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생애
손진은
한 농부가 논을 갈아엎는다
머얼리서 물무늬 얼비치며 다가오는 소의 그림자
빠른 걸음으로 무논을 쟁기가 가로질러 가고
순간, 소리의 여울 이루어 반란하는 개구리 울음
나는 숨죽여 지켜본다
휘뚝휘뚝 지나가는 쟁깃날 너머로
분홍빛 등불을 켜든 풀꽃의 섬뜩한 아름다움이
머리 잘린 채 넘어지고
누군가, 떠올릴 수 없는 빛나는 한 생애가
흙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몇 바지개나 될 것인지
그들 죽음 안타까워 더욱 거세어지는 개구리 울음
개구리 울음이
넘어지는 풀꽃의 혼 이끌고
그것을 보는 내 슬픔마저 이끌어
봄 하룻날
풀꽃의 혼, 개구리 울음, 내 슬픔이 다 슬려
아지랑이로 떠돌고 있는 것을.
만두
- 시를 위하여
나는 속이 어른어른 비치는 만두를 좋아한다
모양을 빚기도 전에 굳어버린 반죽,
그렇다고 너무 많은 재료를 쑤셔넣어
속살이 터진 피도 좋아하지 않는다
햇볕에도 그늘에도 쉬 드러나지 않는 것
아른아른한 피를 한 입 베어물면
속이 살짝 열리고
으깨진 재료들이
차려놓은 오늘의 식탁이 보인다
자기 살이 닳아버린 줄도 모르고
해와 달, 다른 데서 온 낯선 것들이
서로를 붙들고 둥글게 부풀어 숨죽이고 있는
그 고통과 셀렘이 살짝 익은 것이
만두에는 들어 있어야 한다
한 입에 쏙 들어가는 것이지만
너무 아까워 단숨에 먹지 못하는 것이거나
먹고 난 뒤에도 입속에 가슴 속에
열두 광주리의 풀무로 부풀어오르는 것
때로 잘 빚어진 것 같지만
알고보면 다른 이들이 배달해주는 쓰레기 단무지를 잔뜩 넣은 얼굴
숨도 죽지 않고 살아 자신을 드러내는 재료들
만두는 그런 것이 아니지
해와 달 그림자와 이슬,
천천히 그들이 키운 것들의 상처와 고통, 한숨도
아른아른 비치는 마음의 형상이
둥글게 부풀어오른 것이 만두의 완성이다
길
한겨울 어린 보리는
자신의 몸 누르는 추위 견디느라
나사처럼 천천히 잎을 돌려 내민다고 한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이며 서릿발같은 것들
힘겹게 들어올리느라 머리와 몸 비틀며 키를 늘인다고 한다
그 때문에 들뜬 그의 발 한번 눌러주는 게 보리밟기다
그러다 좀 더 자란 보리는,
살얼음 칼날 추위와 눈을
살살 어르면서 그들이 내려온 길까지를 잎사귀에 꼭꼭 채울 줄도
우산 만들어 빗방울 튕길 줄도 안다
사람들 다 잠든 밤에도 통통 몸을 흔들어
생각을 키우는 보릴 보아라
보리밭이 푸르게 일렁이는 것은
하늘의 것들 다스리는 넉넉한 심성
그의 잎사귀마다 돋은 기억
바늘같은 까스러기를 다는 것도 마침내 순해진 그들과의
까슬까슬한 추억들 때문이다
잎사귀 제법 누렇게 된
보리밭의 가슴속에서 노고지리가 솟구치는 것도
눈과 얼음, 달과 비바람의 행로를 하늘 속으로 풀어놓기 위함이다
그리곤 가는 허리 황홀하게 흔들며
자신의 길을 간다
몸속은 비운 채로, 머리에는 흰 구름도 몇 걸치고
중년
열쇠를 돌리는데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문득 등을 끄지 않은 채 차에서 내린 간밤의 기억이
몰려온다 낭패, 눈꺼풀도 내리지 않고
정신없이 꿈속을 헤매는 사이 핏기를 잃어버린 내 눈알
어떤 것에 뒤집혀 긴 밤 긴 생을
후들거리는 다리와 텅 비어가는 머리도 모른 채
내 헤드라이트는 발광했을 것이다
무언가에 홀려 뚫어지게 바라보는 동안
계절은 가고 주름살은 깊어졌고 흰 머리는
늘어났다 어디로 가는가 철철 넘치던 팔뚝의 푸른 힘줄은
전류처럼 터져 나오던 생기, 머릿속을 흐르던 생각은
어느 허공으로 날아가버리고
까칠하고 초췌해진 몸뚱이로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았는가
어저께까지도 명품이라고 믿었는데
눈 한번 들었다 내려놓는 사이
어떤 것에 취해 이렇게 떠밀려온
두드려도 가없는 무슨 소리만 내보내고 있는
중년을 일으키려 저기, 정비기사가 달려온다
또 하나의 몸이 부끄러운 듯 마중하러 간다
풋봄
여린 추위가 남아 있는 캠퍼스
솔숲 옆 아스팔트 길에 들어서다, 어머 저것 좀 봐
생머리를 늘어뜨린 여학생 둘이
이제 갓 눈을 뜬 듯한, 추워서 붉은 목도리를 목에 두른
아기뱀
그 어린 강물 줄기 받으려
새로움을 잃어버린 헐거운 사십대의 사내도 거들어
백지며 책받침을 갖다대는 풍경이라니!
구불텅거리는 그 물은 그걸 타고 흘러내릴 뿐
허릴 붙잡아 보려 해도
혀의 불에 델까 움찔거리는,
오 사랑스럽고 미끄러운 울렁거림이여
결국 손아귀를 빠져나와
저녁 연기처럼 태연히 숲으로 스며드는
그 물줄기 따라가며
어머, 어쿠 어쿠! 정적을 찢으며 뿌려대는
잘 익은 소리들이 대기에다 구멍을 내는지
어떨결에 곁의 벚이며 진달래 같은 것들
몸을 막 열어놓고 꽃들을 터뜨리는 봄날 아침
봄은 그 어린 것을 앞세워서 왔던 것이다
필시 겁과 당황에 잔뜩 움츠렸을 법한 풋봄도
울창한 황홀의 가슴 풀무를 일으킬 줄 알고 있었다
질투
세상 가장 맑은 눈을 가진 생물은
파리라지
수천 홑눈으로 짜 올린 겹눈
흰 천보다 순금보다 거울보다 맑게 빛나게
두 손으로 두 팔로
밤이고 낮이고 깎아낸다지
그렇게 깎인 눈 칠흑의 어둠도 탄환처럼 뚫을 수 있다지
꿀이 있는 꽃의 중심색이 더 짙어지는 걸 아는 것도
단숨에 그 깊고 가는 통로로 빨려드는
격렬한 정사情事도
다 그 눈 탓이라더군
공중을 날면서도 제자리 균형 잡아주는
불붙는 저 볼록거울!
세상에 절여진 눈 단내가 나도록 깎고 깎아야
자신이든 적이든 먹잇감이든 제대로 보이는 법
같은 태생이면서도 짐짓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손 비빈다고
날마다 닦아야 할 죄가 무어 그리 많으냐는 뾰르퉁한 입들에게
폐일언하고
눈알부터 깎으라고
부신 햇살 떠받치며 용맹정진하는
파리 대왕, 파리 마마들
소리들이
천둥같이 쏟아진다
詩
바람이 불 때
우리는 다만 가지가 흔들린다고 말한다
실은 나무가 집을 짓고 있는 것이다
심연의 허공에 뜨거운 실체의 충만함을 남기는.
도취와 나태 속에 취해 있는 듯 하다가도
그림을 그리듯 하늘에
기하학적인 공간을 각인하는 나뭇가지
처음엔 가질 따라 움직이다가
어느덧 그 흔들림 관찰하는 나무의 눈
마침내 눈의 중심과 흔들리는 가지가
하나의 사이로 존재할 때
현기증나는 그 공간과 시간을 채우며
숨쉬고 물결치며 팽창하는 언어
완벽한
그러나 무익한 듯 보이는
물질적인 문장의 향기
그 힘으로 나무는 날아가는 새를 불러들이기도 하고
힐끗거리며 지나는 구름 얼굴 붉히기도 하고
나무의 후손
손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인류의 조상은 나무였다는 생각이 든다
우글우글한 누대의 흰뿌리 퍼올려 낳는 잎맥들
어머니 나무에서 나온 한 그루
나의 씨앗에서 싹튼 어린 몸에 나부끼는
잎맥이 하, 신기하게도 닮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TV 속 이산가족들 하나같이
주름진 잎맥들만 연신 부벼쌓겠는가
도시보다 도시가 낳은 골목들보다도 더 조밀한
잎맥들 낱낱의 손금에 흐르며 불쑥 못 보던 줄기 하날 치는 것
점심 후 도심 산길, 가지 새로 흘러내리는 햇살 왼몸에 창자에 감다보면
제 푸르던 생을 노랗고 빨갛게 물들이다 나무들
잎새들 무덤처럼 둥글게 쌓아둔 채 저 생으로 몸을 밀 때는
별무리가 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밤마다 먼 별들의 강숲에서
글썽이는 눈시울들이 어린 잎자루를 반짝이며 닦아쌓겠는가
하여 잠시 빠져나왔던 일터의 공기를 떠올릴 때도
어느새 내 핏줄을 포위하는
자신의 맥박들이 세상을 다 밀어버리는 것도 모르는 잎맥들의 흔들림!
그래, 나는 잘못 진화된 나무가 낳은 자동차 충혈된 힘줄이 스멀대는
마른 나무들의 분지를
잎새에 스치는 바람이듯
바스락거리는 잎새들이 밟히는 사원이듯 성큼,
다시 들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