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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명절을 앞두고 교통이 복잡할 것을 염려하여 원래는 9월 4~5일로 일정을 잡았다가 2~3일로 바꾸었다. 그런데 전국적으로 많은 비가 온다고 예보를 하고 일부 지방은 폭우가 내릴 것이라는 말에 모처럼 나들이 계획에 적잖이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걱정은 하나의 기우가 되고 약간 흐린 날씨에 오히려 구름이 해를 가리니 뜨겁지 않아서 좋다. 게다가 선선한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주니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여행하기에 아주 좋은 날씨다.
죽도시장!
약 4시간 30분정도를 달려 포항에 도착하다. 유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방송에 나온 횟집을 찾으니 한참을 가야할 것 같아서 가까운 곳에 들어가서 그 유명하고 아내가 먹고 싶다는 말에 멀리 포항까지 오게 된 것이 바로 물회였다. 메뉴판을 보고 특 하나와 자연산 하나를 시켰다. 하나 가지고는 적어서 안 된다고 하여 둘을 시켰는데 먹어보니 하나만으로도 충분하였다. 우선 특을 먹었다. 회와 같이 나오는 것이 생선구이와 멍게와 반찬이며 물회 속에는 무채를 듬뿍 넣고 전복과 우럭, 광어의 고기가 들어서 꼬들꼬들하고 오도독하게 씹히는 맛이 좋고 양념 국물을 많이 넣어서 시원한 것이 그런대로 입맛을 돋우었다. 특을 하나 먹고 나니 배가 부른데 밥이 나와서 매운탕과 함께 한 숟가락 정도 먹으니 딱 좋았다. 남은 자연산 물회는 싸 달라고 하여 가지고 오다. 식사를 한 후에 바로 옆에 있는 죽도시장을 가니 생각보다는 크고 정리가 잘 되어있어서 전통시장에 대한 기대치가 생겼다. 전통시장을 살려야 하는 과제를 생각하며 해마다 사단법인 장날에서 진행하는 전통시장 방문하는 행사에 참여하였던 생각으로 시장을 둘러보며 반 건조 가자미 한 바구니와 큰 조기를 한 마리 사고, 저녁에 탕으로 끓여 먹을 생선도 잔뜩 산후에, 다음 목적지인 경주시 양남면 추읍리에 있는 주상절리를 찾아 나섰다.
포항시 오전읍 문충리의 정몽주 생가 터
정몽주 생가 터!
네비를 따라서 가는데 포항제철 옆을 지나서 14번 국도를 따라 가다보니 길이 얼마나 꼬불꼬불한지 조심스럽게 운전을 하면서 가는 중에 언뜻 이정표에 정몽주 생사라는 글씨가 보였다. 차를 다시 돌려서 100m 거리에 있다는 생가를 찾아가니 이정표가 전혀 없고 시골이라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 4,5학년 쯤 되어 보이는 초등학생이 지나가기에 물어보니 모른다고 했다. 동네로 들어가서 어른에게 물으니 아무것도 없다면서 저기 산 아래에 있다고 하여 가다보니 길은 갈라지고 어디로 가야할 지를 모르고 있는데 마침 어떤 전화국 직원 같이 보이는 제복을 입은 젊은 분이 있어서 물으니 길을 가리키며 저 끝에 있다고 하여 갔더니 아무 것도 없고 조금 전에 차로 지나간 곳이었다. 다시 돌아서 어느 집에 노인들이 있어서 다시 물으니 되돌아서 산 아래에 있다고 하여 겨우 찾아갔다. 동네 가운데 초등학교가 있고 학교 담장을 끼고 있는 끝 지점에서 동네를 벗어나 산 쪽으로 약 200m 쯤 가니 안내판이 하나 보였다. 포은 정몽주 생가 터라고 하며 그의 유명한 단심가와 간단한 안내가 적혀 있고 주변에는 밭으로 농작물이 자라고 생가 터에는 키가 작은 향나무가 차지하고 있었다. 보고나니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길가에 서있는 이정표 하나 밖에는 없고 시골의 길을 처음 찾아오는 사람이 제대로 찾을 수가 없다. 그리고 처음에 만났던 초등학교 상급생 같이 보이는 학생도 학교 담장과 200m 정도 밖에 안 되는 곳에 우리나라 역사상 유명한 인물의 생가 터가 있는 것도 모른다는 사실에 실망과 미래에 대한 염려도 되었다. 아무리 터만 남아 있다고 하여도 수업시간에 아이들을 데리고 현장에 가서 보여주며 설명을 했을 만도 한데 현장의 산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안타까울 뿐이었다. 한 가지 다행한 것은 영천시 임고면에 정몽주의 생가를 복원하기 위해서 2014년 4월에 상량식을 하고 지금 공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역사 교과서 집필에 대해서 진보와 보수층의 의견이 대립되고 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역사에는 이념을 가를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비록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었지만 역사적인 훌륭한 인물에 대해서 바르게 가르치고 역사를 바로 세우므로 우리의 미래를 열어가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정몽주는 해를 마시고 태어났다고 한다. 학문을 좋아하고 무예에 관심이 많아서 말타기를 즐겨했다고 한다. 생가 주위에서 上馬巖과 基礎石과 土器가 발견되었다고 하며 그의 듯을 기리기 위해서 마을을 문충동으로, 골짜기를 문충골로 변경하였다. 휘(諱)는 몽주, 자(字)는 가달(可達), 호는 포은(圃隱)이고 본관은 영일이다. 형양공의 10대손이며 아버지는 운관(云瓘), 어머니 영천 이 씨의 장남으로 1337년 문충리에서 태어나서 8~9세 때 외가인 영천에서 살았다고 한다. 조선초 문신인 그의 제자 함부림에 의하면 경주부 영일현 사람인데 영천에서 살았다고 전한다. 그는 고려를 지키려다가 개성 선죽교에서 태종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에게 추살당하고 말았다.
이방원의 회유가에 답한 단심가가 안내판에 적혀 있는 것을 보니 잠시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何如歌
如此亦如何 如彼亦如何 城隍堂後垣 頹落亦何如 吾輩若此爲 不死亦何如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냐? 성황당 뒷담이 무너지면 어떠하며 우리도 이같이 죽지 않은들 어떠랴!
丹心歌
此心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與之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이시랴!
이방원의 회유에 대한 답가로 단심가를 부르고 그는 결국 처절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주소는 경상북도 포항시 오천읍 문충1리. 지나가는 도로명은 정몽주길 63번길이라고 안내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생가 터를 찾느라고 시간을 보내다 보니 100m 거리에 있는 곳까지 갔다가 오는데 한 시간이 넘게 걸리고 말았다. 국도 14번을 따라 가니 한적한 시골길에 차도 별로 없고 주변은 산으로 둘러싸여 드라이브하기에 좋은 길이라 여유롭게 감상을 하며 끝없이 꼬불꼬불한 길을 가다보니 다음 목적인 경주시 양남면 주상절리 안내판이 나왔다. 큰 길에서 왼 쪽으로 나와서 바다 쪽으로 조금 내려가니 주상절리 주차장이 보여서 차를 세우고 테크로 만들어 놓은 주상절리 파도소리길을 따라 동해 바다를 끼고 시원한 바다 바람을 맞으며 걸으니 주상절리가 나타나다.
누워 있는 주상절리
주상절리!
약 2,000만 년 전 신생대 시대에 현무암이 녹으면서 생긴 암석으로 마그마에서 분출한 1000도 이상의 뜨거운 용암이 차가운 지표면과 접촉하는 하부면과 차가운 공기와 접촉하는 상부에서부터 빠르게 냉각 되면서 수축한 용암의 표면에는 가뭄에 논바닥처럼 오각형, 육각형 모양의 절리(틈)가 생기게 된다고 한다. 그 기둥 모양의 절리를 주상절이라고 한다. 양남면의 절리는 수직은 물론 누워 있는 것과 국내외적으로 희귀한 부채꼴 등 다양하고 독특한 주상절리가 형성되었다. 동해 바다와 어울려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특히 화산활동 연구에 중요한 학술적 자료가 된다고 한다. 쳔연기념물536호로 지정되었다. 주변에 멋지게 자리 잡은 까페와 팬션은 동해의 푸른 바다를 굽어보며 서있는 것이 잘 어울려 보였다.
다음은 경주로 방향을 돌렸다. 오는 길에 멀리 문무왕의 수중릉을 바라보며 그 진의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다.
한화리조트!
예약한 숙소다. 몇 년 전에도 여러 번 와 봤지만 교직원공제회에서 제휴하여 이용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해 주어 30% 싸게 이용할 수가 있어서 종종 이용하는 편이다. 몇 평인지는 모르지만 두 명이 사용하게에는 너무 넓어서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식탁의자가 4개인 것을 보니 4인용인 것 같다. 포항 죽도시장에서 살아 있는 생선을 찌개용으로 사가지고 온 것으로 맑은 탕을 끓여서 자연산 물회 남은 것과 준비해 간 반찬으로 맛있고 푸짐한 저녁을 먹었다.
침대에 길 드려 지지 않아서 그런지 잠을 조금 설쳤다.
아침 안개가 자욱하여 창문 앞에서 보이는 사물도 제 모습을 확인하기가 어렵고 푸른 잔디가 펼쳐진 골프장도 보문단지의 호수도 가름할 수가 없다. 부슬비가 내리다가 그치고 하여 여행하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향단 정경
심수정 고풍스런 모습
양동마을!
경주 근교의 안강에 있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양동마을로 갔다. 들어가는 입구가 예와는 달라지고 주차장도 새롭게 단장을 하였으며 입장권도 사야 했다. 다행이 경로우대로 그냥 들어갔는데, 들어가는 길목이 건물을 지나고 틈새로 가게 만들어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내를 따라 들어가면 제일 먼저 우리를 맞이하는 것이 양동초등학교다. 여는 학교와는 건물이 색다르다. 전통 한옥으로 지은 큰 건물이 인상적이고 운동장의 아름드리 메타쉐카이야로 보이는 큰 고목이 역사를 말해주듯이 의연한 자태로 서있다. 마을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下村 마을에는 안락정과 강학당이 있고 바로 위에 이향정과 심수정이 고목을 친구 삼아 멋진 모습을 지니고 있다. 심수정에서 건너편으로 보이는 물봉골(勿蜂谷)에는 관가정과 향단 그리고 영귀정이 있으며 안골(內谷)에는 제일 위에 서백당이 있고 사호당고택, 상춘헌고택, 근암고택 등이 대표적인 가옥이고 근처에 두곡고택, 낙선당, 경산서당, 동호정 등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오래 된 것이 서백당으로 1459년이고, 1504년에 관가정, 1508년에 무첨당, 1540년에 향단, 1544년에 영귀정, 1560년에 심수정을 지었다고 한다. 그 외 1695년에 이향정, 1730년에 상충헌고택, 1780년에 안락정과 근암고택, 1844년 동호정, 1867년에 강학당을 지었다고 한다.
심수정은 희재 이언적(李彦迪1491~1553년)의 동생인 농재 이언괄을 추모하기 위해서 지은 것으로 벼슬을 마다하고 형 대신에 노부모를 모셨다고 한다. 여주 이씨 집안의 종가인 무첨당과 향단을 바라보기 위해서 ㄱ자로 꺾어 누마루를 두었으며 이 마을에서 제일 큰 정자로 안락당과 강학당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서당역할도 하였다고 한다.
안골의 서백당은 중요민속문화재 제23호로 양동마을에서 가장 먼저 지은 집으로 경주 손 씨 큰 종가로 이 마을의 입향조가 된 양민공 손소(1433~1484)가 조선 세조 5년(1459)에 지은 집이다. 양민공의 아들 손중돈과 이언적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관가정은 보물 제 442호로 중종 때 청백리로 널리 알려진 우재(愚齋) 손중돈의 옛 집이다. 무첨당은 보물 제 411호로 조선시대 성리학자이며 문신이었던 희재 이언적 선생 종가의 제청으로 기능에 충실하게 지어진 조선 중이 건물이다.
향단은 보물 제412호로 마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곳에 있는데 기와집의 일반적인 형식을 과감하게 벗어난 주생활의 합리화를 도모한 우수한 공간구성을 보이는 집으로 원래는 99칸이었다고 전하나 6.25때 일부는 불에 타서 없어지고 현재는 56칸이 보존되고 있다. 강학당은 중요민속문화재 제83호로 여강 이 씨 문중 서당으로 대사간을 지낸 지족당 이연상(1788~1846) 선생이 학생들을 가르친 곳이다. 이 마을에서 월성 손 씨 문중 서당인 안락정과 쌍벽을 이루며 조선 고종 4년(1867)에 후손들과 제자들이 지었다고 한다.
이 양동마을은 중앙에 벼슬이 높은 분들의 집이 있고 주변 낮은 곳에는 양반들이 부리는 서민들이 사는 초가집이 있다. 산언덕을 끼고 양지 바른 등성이에 마을을 형성하여 높은 분들이 모여 살게 되었고 마을 앞의 안강 벌판에는 땅이 넓고 기름져서 벼농사를 비롯하여 각종 농사를 짓기에 넉넉한 곳이어서 이 마을을 형성하는데 주요한 터전이 되었다고 하겠다.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전형적인 양반 가옥의 형태를 잘 보존하고 있는 양동마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것은 마땅하며 우리의 문화를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좋은 사료하고 생각된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잘 보존하여 우리의 고유한 문화유산을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게 물려주어 우리 민족의 우수성과 특수성에 대한 자부심을 갖도록 하여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양동초등학교 전경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대구에서 내가 결혼식을 올렸던 남산동의 서현교회에 잠시 들리다.
2014. 9.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