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보리죽을 먹어 보셨나요
얼마전 방송을 보다가 세상이 이렇게 변할수 있겠구나 하고 한동안 어리둥절한적이 있다.
40대의 아버지가 11살의 어린 아들과 대화를 하다 아버지는 어릴 때 시골에 살면서 그때는 당연한 개구리 잡어 뒷다리 먹은 이야기, 가을이면 메뚜기 잡아 볶아 먹은 이야기, 그리고 겨울이면 밤에 지붕의 처마볏집속을 뒤져 참새를 잡아 구어먹은 이야기를 하면서 너무 맛있게 먹어 지금도 그 맛을 잊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자 어린 아들은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를 들은것 처럼 낮을 찌프리고 동물학대라면서 오히려 아버지를 힐난하는 장면을 보고 한참이나 멍한적이 있다.
방송의 아버지 시대라면 아무리 늘려 잡어도 1970년대 이야기인데 1970년대는 경재개발이 어느정도 이루어져서 메뚜기는 몰라도 배고파서 참새를 먹고 개구리를 먹을때는 아닌것 같아 저 이야기는 어느정도 아버지가 어른들 한테 얻어 들은 이야기를 각색한것으로 짐작되었다.
정말 우리가 겪은 1950년대의 우리나라의 시골형편은 6.25전쟁으로 사회 모든 면이 피박할대로 피박한 상태여서 하루 세끼는 생각 할 수도 없었다. 하루 세끼는 커녕 2끼라도 어떡게 하던 배고파하는 어린우리들을 해먹이기 위해서 힘들어 하는 어른들을 늘 보는 우리들로서는 배고푼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던 채취해 먹었다.
봄이 되면 들과 밭 어딜 가도 나물이 나왔고 우리는 어른들한테 먹을수 있는과 못먹는것을 배워 또래 친구들과 바구니와 호미들고 채취하기 바뻣다. 이른 봄이면 제일먼저 나오는게 냉이였고 좁쌀나물 소루쟁이 씀바귀 민들레 달래 망초나 쑥등을 캐서 저녁이면 나물죽이나 밥을 해먹었다.
그외 두룹나무의 순이나 가죽나무의 순 그리고 엄나무의 순등은 별미중의 별미였다. 이른 봄을 지나 4,5월이 되면 이때 부터는 정말 힘든 보리고개였다. 보리쌀을 먹으려면 6월중순은 되어야 하는데 그때까지 지켜줄 식량은 일부 부유한 집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없는게 정상이었다. 특히 지난해 가믐으로 흉년이라도 들었으면 없는 집에서는 정말 힘들었다. 있는 집에 가서 장례쌀을 먹거나 여름에 일해주기로 하고 쌀을 얻어다 최대한 나물등을 이용해 죽을 쑤어서 연명해 나갔다.
보리 이삭이 피어 이이삭에 알이 조금 백이면 덜익은 푸른 이식을 뽑아다 삶아서 말려 맷돌에 갈아 겉보리죽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이른 감자를 넣어서 끌인 푸르스름한 겉보리죽은 보기와는 달리 맛있었다. 정말 맛이 있었는지 배고파서 기다리다 먹어서 맛있었는지 알수는 없지만 정말 맛있게 먹은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지난해 가믐으로 흉년이 든해에는 집집마다 비상계획이 세워져 있는 식량을 가지고 어떻게 하던 내년 여름 보리쌀 날때까지 버티어야기 때문에 집집마다 김치밥, 콩나물밥, 쓰래기죽, 무밥등으로 최대한 쌀을 아껴먹어야 했다. 무슨 밥이던 밥으로 끼니를 때우는집은 그래도 여유가 있는집이고 그렇지 못한집에서는 여러가지 죽으로 끼니를 때웠다. 이런 사정을 아는 아이들은 낮동안 산과들을 다니면서 시엉이나 삐리기 채취해먹기 나팔꽃 뿌리 캐어 구어먹기, 소나무 가지꺾어 송기먹기등으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아버지가 일찍돌아간 우리집은 형편이 많이 힘들었으나 평생을 근검절약하는 생활속에서 살아오신 할머니가 계셔서 알뜰한 살림을 꾸려오셨기 때문에 다른 집과 같이 보리고개로 인한 힘든 사정은 없었던 걸로기억된다. 할머니는 가을수확해서 탈곡하고 방아를 쪄서 쌀이 만들어 지면 철저히 계산을 해서 가을부터 계획에 의한 식사를 꾸렸다. 가을 부터 김치밥 무밥 콩나물 밥등으로 쌀을 아껴서 다른집들에 비해서 보리고개를 수월하게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