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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기분이 나빠지는 원인이 대상에 있다고 착각하고 분노한다.
그러나 수행자라면 현재의 상황이 업력에 따른 인과 때문임을 바로 알아차리고 참회로 전환해야 한다.
하이고 여래소설법 개불가취 불가설 비법 비비법
(何以故 如來所說法 皆不可取 不可說 非法 非非法)
어떤 연고입니까?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은 모두 다 취할 수 없고 가히 다 말할 수 없으며 법이 법이 아니며 법 아님도 아니옵니다.
어떤 이유로 그러한 것인가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면, 이미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닌 인과(因果)가 생겨나는 고로, 인연을 따라 머물며 때를 따라 들고 남이 자유자재한지라 정법(正法)이 있고 없고를 떠난 것이오니, 여래께서 아무리 말씀을 하신다 하여도 정법(正法)이라고 하면 정법(正法)이 아닌 인과(因果)가 생기는 연고로, 이같이 정법(正法)을 초월한 법(法)을 말씀하심인지라 여래의 말씀을 정법(正法)이라 할 수도 없음이다.
또 여래께서 설하시는 법은 가히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할 것 같으면, 정법(正法)이라고 하면 이미 정법(正法)이 아닌 인과(因果)가 생기므로 정법(正法)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부처님께서 “법도 아니요 비법도 아니다”라고 하셨는지라. 정법(正法)을 정법이라 할 수도 없고 정법이 아니라 할 수도 없는지라 이를 비법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또 비법(非法)이라고 하면 비법(非法)이 아니라고 하는 인과(因果)가 생겨나므로, 다시 비법(非法)이라 할 수도 없는지라, 결국 정법(正法)도 비법(正法)도 아닌 말과 생각을 떠난 자리인 것이다.
한때 신천지 교회, 신천지 교회 신도, 신천지 교단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회자됐다.
코로나19에 따른 전염경로의 주체가 된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나, 그 어떤 종교라도 이를 믿는 이들이 불편과 고통,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신앙하는 것인데, 오히려 불편과 고통의 온상이 된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불법(佛法) 즉, 부처님의 말씀인 법(法)을 따르고자 하는 것은, 한 찰나, 한 순간에도 불편한 마음이거나, 고통스런 마음, 괴로운 마음, 조금이라도 못마땅한 마음을 벗어나고자 함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행에 옮기기만 한다면, 곧바로 한 점의 고민과 걱정 근심, 온갖 고통과 괴로운 마음에서 당장에라도 벗어날 수가 있겠으나, 이를 실행하기가 힘든 것은 수 억겁(億劫)의 긴 시간동안 쌓여온 금강석보다 더 단단한 업습(業習-업의버릇)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번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의 마지막 단락의 가르침은, 우리가 대하는 좋고 싫은 일체의 차별된 모습에 마음을 끄달리지 말라는 교훈이다.
나의 본래 마음은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차별이 전혀 없음인데, 좋고 싫고, 옳고 그른 고락시비(苦樂是非)의 분별된 가짜 마음을 일으키지만 않으면, 그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청정한 자성(自性)을 찾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 어떤 것에도 좋고 싫은, 옳고 그른 분별(分別)만 하지 않으면, 그대로 본래의 청정(淸淨) 자성(自性)으로서 일체의 고통에서 벗어날 것임인데, 너무나 간단하면서도 이보다 더 쉬울 수는 없다 할 것이나, 거꾸로 이를 극복하기란 너무나 힘들고 이보다 더 어려울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인과(因果)의 괴로움을 벗어날 수 없으니, 지금부터라도 마음 수행을 게을리 할 수가 없다 하겠다.
하지만 생각이나 감정으로는 절대 이를 넘어설 수 없다 할 것이니, 우선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을 통해서 하루빨리 계획을 세우고 하나하나 실행해 나가야 할 것이다.
소이자하 일체현성 개이무위법 이유차별
(所以者何 一切賢聖 皆以無爲法 而有差別)
그 이유는 바로 모든 현인과 성인들께서 다함이 없는 무위(無爲)의 법(法)으로써 여러 가지 차별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다함이 없는 청정한 본연의 자성(自性)이다.
여기에는 임의로 조작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함이니, 곧 자성(自性), 즉, 다함이 없는 법(法)에 머물러 다함이 없는 법(法)을 행사하시되, 인연을 따르고 때를 따라서 출몰하는 것이니, 가지가지의 차별이 있게 되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그 어떤 것에도 움직이지 않고 변하지 않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청정한 자성(自性)을 말한다는 것은, 곧 움직이고 변하는 모습의 상대 세계도 있다는 반증이 되는 것이니, 이는 차별이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움직이고 변하는 차별의 세계라 할지라도, 이를 차별로 보거나 차별을 짓지 않음이 중요한 것이니,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성품은 정법(正法)이되 정법에도 걸리지 않는 까닭을 말하는 것이다.
즉, 정법(正法)이라고 규정하게 되면, 다함이 있는 법인 유위법(有爲法)이 되므로 다함이 없는 무위법(無爲法)이 될 수가 없고, 다함이 없는 무위법(無爲法)은 다함이 없는 무위법(無爲法)이기 때문에 다함이 있는 유위법(有爲法)이 될 수가 없음이다.
따라서 여래법(如來法)은 취할 수 없고 설할 수 없으며, 그래서 법이 아닌 비법(非法)이요, 비법(非法)도 아닌 비비법(非非法)이기 때문에, 정법(正法)이 될 수도 없음인 고로, 일체 성현들이 무량무수(無量無數)의 차별을 보이는 것이니, 그러나 온갖 차별신(差別神)의 모습으로 중생을 제도하심이다.
무슨 말이냐?
여래와 보살은 차별이 없는 마음 상태이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뗏목이라는 차별을 두고, 피안이라는 차별을 두고, 강을 건넌다는 차별을 두고, 강을 건넌 다음에는 뗏목을 버리라는 차별을 두고, 저 언덕의 피안(彼岸)이 있다는 차별을 두어서 중생을 제도함이다.
그러나 여래와 보살은, 중생이라는 차별이 없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차별이 없으며, 정법(正法)이라는 차별이 없고, 정법(正法)이 아니라는 차별이 없으며, 일체 모든 것에도 차별이 없음이나, 중생들이 알아듣기 쉽게 하기 위하여 차별을 예로 들어서 제도를 한다는 뜻이다.
그야말로 어제의 난리는 난리가 아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세상을 삼키고 있는 형국이다. 누구나 언제 닥칠지 모를 불안감과 아울러, 확진자들을 생각하면 단순히 기분이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걱정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기분이 나빠지는 데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종류가 있다.
마음먹은 대로 잘되지 않을 때, 화가 나면서 기분이 나빠지게 되기도 하고, 또 몸이 아파서 고통스러울 때는 기분이 나쁜 정도가 아니다.
남들로부터 자존심과 명예가 짓밟힐 때도 엄청나게 약이 오르면서 기분이 나빠진다.
그리고 대부분 드러나게 또는, 잠재적으로 복수를 다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정(情)을 받지 못하거나 너무나 정(情)을 주고 싶을 때도 안타까운 마음에 기분이 나빠지게 된다.
이렇듯 기분이 나쁘다는 것은, 성이 나고, 화가 나며, 약이 오르면서 좋지 않은 감정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이같이 기분이 나빠지는 원인은, 대부분 어떤 대상 때문이라고 생각하기가 십상이나, 지금까지 설명해 왔듯이, 나 스스로 지금까지 그만큼 즐기고 기뻐했고 행복했던 경험의 결과 즉, 인과(因果) 때문이라는 것을 먼저 알아채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그 무엇을 얻어서 기분이 좋아졌다면, 그만큼의 얻은 대가로 인하여 기분이 좋은 만큼의 기분 나쁜 인과(因果)를 치러야 한다.
만약 내가 어떤 형태로든 기분이 나쁘고, 화가 나고, 성이 나며, 약이 오르거나, 고통과 괴로움을 느낀다면, 이는 바로 무엇을 얻어서 즐거웠던 만큼의 과보(果報)가 생긴 것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다.
따라서 내가 어떤 사람의 언행 때문에, 화가 나거나 약이 오르거나 기분이 몹시 나쁘다고 한다면, 이는 나의 업보로 말미암아, 기분 나쁜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나게 되는 시절인연을 만난 것이므로, 기분 나쁜 사람 때문이 아니라, 나의 업보가 원인이라는 것을 번개같이 알아채고, 나의 인과 업보에 대해 먼저 참회를 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 부분을 설명하기 위하여, 삼천대천세계의 가득 찬 칠보를 모두 보시한다면 이 복덕이 얼마나 많겠느냐고 일단 물으신 것이다.
진우 스님 전 조계종 교육원장 sans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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