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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 스크랩 의상대사의 행적과 수행 양상
마조(摩造) 추천 0 조회 95 15.04.30 09:4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의상의 행적과 수행 양상

김 복 순 (동국대 교수)


1. 머리말


신라 승 의상은 진평왕 47년인 625년에 태어나서 성덕왕 원년인 702년까지 격동의 세월 속에서 살았다. 진평왕, 선덕왕, 진덕왕, 무열왕, 문무왕, 신문왕, 효소왕의 7朝에 걸쳐 살면서, 백제와 고구려의 병합, 두 나라 부흥군의 정리, 당군 축출과 대동강?원산만 이남 지역의 확보와 같은 사건의 연속선상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도 의상은 원효와 함께 도반으로 고구려승 보덕에게 나아가 경전도 배우고, 전국을 함께 遊行하며 修道하였고, 입당 유학도 시도한 바 있다. 그리고 그는 홀로 당 유학을 떠나 10여 년에 걸친 수학 끝에 화엄종을 傳敎해 왔다.


의상의 생애를 보는 시각에는 상반된 두 가지의 견해가 있어 왔다. 하나는 그가 귀족 출신으로서 왕권과 밀착되어 화엄사상으로 왕권을 뒷받침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고, 또 하나는 그의 화엄종 전교에 주안점을 두어 철저한 실천 수행을 한 승이었다고 보는 시각이다. 의상을 어떤 면에 주안을 두고 설명하는 가에 따라 이 같은 차이가 있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본 고는 후자의 입장을 좀 더 보강하고, 그동안 방치되어 왔던 사료들을 이용한다는 측면에서 의상의 행적을 더듬어 보고자 의도된 것이다. 그의 활동상을 알려주는 보조자료로서 각 사찰에서 전하는 자료와 『신증동국여지승람』등에 나오는 내용을 참고할 수 있다. 의상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사찰들을 살펴보면, 그 수에 있어 원효에 비견될 정도로 제법 많이 찾아진다. 흔히들 한국의 古刹치고 원효나 의상이 창건하지 않은 곳이 있는가 하고 대개 후대에 가져다 붙인 사실로 여겨 신뢰하지 않는 경향이 있으나 확실한 내용파악도 하지 않고 부정하는 것도 바람직한 태도이라고 할 수는 없다. 때문에 사찰창건 연혁 자체에 설화가 다수 섞여 있다는 자료상의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이를 적극 활용해 본다면, 그의 활동상과 활동영역을 추적해 나가는데 일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의상은 해동화엄초조로서 또는 금산 보개의 화신 등으로 불리어 지면서 실천 수행에 힘쓴 고승으로 추앙되어져 왔는데, 그가 행한 수행양상에 대해서도 살펴 보고자 한다.


이러한 분석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되어지는데, 하나는 그의 행적을 보다 면밀히 파악하여 바른 행보를 밝힐 수 있다는 점과 또 하나는 의상 연구의 범위를 좀 더 넓힐 수 있다는 점에서이다.


2. 의상의 행적


의상의 생애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알려주고 있는 사료로서 〈부석본비〉가 있는데, 다음과 같이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1)〈부석본비〉에 의하면, 의상은 武德 8년(625)에 태어나서 소년 시절에 출가하였다. 永徽 원년(650)에 원효와 함께 西로 당에 유학가려고 고구려 지역에 이르렀는데 장애가 생겨서 되돌아 왔다. 龍朔 원년(661)에 당에 건너가서 지엄에게 나아가 배우게 되었다. 總章 원년(668)에 지엄이 입적하자, 의상은 咸亨 2년(671)에 신라로 돌아왔다. 長安 2년(702)에 입적하니, 이 때 그의 나이가 78세였다.(《삼국유사》권3 전후소장사리조)


의상의 생애는 그의 행적과 관련하여 (1)소년 시절 출가해서 원효와 함께 두 번이나 유학하려 했던 시기(640년경 - 660)와 (2)유학해서 지엄의 문하에서 수학하던 시기(661 - 671), 그리고 (3)귀국 이후 입적하기까지의 시기(671 - 702)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출가에서 유학까지의 시기(640년경 - 660)


이 시기는 의상이 어린 나이 즉, 15세 전후에 출가하여 원효와 함께 당에 유학가려다가 실패하고 국내를 유행하였던 때이다. 『송고승전』등의 내용으로 볼 때, 의상의 당나라 행이 2차에 걸친 노력 끝에 이루어졌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가 1차로 당나라에 가려고 시도하였던 것은 신라 진덕여왕 4년인 영휘 원년 650년이다. 의상의 入唐에 관한 기록 가운데 가장 신빙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 「부석본비」이므로, 그의 1차 입당은 650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원효와 함께 입당하려고 고구려 지역에 이르렀는데 장애가 생겨서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 때 그의 나이가 약관이었다 하므로, 20세라 할 수 있지만, 그의 출생 년도를 625년이라 할 때 실제로는 25세 무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650년은 의상의 입당 이전의 시기에 있어 매우 중요한 기점이 되고 있다. 따라서 650년 이전의 행적은 그의 입당 배경을 규명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그의 입당 배경은 다음의 두 가지로 생각된다.


첫째는 당시 신라의 분위기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출가를 한 무렵인 640년은 안함이 9월 23일에 62세로 만선도량에서 입적한 해이다. 그는 출가하면서 안함의 행적에 대해 누누이 들었을 것이고, 더욱이 그가 태어나던 해에 서역삼장 3인과 중국승려 2인이 함께 입국하여 불경을 역출한 사실도 알았을 것이다. 또한 650년은 신라 진덕여왕 4년으로, 왕은 6월에 당나라에 김법민 등을 사신으로 보내 백제의 공격을 물리친 사실과 五言太平頌을 지어 보냈다. 이에 당 고종은 김법민을 태부경으로 삼아 돌려 보내었고, 신라는 이 해부터 중국의 영휘 연호를 사용하였다. 신라와 당이 매우 긴밀한 관계 하에서 당의 문물이 대폭 수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미 당에 들어가 있던 신라승 신방, 지인, 원측이 현장의 번경사업에 참여하여 활약하고 있다는 소식은 이들의 입당의욕을 자극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신라의 분위기는 그의 입당을 자극케 하는 가장 큰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둘째로 의상이 원효와 함께 보덕화상에게 가서 『열반경』과 『유마경』을 전수받은 일이라 할 수 있다. 그 시기에 대해 대체로 보덕이 고구려에서 완산주의 고대산으로 암자를 옮긴 650년 이전이라는 것과 의상의 나이로 볼 때 645년을 전후한 시기에 그에게 나아가 수학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고구려는 당과의 문화교류가 매우 활발하였으므로, 보덕은 도교의 수입과 함께 당의 불교계에 대한 소식도 접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이미 현장의 귀환에 따른 교종의 성황을 보덕은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의 입당시도 배경에는 당의 불교계 소식을 알고 있던 보덕의 권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입당시도가 수포로 돌아가면서 그 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사지 등에 단편적으로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다음의 사료는 650년 이후의 행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된다.


2) 그리하여 참된 선지식과 오래된 사적을 빼놓지 않고 반드시 尋訪하리라 하고 떠나려 인사를 드리는데, 대덕화상이 말씀하시기를 “옛 노인들 사이에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鄕城山 안에 절 터가 있는데, 옛날 원효보살과 의상대덕이 함께 머무르며 쉬던 곳이라 한다”고 하였다. 대사가 “이미 聖跡에 대하여 들었으니 내 어찌 그 곳 玄基에 나아가서 수도하지 않으랴”하고 마침내 그 舊墟에 풀집을 짓고...... 수 년을 지냈다. 당시 부근 사람들이 聖沙彌라고 일컬었다고 한다.(「보원사 법인국사비문」, 이지관편, 교감역주『역대고승비문』고려편2, 1995, pp.90-91.)


3) 선사는 곧 속으로 ....... 발분하여 그윽한 진리를 찾으려고 ?山에 이르러 .....에 우거하였는데, (그 곳은) 곧 神僧 원효가 도를 깨달은 곳이었다. 석달 동안 선정을 닦은 후에 광종대사에게 귀의하여......(「월광사 원랑선사비문」, 이지관편, 교감역주『역대고승비문』신라편, 1994, p.221.)


법인국사가 사미 시절 수도하던 곳이 바로 원효와 의상이 함께 머물던 곳으로 그 옛터에 초가를 짓고 수행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즉, 이들이 머물다 간 뒤 다른 이들에 의해 이 곳에 절이 세워졌고 시간이 흐르면서 廢해진 장소에 법인국사가 사미로서 초가집을 짓고 수년 동안 수행을 한 사실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원효와 의상이 머물던 곳을 玄基라고 하여 후대인들이 높이 평가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곳에 절이 들어섰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廢해졌음에도 그 故事가 계속 전해지고 있고, 이를 숭앙한 후대 승려가 다시 초가를 짓고 수행에 전력하였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자면 원효와 의상이 머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곳은 후대에 사찰이 세워졌고, 그 고사가 계속해서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원랑선사가 원효가 도를 깨친 감분에서 수행을 한 사실을 적기하고 있다. 즉, 원효가 도를 깨우쳤다는 장소가 신라 하대에까지 계속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고, 그 곳에서 수행하는 이들도 있다는 사실이다.


의상의 행적과 관련하여 이 사료들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본 고에서 살펴 보려는 의상의 행적에 대한 보조적 사료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창건했다고 하는 사찰을 모두 허구로 볼 것이 아니고, 어떤 형태로든 그 장소에 머물렀거나 초막이라도 짓고 수행을 한 것이 전해졌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당시 寺庵의 창건은 왕실이나 귀족의 재력으로 이루어지거나, 또는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또는 관기와 도성 등과 같은 뛰어난 수행이 세상에 알려져 이로 인해 그들의 수행처에 사암이 세워지는 형태로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원효와 의상과 관련되어 나타나는 사적은 많이 있으나, 이들의 행적이 함께 나오는 것은 대개 入唐 이전의 내용으로 파악하였다. 다음의 예들은 의상이 원효와 함께 유행하면서 수행을 하였던 기록으로 생각된다.


4)雲岾寺: 聖迹山에 있다. 신라 진평왕이 중수하였으니 승 원효의 도량이었다. 남북쪽에 만향점이 있는데 원효와 의상이 이 곳에서 강법하였다. 이상한 향기가 풍기어 붙인 이름이다. 八功菴: 聖迹山에 있다. 의상이 중건하였다.(신중동국여지승람』권39 남원도호부 장수현조)


5)의상암: 신라 승 의상이 살던 곳이다. 김극기시에 “기묘한 일만겹 바위 높은 하늘에 비껴 있어 위로 구름 끝까지 올라가니 길이 비로소 궁하구나. 홀연히 의상대사의 여운있음이 기쁘구나 하늘에 닿은 옛 잣나무 어둠 속 바람에 읊조린다”고 하였다.

원효방: 신라 때 승 원효가 거처하던 곳인데, 방장은 지금도 남아 있다.

부사의방장: 신라 때 승 진표가 붙여 살던 곳인데 1백척 높이의 나무 사다리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34 礪山郡 扶安縣)


운점사는 원효가 창건한 사찰로 진평왕이 중수한 사찰인데, 의상이 원효와 함께 이 곳에 머물면서 설법을 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는 또한 성적산에 팔공암이라는 암자를 창건했다고 하므로 그가 수행을 한 곳이 대개 그 곳이었을 것으로 추정해 본다. 그리고 부사의방으로 유명한 전라북도 부안에 의상암과 원효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의상암은 김극기의 시로 봐서 그 위치가 매우 높은 곳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숙종에서 영조대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진 『동여비고』(경북대출판부 고전총서3, 1998) 69A3에 부안 변산의 원효방, 의상암, 부사의방장이 표기되어 있다.)


6) 산 동쪽에 암자가 있어 이를 圭菴이라 하고 그 곁에 瑞石이 겹겹이 서 있어 우러러 보는 자, 굽어보는 자, 누은 자, 일어난 자가 있고 또 무더기로 있는 자와 혼자 섰는 자가 있어 높이가 수백척이나 되고 사면이 옥을 깎은 듯 하다. 그 서석이니 규봉이니 한 것은 뜻이 대개 이것을 취한 것이리라. 물이 잔잔하게 돌 눈에서 쏟아져 나와 비록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 옛날 의상대사가 이를 보고 기이하게 여겨 비로소 精舍를 세웠고, 계속하여 보조와 진각이 공부하여 도를 얻어서 그 꽃다운 자취가 아직도 남아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권40 순천도호부 화순현, 『동여비고』71 C3에도 광주 무등산 원효사와 규봉사가 나오고 있다.)


7) 상주 산양현 북쪽에 산이 있으니, 봉우리는 자못 높고 겹겹이 솟아있다. 동쪽으로는 죽령에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화장산에 닿아 있는 이 곳의 이름은 사불산이라 하며 혹은 공덕산이라고도 한다. 신라고기에 의하면 진평왕 건원 5년 즉 수나라 개황 8년 무신(588)에 갑자기 4면에 4방불이 새겨져 있는 사방 한 길쯤되는 한 덩어리의 바위가 오색 구름에 싸여 있다가 하늘로부터 날아와서 다른 봉우리에 자리잡았다. 왕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이상하게 여겨 그 곳에 행차하여 이를 증험하고 공경하여 마지 않았다. 이에 그 옆에 절을 짓고 대승사라 하고 법화경을 독송하도록 하였다............ 산의 남쪽에 옛 절이 있는데 미면, 또는 백련사라고도 한다. 대개 의상법사가 머물면서 강론하였을 때에 용녀가 늘 시중을 들었다. 뜰 가운데 좌우에 있던 우물에서 날마다 한 곳에서 쌀이 나오고, 다른 곳에서는 국수가 나왔는데 날마다 한결 같았다. 아무리 많은 대중에게 공양을 해도 오히려 모자르지 않았으므로 이로부터 다시 탁발하거나 경작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이름이 생겨났고, 지금도 둘 다 그대로 있다. 또한 의상대사 설법대도 있고, 종려 삿갓과 주석지팡이가 남아있다. ..... 이어서 백련사의 유래를 물으니 그 곳 사람들의 말이 원효 성인이 이 곳에 거처하면서 법화경을 강론하자 흰 연꽃이 땅 속에서 솟아나 이름을 백련이라 했다고 한다.(游四佛山記」『湖山錄』권4)


광주 무등산에는 원효사에서 정상으로 가는 골짜기를 넘은 곳에 의상대라는 바위 봉우리가 있고, 그 아래에는 의상 토굴이 있다. 또한 무등산에 있는 圭峰寺에 대해서는 도선이 은신대에 앉아서 송광산 산세를 보아 이 절을 지었다고 하고, 산 동쪽에 있는 규암은 의상이 세운 정사라고 하는데, 보조와 진각이 이 곳에서 공부하여 도를 얻었다고 하였으므로, 의상이 수행하던 곳이라고 하겠다.


또한 현재 미면사와 관련된 내용을 진정은 또한 뜰 좌우에 미면정이 있고 의상이 설법하던 臺가 있는데, 종려 삿갓과 주석 지팡이가 있었다 하고, 원효가 법화경을 강의하자 흰 연꽃이 땅 속에서 솟아나서 백련사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다시 고종 29년에 최자가 상주목사로 나와서 찾아 보니 옛 궁전에 원효와 의상의 진용이 있고, 소위 삿갓과 지팡이도 아직 탈이 없었다고 부연해서 설명되고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권28 상주목 사불산조)


영변 약산에는 심적사, 의상사, 원효사가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권54 영변대도호부, 『동여비고』109 C2 참조.) 경북 문경군 청화산에는 의상암과 원효대가 있었다.(정시한 저, 김성찬 역주, 『산중일기』, 1999, PP.292-293.) 또한 거제현 우두산에는 원효, 의상, 자명의 3대사의 유적이 있었다고 한다.(『동문선』권75 「거제현우두산견암선사중수기」)


다음은 사지에만 나타나는 유적으로, 울진 지역에 있는 불영사이다. 〈天竺山 佛影寺記〉에는 651년에 의상이 불영사를 창건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사지는 1370년(공민왕 19) 柳伯儒가 지었는데, 651년인 진덕여왕 5년에 義湘이 창건한 사찰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650년을 전후하여 보덕에게 나아가 수학을 하다가 西學이 불가능하게 되자 다시 보덕이 옮겨온 완산주 고대산과 부안, 남원, 광주 무등산 등을 유행하며 수행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왕경으로 돌아온 후에는 동해안의 불영 계곡에 머물면서, 원효의 도량으로 알려진 백련사(미면사) 등 여러 곳에 머물면서 강경과 수행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해 보았다.


(2)당나라 유학 시기(661-671)


이 시기에 의상이 중국에 들어가 머물던 곳으로 나오는 곳은 양주와 장안의 종남산, 산동 등이다. 그가 중국으로 가서 귀국할 때까지의 행적이다.


의상은 문무왕 1년인 661년에 당에 갈 수 있었다. 의상은 신라가 백제를 병합하고 서해안의 뱃길이 열린 661년에 당나라 사신이 타고 가는 배에 편승하여 갈 수 있었다. 의상이 편승한 중국 사신의 배는 10월 29일에 도착한 弔問兼冊封使 일행이 타고 온 것으로, 이 배를 타고 들어 간 것으로 추정된다. 사신 일행은 이듬해 정월까지 신라에 머물고 있었지만, 배는 그 해 겨울에 돌아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상의 중국 도착은 양주설과 산동반도설로 나뉜다. 그가 662년에 장안으로 들어 간 것을 감안하면 양주설이 보다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즉 겨울 동안 운하를 이용하여 장안에 갈 수 없었을 것이고, 날이 풀리기를 기다려 이듬해 봄에 출발하였을 것이다.(일본의 王金林에 의하면 당시 장안으로 가는 길은 육로로 등주(래주)→청주→兌州→曹州→변주→낙양의 육로와 소주,명주 →양주→초주→변주→낙양, 장안의 뱃길이 있었다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양주설을 택해서 살펴 보고자 한다. 그가 도착하였을 때의 양주는 唐代의 도시로 불교가 매우 성한 도시였다. 그는 주장인 유지인의 존대를 받아 아문 내에 머물렀다고 한다. 당시 양주지를 보면 그 곳의 주장들은 유씨 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유지인의 존재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가 화엄종으로 가게 된 것은 이 곳 양주에서 한 겨울을 머물면서 마음을 정한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곳 양주는 신라방과 신라소 등 신라의 교민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던 곳이었다. 때문에 중국으로 들어 온 이들이 중국 사정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의 중국행은 분명 현장의 문하에서 유가유식을 수학하려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 곳에서 현장의 휘하에 있던 신라 유학승들의 힘든 사정을 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에 이 곳 양주는 화엄경과 매우 밀접한 곳이었다. 현재의 양주 박물관인 天寧寺는 양주 邦樂上街 3號에 위치해 있는데, 이 곳이 바로 東晉 때 『화엄경』을 譯出했던 謝司空寺였다. 동진의 太傅인 謝安의 別墅였던 곳인데, 385년에 희사하여 절로 하였다. 진나라 말엽에 서역의 고승 佛陀拔陀羅가 이 곳에서 『화엄경』을 번역하였고, 이로 인해 화엄을 일으켰다고 하여 이름을 興嚴寺로 하였던 곳이다. 이 사실은 이 곳 불교정서에 끼친 영향이 화엄종과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했음을 알려주는 사실일 것으로 생각된다.


의상은 이 곳에서 이루어진 『화엄경』의 초역 사실을 이 곳에 머무는 동안 충분히 느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사사공사인 興嚴寺는 후에 측천무후에 의해 695년 증경사로 개명이 되는데, 이 사실은 동문수학했던 의상으로부터 이 곳의 중요성을 들은 현수법장이 측천에게 청하여 改賜名하면서 사찰을 중건하였던 것이 아닐까 추측되기 때문이다.


또 이 곳 양주는 梁의 昭明太子가 『文選』을 만들 때의 장소인 文選樓遺址가 있다. 의상은 양주에 머무는 동안 양의 소명태자가 머물었던 별원에 갔었을 것이고, 그 곳에서 소명태자가 『금강경』을 32편으로 나누어 이해하기 쉽게 만들었다는 사실도 알았을 것이다. 특히나 신라에 『문선』이 끼친 영향으로 볼 때, 이러한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된다. 唐代에는 李善이 『문선』에 대한 주석을 붙이고 있어, 唐代에도 『문선』에 관한 관심은 대단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의상이 귀국하여 태백산에서 화엄대교를 펴고 있을 때, 문무왕은 그를 欽重하여 田莊과 奴僕을 시주하려 한 일이 있었다. 의상은 이에 대해 "우리 佛法은 평등하여 高下가 共均하고 貴賤이 同揆입니다".....라고 한 바가 있다. 여기서 나오는 “我法平等 高下共均”은 『금강경』제23 淨心行善分에 “是法平等 無有高下“와 같은 말이다. 그는 어떠한 형태로든지 소명태자와 문선루와 『금강경』에 대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662년 종남산으로 가게 된 의상은 지상사에서 지엄화상에게 화엄경을 배우는 한편, 지금은 정업사로 되어 있는 도선율사의 절에 왕래하면서 7년 여에 걸친 교류가 있었다. 이는 지엄이 淸禪寺의 般若院에서 입적할 때까지의 교류로 생각된다.


8) 의상이 스승 지엄의 문하에서 화엄을 공부할 때다. 꿈 속에 형상이 매우 기이한 신인이 나타나 상공에게 “너 자신이 깨달은 바를 저술하여 사람들에게 베풀어 줌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또 꿈에 선재가 총명약 십여제를 주었다. 그리고 또 꿈에 청의동자가 세번째로 비결을 주었다. 스승 지엄이 이를 듣고 ‘신인이 신령스러움을 줌이 나에게는 한 번이었는데 너에게는 세 번이구나. 널리 수행하여 그 통보를 곧 표현하도록 하라’고 하였다.『화엄일승법계도기』


9) 옛적에 의상법사가 입당하여 종남산 지상사 지엄존자에게 가서 수업할 때, 이웃에 도선율사가 있어 항상 천공을 받고 재를 올리 때마다 하늘의 주방에서 음식을 보내왔다. 하루는 도선율사가 의상을 청하여 재를 함에 의상이 가서 좌정한 지 오래도록 천공이 이르지 아니하였다. 의상이 헛되이 빈 발우로 돌아가자 그때에야 천사가 내려왔다. 율사가 어째서 늦었느냐고 물으니 온 동내에 신병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들어오지 못하였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도선율사는 의상에게 신의 호위가 있는 것을 알고 그 도의 수승함을 탄복하고, 천공을 그대로 두었다가 이튿날 다시 지엄과 의상 兩師를 재에 청하고 자세히 그 사유를 말하였다.(삼국유사』 권3 전후소장사리조)


의상이 당에서 수학할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들로서, 의상의 도가 스승 지엄이나 도선보다 더 수승하다는 사실을 은연 중에 나타내 주는 내용들이다. 그런데 도선율사가 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 현재의 종남산 정업사는 의상이 머물던 취화산 지상사와는 子午谷을 사이에 두고 이웃은 하고 있으나, 가까운 거리가 아닌데 이웃집 다니듯이 쉽게 다녔다는 것은 그가 종남산에 있으면서 매우 활동적으로 수행을 하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의상은 스승 지엄이 668년에 입적한 후 귀국하기까지 3년 여 동안 중국에 더 머물러 있었다. 의상은 스승의 입적 후 스승을 이어 화엄종을 어떻게 선양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경쟁자도 없는 상태에서 중국 화엄종의 제3조가 되지 못한 것은 그가 신라인이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당시는 신라와 당의 관계가 전쟁 중이었던 때로, 원측이 종남산 운제사에서도 30리나 더 떨어진 한 암자에서 8년 가까이 은거 수행하고 있었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또한 믿고 의지하던 스승의 입적은 그로 하여금 중국 전역을 유행하게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10)오래지 않아 西堂이 입적하였다. 이에 빈 배에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어 외로운 구름처럼 홀로 떠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니 몸에 그림자 만이 따랐다. 巡歷한 이름난 산과 신령스러운 경계는 생략하고 싣지 않았다. 西州 浮沙寺에 이르러 대장경을 열람하는데 아침 저녁으로 오로지 정진하였고 잠시도 그만 두지 않았다. 눕지도 않으며 자리도 펴지 않고 3년에 이르니, 경문의 오묘함을 궁구하지 못한 것이 없었고 이치는 음미하되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혹은 묵묵히 문장과 구절을 생각하여 깊이깊이 마음에 새겨 두었다. 고국을 떠난 지 오래되었고 법을 선양하고자 하는 마음이 깊어져 드디어 군자의 나라(신라)로 돌아가리라 하고 신기루같은 파도를 가로질러 개성 4년(838) 봄 2월에 귀국하였다.(대안사 적인선사비」, 이지관편, 위의 책(신라편), p.86.)


11)머물은 지 얼마 안되어 스승이 열반에 드셨다. 검은 수건을 머리에서 벗고 “뗏목을 이미 버렸는데 배를 어디에다 매려 하는가”라고 말하였다. 이로부터 유랑함이 바람에 나부끼듯이 하였는데 그 기세를 막을 수 없었으며 그 뜻을 뺏을 수 없었다. 汾水를 건너고 享山을 오름에 있어 옛 자취는 반드시 찾아보고 진실한 승려는 반드시 만나 보았다. 무릇 머무는 곳은 사람과 떨어져 있으면서 가장 중요시한 것은 마음의 위태로움을 편안히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고생을 달게 여기는 것이었으므로 사체를 부르는 것을 종처럼 하되 마음을 임금처럼 받들었다.

     (「성주사 낭혜화상비」, 이지관편, 위의 책(신라편), p.186.)


적인선사가 西堂 地(智)藏이 입적하자 유행을 다닌 사실을 보이고 있고, 무염화상 역시 그의 스승 麻谷 寶澈이 입적하자 역시 유랑하고 있다. 의상도 이들의 예와 같이 스승이 입적하고 나서 중국 전역을 유행하며 3년 동안 이름난 사찰과 승려들을 탐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장안으로 돌아 온 의상은 김인문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보았다. 그는 의상에게 당이 50만 군사를 조련하여 薛邦을 대장으로 삼아 신라를 치려한다는 사실을 일러 주었으므로, 의상은 귀국을 결심하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3) 귀국 이후 입적까지의 시기(671-702)


의상의 귀국은 매우 요긴한 사안을 가지고 온 것이었으나, 각간 김천존에 의해 천거된 명랑이 발탁되어 기도를 주도하게 되었다. 의상은 당과 대치하던 신라에서 당 유학승의 신분이 당시 조정에 받아들여지지 못한 것이고, 그가 전교해 온 화엄종에 대해서도 왕경인들은 생경스럽게 생각한 것이다. 그는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왕경을 벗어나 제일 먼저 동해안을 찾아갔다.


12) 옛적에 의상법사가 처음 당에서 돌아와서 대비관음진신이 이 해변굴 안에 산다는 말을 듣고 인하여 낙산이라고 이름하였으니 대개 서역에 보타락가산이 있는 까닭이다. 이것을 소백화라고 하는 것은 白衣大士의 진신이 머물러 있는 곳이므로 이것을 빌어 이름지은 것이다. 의상이 재계한 지 7일 만에 座具를 晨水 위에 띄웠더니 용천팔부시종이 굴 속으로 인도하였다. 공중을 향하여 참례하니 수정염주 한 꾸러미를 내어주었다. 의상이 받아 가지고 물러나니 동해용이 또한 여의보주 한 알을 바치었다. 의상이 받들고 나와 다시 재계하기 7일 만에 들어가 진신의 용모를 보았다. 진신이 이르기를 座上 山頂에 雙竹이 날 것이니 그 땅에 불전을 짓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의상사가 듣고 굴을 나오니 과연 대가 솟아 나왔다. 이에 金堂을 짓고 塑像을 모시니 그 원만하고 고운 형상이 마치 천생한 것과 같았다. 그 대는 없어졌으므로 비로소 이곳이 바로 진신이 머무는 곳임을 알고 그 절을 낙산이라고 이름하고 의상은 받은 두 염주를 성전에 두고 떠났다.


의상은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어떻게 화엄종을 신라사회에 전교하여 國泰民安에 도움이 될 수 있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고심하였을 것이고, 이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낙산 앞 바다에 나아가 2×7일에 걸친 기도를 올린 것이다. 현재의 洛山寺의 觀音窟에서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진위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이때의 발원문인 ≪백화도량발원문 白花道場發願文≫은 그의 觀音信仰을 알게 하여주는 261자의 간결한 명문이다. 이 곳은 조선시대에도 계속해서 의상이 창건한 사찰로 기록에 나오고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권44 강원도 양양도호부의 낙산사조, 『여지도서』양양부 고적조, 필사본 낙산사사적(불기 2952년 가을 한용운이 기록한 義湘臺記)


의상이 귀국하였을 때에는 이미 많은 사찰들이 왕경과 지방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신라가 그 세력을 동해안으로 확장하면서 남북으로 진출하게 되자, 자장은 동해안을 끼고 태화사, 압류사, 간월사, 정암사, 월정사, 수다사, 백담사, 신흥사 등을 창건하였다. 또한 통도사를 창건하고, 자기 집을 희사하여 원녕사로 하였다. 또한 원효도 초개사, 사라사, 항사사(오어사), 고선사, 반고사 등을 창건하거나 연고를 가지고 있었다. 신라 중고기에 창건된 것으로 확인된 50여 개 사찰 가운데 12 곳의 사원이 지방에 위치하였고, 나머지는 왕경 즉 경주 일대에 위치하였다. 지방의 경우 동축사, 대승사, 영미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장과 원효가 창건한 사찰이었다.


의상은 5-6년 간 돌아 다니면서 이러한 고승들의 흔적이 닿지 않은 곳으로, 화엄종을 전교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다녔다. 이 시기에 그는 원효와 함께 다니지 않고 혼자서 유행하였는데, 아래의 사료는 이를 입증해 주는 자료이다.


13) 그 뒤을 이어 원효 법사가 와서 瞻禮코자 하였다. 원효가 처음에 南郊에 이르니 논 가운데 흰 옷을 입은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 법사가 희롱으로 벼를 달라고 하니, 여인도 희롱으로 벼가 흉작이라고 답하였다. 법사가 또 가다가 다리아래 이르니 한 여자가 月水帛을 빨고 있었다. 법사가 물을 달라고 청하니 여자가 그 더러운 물을 떠서 주므로 법사가 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 마시었다. 때에 들 가운데 서 있는 소나무 위에 한 파랑새가 있어 불러 말하기를 “제호화상은 단념하라”하고는 홀연히 숨어 보이지 않고 그 소나무 아래 짚신 한 짝이 있었다. 법사가 절에 이르니 관음좌 아래에 또 전에 보던 짚신 한 짝이 있으므로 비로소 전에 만났던 성녀가 진신임을 알았다. 그래서 그때 사람들이 그 소나무를 관음송이라고 하였다. 법사가 성굴에 들어가 다시 진용을 보고자 하였으나 풍랑이 크게 일어 들어가 보지 못하고 떠나갔다.


원효가 의상이 감응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동해안을 찾았으나, 관음 진신을 만났어도 알아보지 못하고 관음굴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한 것을 언급하고 있다. 이 때부터 의상은 화엄종의 전교를 위해 독자행보를 한 것으로 사료된다.


의상의 행로는 전국에 걸쳤었겠지만, 그는 특히 소백산과 태백산을 중심으로 한 일대에 집중적으로 주석하였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그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사찰들의 분포가 주로 영주 부석사가 있는 봉황산을 중심으로 영주, 안동, 의성, 상주에 분포되어 있고, 제천과 원주에 여러 곳이 있고, 괴산에도 있기 때문이다. 화엄 10찰과는 달리, 소박한 창건 사실과 함께 그에 따른 연기설화가 전하고 있다.


14) “花府之西 天燈之南 有刹曰 鳳停寺也 羅代古刹而 義湘法師之所占處也”

“安東府 西三十里許 天燈山 山之麓有寺曰 鳳停寺 寺則地勢有若鳳停故 號此名也 是寺者 昔祖師 能仁大德 新羅始創建”


15) 학가산 : 산의 동쪽에 능인굴이 있다. 천등굴 : 안동부 서쪽 25리 천등산에 있다. 世傳에 의하면 “능인이 여기에 거하면서 도를 닦았는데, 천등이 항상 여기에 달려 있었기에 이렇게 이름했다”고 한다. 굴 입구에 소암자가 있고, 굴 속에는 능인선사가 앉았던 禪板이 있다. 능인굴 : 안동부의 서북쪽 30리 학가산 동각에 있다. 고승이 전하기를 “신라 대덕승 능인이 인세를 절연하고 이 굴에 숨었다. 業經僧 천 여명이 부석사에서 찾아 왔으나 끝내 그를 만나보지 못했는데, 떠날 때에 각각 돌을 모아서 탑을 만들었으니 그것을 이름하여 석탑이라고 했다.


14)의 기록은 봉정사에서 1995년 10월 15일 만세루 마루 밑에서 출토된 자료들이다. 봉정사는 현재 안동의 학가산과 천등산에 위치해 있다. 의상은 산 정상 가까운 (의상)굴에서 수도를 한 바 있었으므로, 의상법사가 점유하던 곳이라는 표현을 한 것이고, 그 후 그의 제자인 능인이 이 곳에 머물면서 도를 닦은 기록이 천등굴과 능인굴의 형태로 전하고 있고, 봉정사는 그가 창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682년 봉정사를 能仁이 창건했다고도 전하는 것은 의상이 귀국 후에 이 일대를 돌아보고 수도했던 곳이 10여 년 후에 그의 제자들이 머물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또한 위의 자료에 나오는 석탑과 관련하여 석탑사가 있다. 그리고 학가산 또는 천등산 봉정사가 있는 곳에서 산을 넘어 가면 개목사가 있고, 멀지 않은 곳에 광흥사가 있다. 그리고 석수암, 봉서사, 영봉사가 모두 의상과 관련된 설화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이 사찰들의 특징은 모두 그 위치가 매우 높아서 산 정상 가까이에 있고 매우 협소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한 눈에 아래의 전경이 들어온다는 특징이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의상이 전교를 시작한 초기에는 대개 수도를 위하여 굴이나 초가를 짓고 거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14 충청도 괴산군 조에는 의상암이 元城山에 있다고 했다. 이 외에도 그와 관련이 있는 곳은 매우 많으나 자료상의 한계가 있으므로 생략한다.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의상은 소백산과 태백산을 중심으로 기존의 사찰이 있지 않은 지역으로 화엄종을 전교할 만한 곳에 그 터를 닦았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곳들은 또한 후에 그의 제자들이 상주하면서 수행을 하거나 사찰을 창건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경덕왕대 이후에는 화엄종이 신라에 널리 알려지고 화엄종 승려들이 대덕으로 임명되는 등 화엄종이 세력을 가지게 되면서 이 일대에 많은 불상과 탑들이 조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이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불상과 불탑이 현재 확인되기 때문이다. 7세기 후반 이후 8세기까지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진성규.이인철, 2003, 『신라의 불교사원』, p238에 나오는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영주 신암리 석조 사면불상(영풍군 이산면), 영주 가흥리 마애삼존불(영주시), 봉화 북지리 마애삼존상(봉화군 물야면), 봉화 북지리 마애2불병좌상, 영동 신항리 삼존불입상(영동군 용산면), 의성 탑리 5층석탑(의성군 금성면), 청도 봉기동 3층석탑(청도군 풍각면), 영주 석교리 석불입상, 안동 신세동 7층전탑(안동시 법흥동), 안동 동부동 5층전탑(안동시 동부동), 안동 조탑동 5층전탑(안동군 일직면 조탑동), 금계동 다층전탑(안동군 풍천면 금계동).


그렇다면 의상은 왕경에서 어떠한 활약은 한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대개 그가 황복사에서 출가하였다는 사실로 인해, 그리고 황복사 3층 석탑을 허공에서 탑돌이 하였다는 기록으로 해서 그와 중앙과의 관계를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기록에서 그가 창건하였다는 10刹이나 그의 10대 제자 가운데에는 그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경우도 있음을 감안할 때 굳이 이 기록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또한 황복사에서 출토된 「황복사탑 금동사리함명」(704)의 기록에 나오는 승려들의 명단에는 의상의 제자로 알려진 이름은 전혀 거론되고 있지 않다. 704년에 왕경의 황복사에서 만들어진 銘에 702년에 입적한 의상의 제자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을 굳이 외면하면서, 의상이 황복사에 주했다고 주장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의상은 우리나라 화엄종의 초조로서 신라 이래 고려까지 그 법이 師資相承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로, 그 傳法의 장소가 바로 이 부석사임을 이 곳의 「원융국사비」는 잘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의상은 부석산에 안주한 이후 그 주위를 화엄종을 전교할 곳으로 삼고 활동하였으므로 「황복사탑금동사리함명」에도 당연히 그와 제자의 이름은 거명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상원 원년에 황복사에 있으면서 설법을 하였다는 『법계도기총수록』에 나오는 기록에 대해서도 굳이 674년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上元 원년은 분명히 674년과 760년의 두 간기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 때의 주역인 표훈은 역사상 분명하게 경덕왕대의 대덕인데, 굳이 674년에 매달려 표훈의 나이를 필요 이상으로 늘려 가면서까지 황복사와 의상의 관계를 인정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錐洞記」를 지은 지통을 지적하여 親히 가르침을 받았으므로 妙한 말이 많다고 한 것을 생각해 보면 그의 10대 제자들이 모두 친히 가르침을 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3. 의상의 수행 양상


의상의 수행은 그의 별호가 義持였다는 데서 그가 실천 위주의 수행을 하였음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리하여 비교적 널리 알려진 그의 여러 일화들로써 이를 설명하여 왔다. 그렇지만 그의 수행을 그의 행적과 관련지어 체계적으로 설명한 것은 부족하였으므로 이를 통해 그의 수행의 특징적인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는 그가 행적을 남긴 장소들의 형태가 대개 산 정상 가까이의 토굴이나 암자 형식이 많다는 사실이다.


16) 淸梁山 : 연화봉은 연적봉 서쪽에 있는데, 우뚝 솟은 모습이 마치 芙蓉과 같아서 僧家에서 말하는 의상봉이다. 봉의 동쪽에 연대사가 있다. 의상봉 역시 의상굴이 그 아래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17)신라 효소왕이 有密에 있을 때에 浮石尊者가 (천관산) 아래에서 살았는데, 지금의 의상암이다. 面勢가 要所를 차지하고 맑고 수려하기가 천하에 제일이어서 창문을 열어놓고 내려다 보면 호수와 산의 만 가지 떨기가 한꺼번에 ?案으로 들어온다. 한가롭게 앉아 있노라면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이 엉기고 형상이 풀리어 심오한 진리의 경지로 들어가게 한다. 후에 통령화상이 탑의 동쪽에 절을 창건하였는데 지금의 탑산사이다.


의상봉이라는 명칭이 유래된 사실로서, 의상굴이 의상봉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의상대, 의상암, 의상봉 등과 같은 명칭은 이 곳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여러 곳에 나온다. 이와 함께 그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사찰의 흔적도 많이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이 사료들은 그의 수행의 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가 창건한 사찰과 머물렀던 곳의 위치는 대체로 종남산의 지상사나 부석사와 같이 거의 산의 정상에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 위치가 수행하기에는 적합한 반면 세속과 많이 떨어져 있어 수행에 힘썼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조선시대 연화봉으로 부르는 봉우리가 僧家에서 말하는 의상봉이라고 한 표현이 주목된다. 이는 신라 이래 고려시대까지 전해오던 전승들이 조선시대에 오면서 일정하게 굴절된 사실을 보여주는 사료라 하겠다. 때문에 후대에 전해지는 사찰의 기록이나 전승들을 무조건적으로 신봉해서도 안되겠지만, 무조건 믿지 못하는 태도도 버려야 하리라 생각된다. 오히려 엄격한 사료 비판을 거쳐 자료로서 이용할 수 있다면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둘째로 그의 수행은 화엄경의 강경과 함께 철저하게 관법을 닦는 수행을 겸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18) 진정이 그 어머니의 뜻을 어기기 어려워 길을 떠나 밤을 도와 태백산에 이르러 의상에게 의탁하여 머리를 깎고 제자가 되어 이름을 진정이라 하였다. 3년 후에 어머니의 부고가 왔다. 진정이 가부좌하여 선정에 들었다가 7일 만에 일어났다. 설명하는 자는 말하기를 “추모하는 슬픔이 지극하여 견디기 어려웠으므로 입정을 하여 (슬픔을) 물로 씻은 듯이 하였다”고 하고, 혹자는 말하기를 “입정을 하여 그의 어머니가 환생한 곳을 보았을 것이다”고 하고, 더러는 말하기를 “이것은 실리로써 명복을 빈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미 입정에서 나오게 되자, 이 사실을 의상에게 고하였다. 의상은 門徒를 이끌고 소백산 추동에 가서 초가를 짓고 무리 3천명을 모아 약 90일 간 《화엄대전》을 강설하였다. 門人 지통이 강에 따라 그 요지를 뽑아 두 권을 만들어 <추동기>라고 하여 세상에 유통하였다. 강을 마친 후 그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나는 이미 하늘에 태어났다”고 하였다.

그는 왕경을 벗어나서 제자들을 모아 『화엄경』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세존이 초전 법륜을 굴리신 것에 비유해 볼 수 있다. 즉, 신라에 최초로 화엄종을 전교하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철저한 수행을 견디어 낼 수 있는 이들에게 전교가 가능하였으므로, 화엄종을 배우고자 원하여 찾아 온 이들에게 강경과 수행을 가르쳤다고 생각된다. 초기에 나오는 제자들의 신분이 낮은 것을 교단 내의 평등사상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그의 수행 방식을 견딜 수 있었던 계층은 귀족이 아닌 서민들로서 기존의 교학적인 선입견없이 수행에 힘썼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의상에 관한 초기 기록은 부석사에 대한 것이 아니고 태백산 내지 소백산, 부석산과 같은 표현들이다. 부석산 40일회, 태백산 대로방 강경 등은 부처님의 산상법문을 연상케 하는 법회로서, 이는 그가 절을 창건하는데 힘을 썼다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신라인들에게 제대로 화엄대교를 전해 줄 것인가에 고심을 한 흔적이었다고 생각된다.


19) “....그는 다만 매일 저녁 몸을 단정히 하고 바르게 가부좌하여 한결같은 목소리로 아미타불을 외우거나 혹은 16가지의 관법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관이 절정에 달할 때면 밝은 달이 문 안으로 깊숙이 들어 왔으며, 때로는 그 달빛을 타고 결가부좌하고 있었습니다. 이토록 정성을 들이는데 비록 극락을 가려고 아니 한들 어데로 가겠소. 무릇 천리 길을 가는 자도 한 걸음에서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스님의 태도는 동쪽으로나 갈 만 하오. 서방 극락은 모를 일인가 하오”하니, 엄장이 부끄럽고 무안하여 물러 나와, 원효법사의 처소로 가서 정토왕생에 대한 묘방을 간절히 청하니 원효가 揷觀法을 지어 지도하였는데, 엄장이 이 때서야 조행을 깨끗이 하고 잘못을 뉘우쳐 한 마음으로 관을 공부하여 역시 극락에 갈 수 있었다. 삽관법은 원효법사의 전기와 해동 승전 중에 실려 있다. 광덕의 부인은 분황사의 노비였지만 실은 관세음보살의 19응신의 하나였다.

이 사실은 문무왕대에 있었던 광덕과 엄장의 설화에 나오는 내용이다. 의상의 수행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없어 같은 시대에 행하여지고 있던 관법의 모습을 알기 위해 인용한 것이다. 물론 이들은 서방정토에 왕생하기 위해 관법을 수련한 것이지만, 의상 역시 아미타불을 서방으로 모시고 一佛乘을 닦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부석사에 남아 있다. 또 ≪송고승전≫에는 그의 인품에 대하여 "의상은 설한 바와 같이 행함을 귀하게 여겨 강의를 하는 일 외에는 수련을 부지런히 하였다. 세계와 국토를 장엄하여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일이 없었다. 또 언제나 義淨의 洗穢法을 좇아 실행하여 어떤 종류의 수건도 쓰지 않았으며, 시간이 되어 그냥 마르도록 내버려두었다. 또, 의복과 병과 발우의 세 가지 외에는 아무것도 몸에 간직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수행 방법이 제자들에게 전해졌을 것이며, 그의 제자 가운데 智通이 태백산 미리암굴에서 화엄관을 닦는 모습을 통해 확인된다.

20) 하루는 갑자기 큰 멧돼지가 굴 앞을 지나갔다. 그 때 지통은 평상시와 같이 목각존상 앞에 정성을 다하여 예불을 드리고 있었다. 그 목각불상이 지통을 보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굴 앞을 지나간 멧돼지는 네 과거의 몸이다. 나는 네가 미래에 받을 과보로서의 부처가 되리라” 지통은 이 말을 듣고 곧 삼세가 一際라는 뜻을 깨달았다. 훗날 스승 의상에게 이 말을 하였더니 의상은 지통의 그릇이 이미 완성되었음을 알고 법계도인을 그에게 주었다 한다.

그의 제자인 지통이 굴에 거주하면서 도를 닦고 있는데, 정성을 다하여 예불을 드리고 있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의상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投師禮를 하면서 예불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 굴에 머물면서 관법을 닦았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의상과 그의 제자들이 닦은 화엄관은 140願, 10회향원, 초지원, 성기원등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저술 가운데 유독 발원문이 많은 것은 이러한 그의 수행태도와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셋째로 의상의 수행 양상은 부처님을 닮고자 노력하였다고 생각된다. 실제 그는 "세상에 전하기를 의상은 金山 寶蓋가 現身한 것이라 하였다“고 하여, 금산 보개의 화신으로 비유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수행이 부처님의 여정과 비슷하였다는 데서 나온 별칭으로 생각된다. 이는 원효를 진나보살의 화신으로 비유한 것과 대조되는 형식이다. 또한 그는 浮石尊者로 불리어졌는데, 덕행과 학문이 높은 불타의 제자에게 붙여지는 敬稱인 尊者라는 칭호가 대각국사 때까지 통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불영사사적기」에서 언급한 佛歸寺는 근처 인근 마을 사람들이 그를 부처님으로 여길 정도로 존숭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의상은 귀국 후에 왕경에 머무르지 않고 전국을 유행하였다. 그가 왕경을 벗어 났다는 것은, 곧 그가 이전의 그의 신분인 귀족으로서의 편안함에 안주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서학하기 이전에 거의 동행하였던 원효와의 유행도 귀국 후에는 거의 보이지 않고 있다. 귀국 직후 낙산에서 관음을 친견하기 위해 기도하였던 예와 같이 원효와 함께 행동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자신이 지니고 있던 귀족의 신분에 구애받지 않겠다는 의지로도 생각된다. 때문에 그가 창건한 사찰은 신라 하대에 선사들이 창건한 사찰보다도 훨씬 소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 하대에 쓰여진 비문에는 한결같이 임금의 교서나 조칙이 내려지고, 사찰에 賜額을 하거나, 방생경계를 표해주고, 나아가 왕경에 있는 사찰에 연계시켜 籍을 편입하게 해 주고 있다. 당시 신라에서는 사찰의 창건에 왕의 허가가 있어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왕명이 내려져 주석하게 되면, 신라 하대의 경우 使者를 보내 방생경계를 표하거나, 조칙을 내린 바가 있고, 왕경에 있는 사찰에 소속시켜 재원을 충당하게 한 예가 무수히 보이고 있다. 과연 이러한 형식의 내용이 부석사에도 적용이 되었는가의 문제이다.

(다음의 사례들은 신라 하대의 금석문에 보이는 내용들이다. (1) 문성대왕이 이를 듣고 상법과 말법시대에 걸려 많은 몸을 나타냈다고 이르고, 자주 글을 내려 위문하면서 겸하여 머물고 있는 절의 사방 밖에 살생을 금하는 幢을 세우기를 허락하였다. 이에 사신을 보내어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를 물으니 선사가 封事 약간의 조항을 올리니 모두 당시 정치에 급한 일인지라 왕이 매우 가상하게 여겼다.(「적인선사비문」, 이지관편, 위의 책, p.90); (2) 선제 14년(860) 2월에 부수 김언경이 일찍이 제자의 예를 표하며 선사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청봉을 덜고 개인의 재산을 내어 철 2,500근을 사서 노사나불 1구를 주조하여 선사가 거처하는 절을 장엄했다. 또 왕이 望水宅, 里南宅 등에게 금 160分, 조 2000斛을 내게 하여 절을 장식하는 공덕의 비용에 충당하도록 하고 사찰을 宣敎省에 예속시켰다.(「보조선사비문」, 위의 책, p.110); (3) 이에 화개곡 고 삼법화상이 남긴 절터에 절을 지으니 마치 화성처럼 장엄하게 이루어졌다. 개성 3년(838)에 민애대왕이 갑자기 임금의 자리에 올라 깊이 불교에 의탁하였다. 명령을 내려 齋의 비용을 준비하고 따로 친견하기를 구하였다. 선사가 “부지런히 선정에 힘쓰는데 있는 것이지, 어찌 만날 필요가 있겠읍니까”하였다. 사자가 왕에게 복명하자 왕이 듣고 부끄러워 하며 깨닫고, 선사는 색과 공을 다 초월하고 선정과 지혜를 함께 원만히 갖추었다고 하여 사신을 보내 호를 내려 혜소라 하였는데, 소자는 성조의 묘호를 피해서 바꾼 것이다. 이에 승적을 대황룡사에 올리고 서울로 나아 오도록 청하였다. 사신들이 오고가고 해서 말고삐가 길에서 엉킬 정도였으나 산처럼 우뚝 서서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진감선사비문」, 위의 책, p.144); (4) 문성대왕이 그 교화함을 듣고 임금의 덕화를 돕지 않음이 없다고 하면서 매우 본받을 만하다고 편지를 보내 크게 위로하였다. 대사가 산중재상에게 답한 네 마디를 아름답게 여겨 사찰의 이름을 바꿔 성주라 하고 대흥륜사에 예속시켰다......이에 사자를 보내 방생경계를 표하니 새와 짐승들이 기뻐하였고, 은구를 얽어 성주사라는 제액을 썼는데 용과 뱀이 살아 있는 듯 하였다.(「낭혜화상비문」, 위의 책, p189, p.199); (5) 관영법사를 보내어 멀리서 조칙을 내려 산문을 위로하고 월광사를 빛내어 길이 선사로 하여금 주지하게 하였다.(「원랑선사비문」, 위의 책, p.225); (6)중화 을사년 가을에 敎勅하시기를 “잘 그 뜻을 계승하고 잘 그 일을 서술하며, 길이 선왕의 유지를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 나에게 있을 뿐이니라. 선왕이 세운 곡사는 마땅히 사액을 바꿔 대숭복으로 하라. 그 경을 수지독송하는 보살과 사찰의 기강을 세우는 유나가 좋은 땅으로 공양과 보시에 도움을 주었으니, 한결같이 봉은사의 고사에 의지하도록 하라. 그러한 까닭에 파진찬 김원량이 희사한 땅의 산물로부터 얻은 이익을 운반하는 일이 중대하니, 마땅히 정법사에 위임하도록 하라. 별도로 두 숙덕을 뽑아 적에 편입하여 상주하게 하여 죽은 이의 명복을 빈다면 윗자리에 있는 내가 유명까지 살피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큰 인연을 맺은 이도 감응이 있어 반드시 통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대숭복사비문」, 위의 책, pp.265-266); (7) 비록 내 땅이라고는 하나 또한 왕토에 속하니, 비로소 왕손인 대아찬 계종과 집사시랑 김팔원, 김함희 그리고 정법사 대통 석현량에게 질의하니 명성이 구고에 까지 미쳐 천리에 응하였다. 증태부인 헌강대왕이 아름답게 여겨 허락하였다. 그 해 9월에 남천군 승통 훈필로 하여금 별서로 표지하게 하고 금살표를 구획하였다.........중화 신축년(881)에 이르러 교지를 내리고 전안륜사 승통 준공과 숙정대의 사 배문율을 보내서 강역을 표시하여 정하고, 인하여 사액을 내리기를 ‘봉암’이라 하였다.(「지중대사비문」, 위의 책, p.320, p.323); (8) 효공대왕이 특별히 正法 大德 如奐을 보내 綸音을 내려 멀리서 법력을 빌었으며 詔書를 내림과 아울러 발우를 보내고 特使를 통해 신심을 토로하게 하였다.........이에 흥륜사 上座인 釋彦琳과 中事省 內養인 金文式을 보내어 겸손한 말과 두터운 예로 지극하고 간절하게 초빙하였다............왕은 대사가 입적했다는 소식을 갑자기 듣고 몹시 슬프고 애통하여 昭玄僧 榮會法師를 보내 먼저 조문하여 제사지내게 하고, 삼칠일에 이르러 특별히 中使를 뽑아 賻儀를 보냈다.(「진경대사비문」, 위의 책, pp.355-358,p.361)


만일 의상이 왕명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하였다면, 왜 왕이 하사한 노비와 전장을 거절하였으며, 왕이 왕경에 성을 쌓으려는 것을 막을 수 있었겠는가의 문제이다. 신라 조정은 당군을 물리친 이후 논공행상으로 어수선했을 것이며, 왕실은 궁궐을 중수하고 남산성의 증축 등으로 위세를 과시했을 것이다. 이들과 궤를 같이 하여 의상이 오늘날과 같은 대가람을 그 오지에 짓기 위해 많은 인력과 물자를 투입하면서, 왕이 성을 쌓는 것에 대해 비판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상반된 내용에 대한 논의들을 볼 때, 논자들은 자신의 논지에 유리한 쪽으로 해석들을 해 왔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는 권부이종을 내쫓고 들어간 부석사에서 겨울에는 양지바른 곳에서 여름에는 그늘에서 화엄경을 강의하였다고 하므로,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세웠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의 활동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 그의 활동을 인정해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의상은 왕이 하사한 전장과 노비를 거부하였다. 흔히 이적이 나타나거나 수행이 뛰어난 것이 보고되면 왕실에서 불러들여 조정과 관련을 맺은 예에서 보듯이 문무왕은 그에게 전장과 노비를 하사하고 일정하게 조정과의 관계를 유지하려 했을 것이나 의상이 이를 거부함으로써 그는 조정에 예속되지 않았다. 오로지 그는 화엄대교를 신라에 전교하는 데에만 전력하였던 것이다. 그는 의복과 병과 발우의 세 가지 외에는 아무 것도 몸에 간직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가 귀족의 신분도 버리고 오로지 沙門으로서 부처님의 수행을 따르고자 한 데서 나온 결과로 생각된다.


4. 맺 음 말


의상의 수행은 익히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의 행적과 관련하여 좀 더 상세히 살펴 보기 위해 여러 사적에 나타나는 예를 살펴 구체적으로 살펴 보았다. 자료 상의 한계로 애초보다는 그의 행적을 언급한 범위가 축소된 경향이 있으나, 확실하게 문헌으로 고증할 수 있는 유적에 한정시켜 살펴 보았다. 하지만 그의 행적은 앞으로 봉정사의 예와 같이 신출자료들이 나오게 된다면 훨씬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의 행적과 수행에 관한 논의들을 정리하는 것으로 맺음말을 대신하고자 한다.


의상의 행적을 중국 유학 이전 시기와 유학시기 그리고 귀국 이후의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 보았다. 640년경부터 660년까지로 한정한 첫 번째 시기에 의상은 원효와 함께 보덕에게 나아가 수학을 한 사실과 650년 입당이 좌절된 이후에는 완산주를 비롯하여 부안, 남원, 광주 무등산 등을 유행하며 수행하고 다시 왕경으로 돌아와 동해안의 불영계곡에 머물면서 수행을 한 바 있고, 원효와 함께 상주, 문경 등에서 수행을 한 것으로 생각해 보았다. 661년부터 670년까지의 두 번째 시기는 중국에 유학하여 양주에 머물다가 이듬해인 662년에 종남산의 지엄에게 나아간 것으로 보고, 양주에 머무는 동안 화엄종으로 갈 것을 결심한 것으로 추정해 보았다. 또한 매우 열심히 정진하여 그 도가 스승 지엄이나, 도선율사보다도 더욱 수승하였으나, 신라인이어서 지엄을 이어 중국 화엄종의 제3조가 되지 못하고 3년 간 전국을 유행하다가 장안에 돌아와 옥에 갇힌 김인문으로부터 당의 신라침공 소식을 듣고 귀국을 결심한 것으로 보았다. 671년 이후의 세 번째 시기에는 부석사에 정주하기 이전에 5-6년 간 전국을 다니면서 화엄종을 홍포할 곳을 물색하다가 소백산과 태백산 지역에 자리를 잡은 후, 귀족의 신분에 연연하지 않고 제자들을 길러 냄으로써 당시인들로부터 금산 보개의 화신이라는 추앙을 받게 된 것으로 보았다. 특히 신라 하대의 선사들이 왕실과 연관되는 정황을 금석문으로부터 추출하여 살펴보고, 의상과 중앙정부와의 관계를 비교해 보았다.


의상은 사문으로써 철저하게 수행에 힘썼던 보기 드문 고승이었다. 때문에 그에게는 해동 화엄초조라고 하는 별칭이 늘 함께 하였고, 그의 화엄일승법계도는 법성게라는 약칭으로 오늘날까지 애송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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