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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영남의 아리랑 세계
영남민요연구회장 배경숙
아리랑, 영남아리랑을 말하게 되면 나는 가슴이 벅차오른다. 석·박사학위 논문의 중심 소재가 영남의 아리랑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신대 할머니나 해외 입양아들의 아리랑이나 월드컵 경기 때나 남북공동 입장 때의 아리랑합창 상황을 상기하면 특히 그렇다. 민족사와 함께하며 그 극복의 역동적인 순간을 증언하는 아리랑의 힘은 늘 나를 전율로 자극한다.
이는 나만의 상념은 아니다. 학승 <직지사> 방장 관응스님이 “아리랑은 한국인의 眞言”이라고 했고, 시인 고은선생이 “아리랑은 고난의 꽃”이라고 한 것과 그리고 구한말 한국에 온 미국인 선교사 H·B헐버트는 “아리랑은 조선인에게 쌀과 같다.”라고 했다. 또한 아리랑은 한민족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공인한 민족의 노래이기에 아리랑의 세계유네스코 등재도 당연할 것이다. 이는 결론적으로 ‘아리랑은 민요 그 이상의 노래’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으로, 그래서 이 시대에 ‘민요는 사라져도 아리랑은 다시 탄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내가 사는 지역에 어떤 아리랑이 존재하는가? 그 전체상을 살피기 위해 분포상을 요약, 정리해 본다.
강원도권-정선긴아라리·강릉자진아라리·춘천아리랑·중원아라성
경상도권-문경새재아리랑·예천아리랑·상주아리랑·봉화아리랑·울릉도아리랑·밀양아리랑
신민요-영천아리랑·경상도아리랑·대구아리랑
창작-대구아리랑·구미아리랑·경산아리랑·팔공산아리랑
가요-울산아리랑·포항아리랑
서울권-긴아리랑·구아리랑·강원도아리랑·해주아리랑·주제가<아리랑>
신민요-한오백년·정선아리랑(김옥심제)
남도아리랑권-진도아리랑·제주조천아리랑
북한지역권-삼일포아리랑·통천아리랑·서도아리랑·초동아리랑
이상에서 영남지역 아리랑의 실상을 확인했다. 분포상이나 장르상으로 볼 때 어느 지역보다도 다양함을 확인 할 수 있다. 이는 대단히 주목되는 현상으로 영남지역은 우리나라 아리랑의 중심 분포지 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영남아리랑의 현재적 위상은 바로 우리나라 ‘아리랑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중 아리랑의 블랙박스인 <문경새재아리랑>을 통한 아리랑사와 확산 과정, 그리고 영남지역 아리랑의 대표급인 <밀양아리랑>을 살피기로 한다.
영남민요, 영남아리랑 그리고 이재욱
1920~30년대 우리나라 국학의 태동기에 관심의 대상으로 등장한 민요는 그 대상이 영남지역 민요였다. 여기에는 이 시기의 대표적 연구자들인 조윤제·이재욱·김소운·최상수·김사엽 등이 영남출신이어서 관심 대상을 영남 지역 민요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 민요연구사에서 영남의 민요는 그 중심에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중심에는 1930년 <영남전래민요집>이라는 조사보고서를 남겼고, 1931년 경성제국대학 문학부에서 <영남민요연구>를 졸업논문으로 최초로 민요를 전공 하였으며, 이를 통해 ‘영남민요’를 학술 용어화 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아리랑 문헌인 1896년 H.B. 헐버트의 논문을 소개하며 ‘영남아리랑’을 특화하여 뚜렸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 있다. 바로 대구출신 팔공산인 이재욱(八公山人 李在郁)이다.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 1가 103번지, 시인 고월 이장희(古月 李章熙)가 태어나 살았던 곳이며 음독자살한 곳이다. 지금은 헐리어 큰 건물이 들어서서 흔적이 없지만, 1929년 이장희가 음독자살하기 전후까지만 해도 이 주소지를 중심으로 많은 문인들이 드나들었다. 이는 바로 옆집이 이상화의 집안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이재욱은 1905년 이 주소지에서 태어나 대구고등보통학교를 다녔으며, 삼촌인 이장희로부터 문학적인 영향을 받았던 곳이다. 그리고 해방 직전 ‘지역문화에 이바지하기 위해 경북도청 사회과로 내려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이후 초대 <국립도서관> 관장으로 재직 중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18일 북한군에 납치되어 피살되었다.
이재욱이 우리나라 최초의 아리랑 문헌인 1896년 H.B. 헐버트의 논문을 소개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A-ra-rung a-ra-rung a-ra-ri-o
a-ra-rung ol-sa pai ddio-ra
Mun-gyung sai-chai pak-tala-namu
hong-do-kai pang-maing-i ta na-kan-da
아라렁 아라렁 아라리오
아라렁 얼싸 배띄어라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나간다
1896년 미국 선교사 헐버트의 <KOREA VOACAL MUSIC>에 수록한 <아라렁>의 첫 절이다. 현재로서는 곡보를 수록한 아리랑 관련 문헌으로는 최고(最古)의 자료인데, 지난 시간에 언급했듯 ‘문경새재···’를 첫 절로 쓰고 있다. 문경새재아리랑의 직접적인 영향관계를 분명히 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 글에서는 두 가지를 명확히 알려주고 있다. 하나는 명칭이 ‘아리랑’이 아니고 ‘아라렁’이고, 후렴 2행에서 ‘아리랑고개로 넘어 간다’가 아니라 ‘아라렁 얼싸 배띠워라’로 되어 있어 형태면에서 오늘과 다름을 알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의 명칭과 후렴으로 정형화 되는데 있어 과도기적 시기와 상황이 있었음을 말 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헐버트가 “한국인에게 이 노래는 늘 먹는 쌀과 같은 위치에 있는 노래다. 이 노래는 어느 곳을 가나 접할 수 있는 일상화 되어 있는 노래인 만큼 보편적인 노래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라고 밝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 외국인 선교사는 이 아리랑이 1896년 전후에 대단히 널리 불린다고 한 것이다. 이 말을 확대해석하면 문경새재아리랑이 널리 불리고 있다는 말이기도 한 것이다.
조선조말 대유행가, 문경새재아리랑
노래, 특히 민요의 경우 첫 절은 그 노래의 ‘코드’를 담고 있다. 대개는 노래의 형성배경을 담고 있고, 곡명을 담고 있고, 나아가 선호도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그렇게 본다. 이런 예의 전형적인 민요가 바로 <문경새재아리랑>이다. 첫 절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문경 새재야 물박달나무/ 홍두께 방망이로 다나간다’
이 가사를 통해 형성지역이 경북 문경이고, 경복궁 중수기 특산품인 박달나무가 공출로 다나가는 상실감을 노래한 것으로 그 역사적 배경과 시기가 조선조말 대원군의 폭정이 있던 시기임을 알게 한다. 나아가 형성기 당대에 대원군의 수탈상을 비판하는 것을 공동체가 공감하여 널리 불렀음도 알게 한다. 그런데 이 아리랑을 통한 문경지역 공동체의 저항의식은 문경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당시 전국은 대원군의 강제 부역과 공출에 대한 반감으로 가득 차있던 상황이라 문경새재아리랑의 이 첫 가사는 공감을 얻기에 충분했다.
이 공사 현장에는 전국에서 올라온 초랭이패나 남사당패 같은 유랑 연예패들이 올라와 대원군의 명을 받고 밤마다 위문공연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은 즉흥 음악의 명수들로 문경새재아리랑을 자신들의 레파토리로 삼아 유행 시켰다. 이 과정에서 부역군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노래 한 듯하여 이를 듣고 기억했다가 부역을 마치고 귀향하여 제 고장에 전파를 시켰을 것이다.
오늘날 같이 교통이 원활하지 않던 시절, 방송·출판 같은 매체가 없던 시절에 하나의 노래가 전국에 확산된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문경새재아리랑>은 당시 전 국민의 마음에 공감을 얻은 최고의 유행가였다는 것이다.
<진도아리랑>과 <밀양아리랑(1938년 방송자료)>의 첫 절에서 ‘문경 새재는 왠고갠가/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로고나’로 불린 예가 그것이다. 이는 필자의 조사일 뿐 그 실상은 더 많았을 것이다. 이는 당시 문경새재아리랑이 전국적인 대 유행가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역사를 치러낸 ‘문경고개’가 ‘상실의 고개’로 의미화 되고, 여기서 다시 ‘아리랑’과 ‘고개’(嶺)가 합성하여 ‘아리랑+고개’로 어휘화, 대차단어(代借單語)로 되었다. 이런 상황은 공사 중에 새로운 <아리랑>을 파생시켰는데,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에 고종과 민비가 아리랑을 들었다는 기록을 하고 있어 입증이 되는데, 이 아리랑이 1894년 미국 선교사 헐버트씨가 들은 아리랑이다.
즉, 시쳇말로 <문경새재아리랑>을 ‘아리랑의 불랙박스’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리랑의 전파 계기, ‘아리랑+고개’의 합성 문제 등을 풀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준다는 것이고, 결국 정치적 대역사(大役事)을 계기로 <문경새재아리랑>이 7년간의 경복궁 중시 기간에 널리 불렸고, 이를 계기로 전국적인 아리랑의 형성에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탁월한 영남성(嶺南性), 밀양아리랑
<밀양아리랑>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아리랑이다.
아랑은 한국의 대표적인 해원(解寃) 설화의 주인공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조 명종 때 밀양 윤부사의 무남독녀로서 재주와 용모가 남달라 부근 총각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이 고을 관노인 통인 주기도 아랑을 흠모하여 유인해낼 방법으로 유모를 돈으로 매수했다. 그리고 유모는 휘영청 달이 밝은 날 달구경 가자며 아랑을 영남루 뜰로 데리고 나온 후 자리를 피했다. 이 때 접근한 주기는 겁간하러했으나, 아랑은 정조를 지키기 위해 반항하다 결국에는 주기의 비수에 찔려죽고 말았다. 다음날 아랑이 없어졌다는 소문이 퍼지고, 윤부사는 슬퍼하다 딸을 찾지 못한 채 서울로 올라가고 말았다.
이 후 새로운 부사들이 부임 했지만, 모두 첫 날밤에 원인도 모르게 급사한다. 폐군이 될 무렵 이 상사라는 사람이 자원했다. 바로 그가 억울하게 죽은 ‘아랑’의 원한을 풀어주었고 그 후 변고가 사라졌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지금이로부터 약 400여년 전의 설화인데 <밀양아리랑>의 사설에 녹아있다. 그렇다면 이 노래는 그 때에 형성이 되었는지 궁금하다. 사실 민요에서의 형성과정을 살피는 작업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나, 나름대로의 특징을 가지고 전승되는 노래는 분명히 형성과정은 있을 것이다. 먼저 곡조를 살펴보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빠르고 경쾌하고 또한 첫 음을 강하게 발성하므로 씩씩함을 느낄 것이다. 이것은 아랑의 슬픈 사연보다 밝은 이야기가 더 어울리므로 이 설화와의 개연성은 희박함을 알 수 있다. 즉 흙의 소리 토속요를 지나 퉁속의 잡가시대에서 새로운 가락이 만들어진 후, 이미 이 지역에 있었던 사설 들이 합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현재까지 확인 된 <밀양아리랑>의 첫 음반은 1926년 <매일신보> 광고문에 처음으로 수록되어 있으므로 알 수 있고, 첫 방송은 1932년 경성방송의 국악 프로그램에서 이다.
또한 밀양시 내일동 ‘영남루’ 윗 쪽에는 박시춘선생 기념비와 생가가 있고, 여기서 밀양강 쪽으로 가면 시립박물관을 오르는 돌계단 옆에 <밀양아리랑> 노래비가 세워져 있고, 다시 돌계단을 내려가 대숲 쪽으로 오르면 ‘아랑각’과 안내 현판이 있다. 그런데 이 현판 내용에서나 노래비 어디에서도 ‘아랑처녀 설화’와 <밀양아리랑>과의 관계를 언급한 대목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처녀 이름 ‘아랑’이 변해서 ‘아-리-랑’이란 민요 이름이 생겼다는 주장에 대해 현지 기록에는 없다는 말이 된다. 이는 아랑처녀 설화가 <밀양아리랑>의 배경설화가 아니라는 것이기도 하다.
결론은 <밀양아리랑>의 첫 사설과 가락이 탁월하게 영남적이라는 점이 우리나라의 대표아리랑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날좀 보소’라는 경상도적인 투박한 반말투, 여기에 모든 아리랑 중 가장 활달하고 꿋꿋한 경상도적인 선율이 <밀양아리랑>을 우리들에게 널리 불리게 한 요인이라는 것이다. 곧 탁월한 영남성이 브랜드 파워를 발휘했다는 것이 된다.
이를 전제로 <밀양아리랑>의 형성시기를 추정한다면 전자의 조선시대 형성설이 부정되고 근대에 이르러 형성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명시적으로 <밀양아리랑>의 존재가 확인 되는 최초의 기록물은 1926년 음반자료에서라는 사실이다. 구체적으로는 1926년 9월 26일 ‘일축조선소리반’ 광고에 박춘재 장고반주에 의해 ‘대구 김금화(金錦花)’가 부른 <밀양란란타령’(密陽卵卵打令)>이 그것이다. ‘卵卵’은 ‘아리랑’의 한자식 표현이다. 물론 아리랑의 형성시기를 반드시 명시적이 기록으로만 판단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밀양지역에 이 노래의 기층성이 확인 되지 않는 한 준거의 유일한 틀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26년의 음반(축음기판)계 상황은 전적으로 상업성과 유명 권번(券番)의 기녀들에 의해서 취입되었고, 그 시장성 역시 각 지역 권번을 중심으로 한 상권(商圈)에서다. 그래서 노래를 부른 김금화는 1933년 6월 대구에서 개최된 ‘조선음악대회’ 때 “남조선 <밀양아리랑타령>으로서 조선에 이름이 있는 김금화”로 소개된 권번 출신 명창이다. 이로서 본다면 <밀양아리랑>은 토속 전통민요가 아닌 1920년대 중반에 당대 최고의 상업적 판단으로 형성된 신민요 또는 유행가인 것이 된다.
이는 근래 아리랑 연구가 심화되면서 <진도아리랑>이 1930년대 대금의 명인 진도출신 박종기가 만들었다는 주장과 상황이 유사하여 주목하게 된다.
그러나 당연한 결론, 즉 <밀양아리랑>이 근대에 형성된 노래라고 해서 그 가치나 위상이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밀양지역의 기층을 갖지 않은 신민요라는 사실 역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밀양아리랑>은 지역과 시대를 초월하여 국가적, 민족적 선호도를 획득한 역사적인 ‘히트 송’이기 때문이다. (대구예술, 135호 2012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