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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0 | 5.18 알고 있어야하지요...^^ | 2009-05-16 오후 2:39:42 |
이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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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당시의 모습중 참 따뜻한 그림이지요... 그들은 왜 총을 들수밖에 없었나 그리고 어머니들의 주먹밥은 무엇을 의미했나
민중의 역사 어느 한페이지든 감동적이지 않은 장면이 어디있겠습니까만 광주에서 볼 수 있었던 일은 우리에게 여러가지 면에서 많은걸 가르치고 있습니다 민중은 몸으로 세계를 느끼고 그리고 무엇을 해야하는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며 그리하여 급기야 민중의 세상은 살만한 세상일 것이라는 굳은 믿음을 주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5, 18은 너무도 잔인하게 진압되었지만 그러하였기에 들불과도 같이 다시 살아 우리에게 지치지 말라고 다시 일어나 싸우라고 그래서 꼭 승리하라고 지금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민중이 왜 역사의 주인인지 우리 하나씩 알아가볼까요
미국의 세계전략과 한반도, 민주화운동과 박정희 죽음, 광주의 역사성이 하나로 모여 폭발한 것이 5.18이기 때문에 5.18 민중항쟁의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다음 3가지 내용을 잘 알아야 합니다.
1. 미국의 세계전략과 한반도 미국은 2차대전이 끝나고 소련과 함께 지구를 나눠가졌다.
미국의 세계전략은 지구를 자본주의화, 제국주의화 하여 지구를 손안에 넣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주의 대장인 소련의 영향력을 막는 것이 제 1과제며, 3세계를 신식민지로 만드는 것이 제 2과제요, 자본주의 국가에서 진보적인 노동운동의 싹을 없애는 것이 제3과제였다.
한반도는 미국의 세계전략에서 서유럽과 함께 수레바퀴의 하나가 될 정도로 전략요충지가 된다.
왜냐면 동북아에는 사회주의 강국인 소련, 중국, 북한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미국에 맞서고 있고, 유럽에서는 모스크바와 동유럽이 형제국으로 똘똘 뭉쳐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곳은 석유가 나는 중동이었다.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나토와 주한미군의 위상은 미군에서 아주 높다.
해외 사령부 중에서 별 4개가 있는 곳이 바로 나토사령부와 주한미군사령부다.
한국군에서 보안사, 수방사, 특전사령관이 노른자위인 것처럼 미군보직에서도 주한미군은 노른자위다.
주일사령관은 별이 3개다. 이것은 한반도가 일본보다 더 중요한 군사요충지라는 뜻이다.
즉 일본은 대소전진기지인 남한의 후방기지, 병참기지 역할을 하였다.
한국전쟁 때 미국으로부터 이런 역할을 맡아 군수산업을 발전시켜 한국전쟁 특수를 누려 2차대전의 상처를 딛고 빠른 경제성장을 하게 된다.
미국은 우리에게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왕조시대보다 더 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미국에게 전략적 요충지며 그들의 이익이 완벽하게 실현되고 있는 황금의 땅 한국에서 광주시민들이 무장투쟁을 전개하자 미국은 그들의 '전략과 이익'을 위해 주저하지 않고 전두환에게 한국군의 투입을 승인하고 미국 항공모함을 진해로 보내면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그들이 직접 내뱉은 말을 보자.
"한국사태는 인권문제가 아니고 동북아에서 안정유지를 바라는 미국의 이익에 관한 문제였다."
- 5월 31일 미 고위정책 재검토회의 -
"사이공 함락 후 아시아에서 미국의 우방이 맞이한 최대 위기며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다."
- 5월 27일 워싱턴 포스트 -
미국은 75년 베트남전 패배, 캄보디아 혁명, 미국의 안방인 남미에서 칠레, 니카라과 혁명, 아프니카스탄에 소련군 진주, 그리고 결정적으로 79년 이란혁명으로 미대사관이 점령되면서 3세계전략에 커다란 구멍이 생긴다.
이런 악몽이 채 가시기도 전에 미국의 '세계전략과 이익'에 엄청나게 중요한 한반도에서 무장투쟁이 일어나자 질겁했으며 군사적으로 적극 개입한 것이다.
2. 민주화운동의 성장과 박정희 죽음
총으로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끝내 총성과 함께 세상을 떴다.
그는 18년 동안 반공과 경제발전을 앞세워 자기에게 저항하는 사람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렸고 공장과 대학에 경찰을 들여보내 노동자와 학생들의 움직임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감시하였다. 민중의 위대한 힘을 보여주었던 4.19의 감동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정희는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이 땅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싹을 군화발로 짓이겨버렸다. 그러나 민중은 밟을수록 생명력이 질겨지는 보리와 같이 거센 눈보라를 이겨내고 새봄을 기다리면서 자신의 힘을 키우고 있었다. 마침내 79년 10월 26일 독재자가 사라지고 지배권력은 흔들렸다. 대학생들이 가장 먼저 일어섰고 집단행동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노동자들도 2,168회의 노동쟁의를 통해 그동안 억눌린 설움을 마음껏 뿜어냈다.
이렇게 민주주의가 찾아오는가 싶더니 또 다른 독재자가 나타나 이제 막 싹이 나고있는 보리밭을 군화발과 탱크로 뭉게 버렸다. 육사생도를 움직여 5.16 군사쿠데타 지지 데모를 벌였고 청와대 경비를 하면서 박정희 양아들이 된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으로 있으면서 군대를 손아귀에 넣을 수 있는 자리에 있었다.
오래 전부터 권력을 노린 그는 유학할 때 미국정부와 군부핵심 인물들과 친분을 다지면서 미국으로부터 믿을만한 친미성향의 정치군인으로 쑥쑥 자라고 있었다. 그중 한사람이 주한미군 사령관인 워컴이다. 전두환은 워컴과 베트남전에서 깊이 사귀면서 80년 한국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전두환은 경쟁자인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없애기 위해 79년 12월 12일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청와대를 향한 게임에서 가장 앞서나갔다.
이렇게 군대를 손에 쥔 그는 민중의 저항만 누르면 대통령 자리에 올라앉을 수 있었다.
그래서 80년 2월18일 공수부대를 비롯한 주요 부대에 폭동진압훈련을 명령하고 투입을 준비시켰다.
다음은 2월 27일 국방정보국이 미국방부에 보고한 '특전사 부대위치와 주요인물'에 대한 비밀전문이다.
'특전사는 국내치안에 계속 개입하고 있다. 서울 지역에 있는 특전사 병력은 낮에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밤이 되면 주요 거점이 특전사 병력으로 강화된다.'
학생회를 만들면서 조직력을 키워 온 대학생들은 5월 14일 7만여 명이 광화문에서 시위를 하였고, 15일에는 10만여 학생과 시민들이 서울역에서 시위를 하였다.
대학은 민주주의를 위해 강철을 담금질하는 뜨거운 용광로였고 군부에게는 가장 무서운 저항세력이었다.
노동자들도 노동시간 단축과 40%나 임금을 올리면서 승리하는 싸움을 전국에서 벌여 나갔다. 이에 놀란 군부는 4월부터 쟁의현장에 경찰을 집어넣어 진압에 나섰다. 4월 20일 강원도 사북 탄광에서는 노동자들이 경찰의 폭력진압에 맞서 치열한 저항을 벌였다.
3,500명이 햇볕도 없는 두더지 생활을 하면서 18만원도 안 되는 임금을 받으며 서럽게 살고 있었다. 어용노조위원장이 혼자서 임금인상율을 정해버리자 성난 노동자들이 투쟁에 들어갔고 경찰은 어김없이 찾아와 노동자들을 강제해산하다 경찰차에 치어 광부 4명이 다치는 사건이 일어난다.
동료가 다쳤다는 소식을 들은 그들은 모두 들고 일어나 노조 사무실, 광업소 사무실, 정선경찰서 사북지서, 광업소 무기고와 예비군 무기고까지 점거했지만 무장하지는 않았다. 정선경찰서와 이웃 경찰이 총동원되고 서울에서 500명의 기동경찰이 급파되었다.
노동자들은 돌로 경찰을 공격했고 부녀자들은 치마폭에 돌을 날라다 주며 적극 동참했다. 경찰은 놀라 도망을 쳤고 3일 동안 사북읍은 노동자 세상이 되었다.
그들은 자치규찰대를 만들어 질서유지에 힘썼다. 이 투쟁은 전국 노동자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인천제철, 일신제강, 동국제강, 원진레이온 등에서 경찰과 격렬한 충돌을 하였다.
이 때 놀라운 사실이 5월 8일 비밀전문에 나온다.
강원도 사북에서 경찰이 도망칠 정도로 탄광노동자들의 투쟁이 거세지자 전두환은 공수부대를 대기시켰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모든 특전사 부대가 비상 대기중이며 13공수는 5월 6일 서울로 이동했고 11공수도 7일 서울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동 직전에는 강원도 사북에서 발생한 광부들의 소요사태 때문에 원주지역에서 대기상태에 있었다."
이처럼 노동자와 대학생들은 군부에 맞서 생존권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면서 놀라운 속도로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이를 놔두고서는 '다 된밥에 재 뿌리듯' 청와대를 향한 게임에서 민중에게 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전두환은 서둘러 민중과 민주주의를 향해 80년 5월 17일 비상계엄령 확대라는 기습공격을 하였다. 탱크를 앞세운 공수부대 앞에서 민중은 숨을 죽였다.
그러나 오직 한곳 남녘의 땅, 광주에서 한반도와 세계를 놀라게 한 역사가 시작된다.
3. 광주의 역사성
왜 하필이면 광주에서 그런 비극이 일어났을까 ?
전국이 조용한 데 왜, 광주만 공수부대에 맞서 싸울 수 있었을까?
1) 호남민중의 저항정신
호남은 민족의 운명이 벼랑에 설 때마다 목숨을 바쳐 싸워온 정의로운 전통을 가지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 70%가 호남출신이었고 썩은 봉건정부와 일본군에 맞서 "척양척왜, 보국안민"을 외치며 45만명이 죽은 갑오농민전쟁에서도 광주.전남에서 만 22만 명이 목숨을 바쳤다.
이 정신은 조선말 의병전쟁과 3.1운동 그리고 전국 94개 학교의 연대투쟁으로 퍼진 광주학생운동 등 자랑 찬 항일 민족해방운동의 역사를 이어갔다.
이런 역사적인 전통을 이어온 광주.전남에서는 박정희 군사독재에 맞서 전남대를 중심으로 학생운동과 농민운동, 노동운동 그리고 지식인과 종교인이 중심에 선 재야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2) 광주지역 학생운동의 전투성
광주지역 학생운동은 '유신잔당의 타도를 위한 전면적 투쟁'으로 목표를 잡고 시민과 함께하는 투쟁을 만들어 갔다. 그러나 서울 지역 학생들은 군투입에 겁을 먹고 15일 10만이 모인 서울역 집회를 자체 해산해 버렸다. 이에 대해 광주에서는 이를 비판하며 유신잔당과 결연한 투쟁을 선언했다.
5월 15일 도청에서 9개 대학 2만명이 시국성토대회를 하고 횃불 시위를 하였다.
16일에는 민족민주화 대성회를 열고 횃불 시위를 하였다. 교수들도 적극 참여했으며 경찰들도 이들을 보호하였다.
시대를 앞서가고 이끌어 가는 학생운동의 정세판단과 투쟁의지가 서울과 광주에서 다르게 나타났고 이는 엄청남 결과를 낳고 말았다.
3) 호남에 대한 푸대접
그리고 호남사람에 대한 정권의 푸대접은 내 고장에서 인물 하나 나와야 한다는 집단의식으로 뼈 속 깊이 박혔다.
4) 벼랑으로 몰린 민중생존권
그리고 사회경제적으로는 농촌과 직접 연결 된 광주가 정부의 저곡가 저임금으로 시달린데다 높은 물가와 실업율 그리고 갈수록 커지는 빈부격차 때문에 민중들의 불만이 차오르고 있었다.
5) 정서적 유대감이 강한 도시
또한 산업화가 안되어 외지 사람들이 별로 없었고 농촌의 전통적인 인간적 유대감이 강한 도시였다.
이는 광주해방공동체에서 뚜렷하게 보여준다.
6) 공수부대의 잔악성
그리고 79년 10월 16일 일어난 부마항쟁을 3공수가 탱크를 앞세우고 1시간만에 진압한 경험이 있어 광주에서도 초전박살의 자세로 살인기계와 같은 야만성과 잔학성을 보였다.
이렇게 3가지 배경이 화학반응을 일으켜 세계를 놀라게 하고 우리 역사를 한 순간에 커다랗게 발전시킨 "5.18민중항쟁"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 광주항쟁 전개과정 >
5.17 군사쿠데타는 민중의 저항을 억누르면서 진행되어갔다. 모든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지고 주요도시에 군사력이 집중되었다. 모든 도시와 지역, 그리고 국민들에게 침묵이 강요되었다. 남한의 모든 지역과 도시 주민들이 숨죽이고 살아야만 했던 기간이었다. 하지만 남쪽의 빛고을 광주에서 하나의 커다란 혁명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 당시의 상황은 시기별로 4가지 정도로 구분된다.
1. 18, 19일 계엄군의 과잉진압으로 많은 시민들이 죽임을 당하게 된다.
2. 20, 21일 이에 뭔가 대응해야겠다고 느낀 시민들이 힘을 모아서 계엄군과 공수부대를 몰아낸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은 스스로 무장하게 되고 스스로 하나의 자그마한 '혁명공동체'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한다.
3. 26일까지 시민들은 정권의 폭압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자치권력을 지니게 되어 이른바 '민주공동체' 수준의 사회를 형성한다.
4. 27일 끔찍한 계엄군의 끔찍한 학살, 만행으로 그들은 도청을 함락하고 모든 사건을 덮어버린다. 5월 18일
비상계엄 확대 조치가 발표되기 전부터 여산에 주둔한 제 7공수가 각 대학에 투입되기 시작했다. 전남대학교와 광주교육대에는 33특전대대가, 조선대와 전남대 의과대학에는 35특전대대가 투입되는 등 광주전남지역 12개 대학에 700여명의 공수특전단이 투입되었다. 이들은 각 대학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학교 도서관 등에 남아있던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연행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특히 전북대에서는 이세종군이 구타로 사망하기도 했다. 일요일인 18일 새벽부터 전남대 정문에는 도서관에 들어가려는 학생들과 교문을 봉쇄하는 공수부대와의 마찰이 일어났다. 오전 10시쯤에는 도서관에 들어가려는 학생들과 상당수의 학생들(휴교령이 내리면 10시에 교문앞에 모이자고 약속되었음)이 전남대 정문앞에 모여들었다. 학생들은 정문앞 다리에 연좌하여 "비상계엄 해제" "휴교령 철회" 등의 구호를 외쳤고, 정문을 지키던 공수부대는 갑자기 "와"소리와 함께 달려나와 최루탄을 쏘며 곤봉으로 학생들을 무참히 폭행하였다.
학생들은 급작스러운 공격으로일시 해산되었으나 동료학생들이 계엄군에 의해 심한 구타를 당하며 연행되는 것을 목격하고 교문에서 일정하게 떨어진 곳에서 다시 집결하여 구호를 외치며 항의 시위를 계속했고 이에 대해 교문안으로 철수한 공수부대는 다시 두세차례의 해산을 종용하는 선무방송을 실시한 후 이번에는 첫번째보다 많은 수가 2-3명 1조로 시위대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하여 쫓기던 학생들이 인근 주택가로 몸을 피할 경우 주택에 난입하면서까지 연행하는가 하면 잡히는 학생마다 피투성이가 되도록 무참하게 구타하여 연행하였다. 학생들은 흩어지면서 금남로로 모이자는 구호를 외치며 해산하고 신역과 공용터미날, 일부는 광주공원을 거쳐 금남로 도청앞까지 뛰어갔다. 카톨릭센타앞 금남로 거리에서 연좌농성에 들어간 학생들은 그 숫자가 3-4백명 정도였으며, "비상계엄해제" 등의 구호를 외치다가 11시경 전투경찰의 최루탄에 해산되었다. 골목골목으로 흩어진 학생들은 구호와 노래를 부르며 기습시위를 전개하였다.
오후 1시쯤에는 학생들이 시내중심부를 벗어나 시민들에게 계엄사실을 알리기 위한 시위에 돌입하였고 군데군데에서 경찰과 학생들과의 충돌이 이어졌다. 오후 3시 30분경에는 각 대학에 주둔중이던 공수부대가 시내로 출동하여 진압에 나섰다. 이들은 수창국민학교앞 금남로에서 시위대는 물론 지나가는 시민들에게도 곤봉과 대검을 무자비하게 휘두르고 30분만에 300여명을 연행하는 등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둘렀다. 금남로 일원에서 몸을 피한 학생 시위대는 일시 흩어졌다가 다시 공용터미널 광장에 모였다. 일부 학생들은 터미널 대합실 안에 들어가 차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금남로 일원에서 자행된 공수부대의 잔학상을 폭로하고 있었고, 시위대는 광장에 세워져 있던 자갈을 실은 트럭을 도로 한가운데로 끌어내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이어 금남로에서 작전을 전개하던 계엄군들이 공용터미널 상황에 투입되자 경찰병력은 곧바로 철수했다.
공용터미널 부근의 시위대가 해산되고, 일부 시위대가 터미널 안으로 몸을 피하자, 이번에는 터미널 안에 무차별 최루탄을 발사한 후 방독면을 착용하고 대합실 안으로 들어가 젊게 보이는 사람들마다 닥치는대로 곤봉과 총개머리판으로 구타하여 끌고 나갔다. 이렇듯 공수부대의 잔인한 폭력은 당시 터미널 지하실에서 수많은 시체들을 목격했다는 시민들의 말과 더불어 광주시내 뿐만이 아니라 전남일원에 급속하게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시위는 학생뿐 아니라 시민들까지 가세하여 몽둥이와 연탄집게 등으로 공수부대에 대항하였으며, 공수부대는 이날 밤늦도록 가택수색을 계속하며 젊은 사람은 무조건 연행하였다. 한편 전남북계엄분소는 통행금지 시간을 밤 9시로 앞당기고, 계엄사령부는 서울시내에 배치된 11공수를 광주에 투입하기로 결정하고 일부는 수송기로 일부는 열차로 수송하였다.
5월 19일
이날 아침부터 거리거리에는 착검한 공수부대가 배치되었고, 증파된 11특전여단은 금남로에서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무력시위를 감행하였다. 거리에는 살기가 돌았고 인적이 드물어졌다. 그러나 어제의 만행이 이 집 저집에 알려지자 분노에 찬 시민들은 오전 11시경부터 금남로 3가 카톨릭센타 앞으로 몰려나와 시위가 시작되었다. 시위가 시작되자 금남로 일원 7특전여단 35대대 및 11특전여단 병력 투입되어 진압작전이 개시되었으며 이때부터 공수부대는 착검한 대검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시위대열은 학생들은 거의 보이지 않은 채 일반시민들로 구성되기 시작했으며, 공수부대의 진압방법은 18일보다 가일층 잔혹해지기 시작했다. 수창국민학교 앞에서는 청년 한명을 전봇대에 기대어 세워놓고 시민들이 보는 가운데 집중 구타하여 피를 토하고 쓰러지게 했으며, 이날 오후부터는 붙잡히면 상하의를 벗기고 팬티만 입힌 채 도로상에 무릎을 꿇리고 구타를 자행하기 시작했고 나이든 시민들이 계엄군의 만행에 항의하거나 추격을 제지하면 가차없이 진압봉으로 내리쳐 이날 나이든 사상자가 제일 많이 발생하였다.
점심시간이 다되어 공수부대가 교대하러 간사이 시위대는 금남로 카톨릭센타 옥상에 고립되어 있던 몇 명의 공수부대를 공격하고, 도청 저지선에 불붙인 드럼통을 굴리는 등 적극적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날은 시내 고등학교 학생들도 시위에 참가하였다. 중앙여고생 1,300명은 아침 10시부터 교복에 흰리본을 부착한 채 죽은학생을 위한 추도식을 갖고 교내 시위에 들어갔고, 대동고와 광주일고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한 채 노래와 구호를 외치며 농성에 들어갔다. 이날을 기해 시내 각 고등학교에 휴교조치가 내려졌고, 고교생들은 이날부터 개별적으로 시위대에 합류했다.
오후 5시쯤에는 계림동부근에서 위력시위를 전개하던 계엄군 장갑차가 시위대에 포위되어 감시경이 깨지고, 같이 있던
공수부대가 달아나자 다급해진 공수부대 중위는 바로 앞에 서 있는 시위대를 향해 정조준 사격을 해 조대부고생 김영찬군이 총을 맞고 쓰러졌다. 밤늦게까지 유동과 터미날 등지에서 시위를 전개하던 시민들은 광주역앞에 있는 KBS와 파출소에 투석하고, 임동파출소를 불태웠다. 이 때문에 유동, 임동 일대는 밤새도록 공수부대의 가택수색이 이어졌다. 한편 광주시민들은 TV 앞에 앉아 광주소식이 어떻게 방영되는가를 지켜보았으나 방송에서는 연속극과 오락프로만 방송되고 있었고, 뉴스에서도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한편 이날 미국의 태평양 지구 공군사령관 휴즈중장은 '북한의 남침'운운하면서 완전한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음을 내외에 천명했다.
5월 20일
5월 20일 새벽에 또다시 광주에 3특전여단 병력이 추가 투입되어 전남대에 주둔하며, 진압작전을 시작했다. 이 3특전여단 병력은 주로 광주역과 광주시청 일원에서 작전을 전개했다. 5월 20일 오전은 시내 전역에서 밤을 지새는 시위가 있었던 탓으로 소강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나 오후가 되면서 당시 계엄사에서 최초의 사망자로 공식 발표되었던 시민의 시체 한 구가 발견되어 시민들에게 공개됨으로서 상황은 더욱 격화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전남주조장에서 발견된 이 시신은 김안부씨로 얼굴과 가슴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진 상태였다. 시민들은 이 시신을 리어카에 싣고 금남로로 진출, 시민들에게 공개함으로서 다시 시위가 가열되기 시작했으며, 특히 이날 오후부터는 계엄군의 착검한 대검과 곤봉에 맞서 각목과 쇠파이프등으로 자위적 무장을 하고 대치함으로서 이전의 양상과는 달리 공수부대는 목표를 향한 무조건 돌격식 진압작전의 형태에서 상당히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눈 앞에서 수많은 시민, 학생들이 대검에 찔리고, 형언할 수 없을 지경으로 피곤죽이 되도록 구타를 당하는 상황을 목격해 온 시민들이었지만 얼굴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게 짓뭉개진 시신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결사적 대항의지를 갖게 되었고 오후가 되면서 금남로에 다시 집결하기 시작했다. 리어카에 실은 시신을 앞세우고 금남로에서 시위대열을 형성했던 시민들은 공수부대에 의해 흩어졌다가 다시 금남로와 연결된 도로에 수백명 단위로 재집결하여 시위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한편 5월 19일 시외곽에서 시민들을 시내로 실어 나른다는 이유로 택시운전사 4명이 계엄군에 의해 무참히 구타당한 시신이 시내 운전사들에게 전달되어 5월 20일 공설운동장에 시내 차량들이 집결, 오후 5시경에 도청 앞에 있는 계엄군을 차량으로 물리치자는 결의로 차량시위를 전개했다. 이날의 차량시위는 택시운전자들만이 참여한 것이 아니라 시내버스, 대형트럭운전자등도 참여했는데, 이는 18, 19일 양일간에 공수부대가 시내를 운행하던 시내버스를 무조건 세우게 한 후 차내에 있던 젊은 청년이나 학생들을 무차별 구타하여 끌어내리는 만행을 곳곳에서 자행하여 운전자들이 이를 많이 목격했기 때문에 그만큼 공분이 극에 달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금남로는 일시에 뒤엉킨 차량과 자욱한 최루탄 가스로 아수라장이 되었고,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공수부대의 진압봉에 맞아 머리가 깨지고 어깨가 내려앉았으며, 비명과 함성이 뒤섞이고 피가 낭자했다. 금남로 차량시위에서 해산된 시민들은 다시 흩어져 양 옆 도로로 몸을 피했다가 당시 문화방송이 있던 장동지역에 재집결하였다.
당시 외부와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던 광주시민들은 광주에서 자행되고 있는 공수부대의 만행이 타지역에 제대로 알려져야 한다는 갈증을 가지고 있었으나 언론에서는 소요의 모든 원인을 불순분자의 배후조종으로 보도하고 있었으며, 계엄군의
잔악한 만행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언급도 없이 불행한 사태의 수습을 위해 군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보도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러한 언론에 대해 시민들은 격분하였고, 마침내 문화방송이 불태워졌다.
10만여명에 이른 시민들은 그 여세를 몰아 공용터미널을 경유, 그 지역에 있던 시민들과 합세하여 광주역으로 향했다.
광주역 광장에 이른 시위대는 도로가의 가로등과 공중전화 부스등으로 바리케이트를 설치하고 계엄군과 대치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가 부족한 계엄군이 밀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시청 지역은 공수부대가 시위대에 의해 고립되기에
이르렀다. 자정무렵 시위대에 의해 시청과 광주역은 점거위기에 직면했다. 고립된 공수부대는 지원부대와 연결할 방법과 특히 시청과 광주역 병력의 연결을 시도했으나 시민들의 치열한 대치로 용이하지 않자, 마침내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광주역 병력은 발포를 시작했고, 시청에서는 31사로부터 긴급 지원된 화염방사기를 쏘아대며 대치하고 있던 시민들을 해산시켰다. 이날 시청 앞에서 발사한 화염방사기에 의해 희생된 사람은 최강식씨로 이후 7년여 동안 골수암을 앓다가 사망했다.
광주역과 시청일원의 시위는 공수부대의 발포와 화염방사기의 사용에 의해 해산되고 지역에서 고립되어 있던 3특전여단의 병력은 전남대로 철수했다.
5월 21일
21일 새벽 6시경 광주역 부근에서 밤을 세운 시위대는 계엄군이 물러난 광주역안으로 몰려갔다. 이들은 역대합실에서 계엄군이 버리고 간 시체 2구를 리어카에 싣고 도청앞 광장으로 출발했다. 한편 시내일원에서 작전을 전개하던 공수부대는 20일을 전후해서 연행자들의 수가 많아지자 미처 상무대로 이송하지 못하고 전남대에 구금하기 시작했다. 공수부대의 숙영지였던 전남대로 끌려들어 간 시민들은 잡혀 올 때 만신창이가 된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공수부대는 이곳 전남대학교에서 다시 들어올 때마다 여기에 구금되어 있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형언할 수 없는 만행을 자행했다. 구금된 시민들을 세워놓고 대검으로
죽여 버리겠다 고 위협하는가 하면 헤아릴 수 없는 구타를 자행했다.
공수부대는 1980년 5월 21일 전남대학교에서 광주교도소로 이동하면서 전남대에 구금되어 있던 시민들을 함께 이송했다. 이송은 군용 부식차량에 시민들을 세워서 빽빽하게 태운 후 그 차안에 최루탄을 터트리고 밖에서 문을 잠가버린채 이동하여 그 차안에 있던 상당수의 시민들이 질식, 또는 화상에 의해 중상을 입었으며, 피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 과정에서 희생된 시민들도 많았다고 한다.
광주교도소에 도착한 시민들은 교도소내 창고에 구금된 채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상태에서 몽둥이로 맞고 군홧발에 걷어 채이는 등의 구타와 기합, 그리고 끊임없는 조사등으로 엄청난 고통을 치렀던 것이다. 그리고 계엄당국에서는 한미연합사의 승인을 얻어 20사단 4개 대대를 광주에 급파하기로 하여 오전 8시쯤 상무대에 도착하였다. 시민들의 저항을 광주진입에 실패한 20사단은 광주외곽 봉쇄작전에 들어갔다.
9시가 넘어서부터는 차량을 이용한 도청공격이 본격화되었고, 차량을 몰고 도청으로 진격하던 시민과 차량위에서 태극기를 흔들던 시민 모두가 계엄군의 총탄에 희생되었다. 공수부대는 도청에만 몰려 있는 상태였고, 시민들은 도청을 포위하고 있었다. 10시쯤에는 시위현장에서 뽑은 대표 김범태씨와 전옥주씨가 도청안으로 들어가 장형태 전남지사를 만나 협상했다.
이들은 지사에게
1. 유혈사태에 대해 도지사가 공개 사과할 것
2. 연행한 시민.학생을 전원 석방할 것
3. 입원시켰다는 부상자들의 소재와 신원을 공개할 것
4. 계엄군은 21일 정오까지 시내에서 모두 철수할 것
5. 전남북 계엄분소장과 시민대표의 협상을 주선할 것
등을 요구했다.
전남도지사는 '군철수는 최대한 노력하겠으며 나머지도 책임지고 처리하겠다'고 밝히고 대표들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도지사의 무책임한 약속에 시민들은 시위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고, 11시 쯤에는 시위대가 10만을 넘어섰다. 약속한 12시가 되어도 계엄군이 철수하지 않자 시민들은 도청으로 조금씩 밀고 들어갔다. 군인들과의 거리는 10m밖에 안되었다. 12시 30분쯤 도청 스피커에서는 애국가가 흘러나왔다. 시민들은 숙연해졌다. 그러나 애국가 소리가 끝나자마자 콩볶는 듯한 소리가 진동하며 앞에선 시민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금남로에는 수십명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고 시민들은 인근 골목으로 피하였다.
22일 아침이 되면서 많은 시민들이 도청으로 들어갔으나 지난 싸움에서 통일된 지도부가 없어서 체계가 잡히지 않았다.
오전 11시경 지역 유지급 인사들이 '수습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사태 수습에 나서기로 하고, 재야인사들은 수습대책위에 합류하여 정부당국에 대한 7개항의 요구사항을 결정하였다.
1. 사태수습전에 군을 투입하지 말 것
2. 연행자 전원을 석방하라
3. 군의 과잉진압을 인정하라
4. 사후 보복 금지
5. 책임면제
6. 사망자 보상
7. 이상의 요구가 관철되면 무장해제를 하겠다.
는 내용을 가지고 수습위원 8명이 상무대 전남북계엄분소를 방문하여 군측과 협상하였으나, 계엄군은 불성실하게 협상에 응하면서 '무기회수'만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22일부터는 지금까지 유인물을 제작하였던 팀이 합하여 '투사회보'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편 도청에 들어간 재야인사들은 학생들을 모아 '학생수습대책위'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위원장,총무,대변인,무기관리,장례담당,총기회수반,차량통제반,의료반등으로 구성된 '학생수습대책위'는 즉각 무기회수에 들어가 2천여 정의 버려진 무기를 도청으로 수집했다. 당시 도청안에는 도청간부와 이들이 내세운 '수습대책위', 재야인사가 중심이 된 '수습대책위'와 '학생수습대책위' 및 계엄군 정보공작요원 등이 혼재되어 체계가 잡히지 않는 상태였다. 이에 재야인사들은 학생들을 YMCA로 집결시킨 뒤 모이는 대로 도청으로 들여보냈다. 마침내 25일 저녁에는 무기를 든 많은 학생들이 도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22일 광주에 온 박충훈 국무총리는 정작 광주시민들앞에 나서지 못하고 계엄분소에 들러 상황보고만 듣고 시민들에게 보내는 호소문만 내놓았다. "대부분의 선량한 시민들의 노력으로 광주사태는 호전되고 있다. 시민들은 일부 폭도와 불순분자들의 터무니없는 유언비어에 현혹되거나 부화뇌동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또한 저녁 7시 30분 전국적으로 중계된 라디오와 TV방송을 통해 "현재 광주시내에는 군병력도 경찰도 없는 치안부재상태이다. 일부 불순분자들이 관공서를 습격, 방화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군인들에게 발포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은 명령 때문에 시민들에게 발포하지 못하여 울화통이 터지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것같다.."고 말했다.
5월 25일
오후 5시경 최규하 허수아비 대통령이 상무대를 방문하였다. 상무대에 도착한 최규하는 현지담화를 발표하고, 충정작전 계획을 보고 받았다. 이 자리에서 미국과의 합의내용을 토대로 27일 이후에 전교사 사령관인 소준열 소장의 책임하에 충정작전계획을 실시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도청에서는 25일 오후 새롭게 지도부를 결성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계엄군의 일방적인 항복요구에 무릎을 꿇고 만다면, 도청에 있는 수습위원들은 역사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며 지금까지 고귀한 생명들을 바쳐 이루고자 했던 이 땅의 민주주의는 영원히 포기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25일 밤 항복과 투쟁의
갈림 길속에서 도청안은 수선스러웠다. 계속적인 투쟁만이 진정한 승리를 안겨다 줄 것이라고 주장하는 측은 가두홍보방송을 통해 집결시킨 대학생들의 힘을 바탕으로 새로이 조직을 결성하고, 무기회수와 무조건 반납을 주장하던 측은 위협을 느끼며 도청을 빠져나갔다.
이때 도청내에 '민주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 조직이 뒷날 통상 '항쟁지도부'로 불리게 된다.
1.시내버스를 정상운행하도록 한다.
2.공무원과 경찰을 비무장으로 근무토록 한다.
3.상가와 시장의 문을 열도록 한다
4. 각 동별로 피해상황을 집계한다.
5.시민들에게 시청의 비축미를 공급한다.
6.가능한대로 언론기관을 가동시킨다.
7.유류사용을 통제한다
8.시외전화를 개통시킨다
9.순찰대를 개편강화하고 기동타격대를 운영한다.
등이었다.
또 무장력 개편을 위해 도청 주변에 산만하게 배치되었던 경계요원을 25일 새로 도청에 들어온 일반 대학생들로 교체했으며, 예비군을 동원하여 외곽경계를 서도록 하고 기동타격대를 편성 운영키로 하였다.
5월 26일
도청 민주투쟁위원회 위원들이 날을 새우며 새롭게 조직을 개편하고 장기전을 준비하는 동안 계엄군의 진압작전은 차근차근 실행에 옮겨지고 있었다. 새벽 5시경 화정동 통합병원에 버티고 서있던 계엄군의 탱크가 시내쪽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김성룡신부등 일반수습위원들이 시민들과 함께 계엄군이 진입해 오는 농성동 부근으로 '죽음의 행진'이라 불린 침묵행진을 시작했다. 현장에서 지휘관과의 협상에서 계엄군은 '무조건 총기를 회수하고 반납하라'고 협박하고 수습위원들은 '시내질서는 우리가 책임지고 처리할 것이니 계엄군은 무력으로 밀고 들어오지 말라'고 주장하였으나, 계엄군은 한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았다.
아침이 되면서 계엄군 진입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다시 도청앞 광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제 4차 민주수호범시민 궐기대회가 자연스럽게 열렸다. 분노가 가득한 시민들이 분수대에 올라가 계엄군의 잔인성과 시민군과의
협상을 배신한 사실을 규탄하였다.
시민들은 22일부터 매일 오후 3시와 9시, 두 차례씩 도청 분수대 앞에서 궐기대회를 갖기로 결정하여 진행했다.
원하는 사람에게 연설할 기회를 주고 토론과 발표을 했다.
시가행진의 코스와 요령 및 선언문 내용, 그리고 시내 치안유지 방법 등이 토론되었으며, 광주 조직폭력배인 오비파와 화신파 두목들도 연단에 나와 민주화 투쟁에 협력할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시민들은 특히 질서유지에 역점을 두고 시민들로 치안대를 구성 경찰 서장집, 박인천 사장집, 관공서 등 요소요소에 배치하여 폭력, 방화, 강도를 방지했다.
시위차량도 조직적으로 나누어 지휘차, 대변인차, 식량수송차, 무기수송차, 시민수송차로 역할을 전개했으며 또 생필품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쌀과 석유의 매점매석을 막았다. 광주시민들은 7번의 집회를 통해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면서 새로운 질서와 사회상을 창조하였다.
25일 궐기대회에서는 미7함대 소속 항공모함이 부산에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26일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를 마친 시민들은 민족과 역사 앞에 끝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하며 '우리의 소원'을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시민들은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고 투쟁을 다짐했다. 이 노래는 광주시민들이 항쟁기간 가장 많이 부른 노래다.
도청 옥상에서 안내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시민 여러분!
오늘 밤 계엄군이 쳐들어 올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광주 시민 여러분!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기꺼이 죽어도 좋다는 사람들만 남고 나머지는 돌아가십시오."
300명 시민이 도청에 남았다. 투쟁위원들은 여자들과 고등학생들은 집으로 돌아갈 것을 부탁했다. 살아서 증언할 사람도 있어야 한다며... ....
그러나 10명의 고등학생들은 형들과 함께 하겠다며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날 밤 윤상원 대변인은 시민군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오후 2시경에는 정시채 부지사, 구용상 광주시장, 일반 수습위원, 투쟁위원회 간부급 인사들이 참석한 모임이 도청 기획실장실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수습위원과 투쟁위원회는 시민생활 정상화를 위한 몇 가지 요구사항을 제출하였고, 도청과 시청의 책임자들도 대체적으로 수락하였다.
그들이 합의한 내용은,
1.매일 도청에 백미 한가마씩 공급한다
2.도청에 부식과 연료를 계속 공급한다
3.장례식 준비를 위해 필요한 관 40여개를 공급한다
4.부상자 수송을 위해 앰블란스를 공급한다
5.상가와 시장을 열어 생필품 공급을 원활하게 한다
6.치안문제는 일반 형사범에 한해 경찰이 책임진다
7.시내버스를 운행토록 한다.
8.사망자 장례는 도민장으로 한다.
이러한 내용에 덧붙여 장례식도 5월 29일 도청앞에서- 치르기로 합의하였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무기를 반납하자'던 사람들이 다시 도청에 들어왔다. 이들은 "오늘밤 계엄군이 무력진압할 것이니 빨리 빠져나가라"고 이야기하며 돌아다녔다. 시민열기의 쇠퇴를 걱정하던 도청안의 사람들은 '미친소리 하지말라'며 그들을 도청밖으로 몰아냈다.
5월 27일
시민군은 정면의 계엄군 탱크를 향해 몇차례 응사하였지만 화력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하늘에는 월남전에서 맹위를 떨치던 캐터필러가 요란스럽게 소리를 내며 도청주위를 맴돌고 "폭도들에게 알린다. 즉각 총을 버리고 자수하라"는 방송을 계속하고 있었다. 시민군의 화력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게되자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 만행을 알려야겠다며 총을 머리위에 치켜들고 흰손수건이나 런닝을 벗어들고 건물밖으로 걸어나왔다. 그러나 계엄군은 그들마저 M16으로 사살하고 말았다.
YWCA를 지키던 젊은이들도 계엄군의 기습에 대항하였으나 총 몇발 쏘아보지 못한 채 죽거나 다쳤다. 동이 터올 무렵 수십명의 사망자를 내고 총소리는 멎었고 계엄군은 도청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날 확인된 희생자는 26명으로 노동자 12명, 대학생 6명, 고등학생과 재수생 8명이었다.
계엄군은 날이 새면서 도청 등에 남아있던 시민군은 물론 주변의 민가까지 샅샅이 뒤져 젊은이들은 무조건 연행했다. 그들은 연행한 사람들을 건물밖으로 끌어내어 엎드리게 한뒤 포승줄이나 전기줄로 두손을 등뒤로 결박하고 목에 걸기도 했다. 연행된 사람들은 군용버스와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실려갔다.
세월이 흐르면서 계엄군의 총칼이 휩쓸고 간 뒤 도로의 핏자국과 건물의 총탄자국은 지워졌지만 항쟁의 열기와 학살의 진상은 결코 가려질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 5.18묘역에 누워
산자들에게 끝없는 힘과 용기를 주고 있으며
그들의 심장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고 있다.
< 518 광주 민중 항쟁 교양자료집 발췌 >
어떠세요... 조그마한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월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마라하는 오월이면 우리는 함께 모여 오월가를 불러야할것 같아요^^
오 월 가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피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솟네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디갔지 망월동에 부릅뜬 눈 수천의 핏발 서려있네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솟네
산자들아 동지들아 모여서 함께 나가자 욕된역사 투쟁없이 어떻게 헤쳐 나가랴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솟네
대머리야 쪽바리야 양키놈 솟은 콧대야 물러가라 우리역사 우리가 보듬고 나간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솟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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