 구석에 초라하게 세워진 인천출신 전몰장병의 영령을 기리는 현충탑의 이전 건립지를 물색하던 중, 장시 안동 권씨의 문중산이던 수봉산의 정상부 약 5만평을 시에서 매입하여 현재의 웅장한 현충탑을 건립하게 된 것이다. '너분바위'라 불렀던 주안 지석묘는 주안동 집근처에 여러개 흩어져 있었는데, 그 중 하나를 옮긴 것이다.
수봉산에는 수봉암과 청룡사, 연화사 등의 사찰이 있으며 인천 시가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인 '우강정', 어린이 놀이터, 임간 산책로와 시민 운동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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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동 제물포역
인천을 대표하는 지명으로 곧잘 쓰이는 제물포(濟物浦)는 원래 지금의 중구 중앙동, 항동일대에 있던 작은 포구였다. ‘제물’이라는 말은 조선 초기부터 이곳에 있었던 수군 기지 제물량에서 비롯됐다.『세종실록지리지』에 ‘제물량은 인천군 서쪽 15리에 있다. 성창포(城倉浦)에 수군 만호(萬戶)가 있어 수어(守禦)한다’고 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도 ‘제물량영(濟物梁營)은 인천부 서쪽 19리 되는 곳에 있고 수군 만호 1인이 있다’라는 기록이 나와 있다. 이는 한양에서 가까운 해안의 수비를 위해 이곳에 설치한 군사기지를 말한 것인데,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을 봐도 인천항의 옛 이름은 성창포였고, 제물포는 그 안에 있는 작은 나루터였음을 알 수 있다.일부 향토사학자들은 ‘제물’을 ‘제수(濟水)’ 곧 ‘물을 다스린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인천 앞바다의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워낙 커서, 물때에 맞춰 배를 대지 않으면 갯벌에 배가 얹혀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생겼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보다는 이곳이 포구이니 만큼 제물은 ‘물을 건넌다’는 뜻의 ‘건물’에서 비롯된 말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건널 제(濟)’자는 ‘건넌다’는 우리말의 뜻을 따서 쓴 한자이고, ‘만물 물(物)’자는 바닷물의 ‘물’을 소리만 따서 한자로 옮긴 것이다.또한 제물포의 ‘포(浦)’는 ‘물이 들어오는 곳’을 뜻하는 우리말 ‘개’를 한자로 옮긴 것이니, 결국 제물포는 ‘건물개’라 불리던 곳이었고 이것이 언제부터인가 한자로 바뀐 것으로 보는 것이다.제물포는 원래 지금의 자유공원을 중심으로 넓게는 중구와 동구 지역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1963년 1월 당시의 경인전철 숭의역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제물포역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지금은 그 역사가 있는 남구 도화동 일대가 마치 제물포인 것처럼 변해 버리고 말았다. 철도청에서도 당시 왜 숭의역을 제물포역이라 이름 붙였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설명을 못하고 있다.어쨌든 이 때문에 원래 제물포와 인천도호부의 위치를 따져볼 때 지금의 경인전철 인천역이 제물포역이 되고, 오히려 제물포역이 인천역이 돼야 타당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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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안동은 원래 인천부 다소면 충후부와 사미(시미라고도 부른다)마을이었다.1903년 8월 인천부가 동리명을 확정할 때 충훈부리, 사미리로 불리우다가 1906년 5월 동리명 개정으로 충훈리, 사미리로 하고, 1914년 3월 1일 부천군이 신설되고 동년 4월 1일 주안면과 다소면을 통합해서 사충리가 되었는데 1936년 10월 1일 사충리가 인천부에 편입된 직후 간석동의 일부와 관교동의 일부를 편입하여 주안정이라 개칭하였다. 1946년 1월 1일 해방직후 동명을 주안동이라 개칭하였으며 1950년 1월 9일 동명분할로 주안1, 2동으로 구분되었다. 충훈이란 이 마을에 옛 조선시대 정부기구인 충훈부의 방죽이 있어서이고, 사미리란 아름다운 선비라는 뜻이다. 구한말의 이조판서 이헌경의 출신 마을을 뜻한다. 사충이란 사미리와 충훈리를 합한 이름이다. 주안은 원래 석바위 뒷산이 주안산이고 이산의 흙색이 붉고 산형태가 마치 기러기가 내려앉는 것 같다해서 주안산인데 옛날 지금의 간석동, 구월동을 합쳐 산이름을 따서 지은 면명이다. 경인철도가 개통될 때 간석동에 주안역을 처음 설치해서 주안역이라 하다가 지금의 주안동으로 역사를 이전하고도 그대로 주안역이라 부르고 또한 주안염전을 설치해서 주안동이 된 것이다. 주안은 1970년대에 5개동이다가, 1980년대에 다시 8개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천을 대표하는 땅 이름 가운데 하나인 주안(朱安)은 주안산(朱雁山)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요즘에는 없어져 쓰이지 않는 이름인 주안산은 『동국여지승람』이나 『대동여지도』 등의
기록으로 미루어 지금의 간석동 만월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글자 그대로 흙이 붉고[朱]
산의 모양이 기러기[雁]가 내려앉은 것 같아 주안산이라 불렸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대동여지도』에 주안산(朱岸山)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 쉽게 믿을 수 없는 해석이다. 이 때문에 일부 국어학자들은 이를 산천에 제사 지내는 ‘밝’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옛날 도읍지나 중요한 행정 관서가 있는 곳에서는 주변의 산이나 바다에 국가나 마을의 평안과 풍년, 풍어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 이런 곳의 땅 이름에는 ‘한[大]밝’ 또는 그 변형인 ‘한밭’처럼 흔히 ‘밝’이라는 말이 들어갔는데 이는 곧 천신제(天神祭) 사상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 ‘밝’은 그 뒤 한자로 바뀌는 과정에서 그 발음 때문에 명(明;밝다), 주(朱)나 적(赤;붉다), 족(足;발) 등으로 파생됐는데, 주안산도 그 옛날 같은 기능을 했고, 또 똑같은 지명의 변천 과정을 거쳤다는 해석이다.어느 쪽이든 주안은 원래 지금의 남동구 간석·구월·십정동 일대에 해당하며, 1898년 경인 철도가 만들어질 때 당시의 간석리에는 말을 관리하던 주안역이 있었다. 그러나 철도가 생기니 이 역은 필요 없게 됐고, 그 대신 당시 충훈리(忠勳里)라 불리던 지금의 주안동에 새 역사가 생겨 그 이름이 주안역이라고 붙었다. 충훈리란 조선시대 바닷가였던 이곳에 정부 기구인 충훈부(忠勳府)의 방죽이 놓여 있어 붙은 이름이다.이처럼 충훈리에 주안역이 생긴데 이어 1920년대 이곳에 생긴 염전까지도 주안 염전이라 불리면서 결국은 충훈리 일대가 주안이라는 이름을 빼앗아 오게 됐다. 주안은 그 뒤 일제에 의해 ‘주안(朱岸)’에서 지금과 같은 ‘주안(朱安)’으로 한자 표기가 바뀌게 되는데 그 이유는 분명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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