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어디에서 오는가
김동원
저는 늘상 ‘시란 무엇인가, 시는 어디에서 오는가’란 질문을 합니다. 어쩌면 시는 듣는 것이 아니라 들리는 것이 아닐까요.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이 아닐까요. 모든 사물의 근본은 하나지만 저마다 생긴 모양이 다르듯, 시법은 한곳으로 귀착되나 그에 이르는 길은 천만 갈래입니다. 하여, 제게 시는 사물과 언어 사이의 비밀을 푸는 열쇠입니다. 시인의 몸은 사물과 언어가 관통하는 고통의 통로입니다. 이것을 말하는가 하면, 저것에 가있고, 저것을 말하는 가하면, 이미 그것 너머에 존재합니다. 시는 언어 밖에도 있고 언어 안에도 있습니다. 제게 시는 몸의 감옥을 부수고 뛰쳐나와 길(道)의 자유를 얻는 행위예술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시는 생사生死의 그림자놀이입니다. ‘언어’를 통해 이 세상 모든 더러운 ‘색色과 공空’의 욕망을 대신 닦아 줍니다. 상극을 뚫어 상생을 추구하며, 주관과 객관, 안과 밖, 중심과 주변의 이원 구조를 부정합니다.
제 시는 병病의 문을 열고 바라본 앞마당 가득 핀 꽃의 이야기요, 피의 이야기입니다. 수만 생을 윤회한 저의 또 다른 환생의 조각보입니다. 하여, 저는 늘 흔들립니다. 바람에 흔들리고 외로워 흔들립니다. 밑도 끝도 없는 기미와 기척에 흔들리고, 제 심연의 불안한 목소리에 흔들립니다. 저는 서정시를 사랑합니다. 언제나 동일성의 시학을 꿈꿉니다. 법고의 뼈와 살을 발라 먹고 창신의 새 길을 엽니다. 만물의 음양을 받아들여 시의 형形과 상像을 빚습니다. 전통의 불신과 전복이 아니라 계승과 성찰을 통해, 시의 요체를 뀁니다. 현실 공간인 몸과 시의 공간을 하나로 봅니다. 격물을 궁구하여 치지로 나아갑니다. 직유를 통해 사물의 극을 치받고, 은유를 통해 물아일체가 됩니다.
하여 저는 밤낮없이 비극과 역설, 아이러니와 모호성, 풍자와 해학의 행간에 바장였습니다. 제 시의 급소는 사랑과 이별의 통증입니다. 소리를 쫓다 숲을 잃었고 언어를 쫓다 시를 들었습니다. ‘이름이 없는 천지의 처음, 무명無名’과 ‘이름이 있는 만물의 어미, 유명有名’(도덕경 1장) 사이를 헤맸습니다. 어둠에 손을 넣어 달을 만졌고, 바다에 머리를 넣어 해를 먹었습니다. 하여, 제게 시는 ‘천하에 천하를 감추는 작업’(약부장천하어천하若夫藏天下於天下(장자)’입니다. 하늘이 감춘 것을 시인은 들춥니다. 30년간 밤낮없이 간절히 묻고 또 물었습니다. 세상을 향해 가장 아파하는 자만이, 가장 아름다운 시를 얻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시인은 이름을 남기는 자가 아니라, 시를 남기는 사람입니다. 시력詩歷이 높아질수록 시마가 깊어집니다. 예술 작품은 기존 작법을 무너뜨릴 때 ‘미완성의 완성’이 됩니다. 제게 시는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드는 과정에 비견됩니다. 근래 저는 머무는 곳마다, 서 있는 자리마다, 미완성의 시가 태어나는 곳임을 자각합니다. 궁하면 변하고窮則變, 변하면 통하고變則通, 통하면 오래간다通則久’는 주역의 이치를 따릅니다. 하여, 제게 시는 천지만물을 통해, 이 우주의 미완성의 노래를 부르다 가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바다와 시니피앙
김동원
숨을 깊이 들이쉬고, 그는 계속해서 물속으로 들어간다. 한 마리 물고기가 되어, 아래로 아래로 헤엄쳐 내려간다. 물은 물의 은유다. 바다는 문門이 없고, 있다. 바다의 깊이는 질문이다. 오, 지우는 방식으로 채우는 바다여! 바다는 거울을 보지 않는다. 바다는 생각을 생각하지 않는다. 바다는 노을을 버리고 주체가 된다. 바다는 바다일 때만 나비가 된다.
오십천
김동원
어릴 적 난 홀어머니와 함께, 강가 백로 외발로 선 오십천 천변에 핀 복사꽃 꽃구경을 갔다 봄 버들 아래 은어 떼 흰 배를 뒤집고, 물결이 흔들려 뒤척이면 붉은 꽃개울이 생기던, 그 화사한 복사꽃을 처음 보았다 젊은 내 어머니처럼 향기도 곱던 그 복사꽃이 어찌나 좋던지, 그만 깜박 홀려 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갓 서른이 넘은 어머닌 울고 계셨다 내 작은 손을 꼭 쥔 채, 부르르 부르르 떨고 계셨다 그 한낮의 막막한 꽃빛의 어지러움, 난 그 후로 꽃을 만지면 손에 확 불길이 붙는 착각이 왔다
어느새 몸은 바뀌고, 그 옛날 쪽빛 하늘 위엔 흰 구름 덩이만 서서, 과수원 언덕을 내려다본다 새로 벙근 꽃가지 사이로 한껏 신나 뛰어다니는 저 애들과 아내를, 마치 꿈꾸듯 내려다본다
흰 눈이 내린 겨울 숲이 여자로 보일 때
김동원
흰 눈이 내린 겨울 숲이 여자로 보이거나, 하나 둘 켜지는 저녁 도시 불빛이 그 여자들의 어깨 둘레로 보일 때, 붉게 물든 저녁놀 부드럽게 산정에 입 맞출 때, 난 으레히 습관처럼 지녀 온 버릇이 있다. 그것은 한 편의 시를 펼쳐 보는 일이다. 그중에서도 내 마음속 깊이 움직이게 한 한 줄의 아름다운 시구를 찾아내, 방 안을 서성대며 조용히 혼자 소리내어 읊조리는 기분은… 참 묘한 것이다. 이 소리들은 나직이 방 안 귀를 따라 돌며 천장으로 올라갔다 내려온다. 마치, 누군가 이 시어들에 맞춰 피아노의 선율을 소리내어 들려주는 것처럼. 그러면 놀란 사방의 벽들만이 이 우스운 짓을 왜 하는지 몰라, 킥킥킥 돌아서서 비웃고 있는 것이다. 아무러면 어떤가. 어차피 인생은 제 스스로 힘껏 움직이다 가는 것. 저 창밖 빈 겨울 나무처럼, 추운 모퉁이 한켠에 비켜서 있다가, 봄이 오면 제일 먼저 뛰어나가 푸른 잎사귀의 물관을 타고 올라서, 하늘 위 흐르는 흰 구름의 가슴을 뭉클 만져 보면 된다.
처녀와 바다
―시간의 저편 너머에 묻힌 H에게
김동원
내 마음속엔 언제나 해당화 꽃처럼 붉게 멈춰 버린
처녀의 무덤이 산답니다
저 바닷가 물 밑에 가라앉아
진주가 돼 버린 처녀랍니다
처녀는 곱고 수줍고 아름다운 머릿결이 물풀 같았습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 운명처럼 만나
아침마다 해가 뜨기 전 금빛 물결이 일렁이는
바닷물 위 걸어서
해를 만지러 가곤 했습니다
해는 출렁이는 우리의 운명 같아
잡힐 듯 잡힐 듯 손길에서 멀어졌습니다
나는 언제나 죽음이 두려웠습니다
그렇게 처녀는 그 겨울 바다 속 생生이 잠기고
영원히 바닥에 잠겨서 물풀에 가려졌습니다
그 후 난, 문득문득 깊은 밤 혼자 잠에서 깨어나 웁니다
그토록 그리운 처녀는, 내 바다 위 어디에도 없고
백사장 흰 모래알 속에나 등대 불빛 밑으로
찾고 또 찾아 헤맸지만,
잃어버린 바닷길은 그대로 천 길 물길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따금 처녀는 그 처녀는, 저 먼 시간의 저편 너머 수평선에서
붉은 해를 타고 올라와,
그 새벽 깨어나 우는 내 서러운 등을 두 손길로 따뜻이 어루만져 줍니다
황진이
김동원
진이,
그대는 가야금 침향무를 뜯게
나는 그대의
치마폭 위에 분홍 진달래꽃을 치겠네
노을로 번진 눈물을 치겠네
흔들리는 그 바람의 무늬를 치겠네
중모리 중중모리 휘모리로
피어 노는
저 비슬산 꽃의 한 생生 다 떨어지기 전,
진이,
그대는 침향무를 뜯게
나는 엉망진창 술에 취해
대견봉 그 둥근 달빛에 붓을 적셔
그대 치마폭 위에
분홍, 분홍, 분홍, 분홍, 그렇게 번지겠네
인생
김동원
만 년을 껴안고 뒹굴어 봐라 여자 다 아는가
천 년을 낳아 봐라 남자 다 아는가
알 둥 말 둥 보일 둥 말 둥
그렇게 한세상 건너가면 되지
인간사 좋을 땐 한겨울도 꽃밭 같고,
뚱하면 등짝이 지옥 같다
우리 다 백 년 새 하늘에 눕는 거 알지,
부모 자식 간도 삐걱거리는 소리 천 번 만 번인데
남은, 말할 게 없다
공연히 헛것에 마음 붕 떠서 떠돌지 마라
알고 보면, 이 힘들고 쓸쓸한 날, 행복의 모든 것이다
보름달
―시선 이백의 「월하독작月下獨酌」에 답하여
김동원
여자 엉덩이만 한 둥근 보름달이 떴다
내 오늘, 법이산 위에서 그 엉덩이 밟고 올라
쑤―욱 구름장 위로 고개를 내밀면,
껄껄껄 시선 이백이
하늘 위서 손을 뻗는다
이렇게 우리는 초저녁 북극성에 걸터앉아
술상이 나오기 전
한 수 시를 짓고,
지구로 떨어지는 별똥을 바라보며
눈앞에 귀찮게 아른거리는 우주선 파리채로 후리고,
참 고운 몸매의 샛별이
웃는 듯 상床을 받쳐 들고 나오면, 안주론
별자리 황소를 굽고
술은 북두칠성 국자로 알콜 성단星團에서 뜨고,
어린것들은 조랑말자리 별에 태워
성도星道를 한 바퀴 천천히
돌게 한다
그렇게 한밤중 거나하게 취하면,
우리 둘은 어깨를 끼고
은하수 강가에 배를 띄우는데,
이백은, 뱃머리서 월하독작月下獨酌을 읊고
난, 취흥에 겨워, 저 이쁜 달 엉덩이를 힘껏
‘철썩’ 때린다
그러면, “으응” 하고 잠 덜 깬
웬 여자 볼멘소리가
방 한구석에 자늑자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