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왕에서 선덕여왕까지
어릴 때 이름이‘심맥종’또는‘심맥부지’였던 진흥왕은 7살 때 신라 제24대 왕이 되었다. 36년 동안 왕위에 있다가 43살 때인 576년에 죽었다. 진흥왕이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순행한 곳에는 척경비 또는 순수비를 세웠는데 지금까지 모두 4개가 발견되었다. 북한산비·마운령비·황초령비는 순수비 성격이고, 창녕비는 척경비 성격이 강하다.
진흥왕에 대해서는 여러 금석문이 남아 있어서 《삼국사기》등 그 어떤 사료보다 정확하고 깊이가 있는데 울주 언양 천전리 각석에는 그가 왕위에 오르기 한해 전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같이 여기를 찾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어머니는 지몰시혜비(삼국사기에는 지소태후)로 법흥왕의 딸이고, 아버지는 법흥왕의 동생인 사부지갈문왕(삼국사기에는 입종갈문왕)으로 법흥왕이 큰아버지이기도 하고 또 외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진흥왕의 부인은 사도왕후와 숙명왕후 둘이었는데 사도한테서 동륜과 금륜 두 아들이, 숙명왕후한테는 아들 정숙이 태어났다. 사도왕후는 각간 영실의 딸로 박씨고, 숙명왕후는 어머니 지소태후가 남편이 죽은 뒤에 상대등 태종과 사통하여 낳은 딸이다. 숙명왕후는 진흥왕과 오래 같이하지는 못했는데 그것은 숙명왕후가 이화랑 - 화랑의 우두머리(풍월주)- 과 사통했기 때문으로, 진흥왕은 숙명왕후와 태자 정숙을 폐하고 사도왕후한테서 난 큰아들 동륜을 태자로 삼았다.
하지만 동륜은 진흥왕 다음 왕위를 잇지 못했는데, 그것은 동륜이 태자 시절에 죽었기 때문이다. 동륜이 죽자 작은 아들 사륜(혹은 금륜)을 태자로 삼고, 다음 왕위를 잇게 했다. 이이가 25대 진지왕이다. 진지왕에 대하여는 후세에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그만큼 대접받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삼국유사》에 진지왕은 정란(政亂)과 황음(荒淫)으로 폐위되었다고 했는데, 이는 신라시대 왕권을 중심으로 한 전제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고 또 진지왕은 사량부에 사는 도화녀(桃花女)를 사모하여 죽은 뒤 다시 나타나 사랑을 나누어 비형랑(鼻荊郞)이라는 아들을 낳았다는 설화가 실려 있는 것에서 보듯이 진지왕은 문제가 있었던 인물이다. 진지왕은 왕위에 오른지 불과 4년 만에 폐위되었다.
진지왕에게는 용수·용춘 두 아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왕이 폐위되자 왕자에서 전군으로 강등되었는데, 그러자 할머니인 사도태후가 첫째 아들 동륜의 아들이자 손자인 백정에게 다음 왕위를 잇게 했다. 백정이 바로 선덕여왕의 아버지이기도 한 26대 진평왕이다. 진평왕은 13살에 왕위에 올랐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명에 따를 밖에 없었던 백정은 할머니 사도태후가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심지어 작은 어머니 지도태후에게도 진평왕을 모시라고 했다. 진평왕이 어렸을 때는 할머니 사도태후, 어머니 만호태후, 작은 어머니 지도태후 등 여자들의 치마폭에 싸여 있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진평왕은 우리 역사에서 고구려 대무신왕, 장수왕, 발해 무왕 등에 이어 54년이나 재위했던 왕이었지만 아들이 없었다. 마야왕후, 승만왕후 등 2명의 왕후에게서 아들은 없었고 다만 딸인 천명과 덕만이 있었는데, 천명은 삼촌인 용수 즉 진지왕의 큰아들과 결혼하고, 덕만은 진지왕의 작은 아들 용춘과 결혼했는데 이것은 둘 다 삼촌과 결혼한 것이다. 둘 중에 천명은 춘추를 나았으나, 덕만은 아들은커녕 딸도 낫지 못했다.
진평왕은 처음에는 천명과 결혼한 사위이자 4촌인 용수를 다음 왕으로 삼을 생각이었지만, 둘째 딸인 덕만이 커가면서 용봉의 자태를 보이는데 고무되어 큰딸 천명에게 양위하도록 하고 둘째 덕만에게 다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이가 27대 선덕여왕이다. 물론 이 무렵에는 일본에서는 이미 여러 명의 여왕이 있었으므로 신라도 여자가 왕이 된다하더라도 춘추나 유신 등 신하들이 잘 보필하면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덕만이 여왕이 된 뒤에 신하들은 왕의 후사를 위해 ‘삼서의 제’라는 새 제도를 만들었는데 한두 명의 남편으로는 부족하므로 세 명의 남편을 두는 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세 명의 남편에게서도 결국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다.
중국보다 앞서 우리 역사에서 최초 여성 대통령인 선덕여왕에 대해서 당나라는 여자가 왕이라고 업신여기는 태도를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보다 우리가 먼저 자격지심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이 신통령을 가졌다고 하면서, 세 가지 신통한 이야기를 적고 있는데 당나라에서 보내준 병풍의 모란 그림을 보고 자신을 여자라고 업신여기고 조롱한다고까지 생각했고. 영묘사 연못에서 겨울에 개구리가 운다는 소리를 듣고 적이 쳐들어 온 것을 알고 군사를 보내 물리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이 죽으면 도리천에 장사 지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런데 첫째 이야기, 중국에서 보낸 그림을 잘 못 이해한 때문이라는 것은 좀 더 정확히 짚어봐야한다. 당태종이 보내온 모란꽃 그림을 보고, 이 꽃은 향기가 없는 꽃이라고 선덕여왕이 말했고 이듬해에 보니 과연 그랬다고 하고,
둘째 이야기는 겨울인데도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서 개구리가 울어댄다고 왕에게 보고하자, 선덕여왕이 정병을 여근곡(女根谷)에 보내 적을 퇴치토록 했다고 하고,
셋째 이야기는, 자신이 죽을 날을 예언한데다, 죽으면 도리천(忉利天)에 장사(葬事)지내라고 하였는데 도리천은 낭산(狼山) 남쪽이라 했다고 하고, 과연 여왕이 죽은 10년 뒤에 무열왕의 아들인 문무왕이 선덕여왕릉이 있는낭산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지었으니, 왕릉이 있는 곳이 바로 도리천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이야기에는 조금씩 오류와 착오가 있는 것이다. 첫 번째 이야기인 당나라 태종이 모란꽃 그림이 그려진 병품과 꽃씨 3되를 보내온 것을 두고, 선덕여왕이 “이 꽃은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꽃에 향기가 없기 때문에 나비가 날아오지 않고, 그것은 당태종이 자신을 향기 없는 꽃, 즉 짝 없는 것을 조롱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고 한 것인데
고래(古來)로 모란은 부귀(富貴)를, 목련은 옥(玉)을, 해당화는 당(堂)을 상징하였다. 이들 그림은 따로 또는 함께 그려서 ‘귀댁에 부귀가 깃들기를 바란다.’ 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모란꽃과 나비를 같이 그리지 않은 이유는 나비를 뜻하는 접(蝶)자와 노인을 뜻하는 질(耋)자가 중국어로는 디에(die)라는 같은 발음인데 동양화에서 흔히 나비가 노인의 의미로 그려지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특히, 질은 노인 중에서 60~80살 노인을 지칭하는 한정어(限定語)다. 따라서 모란과 나비를 함께 그리면 60~80세까지 부귀를 누리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왜 나비를 그리지 않은 것일까? 그것은 80세보다도 더 오래 살라는 중국인의 과장된 욕심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80살 이상 더 오래 살라는 의미다. 선덕여왕은 이같이그림에 담긴 이 같은 사정을 몰랐던 것이다.
또 영묘사의 옥문지에서 겨울인데도 여러 날 동안 계속해서 개구리가 울어대는 기이한 일이 생기자, 이를 보고 받은 여왕이 급히 각간(角干) 알천(閼遷)에게 정병 2,000을 뽑아 서쪽 교외 여근곡으로 가면 적병(賊兵)이 숨어 있을 테니 잡아 족치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라인들의 자유분망한 성풍속을 보는 것 같은 것으로, 개구리는 성난 군사로 남자의 모습이고, 옥문과 여근은 여자의 생식기를 의미한다. 그리고 여자는 음(陰), 빛으로는 흰색이고, 흰색의 방위는 서쪽이다. 그러므로 여자의 음부를 상징하는 서쪽에 적군, 즉 백제 군이 숨어 있으며 그곳에 군사가 들어왔으니, 남자의 성기가 여자의 그곳에 들어가면 기죽듯이? 반드시 쳐부술 수 있을 것이라고 미리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겨울철에 개구리 울음소리는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는 논거로 황당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재미는 있다.
마지막 도리천 이야기는 더욱 신비로운데 건강하던 선덕여왕이 자신이 죽을 날을 미리 예언하고 자신이 죽으면 도리천에 장사지내라고 하자,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디냐고 물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여왕은 낭산 남쪽이 그곳이라고 했다. 과연 예언한 날에 선덕여왕이 죽자 낭산 남쪽에 장사 지냈는데, 10여 년 뒤에 문무왕이 선덕여왕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라는 절을 창건했으므로, 이는 선덕여왕의 예지라는 것이다. 불경(佛經)에 ‘도리천은 사천왕 위에 있다’고 한 것으로 선덕여왕은 자신이 죽은 후 자신의 무덤 아래 사천왕사라는 절이 들어설 것을 미리 알았다는 것이다. 아무리 봐도 갖다 붙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