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는 3군사령부가 창설된지 얼마 안된 시기였기 때문이고 보통 군인 아파트에 많이 살았으나 내가 살던 집은 독립된 마을이었으며 주인집은 농사를 짓고 소도 여러마리 키웠다.
학교와의 거리는 걸어서 30분정도였고 보통 갈 때는 동네의 형들과 동급생이던 친구와 함께 갔으나 1학년 때 부터 한글을 몰라 담임이시던 심기창 선생님은 따로 남게 하여 나머지 공부를 해주셨었다.
당시엔 시골아이들과 도시에서 살던 학생들이 섞여 학력차 나고 그러다 보니 수업진행이 어렵자 선생님은 시골에 살던 학생들 중 글을 모르던 학생들을 남겨 지도를 해주셨고 나는 점심이 훨씬지나 큰 길가 도서관에도 들리고 개울에서 물고기도 잡고 논에서 메뚜기를 잡으며 집에 왔었다.
고지대에 있던 마을에서 측면을 보면 굴뚝에 연기가 났는데 당시 낚시대 공장이 있었고 냄새가 그리 좋지 않았다.
가끔씩 터미널 근처 친구집에 가서 놀기도 하고 주일날엔 사령부에 있는 군인교회에 갔었는데 솔직히 목사님 설교보다는 군용버스 타는 재미로 갔었다.
또 어떨 때는 통일교 다니는 동네 친구를 따라 갔는데 예배 후 찬송이 과격해서 가지 않았다.
당시 동네뒷산에는 울창한 침엽수림 있었고 지금은 명지대가 들어선 논가에 가서 개구리알을 채취하기도 했었다.
아무튼 용인초등학교에서 전학을 간 이후 한번도 가본적이 없었고 46년 만에 행정실에 학원에서 지도하는 어머니의 시험 접수에 필요한 졸업증명서를 대신 받으러 가게 되었는데 정문는 닫혀 있어 후문으로 갔다.
2015년인가 개교한지 100년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기초자치단체의 학교들 개교시기가 보통 1910년 이후로 알고 있고 면단위는 1930년 전후 1945년 이후엔 토지개혁을 할 쯤에는 면소재지에서 먼 리단위에 초등학교가 세워진 것으로 안다.
용인의 경우는 용인초등학교보다 인근 양지면의 양지초등학교가 약간 오래된 것으로 안다.
아무튼 1915년 입학을 한 졸업생들은 1919년 3월 24일 졸업식을 하는데 이때 만세시위를 했다고 한다.
용인은 이 후 장날에도 만세시위를 하여 여러 사람이 연행되었다고 한다.
용인초등학교는 다른 시군단위 대표 학교가 그렇듯 남향에 위치하며 아마 조선이나 고려시대에도 이곳에 향교나 절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