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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안동레미콘산업유한회사 정영수리사장의 창업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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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23 흑룡강신문 | |
시대가 영웅을 낳는다. 전쟁년대가 장군을 낳는 산실이였다면 오늘의 시장경제발전년대는 시대의 풍운아-기업인들을 배출하는 산실이다. 심양안동레미콘산업유한회사 리사장 정영수씨가 바로 우리 시대 풍운아의 한사람이다.
흑룡강성에서 출생한 정영수(1952년 생)씨는 어려서 공부도 잘하고 꿈도 많았지만 1972년 9년제학교를 마치고 그 시대청년들이 누구나 겪었듯이 귀향해 호미자루를 쥐여야 했다. 귀향 첫해에 그는 생산대회계를 맡았고 이듬해 참군해 안산에 오게 되였으며 수학골이 좋다는 평판을 받아 기계화련대에 배치되였다. 전 사단에 한대밖에 안되는 미국제페로다를 운전하던 정영수는 1974년 부대에서도 대학에 《로농병학원》을 추천한다는 소식을 듣고 열심히 공부해 이듬해 부대내에서 치뤄진 추천시험에서 1위를 취득, 장춘야금학교에 입학하였다. 1977년 9월에 졸업하고 원 부대에 돌아온 정영수는 기술간부로 제발돼 안강소속의 여러 광산개발에 참여하였으며 1983년 100만 감군으로 부대가 집체로 군복을 벗고 《안강건설회사》로 명칭을 바꾸자 회사에서 기술과장직을 맡았으며 회사의 배려로 1985년 9월부터 1987년 9월까지 청화대학 환경공정학원 열에너지전공학부에서 공부할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1990년 그는 한국의 사촌형의 초청으로 처음 고국땅을 밟았다. 인품좋은 사촌형은 그를 살갑게 대해주며 여러 사람들에게 소개시켜주었는데 이는 그후 그의 사업에 큰 도움이 되였다.
한국체류기간 한국의 선진공법과 기술을 터득할 욕심으로 그는 사촌형에게 떼질을 써 현장에 취직, 채석장에서 페로다도 운전해보고 지하철공사장에서 직접 일도 해보면서 많은것을 체험했다. 당시 중국에는 현대화된 레미콘생산시설이 기본상 없었고 레미콘생산기술은 더욱 락후했다. 하여 정영수씨의 머리속에는 귀국하면 한국의 레미콘생산기술과 설비를 도입해 레미콘생산회사를 설립해야겠다는 구상이 서서히 무르익었다.
2개월반후 귀국한 정영수씨는 레미콘시장에 대한 자세한 조사보고를 만들어 한국레미콘협회에 보내 합작파트너추천을 의뢰했는데 대방에서는 이에 중시를 돌려 동아건설 등 5개 중견건설업체를 추천해주었다. 여러 회사와의 상담을 거쳐 정영수씨는 최종 동아건설을 파트너로 정해 1994년말 당시 심양 최대 규모의 레미콘생산합작회사 《심양안동레미콘》이 심양혼남고신개발구에서 고고성을 울렸다.
선진설비, 선진공법으로 생산되는 《안동레미콘》은 그 품질을 인정받아 심양시의 많은 고층건물건축과 립체교(立交橋), 혼하다리건설에 대량 사용되였다. 수십개에 달하는 건물건축외 《황하립체교》, 《건설대로립체교》, 《망화립체교》, 《공화립체교》, 《부민교》, 《장청교》, 《혼하남제방》, 《2환도로다리》, 《승리교》, 《공농교》, 《동서고가다리》(高架橋) 등에 납품되였으며 지난해 심양지하철공사가 시작된후 주요납품회사로 지정되였다.
《안동레미콘》이 설립될 때만해도 심양시에는 레미콘회사가 불과 4개, 그런데 그후 륙속 생겨나 현재 레미콘회사가 35개에 달한다. 그만치 경쟁이 치렬해졌다. 동기생산을 확보하기 위해 《안동레미콘》은 그간 스팀보일러와 온수보일러를 설치해 생산을 보장했는데 지난해부터 석탄값이 폭등해 수지가 맞지 않았다. 고심끝에 정영수씨는 새 공법으로 겨울작업을 할수 있는 새 공장을 설계해 신축, 새 공장은 지하에 보일러를 설치하고 우에 모래를 얹어 가열하고 뚜껑은 채광판을 씌워 태양열을 받게 한다. 7월에 준공되는 새 공장은 생산원가도 크게 낮출수 있고 겨울에도 지하철공사에 레미콘을 제대로 납품할수 있어 경쟁력을 확보할수 있다. 그의 회사는 선전적공법외 레미콘생산에 필요한 설비와 차량을 대량 구입, 탄탄한 실력을 갖추었다.
정영수씨는 근년래 사업분야를 확장, 자체로 채석장(采石場)을 구매해 레미콘생산에 필요한 골재를 충분히 확보해두었다. 레미콘생산에서 석회암보다 화강암이 상대적으로 원가는 높지만 레미콘질이 좋아 건설현장에서 선호, 그래서 그에게는 주동적으로 찾아와 납품울 요청하는 건설회사들이 많다. 이외 그는 심양지역에서 버림받던 흙모래를 재리용하기 위해 해외에서 모래선별기와 모래세척기를 구입, 지하철공사 등에서 나오는 흙모래를 실어다 선별, 세척해 모래는 레미콘생산, 건축자재로 판매하고 흙은 도시록화에 공급한다. 벽돌공장에서 흙을 파낸 구덩이를 임대해 세척장으로 사용하며 선별, 세척해낸 흙과 모래외 돌덩이 등 찌꺼기로는 구덩이를 메우기에 자원재생리용과 생태계회복에 리롭다. 현재 심양지역에서 이런 설비는 그가 유일하게 보유, 시장전망이 밝다. 한국과 합자로 기계제조회사도 설립했는데 주로 레미콘생산기계와 광산용 대형설비들의 배합시설들을 생산하고있다.
구매한 토지는 46무, 임대한 토지는 24무, 5천여평방메터에 달하는 2개의 공장건물과 대량의 설비, 차량들을 확보한 《안동레미콘》은 현재까지 은행대부금 1전한푼 쓰지 않고 운영되고있다. 다년래 국가에 납부한 세금이 4천여만원에 달하고 300여명 로동자들의 로임을 종래로 체불한적이 없이 정상운영되여왔다. 그의 회사에서는 대량의 레미콘분야인재들이 양성되여 동업종회사들에 수송되였는데 이 회사를 거친 사람들이 여러 회사들에서 중견으로 일하고있다. 심양시레미콘협회 부회장직을 맡은 정영수씨는 그래서 동업계모임 때면 상좌에 모셔지는 특별대우를 받고있다. 지난해는 한국회사의 제작의뢰를 받아 몽골에서 레미콘생산라인을 깔아주는 공사를 진행하였다.
모든 성공한 경영인들이 그렇듯이 정영수씨의 성공도 우연이 아니였다. 성공비책의 첫째 조건으로 그는 성실과 신의를 꼽았다. 우선 경영인 자신이 성실해야 한다는것이 그의 신조다. 파트너와의 합작에서 절대 잔머리를 굴리지 않고 공동리익을 도모했기에 그와 합작하는 여러 파트너들은 그를 믿어주고 경영을 위임하였다. 제품사용호들에게도 항상 신의를 지켰다. 납품계약을 체결하면 하늘이 두쪼각나도 기한대로 질좋은 제품을 납품하였기에 신용도가 사용업체에서 쌓아졌다.
둘째, 멀리 내다볼줄아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수년전 레미콘시장이 호황을 누릴 때부터 정영수씨는 금후의 회사발전을 두고 고심, 그 대책으로 채석장을 구매하고 레미콘설비제조회사를 설립하였다. 잘나간다고 한가지 사업에만 매달린다면 어느 때인가 한계에 부딛친다는것이 그의 체험이다.
셋째, 종사하는 분야의 프로가 되여야 한다. 경쟁이 치렬한 레미콘생산분야에서 살아남자면 원가를 낮추는것이 급선무, 이를 위해 정영수씨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 기술혁신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현재 신축하는 새 공장의 동기생산시설들을 만들기 위해 기술진과 설계를 몇번이나 뜯어고쳤는지 모른다. 그 자신이 기술에 조예가 있었기에 자금을 절약하면서 설비갱신에서 리상적인 효과를 거둘수 있었다.
넷째, 규장제도는 엄격하게, 베풀 때는 베풀어야. 정영수씨는 한국기업의 모식을 따 규장제도는 상세히 제정하고 그 집행도 엄격했지만 베풀 때는 베풀줄도 알았다. 종업원들의 가정에 대사가 있을 때면 꼭꼭 찾아주었고 사유상 회사를 떠날 때는 근무기간이 1년미만인 종업원에게는 1개월의 로임을, 5년이상인 종업원에게는 5개월의 로임을 퇴직금으로 지불해주었다. 엄하면서도 후더운 인간애가 있었기에 종업원들이 잘 따라주었다.
그사이 자기사업에 몰두하다보니 조선족사회활동에 얼굴을 내밀지 못했다는 정영수씨, 지난해 민영 발해대학에 장학금을 내놓는 등 민족을 위한 자선사업에 나선 정영수씨는 금후 조선족사회발전을 위해 해야 할 바를 하겠다고 표하였다.
/요녕조선문보 |
첫댓글 대단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민족의 자존심...
조선족분이 중국에서 잘 해내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