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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달려 죽음의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15장 33-41절/ 33제 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34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35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36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융에 신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고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37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38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39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40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41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좇아 섬기던 자요 또 이 외에도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가 많이 있었더라.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교회 절기를 갖고 지키는 것을 봅니다. 그 중에 사순절, 종려주일, 고난주간, 부활절이 있습니다.
사순절(四旬節) : 부활절까지 주일을 제외한 40일의 기간으로, 부활절로부터 46일전인 재의 수요일에 시작된다.
종려주일 : 종려주일은 고난주간을 시작하는 주일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입성하실 때 예수님을 환영하는 무리들이 종려나무가지를 흔든 것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난주간 : 고난주간은 종려주일 다음 날일 월요일부터 부활절 주일 전 토요일까지의 한 주간을 말한다. 고난주간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겪으신 고난을 생각하며 지내는 주간이다.
부활절 : 부활절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이다.
이것에 의해서 2024년 사순절 - 2월 24일(재의 수요일)부터 부활절 전날인 3월 30일까지로ㅡ 이 절기의 기간에 종려주일(3월 24일)과 고난주간(3월 25일-30일) 있다 - 을 지키고 있으며, 그리고서 3월 31일 주일을 부활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절기를 지킴에는 가톨릭교회와 개신교를 막론하고 같은 실정입니다. 온 교회가 이러한 교회 절기의 전통을 가지고서 지킴에 있는 것은 참으로 비성경적이요 비신앙적이요 비교회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는 십자가로 법조문으로 쓴 증서, 곧 율법을 십자가에 못 박아 더 이상 이것으로 무거운 짐이 되지 않게 하심으로 본체이신 그리스도의 그림자에 의해서가 아닌 그림자의 본체이신 그리스도에 의해서 살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해서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 마셔도 될 것과 마셔서는 안 될 것과 관련한 음식에 대한 정결 규례나 절기 – 유월절과 함께 지키는 무교절, 오순절이라고도 불리는 칠칠절, 장막절 혹은 초막절, 나팔절, 수전절, 부림절 등 - 를 지키는 문제나 월삭과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로 남의 비난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셨으며, 또한 일부러 겸손하며 천사를 중보자로 내세워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천사 숭배 사상에 있다거나 영성을 주장하며 보이지 않는 것을 마치 보는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인 양 하지 않도록 주의를 주었습니다(골 2:14-18). 그러한데 본체이신 그리스도를 위해서 구약시대에 한하여 존재하게 했던 절기를 좇는 것에서 신약시대의 절기를 새롭게 만들어서 여전히 이 절기의 본체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에 있을 뿐인 절기를 좇아 이것을 지키며 그럼으로써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기념하고 따르며 살게 하겠습니까? 직접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기념하고 따르는 믿음에 있게 해주셨는데 말입니다. 칼빈은 골로새서 주석에서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습니다.
바울은 아직 그리스도께서 그 의미를 나타내 보여주시지 않은 시기의 그림자들이었다는 이유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이 날들을 지키는 일로부터 자유하도록 한다. 바울은 그림자와 계시, 그리고 없는 것과 나타난 것을 서로 대조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그림자들을 계속 고집하는 자들은 마치 사람을 직접 자기 눈앞에 바라보면서도 그 사람의 그림자로 그의 모습을 판단하려고 하는 사람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이제 우리에게 나타나셨으므로 우리는 그가 우리 앞에 직접 임재하여 계심을 기뻐하고 있다. 바울은 ‘그 몸이 그리스도의 것’,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이라고 말한다. 한때 그림자이었던 의식들의 실체가 이제는 그리스도 얀에서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그림자들이 가리키고 있던 모든 것들을 자신 속에 포함시키셨다. 그러므로 돌이켜 의식들을 행하도록 주장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계시를 매장시키든가 아니면 그의 권능을 탈취하여 그를 공허하게 만드는 자들이다.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그것들은 유한한 것임을 깨닫고 그런 사람들의 말을 따르지 않도록 하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다는 생각만이 유일하게 올바른 판단이다. 바울은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했을 때 거짓 사도들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고 골로새 교인들이 그릇된 멍에에 목을 매이지 않도록 막아주려고 말한 것이다. 야비한 혈육을 끊는 것 자체는 조금도 해롭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를 무익하게 만들기 때문에 오히려 거기 매여 있는 것이 해로운 것이다.
칼빈의 이 말을 주의 깊게 듣기를 바라면서,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에 대해서 전하고자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것에 구약성경은 선지자를 통해 예언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많은 가르침을 주신 가운데 심으로부터 시작하여 유대인의 절기인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 금요일에 십자가에서 못 박혀 달려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시기까지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는 금요일 하루에 가룟인 유다와 결탁한 대제사장이 보낸 무리들에 의해 체포되셨으며 예수님과 함께 했던 제자들은 다 도망하여 예수님 혼자 되셨고,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심문받으시고 또한 대제사장 가야바에 의해서도 심문받으셨으며,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에 걸쳐 부인하는 일이 있었으며, 산헤드린공회 앞에 세워져 심문을 받으셨고, 예수님을 배반하여 은 삼십에 팔아넘긴 가룟인 유다가 자책하여 자살하였으며, 총독 빌라도와 헤롯왕, 다시 빌라도를 오가며 심문과 재판을 받아 마침내 사형 판결을 받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끌려가는 동안에 희롱을 당하시고 채찍을 맞는 고난을 당하신 후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신 때가 오전 9시(유대인 시간으로는 제3시)였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서는 침 뱉음과 모욕을 당하며 창으로 허리를 찔려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십자가에 달린 지 6시간 만인 오후 3시(유대인 시간으로는 제9시)에 죽임을 당하셨습니다(마 25:47-27:50).
본문은 이중에서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사람들에게서 온갖 모욕을 받으셨는데, 3시간쯤이 지나 낮 12시경이 되자 태양은 빛을 잃고 어둠이 온 땅을 덮기 시작하더니 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3시쯤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큰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부르짖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달린 십자가 곁에 섰던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는 잘못 알아 들어서 선지자 엘리야를 부르는 것으로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보라, 저가 엘리야를 부른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제 모든 것이 다 완성된 것을 아시고는 성경의 말씀대로 이루시려고 “내가 목마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9:28). 예수께서는 여느 사형수와는 달리 십자가에 달린 6시간의 짧은 시간에 자신의 몸에 있는 온 물과 피를 다 쏟아내심으로써 심한 갈증에 있었습니다. 그 까닭은 로마 병사가 창으로 예수님의 허리를 찔렀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내가 목마르다”라고 하시자, 한 사람이 달려가서 히솝가지에 꿰맨(요 19:29) 해융[해면]에다 신포도주 적셔가지고 와서는 갈대 끝에 꽂아 올려주고는 목을 축일 수 있게 해주고자 예수의 입에 대어 드렸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말하기를, “그냥 내버려 두시오.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해 내려주나 보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신포도주로 목을 축일 수 있게 해자 그것으로 목을 축인 뒤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9:30). 그리고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하며 큰 소리를 부르짖으시고는 머리를 아래로 떨어뜨리고 숨을 거두셨습니다(눅 23:46; 요 19:30; 참조. 시 31:5).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시는 것을 통해서 마침내 아버지께서 자신을 보내 맡은 일을 성취하여 다 완성하셨음으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고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하시며 운명하신 것입니다. 그때 성전 안에 있는 두꺼운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한 가운데로 갈라져 두 폭으로 찢어졌습니다. 마태는 이때에 있었던 이적의 광경을 보다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땅이 흔들리며 바위가 갈라지고, 무덤이 열리면서 잠들었던 많은 옛 성도들이 다시 살아났으며,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무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서 많은 사람에게 나타났다고 하였습니다(마 27:51-52).
이 광경의 모두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병사들과 그들의 백부장, 곧 로마 군대의 지휘관이 십자가 곁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들은 큰 두려움 속에서 있었으며(마 27:54), 백부장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분은 진실로 무죄하며, 하나님의 아들이었다”(참조. 눅 23:47)라고 말하였습니다. 백부장의 이 말은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욕하는 말을 하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며 배척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정체성(실체)을 분명하게 드러내심으로써 온 세상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주이심을 나타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린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여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이모,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막달리 마리아, 젊은 야고보와 요세(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그리고 또 살로메가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의 어머니 곁에는 예수께서 사랑하는 제자 요한도 서 있었습니다(참조. 마 27:56; 눅 23:25, 26)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섬기던 자였습니다. 그리고 이들 외에도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가 많이 있었습니다. 이들 모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난 중에 죽음을 당하시는 것을 여실히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는 고난을 받으시는 것을 통해서 자신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시면서, 그분이 이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는 고난에 있으신 것이 무슨 일로 있는 것인지를 알려주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 성전에서 일어난 일인 성전 지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둘로 갈라져 찢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아래 있어 죄에 갇혀 있는 죄인을 벌하여 저주하시는 화를 죄인을 위하여 대신 받으시는 희생제물로 자신의 몸을 바침으로 대속주의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보낸 아들에게 자신의 택한 백성에게 쏟을 진노를 내려 벌하십니다. 그러한 하나님께서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는 예수님을 외면하십니다. 그럼으로써 죄인인 모든 사람을 향한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의의 엄위하심을 행하십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위하여 그들을 대신해서 죄값인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께서는 죄인의 한 사람처럼 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무덤 안에 두지 않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는 부활에 있게 하여 온 세상에 생명의 주가 되게 하심으로 죄인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택한 백성과 평화를 누리게 하시는 화목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10장 1-20절에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심으로 성전에서 드려온 희생제사의 제물이 되시는 것에 있은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그 사실을 기록하여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 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요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죄를 없애지 못하는 해마다 드리는 제물이 아니라 단번에 영원히 죄를 없앨 제물이라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속죄를 영원히 이루는 영원한 제사를 드리심으로 이제는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하여 다시 제사를 드릴 것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속죄함을 받은 은혜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예수의 피를 힘입어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음을 당하심으로 자신을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열어 놓으신 길은 새롭고 생명의 길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동안에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나 막혀있던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 막았던 담벼락인 휘장을 자신의 몸을 찢으심으로써 헐고 길을 내어 열어주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하신 아들이 십자가에서 단한번의 죽으심을 통하여 흘린 피가 영원한 속죄를 이루게 하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따르는 길을 걸어 들어오는 모든 이들의 죄를 영원히 용서하셨으며 또한 영원히 기억조차 하지 않으시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과 화목에 있게 하십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도 하나 된 몸으로 있어 화목한 관계를 가져나갑니다. 우리는 매주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 들음으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신 분이심을 인식하며 믿음에 있는 은혜를 입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리스도로 하나 됨에 있어 그리스도로부터 공급되는 떡을 먹고 음료를 마심에 있는 온화하고 화목한 관계를 가져나가는 그리스도인으로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갖게 한 것을 비롯해서 절기를 주신 것에서 원리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은 힘써 일하며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게 해 주셨습니다. 여기에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타지방을 다녀오는 여행에 있는 것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일곱 째 날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노동자, 자신의 집을 방문한 손님을 비롯하여 소 등 노동에 동원되는 가축들도 모든 일을 쉬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와 있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 언약하신 말씀을 상고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의 구함에 있으며 온 가족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음식과 음료를 먹으며 평안을 누리는 복에 있습니다. 이것에 있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 오는 은혜를 누림에 있는 하나님과의 화목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 오는 은혜인 하나님과 화목을 누림에 있지 못합니다. 세상이 결코 줄 수 없는 하늘로부터 오는 복을 빼앗기고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마 13:1-23, 막 4:1-20; 9; 눅 8:4-15)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옥토인 좋은 땅에서 보게 되는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함으로 해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함에 있는 복된 마음으로 있어야 할 것이지, 그렇지 않은 길가의 땅, 돌작밭, 가시덤불로 덮여 있는 밭으로 있음으로 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마귀에게 빼앗김으로 아무런 결실에 있지 못하여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함에 있는 즐거움을 마음에 누리지 못하고 있어서야 되겠는지요. (*)
*2024년 3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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