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방1/수필/이정옥
봄이 오는 소리
정오의 햇살이 들썩거리는 속살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살며시 고
개를 숙인다. 여기저기서 가슴이 쩍쩍 갈라지는 소리 들린다. 동네 꼬
마들도 신이 난 듯 두꺼운 외투 훌훌 벗어 던지고 산으로 들로 힘차게
달려가 본다. 잠자는 호수에게 달려가 문을 두드려 본다. 파장이 인다.
만물의 소생이 한 점 한 알의 씨앗에게 시작 되듯이 일렁거리는 물결
의 춤사위는 어느 새 호수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다. 잠시 가벼운 마음
으로 일상을 접고 마을 어귀 밭두렁에 귀 기울려 본다. 차갑지 않다.
겨우내 사랑방 아랫묵에서 느슨함을 만끽했던 농부 아저씨도 덩달아
신이 난 듯 들녘의 신부를 맞이하려 단장을 하니 온 세상이 흥겨움에
춤이라도 출 것 같은 기분이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기계문명에 귀 닫
고 순수의 들판으로 달려가 신부가 되고 싶다.
임이 오는 대지를 바라보는 마음은 설레임으로 가득 차는가 보다.
괜스레 가슴이 뛴다. 세월의 숫자에 못 이겨 이젠 추억속의 이야기로
남으리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바구니 옆에 끼고 쑥 캐러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락거린다. 현실은 조금도 내게 그 시간을 내어 줄 것 같지
않기에 상상의 날개를 달고 추억속의 담장을 넘어 본다. 쌀 밥 한 그
릇이 금보다도 귀하던 시절, 쑥이란 우리의 반찬이요 간식이요 주식으
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것이였다. 개울에서 멱을 감을 때는 귀에
물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쑥 몇 잎을 떼어와 손으로 비벼 귓속에 꼭꼭
밀어 넣고선 마음 놓고 잠수를 했었다. 지금도 가끔은 그 옛날 기억을
더듬어 쑥이 나올 때면 쌀가루에 버무려 쪄 먹기도 하지만 그 때 그
맛이 나지를 않는다.
영원이 그 자리에 서 있을 것이라며 각오라도 한 듯 붉은 벽돌로 단
단하게 둘러쳐져 있던 교문이 어느 날 자유의 함성을 지르기라도 했을
까 산산 조각이 났다. 딱딱한 시멘트의 조각들이 이사를 하고 그 자리
에는 연분홍 철쭉꽃이 얼굴을 내미는가 싶더니만 그와 함께 이사르 온
갖가지 돌들과 잔디가 아담하게 자리를 잡았다. 내 것이라 울타리를
만들어 놓고 다듬는 뜰이 아니라도 눈만 뜨면 바라볼 수 이쓴 정원이
새로 생겼으니 어린아이 마냥 행복하기만 하다. 이제 내가 떠나기 전
에는 그들이 먼저 떠나지 않으리란 생각을 하니 새로운 벗 하나 생겼
다는 마음에 왠지 든든하기만 했다. 무엇이든 가까이 있다는 것은 눈
길 한 번 더 마주칠 수 있으며 손 한 번 더 잡아 줄 수 있기에 멀리
있는 인연보다 이웃사촌이 더 정겹다는 것이리라
계절의 순리 따라 찾아온 임의 소리와 함께 생명의 환희를 맛보던
날, 세월의 교차로에 서서 잠시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부
인하려고 애를 써도 한 겹 두 겹 내려 않는 시간의 두께는 가냘픈 두
어깨의 마음을 헤아려 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내 가슴 한 쪽에서는 빨
리 달려가 이목구비를 확인해 보고 싶으니 달려 갈 시간을 점찍어 두
고 분주히 채비를 한다. 분명 희망이 부르는 소리이기에 어디까지라도
달려가고 싶은 것이다.
설레는 가슴 접고 일상에 서면 분주함이 앞선다. 생명의 끈을 이어가
기 위해서는 필수요건이기에 맥박이 뛰고 심장이 멈추지 않는 이상 달
리고 또 달려야 한다. 때로는 더 잘 달리기 위해서 휴식이란 생수의
샘물을 마시면서 가고 또 간다.
아직도 먼 산 위에는 눈보라가 휘날리고 흰 잔설들이 여기저기 남아
떠나기 싫은 모습으로 다가오는데 아래 마을에서는 쑥 캐러 가는 여인
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함께 떠날 여유 없이 안타까워하는 내 마음
을 알기라도 했을까 교문 가장 자리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 들리는
것 같아 달려가 곁에 살며시 앉아 본다. 바싹 마른 잔디 사이로 뽀족
이 내미는 얼굴은 신기하기만 하다. 그 가냘픈 몸으로 밟고 밟아 다
져진 그 땅을 어찌 뚫고 올라 올 수 있을까 자연의 섭리가 어찌 위대
하지 않겠는가 누군가의 손길이 있기에 그 여린 잎새 하나에서도 꽃
을 피우며 열매를 맺게 하리라.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며 위대하다고
하지만 바위틈 사이에서 피는 꽃을 흉내라도 낼 수 있단 말인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할 일만 하고 우리를 위해 그 몸 다 내어주고 떠나는
모습, 다시 한 번 새겨야 할 것 같다.
돌 틈 사이로 얼굴 내미는 갖가지 잡초와 꽃들이 오늘따라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아이들이 던지고 간 장난감 부스러기와 쓰레기들이 행여
그 예쁜 얼굴에 상처라도 내면 어찌하나 염려되어 모래알만한 조각까지
지도 하나하나 뽑아내니 어느새 새 생명들이 어머니가 된 듯 하다.
나늬 어머니는 연약한 나를 바라보시며 아무 생각 말고 건강하게만
자라라고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을 것이다. 행여 날아가는 가시들이
날아와 내 보드라운 살결에 상처라도 낼까봐 감싸고 또 감쌌을 것이다.
그 모습 다시 한 번만이라도 뵙고 싶어 오늘 한 번만이라도 노란 새싹
들이 올라오는 길 따라 함께 오실 수 없는지요. 간절한 소원을 전하고
싶은 날이다. 잘 계신다고 전화 한 통화 주신다면 봄의 전령사가 전해
줄 것 같으니 말입니다. 행여 오시지 못한다 해도 “너의 가는 길목마다
내 먼저 가 가시덤불 잘라내고 큰 바위 가로막혀 있으면 세상 사람 다
동원해서라도 치워버리겠다 는 그 소리 들리는 듯 하니 새 힘이 불끈
솟아오르는 것 같다. 희망과 용기를 주는 소리 지금 땅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고 있다. 움츠렸던 가슴 활짝 열고 달려가 반가이 맞이하리라.
삶의 영위를 위해 이해관계에 얽혀 넘어졌던 영혼들이여, 깨어지고
넘어지며 밟혀도 자신의 자리만 묵묵히 지키며 사랑을 전하는 자연의
섭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심성이였으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그러면 싸음도 없을텐데.
우리는 봄이 가져다 주는 신비한 소리를 듣기 원한다. 간절히 원한다면
가슴 깊이 있는 욕심과 교만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버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