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 남선 교수님과 함께하는 풍수답사입니다. *
정기답사는 홀수 달 두번째 주 일요일에 실시하며
일정에 변동이 생길 시 미리 공지하겠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장마와 무더위가 시작되었습니다.
자연이 정해논 법칙을 인간이 거스를수 없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게 지혜가 아닐까 싶습니다.
정석풍수가 추구하는 자연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선택이
요즘 급변하는 기후변화와 자연재해에 대한 답이 아닐까 싶습니다.
건강 잘 챙기시면서 여름을 즐기시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1. 답사일 : 2024년 7월 14일 (일)
2. 장소 및 시간 : 아주대 정문 오전 8시 정각 출발
3. 답사지
1) 거창 수승대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에 위치한 명승지)
거창 수승대는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에 있는 영남 제일의 동천(洞天: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으로 알려진 ‘안의삼동(安義三洞)’ 중 하나로 원학동 계곡 한가운데 넓은 화강암 암반으로 이루어진 계곡이다. 이곳은 암반 위를 흐르는 계류와 숲이 어우러져 빼어난 자연경관을 이루고 있어 2008년에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수승대는 이곳이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던 관계로, 신라로 가는 백제 사신들이 수심에 차서 송별하는 곳이어서 수송대(愁送臺)라 불렸다고 한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이곳의 풍경을 예찬하는 시를 한 수 읊은 뒤부터 수승대(搜勝臺)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수승대에는 거북바위를 비롯해 요수정(樂水亭)과 관수루(觀水樓)가 아름다운 계류와 함께 어우러져 있다. 주변에는 구연서원과 원각사 등이 자리하고 있어 문화경관으로서의 가치도 크다. 수승대의 하부에는 보가 설치되어 하천의 일정 구간이 못으로 형성되어 있다.
수승대에는 그 명칭이 유래된 퇴계 이황의 개명시와 관련하여 갈천(葛川) 임훈(林薰)의 화답시가 전한다. 거북바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특히 거북바위에 새겨진 글 중에서 누구의 장수지대(藏修之臺), 장구지소(杖屨之所)라 한 것은 그가 이 동천의 주인임을 명확히 표시하고자 한 각자라고 한다.
[네이버] 거창 수승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황산 고가 마을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황산전통한옥마을은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에 위치한 전통한옥마을로 수승대국민관광단지 건너편에 있다. 1540년(조선 중종35년)에 요수 신권 선생이 이곳에 은거하며 1540년 ''구연재''를 세우고 후학들을 양성했던 이후로 거창 신씨의 집성촌 마을이 되었다.
이 ''구연재''는 1573년 신권선생이 죽자 사림에서 ''구연서원''으로 개칭 하고, 석곡 성팽년과 함께 배향하였다. 이후 황산마을은 18세기 중엽 조선 영조 때 노론계 학자인 황고 신수이 선생이 입향을 하면서 번성하게 되었다. 이곳 황산전통한옥마을의 가옥들은 대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건립된 건축물로 대한제국 말기와 일본 강점기 시대의 지방 반가의 전통 한옥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남아 있는 한옥은 약 50여 호로 안채와 사랑채를 갖추고 있고, 모두 기와집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씨족 부농촌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을의 담장은 제법 큰 자연석을 이용한 토석담으로 약 1.2Km에 걸친 활처럼 휘어진 전통 담장길은 전통고가와 잘 어우러져 매우 고즈넉하고 아늑한 느낌을 준다.
마을에 들어서면 입구에 높이 15m, 수령 600년에 이르는 ''안정좌''나무라 부르는 느티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마을 중앙에는 "거창 황산리 신씨고가"가 자리 잡고 있는데, 1927년 옛 건물을 허물고 새로 지은 건물로 ''원학고가''라고도 부른다.
이 가옥은 경상남도 민속문화재 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채, 사랑채, 중문채, 곳간채, 솟을대문, 후문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특히 사랑채는 궁궐에서나 볼 수 있는 고급스러운 장식물로 꾸며져 있어 당시 큰 지주였던 집주인의 재력을 엿볼 수 있다. 안채는 많이 개수되어 전통한옥의 격식에서는 많이 벗어난 모습을 보여 준다.
[네이버] 황산전통한옥마을 (대한민국 구석구석)
3) 동계 정온 선생 가옥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 50-1)
덕유산 남쪽 끝의 금원산에서 흘러내린 산상천을 따라 위천에 이르면 조선시대 성품이 강직하기로 유명한 본관 초계(草溪), 동계 정온 선생의 고택이 나온다. 정온 선생은 광해군에게 나이 어린 영창대군을 증살(방에 장작불을 지펴 열기로 죽이는 방법)한 것은 부당하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 대정(大靜)에서 10년간 유배 생활을 했고, 인조 때 발발한 병자호란 이후 척화를 주장하다 화의가 이뤄지자 낙향했다. 《덕변록(德辨錄)》과 《망북두시(望北斗詩)》, 《망백운가(望白雲歌)》를 지어 애군우국(愛君憂國)의 뜻을 토로하였고, 문집으로는 《동계문집(桐溪文集)》이 있다.
정온 선생은 함양(咸陽)의 일두 정여창 선생을 모신 청계서원 바로 옆의 남계서원(藍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유명한 서원 두 군데가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경우도 드문 경우로 고건축 답사를 가게 된다면 꼭 들러볼 일이다. 동계고택은 위천면에서 북쪽으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다. 면에서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서면 산 아래 커다란 기와집이 나타난다.
세월을 알리기라도 하듯 나이 많은 거대한 고목이 고택 뒤쪽에 서 있어 답사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마을 앞길을 걸어 대문 앞에 다다르면 하마석이 있고 대문에는 인조가 내린 정려(旌閭) 현판 〈문간공동계정온지문(文簡公桐溪鄭蘊之門)〉과 〈(국태민안國泰民安)〉이 솟을대문에 걸려 있다. 정온댁과 동일한 크기의 솟을 대문채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데, 밖으로 창문이 없는 것과 한쪽은 창문을 칸칸이 두어 두 건물의 차이점을 발견하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볼거리다.
[네이버 지식백과] 동계 정온선생가옥 [桐溪 鄭蘊先生家屋] (한옥의 미, 2010. 7. 15., 서정호)
4) 거창 원천정[ 居昌原泉亭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장기리 778]
거창 원천정은 남명 조식(曺植)[1501~1572]의 문도 원천 전팔고(全八顧)[1540~1612]가 1587년(선조 20) 대를 쌓고 연못 조경을 하였으며, 1588년(선조 21)에 원천 정사(原泉精舍)로 창건하였다. 뒤에 건물이 퇴락하자 1684년(숙종 10)에 후학들이 힘을 모아 중창한 건물이다. 거창 원천정은 남명학파의 문도인 최영경(崔永慶)[1529~1590]·정구(鄭逑)[1543~1620]·김우옹(金宇顒)[1540~1603]·오장(吳長)[1565~1617]·문위(文緯)[1554~1631]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논하고 후학을 양성한 장소이며,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모아 대책을 논의한 사적지이다.
거창 원천정은 원천 전팔고가 1587년(선조 20)에 물가에 대를 쌓고 연못을 조경하여 개인 수양과 휴식 공간으로 사용하였으며, 1588년(선조 21)에 원천 정사를 초가집으로 창건하였다.
이 무렵 원천과 가북 용산은 남명학파의 왕성한 활동으로 거창 유림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 중국 명군이 가조에 머물자 전팔고가 군량미를 제공한 공로로 명나라 황제가 첨지 벼슬을, 선조는 대사헌 관직을 내렸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이후 옛 건물이 몇 칸 무너지자 1636년(인조 14)에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양쪽에 방을 한 칸씩 만들고 가운데 마루를 두 칸으로 하여 완성하고 후학 양성 장소로 사용하였다.
1684년(숙종 10)에 다시 후학들이 재물을 모아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왼쪽에 마루를 두 칸으로, 오른쪽에 방을 두 칸으로 구조 변경하였다. 이때까지 정자 이름은 원천 정사(原泉精舍)였다. 1760년 간행된 『거창부 여지승람』에 거창 원천정(居昌原泉亭)이 등재된 것으로 보아 수차례 보수를 하고 18세기에 와서 거창 원천정으로 명칭을 바꾸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건물은 1684년 이후의 건물이며, 마루와 뒤쪽 일부를 제외하고는 계자 난간을 둘렀다. 정자 뒤에 용천사가 있으며, 용천사는 1712년(숙종 38) 창건하여 1868년(고종 5) 훼철되었다가 2001년에 중창하여 형사보·류자우·전팔고·전팔급·서숙 등 5현을 배향하고 있다. 해마다 3월에 향례를 올린다.
[네이버 지식백과] 거창 원천정 [居昌原泉亭]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4. 회비 : 5만원 (차량 대여비 및 중식 석식 기타 비용 포함)
(당일 총무에게 납부)
5. 연락처 : 총무 김 은희 (010 - 3228 - 64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