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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모 창립 17주년 기념
남한산성 역사문화강좌
- 남사모 활동지(회보) -
일시 | 2013년 5월 26일 10시
장소 | 남한산성 행궁 및 만해기념관
주최 |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후원 | 경기문화재단
http://cafe.daum.net/namsamoh
인사말 / 전보삼(남사모 회장)............................................................................ 4
1. 남사모 2012~2013년 역사문화 강좌
1) 압록강에서 요양(遼陽)까지 400리 길
이승수(한양대 국문학과 교수) ............................................................ 4
2) 임진왜란과 남한산성
정구복(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 4
3) 10년의 복원, 100년의 기다림 남한산성행궁
노현균(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 문화유산팀장) ...................................... 4
4) 등산이란
고태우(한국생활등산문화교육원 원장) .................................................. 4
5) 과거 급제 기록을 통해서 본 선조들의 삶
양창진(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 4
6) 남한산초등학교의 잊혀진 역사를 찾아서
김명섭(강남대)................................................................................. 4
7) 남한산성의 과거, 현재, 미래
최종대(평화통일국민포럼) .................................................................. 4
8) 사월의 수채화들
최종섭(전국경제인연합회 경영자문위원) ............................................... 4
2. 남사모 2012~2013년 역사탐방
1) 정충묘, 허난설헌 묘지, 최항 묘지 ....................................................... 4
2) 문경 역사 탐방-영남대로, 고모산성.................................................... 4
3) 수덕사, 해미읍성, 서산 마애삼존불상 ................................................. 4
목차
3. 남사모 2012-2013년 회보
1) 2012년 1월호 .................................................................................. 4
2) 2012년 2월호.................................................................................. 4
3) 2012년 3월호.................................................................................. 4
4) 2012년 4월호 ................................................................................. 4
5) 2012년 5월호.................................................................................. 4
6) 2012년 6월호.................................................................................. 4
7) 2012년 7월호.................................................................................. 4
8) 2012년 8월호.................................................................................. 4
9) 2012년 9월호.................................................................................. 4
10) 2012년 10월호................................................................................. 4
11) 2012년 11월호.................................................................................. 4
12) 2012년 12월호................................................................................. 4
13) 2013년 1월호................................................................................... 4
14) 2013년 2월호.................................................................................. 4
15) 2013년 3월호.................................................................................. 4
16) 2013년 4월호.................................................................................. 4
17) 2013년 5월호 .................................................................................. 4
4. 남사모 임원 명단.................................................................................... 4
남사모 창립 17주년 기념
남한산성 역사문화강좌
인사말
남사모 창립 17주년을 맞이하여
⌜남사모 15년사⌟를 간행한지 벌써 2년이 되었다. 또한 2012년부터 다시 남사모 회장직을 맞아
초심으로 돌아가 남사모 모임을 활성화하려는 노력을 회원들과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하였다. 1년
4개월 동안 주력한 활동은 역사탐방 활성화와 문화강좌를 계속 이어가는 노력을 병행하였다.
15년사에서 정리한 바와 같이 현재 남한산성 복원사업은 인화관 복원과 더불어 1단계 사업은
완료되어가고 있다. 앞으로 2단계 사업의 방향성에 대한 계획 수립이 필요하며, 내년 2014년 6월
세계문화유산 최종 등재를 앞두고 있어서 남사모의 역할은 무엇인가 다시 한번 생각하여야 할 중
요한 시점이 되었다.
우리 남사모는 남한산성 복원 사업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듯이 앞으로도 남한산성에 대한 사랑
과 열정으로 더욱 분발하여 남한산성이 시민속의 남한산성, 세계속의 남한산성이 될 수 있도록 힘
과 중지를 모아야 하겠다.
이제 창립 17주년을 맞이하여 과거의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좀더 체계적인 연구를 통하여 남한
산성의 문화관광 자원화 및 국민 교육장으로서의 재도약 할 수 있는 기반조성에도 계속 노력할 것
이다. 이러한 다짐의 하나로 창립 17주년을 맞이하여 남한산성 역사문화강좌에서는 특히 남한산
성을 즐기는 방법, 남한산성의 시문학, 남한산성의 숲 이야기 등으로 산성을 시민 품속으로 끌어
않는 작업을 시도하면서 남한산성의 무궁한 발전을 남사모와 함께 번영하기를 기원드린다.
바쁘신 중에도 매달 회보를 제작한 김진원 사무국장 주미숙 총무, 그리고 답사 스케치를 생생하
게 작성하여 주신 남·사·모 회원 여러분과 남사모를 위해 지원하여 주신 광주시와 경기문화재
단, 경기도에도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끝으로 창립 17주년 행사가 원만히 성취되기를 기
원하며 더욱 열심히 노력할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하고자 한다.
2013년 5월 16일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회장 전 보 삼(신구대학교수/ 만해기념관장)
6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모임 스케치
김 진 원
이른 새벽 눈을 떴다. 2011년 마지막 남사모 모임 날이란 생각에 잠이 확 달아났
다. 오늘 총회가 있을 것이고 새로운 집행부가 탄생하는 날이기도 하다. 누가 새로
운 회장님이 되실 것인가? 평소보다 이른 시간 산성에 오를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
섰다. 날씨가 꽤나 차갑다. 일기예보는 영하 10도 이하라고 했다. 바람이 많이 불어
체감온도는 더 떨어질 것이라 했다. 옷깃을 파고드는 매운바람이 대단한 아침이었
다. 집 앞에 있는 차로 갔다. 그러나 황당한 일이 생기고 말았다. 5 년여 무사 무탈
하게 굴러가던 내 차. 시동이 안 걸린다. 시간이 없다. 모임 약속시간이 열 시인데.
어쩌란 말인가? 당황한 난 와이프를 전화로 불렀다. 이래 저래하니 나를 남한산성
까지 데려다달라고 했다. 화급하게 와이프가 내려왔고 난 그 차에 몸을 실었다.
산성 남문관에 도착하니 많은 분들이 앉아 있었다. 죄송합니다를 연발하고서야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이종화 사무총장의 사회로 연말 정기 총회가 시작되었
다. 먼저 그동안 수고한 신청회장의 말씀을 듣고 새로운 회장 추천에 들어갔다. 이
런 저런 분들의 이름이 나왔다. 결국 신청회장의 강력한 추천을 밀어낼 대안이 없
었다. 제 3/4대 회장을 역임하신 전보삼 교수님이 또 다시 남사모를 이끌 중책을
맡으셨다. 자리한 회원 모두의 만장일치 박수소리는 매우 크게 들렸다. 수고하심은
봉사다. 진정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사람이면 모두를 위한 수고를 봉사로 생각하고
이를 기꺼이 받아주신 전 교수님께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곧바로 사무국장으로 본인(김진원)을 지명하시는 절차가 지나갔고 연회
비와 모임 당일 활동식사비 문제에 대한 의견들이 분분했다. 결국 2012 년부터 연
2012년 1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7
회비는 3만 원 당일회비는 2만 원으로 의결되었다. 또한 예전에 발행되었던 월간
회보에 대한 의견들이 나왔다. 하지만 이 문제는 경비문제와 실효성문제가 제기되
면서 결론 없이 마무리되었다. 일행들은 전보삼 교수와 이종화 사무총장의 안내로
몇 가지 복원된 행궁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동안 없던 종각이 세워졌고 커다란 종
이 제작되어 매달려 있었다. 몇 년 전 이승수 회원이 문헌조사 과정에서 남한산성
의 종이 국보로 지정받아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되있다는 사연을 전교수님이 설
명해 주셨다. 대단한 남사모가 아닌가. 하지만 종각의 위치가 바람직하지 않은 곳
에 있다는 결론을 얻었으며 초가집 세 채의 사용용도를 들을 수 있었다. 한남루를
지나며 글씨체가 부적절하다는 의견들이 많았다. 행궁을 들어가면서 이런 저런 곳
을 살펴보고 실험삼아 불을 때 보았다던 하궐의 모습도 둘러보았다. 상궐을 돌아
다시 남문관으로 돌아와 맛있는 북어 무조림을 주 메뉴로 점심식사를 했다.
그동안 많은 분들 특히 전교수님과 김남일 박사의 큰 수고로움이 깃든 남사모 15
주년사 책이 나왔다. 회원들은 살짝 감격해하며 책을 손에 넣었고 돌아가면서 본인
또는 다른 회원의 글을 낭독하는 것으로 공식 모임은 끝이 났다.
이달의 산성 인물 : 인조대왕
■ 제16대왕 : 인조(1595-1649)
재위 : 1623-1649년.5월. 집권 26년2개월. 55세를 일기
● 인조반정의 명분
첫째 : 명에 대한 의리를 져 버리고 대명사대를 하지 않았다는 것.
둘째 :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형제를 죽이고 불효를 했다는 것.
그러나 광해군은 대북파들이 인목대비를 죽여야 한다는 주장을 물리치고 영
창대군을 죽이는 것도 반대 했다. 그리고 청과 명에 대해 중립적인 외교로
2012년 1월
8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실리를 취했으나, 인조는 대명 사대주의에 빠졌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삼
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는 치욕을 당했다. 인조반정으로 정인홍, 이
이첨 등은 사형을 당했고, 대북세력 200명 모두 숙청당함. 인조는 친명 사대
주의를 표명하여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려 했으나 이괄의 난, 청의 침입 등으
로 엄청난 혼란을 겪고 결국 청과 군신관계를 맺는 삼전도의 치욕을 당한다.
이괄의 난은 인조가 한성을 버리고 도주했을 정도로 조선 조정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이괄이 북방 주력부대를 이끌고 내려옴으로써 변방의 수비
에 허점이 생겨 후금의 침략을 용이하게 했다.
● 병자호란(1636년) : 1636년부터 정묘조약 때 맺은 '형제의 맹약' 을 군신관계로
개악하고자 하면서 황금과 백금 일백 냥, 전마 3천 필, 정병 3만을 지원해 달라
고 요구해왔다. 후금의 요구사항이 터무니없이 늘어나자 조선은 화의조약을 깨
고 후금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후 후금은 국호를 청으
로 개칭하고 태종은 황제의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해 12월1일 청태종은
청군 7만, 몽고군 3만, 한군 2만 등 12만을 이끌고 압록강을 쳐내려 왔다. 청군
은 임경업이 지키고 있던 의주 백마산성을 피해 직접 한성으로 진군하였다. 인
조는 세자와 백관을 대동하고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했다. 한편 청군은 12월16
일 남한산성에 도착했고, 청 태종은 1월1일 군사를 20만으로 늘려 남한산성 밑
탄천에 포진하고 있었다. 이후 별다른 싸움 없이 40여 일이 경과하자 성안의 식
량은 떨어지고 군사들은 피로에 지쳐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게 됐다. 그러는 사
이 강화도가 함락됐다는 보고가 있자 성안은 술렁대기 시작했고 인조 는 별수
없이 항복을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의 요구사항은 총11 가지였다. 청에 대
해 신하의 예를 갖추고, 명과의 교호를 끊을 것 ,청에 물자 및 군사를 지원 할
것, 청에 적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말고 곡물을 보낼 것 등이었다. 이 조약이
체결되자 1637년 1월30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서문으로 나가 한강 동편 삼전도
에서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갖춘 뒤 한성으로 되돌아 왔다. 이로
써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는데, 이 관계
는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청이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된다. 병자호란을 통해
굴욕적인 역사를 남기게 된 것은 당시의 집권당인 서인과 인조가 지나친 대명
2012년 1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9
사대주의에 빠져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 광해군의
실리주의 노선을 제대로 살렸더라면 변란은 물론이고 그 동안 중국과 맺어 오던
군신 관계를 청산하고 국력을 신장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연재 1회
1779년 정조의 능행과 남한산성
김문식(단국대 사학과)
1. 머리말
1779년(정조 3) 8월, 정조는 도성을 벗어나 남한산성과 이천을 경유하여 여주에
있는 효종의 곻겓을 참배하고 돌아왔다. 총 7박 8일의 장거리 여행이었다. 정조가
영릉을 참배한 것은 효종이 서거한지 2周甲이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정조
는 재위 24년 동안 총 66차례의 능행을 했으므로, 능행 자체가 이례적인 것은 아니
었다. 이보다 앞서 정조는 1777년에 永겓과 弘겓을 방문한 것에서 시작하여, 1778
년에는 2차례, 1779년에는 4월까지 이미 2차례의 능행을 다녀온 바 있었다. 그러
나 1779년의 능행은 정조에게 최장거리 여행이자 여주를 다녀오는 유일한 여행이
었고, 이동 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남한산성에서 보냈다는 점을 주목할 필
요가 있다.
정조의 능행 중 7박 8일이 소요된 여행은 두 번 있었다. 1779년 여주 능행과
1795년의 화성 행차가 그것인데, 후자는 정조가 생모인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화
성에 행차하여 사도세자의 묘소인 顯隆園을 참배하고, 화성행궁에서 혜경궁의 회
갑잔치를 열었던 뜻 깊은 행사였다. 조선시대의 왕릉은 도성 인근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능행이라 해봐야 당일에 다녀오는 것이 대부분이고 길어도 3일 내지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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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이 소요되는 정도였다. 당시 여주에는 효종의 곻겓과 세종의 英겓이 있었는데, 이
들은 도성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왕릉이었다. 그런데 여주 능행이라 하더라도
남한산성, 이천, 여주에서 숙박하는 것으로 계산하면, 5박 6일의 일정이면 충분히
다녀올 수가 있었다. 그러나 정조는 일정을 7박 8일로 늘였고, 그 중 4박 5일을 남
한산성에서 보냈다. 이 때의 능행은 120주기를 맞은 효종의 능을 참배하는 동시에
남한산성을 방문하여 산성의 상황을 점검하고 군사 훈련을 실시한다는 목적이 있
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1779년 정조 능행의 실상과 의의를 검토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이를 위
해 2장에서는 능행의 과정을 시간 순서에 따라 행사 준비, 본 행사, 행사 마무리로
구분하여 정리하고, 3장에서는 정조가 능행 중에 취했던 조치들을 대상에 따라 山
林, 유생과 무사, 백성으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그리고 4장에서는 정조의 능행이
가지는 의의를 정리했다. (다음 호에 계속)
2012년 1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11
2012년 1월
12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시산제 있는 날의 스케치
조 한 숙
임진년 첫 모임이다. 2012년 1월 29일, 오늘은 남사모 회원들이 모여 시산제를
올리는 날이다. 입춘을 며칠 앞두고 쌀쌀한 바람 속에 날씨가 쾌청했다. 10시에 산
성 남문관 식당 앞에 모였다. 봄바람 탓인지 회원들이 37명이나 모였다.
남사모 깃발을 앞세우고 모두 숭렬전 쪽으로 향했다. 숭렬전은 백제의 시조 온조
왕과 남한산성 축성 당시 책임자였던 이서 장군을 모신 곳이다. 그곳 왼쪽 언덕은
언제나 양지바른 곳으로 겨울에도 눈이 빨리 녹는다. 오늘 그 양지바른 곳에서 시
산제를 지내기로 했다.
야트막한 언덕에 돗자리를 펴고 시루떡, 과일, 편육 등 시산제 제물을 차렸다. 시
산제를 지내기 전 남한산성 역사 속의 영혼들과 먼저 가신 선열에 대한 묵념을 했
다.
우선 강신의 절차로 김진원 사무국장이 시산제를 올리게 됨을 산신에게 아뢰었
다. 남사모 회원들의 평안과 모든 등산객들의 안위와 출렁거리는 주변의 안정과 국
가적으로도 평안하기를 바라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전했다.
술잔을 올리는 차례다. 첫잔, 초헌은 전보삼 회장님이 올렸다. 두 번째 잔 아헌은
원로 두 분, 공석봉 고문, 문제길 고문이 올렸다. 이어서 최종섭 부회장을 비롯한
여러분들과 회원들이 차례로 헌작을 했다. 시산제가 끝남을 아뢰는 술잔, 종헌을
올리는 대신 모든 회원들이 함께 재배 올리는 것으로 시산제를 마쳤다. 몇 분의 음
2012년 2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13
복이 있은 후 회원들이 떡을 나누어 먹을 사이도 없이 서둘러 저 아래 행궁 종각 쪽
으로 내려가야 했다.
종각에서 정각 12시, 정오에 남사모 회원들이 타종을 하기로 되어 있다. 작년 겨
울에 종각을 짓고 종을 제작한 후 공식적인 타종식은 금년 1월 10일에 있었다.
전보삼 회장님의 종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있었다. 이 종의 원본은 조선시대 4대
명종인 국보 제 280호, 충남 성거산 천흥사 동종이라고 했다. 천흥사가 폐사되고
남한산성으로 옮겨서 사용되다가 일제 강점기에 창경궁으로 옮겨지고 지금은 국립
중앙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고 한다. 서둘러 내려온 덕에 시간이 남아 회원들이 종
각으로 삼삼오오 올라가 종 구경을 했다. 얼핏 보기에 국립 경주박물관에서 보던
에밀레종(성덕대왕 신종)과 흡사했다. 특별히 종신의 중앙에 비천상이 아름다웠다.
중국 돈황 막고굴 천장에서 보았던 그 비천상이다. 불교의 전래에 따라 그 아름다
운 그림도 전해졌으리라. 종각 관리인의 말에 따르면 종의 무게가 무려 1000관이
라고 했다. 3750kg이다. 대단한 무게다. 종신에는 제작 시기, 단기 4344년(2011
년) 11월이라고 양각되어 있었다. 옆에서 함께 보던 이영남 교수가 종을 치는 막대
기 당목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당목은 고래를 닮았다는데 고래가 종을 치면 고래를 무서워하는 용이 많이 운다
고 했다. 종의 맨 위쪽에 있는 종걸이, 용뉴(괟?)를 휘감고 있는 용을 포뢰라고 하는
데 포뢰는 바다에 사는 용의 셋째 아들이라고 했다.
우리 회원들은 6명씩 한 조가 되어 종을 치기로 했다. 한 번 친 종의 여음을 느끼
면서 두 번째 종을 치고, 이어서 세 번을 치기로 했다. 1조에는 전보삼 회장, 이승수
교수 아들 다움이, 공석봉 고문, 문제길 고문, 이영남 교수와 필자, 이렇게 여섯이
타종을 했다. 12시 몇 초 전에 당목을 잡고 뒤로 당긴 후 종을 치는 자리 당조를 정
확히 겨냥했다. 하나, 둘, 셋! 남한산성 산성리 종로거리에 종소리가 퍼져 나갔다.
종 치는 것을 마친 회원들은 점심을 먹기로 한 남문관 식당으로 떠들썩하게 내려갔
다.
2012년 2월
14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이달의 산성 인물 : 서흔남
서흔남(?~현종 8년 1667년 졸)
남한산성 관리사무소 앞쪽 지수당 언저리에 묘비 하나가 보인다. 묘비의 위쪽은
깨어져 없어졌고, 남은 묘비마저도 마모되어 확실한 형체를 알 수 없다. 묘비를 자
세히 보면‘徐欣男’이라는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묘비는 동문 밖의 병풍산 묘소
에 있었다. 그 후손이 화장 처리를 하면서 묘소가 없어지고 버려진 묘비를 수습해
서 옮겨온 것이다.(광주시 향토문화유산 제6호) 서흔남은 누구일까?
때는 1636년,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가 1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 국
력이 약했던 조선은 저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청나라 군대에 쫓겨 인조임금
은 황급히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떠났다. 사태가 암울하고 다급해지자 인조를 모시
던 신하들은 하나 둘씩 흩어져 버렸고, 인조는 얼마 남지 않은 신하들과 함께 송파
나루를 겨우 건널 수 있었다. 강은 건넜으나 날은 어두워졌고 폭설이 길을 막았다.
인조 일행은 남한산성까지 올라 갈 일이 아득했다. 통곡소리가 잠실 일대를 뒤
흔들었다. 인조는 신하의 등에 번갈아 업혔지만 눈 덮인 험한 산길에 신하들은 지
쳐갔다. 일행은 걸어서 산성을 올라가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때 한 총각이 굽 높은 나막신을 신고 나무를 하고 있었다. 신하들은 그에게 도
움을 요청했다. 인조는 나막신을 거꾸로 신은 그의 등에 업혔다. 그는 단숨에 산성
비탈길을 거슬러 올라 성안으로 들어갔다. 인조는 남한산성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
리고 서흔남에게 왜 나막신을 거꾸로 신었는지 물었다. 그는 눈 위 거꾸로 찍힌 발
자국을 적들이 보면 혼란에 빠져 그들을 교란하고자 그랬다고 했다. 인조는 그가
너무나 신통해서 고마워했고 소원을 말하라고 했다. 그는 전하의 곤룡포를 입어보
고 싶다고 했다. 인조는 즉시 곤룡포를 벗어주었다. 이렇게 인조를 업고 무사히 남
한산성 안으로 피신시킨 총각이 바로 서흔남이다.
서흔남은 그 후에도 여러 가지 활약을 펼쳤다. 청나라 군대가 철통같이 포위하여
2012년 2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15
산성의 안과 밖 교통이 끊어졌지만 나무꾼 서흔남은 용의주도하게 미친 사람, 또는
적군변장, 거지 등 행적을 보이며 정보를 가져오곤 했다. 서흔남은 적진을 통과하
여 삼남지방과 강원도 등지로 인조의 유지를 전하고 위급하게 알리며 인조임금을
도와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렇게 서흔남은 전국 각지로 돌아다녔다. 그야말로 눈부
신 활약을 펼쳤다. 서흔남은 전투에도 나섰다. 청나라와의 전투에 참여하여 적군 3
∼4명을 죽이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서흔남이 여러 방면에 걸쳐 활약을 펼쳤지만
청나라와의 전쟁은 치욕적으로 끝나고 화친 조약이 맺어졌다. 그리고 청나라 군대
는 물러갔다.
그 이후 서흔남은 죽을 때까지 인조임금에게서 받은 곤룡포를 지극 정성으로 보
존했다. 그리고 죽을 때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평생 동안 내 몸처럼 아
껴왔던 곤룡포를 나와 함께 묻어주어라.”그의 유언에 따라 서흔남의 가족들은 그
와 함께 곤룡포를 중부면 검복리 서남쪽 병풍산에 묻었다. 나라에서는 서흔남의 공
을 높이 평가했다. 그래서 하찮은 천민임에도 불구하고 가의대부 정2품 동지 중추
부사 라는 파격적인 벼슬을 내렸다. 후세에 말을 탄 벼슬아치들이 서흔남의 무덤
앞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다고 한다. 이는 서흔남과 더불어 왕의 곤룡
포가 함께 묻혀있기 때문이다.
연재 2회
1779년 정조의 능행과 남한산성
김문식(단국대 사학과)
2. 능행의 경과
1) 행사 준비
1779년(정조 3) 7월 6일, 정조는 여주에 있는 효종의 곻겓을 방문하여 제사를 올
2012년 2월
16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리겠다고 밝혔다.
올해는 바로 기해년이다. 괋法을 따라 곻겓에 가서 展拜를 해야 하지만,
초봄에는 민간의 양식이 떨어질까 염려되어 결행하지 못했다. 이제 농사일
이 거의 실마리가 잡혔고 길도 멀기 때문에, 草記를 기다려 하교한다면 군색
한 점이 많을 것이다. 이미 대신들에게 물어보았으므로, 여주 곻겓에 직접
제사한 뒤 英겓에 나아가 展謁하는 날짜를 다음달 초순 중에 택하여 올려라.
여기서‘기해년’이란 효종이 승하한 1659년을 말하므로, 1779년은 효종이 승하
한지 2周甲, 120년이 되는 해가 되었다. 그리고 국왕이 영릉을 방문했던 것은 1730
년(영조 6)이 마지막이었으므로, 50년 만에 거행되는 행사이기도 했다. 이 날, 정조
는 능행은 8월 3일에 출발하고, 숙박은 남한산성, 이천, 여주에서 하며, 국왕의 호
위는 훈련도감과 어영청이 담당하고, 도성의 방위는 금위영과 총융청이 담당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렇게 되면 중앙의 5군영 가운데 수어청이 빠지게 되는데, 정조
가 방문하는 남한산성이 수어청 관할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정조는 도로를 정비하
거나 船艙을 조성할 때, 民弊가 발생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라고 명령했다.
7월 8일, 정조는 조정 대신과 수어사(徐命膺), 경기감사(鄭昌聖), 훈련대장(洪國
榮)이 합석한 자리에서 보다 구체적인 사항들을 결정했다. 먼저 곐걛하여 능행에
참여하기 어려운 병조판서 權?를 鄭尙淳으로 교체하고, 현지의 호위군 및 布城의
숫자, 각 관서의 支供을 줄여 경비를 절감하도록 했다. 또한 1천여 명의 군사가 참
여하는 남한산성의 군사훈련[城操] 장소를 곚兵館의 서남쪽으로 이동시키고 국왕
은 西將臺에서 이를 지켜보며, 남한산성의 밖에서는 모든 신하가 말을 타고 이동하
도록 했다. 그리고 남한산성의 別試에는 광주, 여주, 이천에 거주하는 사람에게만
응시 자격을 주고, 武科의 初試는 능행 전(7월 17일)에 수어사가 주관하여 미리 실
시하도록 했다. 또한 摠戎使만 능행에 참여하고 총융청 소속 군사들은 창경궁 弘化
門밖에서 陣을 짜고 괨都하며, 국왕의 호위부대로 前廂軍은 훈련도감의 步軍8哨
馬軍4哨, 後廂軍은 어영청의 步軍8哨騎士3番, 挾輦軍는 600명, 前排20쌍으로
할 것을 결정했다. 그리고 국왕의 행렬을 수행할 禁軍의 숫자는 5番으로 결정했다.
7월 13일에는 남한산성 군사 훈련에 대한 의논이 주로 이뤄졌다. 이 논의는 수어
2012년 2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17
사 서명응이 주도했는데, 국왕이 閱武를 하기 전에 私操를 실시하기 위해 미리 標
信을 받았고, 군사훈련은 晝操와 夜操를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후 정조는 大駕
가 강을 건널 때의 호위 상황을 결정했고, 御駕가 남한산성에 도착했을 때 溫王廟
와 顯節祠에 官員을 파견하여 제사를 지내기로 했다.
준비의 마지막 단계는 행차가 출발한 이후 서울의 방어 상황에 대한 점검이었다.
8월 2일, 정조는 행차가 떠난 후 창덕궁의 敦化門과 갏虎門, 창경궁의 通化門은 규
정대로 개폐하되 창경궁의 弘化門은 즉시 닫으며, 서울에 남는 금위영은 露宿을 하
되 날이 밝은 뒤에 結陣하고 날이 저문 뒤에 陣을 本營으로 옮기도록 했다. 또한 守
宮大將은 藥房의 分提調가 겸하도록 결정했다. (다음 호에 계속)
*2012년 02월 남사모 강의 자료*
압록강에서 요양(遼陽)까지 400리 길
(이 글은 논문「연행로(燕궋걟) 중의 동팔참(東八站) 고」에서 절록한 것입니다)
이승수(한양대 국문학과)
대원울르스 운영시스템의 동맥은 역참제도였다. 역참은 내륙교통만의 군사 및
물류의 이동 경로였다. 원 세조 쿠빌라이는 군사 행정의 목적을 넘어 상업 활동의
촉진을 위해 교통체계를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몽골제국은 정복지에 여섯 가지를
요구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역참의 설치였다. 이 원칙은 고려에도 적용되었다. 대
몽항쟁 직후인 원종 즉위년(1259)에 역참 설치를 요구했고, 1262년에 여섯 가지 일
의 시행을 강력 촉구했으며, 1279년에는 번윤을 보내 역참을 점검하였다. 이러한
2012년 2월
18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사실로 미루어보아 1270년 즈음에는 압록강에서 개경으로 이어지는 역참은 물론,
고려 내의 역참과 연결되는 요동 지역의 역참이 마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에서 (驛)站이라는 단어는 元宗代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 이전까지
는 역참에 상응하는 제도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현재 알려져 있는 역참제도는 시행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한반도와 북경을 잇는 문명로와 이 길의 운영 체제
인 역참은 원나라의 등장을 배경으로 나타난다.
세종 임금 재위 시절(1418~1450) 훈민정음 편찬과 관련하여 집현전의 申叔舟와
成三問은 13차례나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그중 돌아오는 길 솔참[松站]을 지나며
신숙주가 지어 성삼문에게 보여준 시가 있어 눈길을 끈다.
시종일관 가까운 이 세상에 몇이런가 終始情親世幾多
자네와의 사귐만이 핏줄처럼 가깝노라 與君交結獨莩5⃞
더구나 만 리 길에 서로 마음 따르노니 況今萬里相隨意
말 나란히 논심하는 솔참의 도롱이라 뗋뵈걩心松站蓑
태어난 해도 비슷하고 관력도 함께 했다. 똑같이 세종의 지우를 입어 집현전에
들어갔는데, 만 리 길을 함께 오가며 聖旨를 받들었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이라 몸은 지쳐 있는데 마침 비가 내렸다. 도롱이(와 패랭이) 차림에 비를 맞으며
말 머리를 나란히 한 두 사람은 묘한 일체감을 느꼈고, 신숙주를 그 마음을 시로 지
어 보여준 것이다. 성삼문도 다른 마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형제보다 가까
웠던 두 사람은 癸酉靖難(1453)을 기점으로 정치행로는 물론 생사가 갈리고 만다.
역사의 옛 자취가 모두 퇴락하여 사라진 낯선 솔참에서 득의시절 신숙주와 성삼문
이 등장하는 한 폭의 친근한 조선산수화를 발견하는 것은 이채로운 체험이다.
1384년 정도전은 남경 사행 길에 두관참에서 묵으며 아래 시를 지었는데, 이것이
우리 문헌 최초의 기록이다.
북풍은 쉬이이익 마른 가지에 우짖는데 朔風淅瀝吼枯枝
말은 곤해 소리 없고 객은 겨우 누웠구나 馬困無聲客臥遲
내일은 또 요동 발해 먼 길을 떠나가니 明日又從괞海去
2012년 2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19
어드메 역정에서 새벽밥을 지으려나 驛亭何處是晨炊
당시 명나라의 수도는 남경이었고, 요동 지역에는 겗元세력이 남아있었다. 남경
을 가기 위해서는 여덟 참을 지나 괞陽에 왔다가, 다시 鞍山·海州·蓋州·겖州·
갏州를 거쳐 곂順에서 배를 타고 산동반도의 登州에서 하선하여, 육로와 수로를 번
갈아 이용해야만 했다. 행정도 훨씬 멀고 어려울뿐더러, 고려에 대한 명나라의 압
력이 갈수록 높아져 외교 업무도 지난했던 시절이다. 사행 시기는 한겨울이었고,
여덟 참을 지나오느라 말은 지쳐 소리 없이 자고 자신은 늦게 겨우 자리에 누웠다.
누워 생각하니 뭍길로 바닷길로 또 뭍길로, 새벽밥을 먹고 길을 떠나야 하는 노정
이 아득하다. 두관참이 있던 탕하수고 얼음 위를 부는 바람은 아직껏 600여 년 전
정도전의 번민과 고뇌를 들려준다. 우리가 이 자리를 기억하고 찾아가는 이유 중
하나이다.
始山祭祝文
정 재 열 (문화예술분과장)
유세차 단군기원 사천삼백사십오년 임진 정월 초이레(維歲次檀君紀元四千三百
四十五年壬굪正月初七日),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의 회장 전보삼은 <남사모>
회원일동과 더불어 南漢山城청량산에 올라 정성을 모아 마련한 酒果脯를 陳設하
고 삼가 산신령님께 告하나이다.
지난해에는 <남사모> 창립 15주년을 맞이하여 산신령님의 지극한 보살핌 아래
안전한 산행과 역사탐방은 물론, <남사모 15년사>를 비롯한 여러 가지 뜻있는 사업
과 행사를 무사히 성공적으로 마무리 할 수 있었나이다.
2012년 2월
20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이에 대하여 저희는 천번만번 感之德之하면서 금년 임진년 한 해도 萬事亨通할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이 소원하오니, 부디 산신령님의 神通力을 저희 <남사모>에 내
려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하나이다.
먼저 <남사모> 회원 각 가정에 건강과 활력이 충만하고 화목의 꽃이 피어나게 하
시어 모든 회원들이 즐거운 마음과 적극적인 자세로 <남사모>활동에 참여할 수 있
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소원하나이다.
다음은 安全山궋을 기원하나이다.
저희 <남사모> 회원은 물론이거니와 南漢山城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 안전한 산
행을 할 수 있도록 산신령님께서 길을 밝혀 주시기를 소원하나이다.
마지막으로 저희 <남사모>가 하고자 하는 사업이 괥水와 같이 막힘이 없고 마른
장작에 불꽃이 일어나듯 왕성하며, 승천하는 괟이 如意珠를 얻은 것과 같이 萬事如
意형통할 수 있도록 산신령님의 특별한 配慮와 加護가 있기를 소원하나이다.
통상적인 활동을 제외하고 금년에 추진하는 주요사업은, <남사모>가『사단법인』
으로 거듭나는 일이 그 첫 번째요‘, 南漢山城世界文化遺産登載推進事業’에 있어
서 <남사모>가 중추적인 역할의 한 축을 담당하여 그 맡은 바가 순조롭게 진행되게
하는 일이 그 둘째임을 아뢰나이다.
南漢山城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산신령님이시여!
저희가 마련한 정성을 嘉尙히 여기시고 欣快히 歆饗하시어 저희가 아뢴 소원이
모두 성취되고 旭日昇天하는 <남사모>의 기세가 더욱 왕성하게 해 주소서.
다시 잔을 올리나이다. 尙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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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21
2012년 2월
22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봄이 오는 소리를 들으며
박 용 규
매달 같이 오르던 손종구씨가 전날 사정이 있음을 알려와 오늘은 혼자 오른다.
오늘은 남사모 2012년 2월 정기답사일. 남한산성 유원지에서 남문을 향해 가는 길
이다. 시간을 보니 여유가 있어 애초부터 차분하게 즐기면서 올라가리라 마음 먹는
다. 가능하면 눈에 보이는 것들 하고 대화라도 나누고 싶을 정도로 느긋하다. 아직
푸르름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고 삭
풍을 온몸으로 이겨낸 나목이 봄을 기다린다. 남문관에 도착하니 주인도 안 보이
고 썰렁하다. 많이 안 오실 것 같은 예감이 순간 스친다. 곧 공석봉 고문님 문제길
고문님 신 청 전 회장님이 보인다. 예감과는 달리 모두 23분이 이번 달 모임에 오셨
다. 신영수 의원님은 때가 때인 만큼 오셨다가 인사만 나누시고 돌아가신다. 모처
럼 경기도 박물관장 조유전 박사님이 들어오신다. 이어 전보삼 회장님이 오시고 지
난달 회보를 모두들 관심 있게 보신다. 날씨가 제법 싸늘해서 방안에서 인사를 나
누기로 한다. 전보삼 회장님께서 5월에 만해기념관에서 매화전이 있다는 안내 말
씀을 하고 답사를 시작했다.
오늘은 북문을 거쳐 옥정사터로, 동장대 그리고 최근 보수공사를 끝낸 현절사를
돌아보는 코스다. 드디어 북문을 향해서 출발! 산성 로타리 공사가 한창이다. 지금
위치에서 밑으로 10m 정도 이동시키는 공사가 진행 중이라는 이종화 부회장의 설
명을 듣는다. 북문을 옆을 올라 군포터를 지날 즈음 오던 길을 뒤돌아서 전보삼 회
장께서 모두를 세우더니 수어장대 쪽을 바라보라 하신다. 소나무들 틈으로 수어장
대의 모습이 들어온다. 전 회장께서 모두에게 산성의 랜드마크격인 수어장대가 멀
리서도 더 뚜렷이 드러나도록 주위의 소나무들을 제거해야 하는가에 대해 의견을
물으신다. 분분한 의견들 속에서 조유전 박사님께서는 어느 쪽으로 결정하든 논란
2012년 3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23
을 부를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으신다. 배윤옥, 신창규 회원님은 회원들 동정을 카
메라에 담느라 분주 하다.
이윽고 방향을 틀어 옥정사터로 들어섰다. 터가 삼태기형으로 양지가 바르다. 흔
적이 어슴푸레한 우물터와 한쪽 구석으로 쳐박혀진 맷돌이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
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 산성 내 병자호란 전부터 있었던 사찰은 망월사 옥정사 뿐
이라는 전보삼 회장님의 설명이다. 노산 이은상선생이 자신의 가묘를 위해 매입했
다는 터에 대한 설명도 이어졌다. 동장대쪽으로 오르다 현절사 가는 길로 접어들었
다. 도착하니 보수는 말끔히 완료하였으나 자물쇠가 채워져 아쉽게도 안으로는 들
어갈 수 없었다. 아쉬움을 달래려 조유전 박사님으로부터 병자호란 당시의 척화파
와 주화파의 대립상황에 대해서 설명을 청해 듣는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호란당시의 아쉬운 면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러나‘역사는
가정이 없다’라는 명언을 남기시고 조선왕조의 단절을 지켜낸 최명길 대감의 사당
을 지어야 마땅한 것 아니냐는 말씀도 덧붙이신다. 마침 오늘 참석하신 회원 중에
정온의 17세 후손 되는 정완길 회원님이 선조에 대해 설명이 있으셨다. 모처럼 현
절사 계단에서 단체사진 촬영을 끝으로 삼학사를 모신 현절사를 떠난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김상헌 대감의 시가 현절사 주위를 휘감는 것 같다.
오전 답사의 마지막 코스는 지수당이다. 한켠에 세워져 있는 서흔남의 묘비를 보
고 오전 답사를 마쳤다. 오늘 준비된 음식은 오리 볶음탕이다. 막걸리 한 잔을 곁들
여 먹는 점심식사는 언제나 말 그대로 꿀맛이다. 조유전 박사님의 건배 제의로 모
두들‘남사모를 위하여!’식사 후에는 이승수 박사의 역사 강좌가 이어졌다. 원나
라 때 신속한 보급을 위한 역참제도를 운영하였는데 요동까지 8개의 역참 이른바
동팔참에 대한 설명이 오늘 주된 강의내용 이다. 이것이 이른바 조선시대 때 사행
로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사진을 보면서 더 실감나게 들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
지만 그래도 강의는 마무리 되었고 이번 달 정기모임도 서서히 막을 내린다. 특히
나 여성회원들의 참석이 비교적 적어서 아쉬움을 남겼지만 다음 달 외부 답사 때
맛보게 될 특별식을 기대하면서 모임을 마무리 한다.
우리 남사모는 함께하는 것이 더 따뜻하다는 것을 알기에 다음 달에도 많이 뵐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남사모는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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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이달의 산성인물 : 정뇌경
정뇌경(鄭걳卿) 1608년(선조 41)∼1639년(인조 17)
조선 후기의 문신·지사.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진백(震伯), 호는 운계(雲溪).
을사삼간(乙巳三奸) 정순붕(鄭順朋)의 현손으로, 생원 정환(鄭晥)의 아들이며, 어머
니는 증병조참판 서주(徐澍)의 딸이다. 조부 정순붕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역적으
로 몰렸다. 2살 때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다 이모부 기평군 유백증의
도움으로 수학하였다. 총명함이 뛰어나고 기개와 도량이 출중해 또래 중 누구도 상
대가 되지 않았으며 20세가 못되어 사림의 추앙을 받았고 성품은 충효롭고 강개하
며 절조가 있었다. 1630년(인조 8)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이 되
고, 그 뒤 공조·예조·병조의 좌랑을 거쳐 부수찬·수찬 및 지평·정언 등의 언관
을 역임하였다. 인조 7년(1629)파평 윤씨를 배필로 맞아 혼인하고 아들 유악(維岳)
을 얻었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왕이 남한산성에 피난 갈 때 교리로 호종(扈從)하였다. 정
뇌경은 한두 해 사이로 과거 급제한 두 살 위 윤집, 한 살 아래인 오달제와 같은 언
관으로 친하게 지내며 배청친명 사고를 공유하게 된다. 주화파와 척화파의 논쟁 시
척화파의 일원으로 김상헌 정온 홍익한 등과 함께 화의할 수 없다고 강력한 논쟁을
펼치기도 했다. 강화도가 함락되고 봉림대군과 왕실의 직속들이 인질로 잡히자 대
세는 주화파가 쥐게 된다. 그 이듬해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한 뒤 소현세자
(昭顯世子)가 볼모로 청나라 심양(瀋陽)에 잡혀가게 되자 자청하여 수행하였으며,
1639년에 필선으로 승진하여 심양에서 세자를 보위하였다.
당시 청나라에는 1618년(광해군 10) 건주위(建州衛)정벌 때 도원수 강홍립(姜弘
立)을 따라갔다가 포로가 된 정명수(鄭命壽)·김돌(갏突) 등이 우리나라 사정을 청
나라에 알려줌으로써 청나라 황제의 신임을 얻고 양국 간의 통역을 담당하면서 임
금을 모독하고 조신(朝臣)을 업신여기는 한편, 관직이나 뇌물을 요구하는 등 갖은
2012년 3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25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그는 이들을 제거하고자 기회를 엿보던 중 마침 이들이 우리
나라에서 청나라에 보내는 세폐(歲幣)를 도둑질하자, 이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청
나라 사람을 시켜 그 죄상을 고발하게 하고 그들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미 증거를 없앤 역적 정명수의 계략에 전세가 뒤집혀 정뇌경이 용골대와 정명수를
모함한 것으로 되었다. 당시 청은 재상의 말을 믿었지 하층 관료인 정뇌경의 말을
믿지 않았다. 정뇌경과 소원한 관계인 재상 박노가 정뇌경을 옳게 증언하지 않았
다. 조정에서도 정공을 구원하려 많은 노력을 했으나 번번이 쥐새끼 잡으려다 장독
을 깰 수 있다는 논리에 막혀 이루지 못했는데 당시 청이란 나라에 굴복한 인조의
작아진 심장을 보는 듯 해 씁쓸하다. 정명수를 제거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에서 증
거인멸을 당한 정공이 모함이 아니라고 여러 사람이 다 알 것이라고 하면 죽임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는데 어차피 뒤집힐 일 아니라면 스스로 죄를 뒤집어쓰는 것이
도리다 라는 어진 판단을 한 것이다. 소현세자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릴 즘 독약을
마시고 죽고자 했는데 독약의 양이 적어 죽지 못했다. 그해 4월 강효원과 함께 청
나라 관헌에 잡혀 처형당하였는데(인조 17년. 1639) 4월 18일이었다. 그때 나이 32
세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鳳林大君: 효종)이 자기 옷을 벗어 염(斂)을 하였다 한
다. 시신을 수습해 그해 8월 경기 광주 경안 왕능 예정지로 출입이 금지되던 능지
언덕에 하사(下賜)하였다. 성종의 태가 묻힌 태봉이 바라다 보이는 곳이다.
처음에 도승지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뒤에 찬성이 가
증(加贈)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3월 탐방 자료
정 충 묘
정충묘는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대쌍령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국도 3호선 우측에
홍살문이 서 있다. 돌계단으로 이어진 산기슭에 정면 1칸, 측면 1칸의 작은 사당이
다. 광주문화유산 유형문화재 제 1호로 지정되었다. 정충묘는 병자호란 쌍령전투에
2012년 3월
26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서 순국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허완장군,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민영장군, 공청도
병마절도사 이의배 장군, 경상좌도 안동영장 선세강 장군 등 4명의 위패를 봉안해
제향하고 있다. 정충(精忠)이란 정충보국에서 연유한 것으로 사사로운 감정이 없는
순수하고 한결같은 국가에 대한 충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병자호란 후 시신을 수습하여 제사를 지낸 쌍령의 전례(典禮)는 사제(뚴祭)였다.
사제는 국왕이 나라를 위하고 임금을 위하여 죽은 신하에게 특별히 제사를 지내주
던 일로 당시에는 대단히 영광스러운 행사였다. 공신이나 전쟁에서 전사한 신하들
을 위로하기 위해 지내주던 제사인 것이다. 쌍령의 경우 억울하게 죽은 혼령을 위
로하기 위한 위령제로 치제(致祭)하는 때도 있었고, 가뭄이 심할 때는 기우제의 성
격을 띠고 지내기도 하였다. 전염병이 창궐하여 백성들이 괴로움을 당할 때 지내는
여제(견祭)를 하기도 했다. 예전에는 한이 맺혀 죽은 귀신은 여귀가 되어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을 떠도는 데, 죽은 영혼이 제사를 받지 못하면 원한이 사무쳐서
인간 세상에 보복을 하거나 역병을 퍼뜨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조선 조정은 1637년 정월 초사흘 쌍령전투에서 처참하게 패한 수많은 장졸들이
희생된 것을 애처롭게 여기긴 했으나, 병자호란이 끝난 후에도 미처 전사자의 시신
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해 4월 초 예조에서 품신하여 사람들을 동
원, 비로소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하고 처음으로 쌍령에서 위령제를 지내게 하였다.
승정원 기록을 보면 영조가 여주 능행을 계획하면서 당시 영의정 심수홍이“쌍령은
병자란에 경상도 좌우병사와 근왕군이 함몰한 전장인바 전조에서도 역시 치제하였
으니 금번 그곳을 지나게 됨으로 전과같이 치제토록 하는 것이 어떠합니까?”진언
하자 영조가“상시 치제하도록 하고 이번 능행 때에도 역시 치제함이 옳다.”라고
되어있다.
정충묘의 향사는 병자호란 후 왕실에서 사제하여 받들도록 하였으며 조선 후기
에도 본도에서 제관을 차출하여 보내 지내도록 하였고 조선말까지 이어왔다. 흥선
대원군 집권 후 전국 향사는 국제를 철폐하고 서원 철폐령을 내림으로서 정충묘 향
사는 중단되었다. 정충묘 사우(祠宇)의 건립연대는 파악할 수 없다. 병자호란 후 국
왕이 사제할 때 처음에는 제단설치하고 그 후에는 비석을 세운 기록이 있다. 비석
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주민들의 구전은 흥선대원군 서원철폐령 때 정충묘가 훼
철(毁撤)되었고 최근에는 국도 3호선 확장공사 때 원래 위치에서 지금의 자리로 이
2012년 3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27
전되었다. 1958년 정충묘 중수 후 병자호란 당시 경상도 관찰사였던 심연의 위패
를 봉안하였던 적이 있다. 심연은 병자호란 당시 선발군으로 경상좌우 병사를 보내
고 뒤이어 본진을 인솔하고 오다가 여주에 이르러 쌍령에서 근왕군이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령으로 도망, 결국 호란이 끝난 후 겁을 먹고 군사를 돌려 조령으로
철수한 죄를 물어 귀양 간다. 이 이유로 위패 봉안을 취소하였다. 1970년 안동영장
선세강 장군 후손들의 간곡한 요청에 이해 선세강 장군의 위패를 정충묘의 봉안 치
제하게 되었다.
2003년부터 매년 정월 초사흘 11시, 광주문화원이 주관하는 관민합동 제향을 하
고 있으며 전설로 남은 낙화암 비극 또 비오는 날 진새골 골짜기에서 사람 우는 소
리가 들려 민심이 흉흉하였다고 한다.
(광주문화원 출간-정충묘지(精忠廟誌)중에서)
3월 탐방 자료
허난설헌 묘지를 가다
김진원 소설가가 말하는 `400여 년 전 그녀의 恨.
본명은 초희요, 호는 난설헌, 자는 경번, 강릉태생이다. 천재 여성 난설헌이 살았
던 400여 년 전 그녀 삶이 한(恨) 맺혔던 내면을 엿보기로 하자.
■하나. 정치적 배경
난설헌 나이 13살. 을해붕당(1575년)이 일어난다. 건천동 근처에 살던 이황, 조식
그리고 그 문하의 인재들, 난설헌의 오라비 허봉, 형부 우성전과 유성룡 등이 난설
헌 아버지 허엽을 영수로 추대하여 동인이라 자처했다. 이에 맞서 서인은 이이와
성흔의 문하생들이 주축을 이뤘으며 정철 등이 서인의 영수로 박순을 추대했다. 이
과정에서 난설헌의 아버지 허엽이 파면을 거듭하게 된다. 아버지 허엽이 경상관찰
사직을 수행하다 죽음으로 돌아오고, 오라비 허봉이 서인 이이를 강력하게 비판하
2012년 3월
28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는 상소를 올리자, 선조는 즉각 함경도 갑산으로 귀양을 보낸다. 그녀의 정신적 지
주였던 두 사람의 불행은 시댁 고부간 갈등에서 의지력을 잃었고, 붕당정치는 그녀
한(恨)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둘. 사회적 배경
조선의 역사는 주자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유교사상이 주류를 이룬다. 삼존지도,
남존여비칠거지악, 재혼금지 등 여자들에게 굴욕적인 단어들이 조선 여인들의 삶
을 옥죄었다. 난설헌 시(詩) 중에 이를 비판하는 글귀가 많아 그를 페미니스트라 함
이다.또한 난설헌은 서출이기에 관료사회에 진입할 수 없었던 스승 이달과 몸종 달
래를 보며 자유와 평등이 억압된 세상 속 그녀는 불만을 시(詩)로 풀어냈다.
■셋. 정신적 사상
화담 서경덕. 화담은 불로불사(不걛不死)를 외치던 신선세계에 눈을 뜨고, 노장
사상의 대표적 논리인 도가사상에 깊게 빠지게 된다. 장자는 이를 절대자유와 절대
평등의 사상이라고 말한다. 이런 화담의 제자가 바로 허엽이었기에 그녀의 정신적
사상도 아버지에서 연유한다. 난설헌은 유교적 사고보다는 절대 자유와 절대 평등
을 강조하고 신선사상과 근접한 도가적 사고에 더 심취한다. 또한 그녀의 정신적 사
상 바탕엔 스승 이달이 있다. 삼당시인(三唐詩人) 중 한 사람인 이달은 서출이기에
시를 짓고 읊으며 세상을 떠돈 인물이다. 그녀는 태평광기(중국 설화집) 선편(仙編)
을 탐독하며 신선세계를 동경했다. 그녀는 여덟 살 쯤 광한루 백옥루 상량문을 지었
다. 이는 곧 신선사상과 도가사상의 묶음이다. 그녀는 신선사상과 도가사상을 실천
해 자유와 적자 서자, 빈자 부자, 여자 남자의 평등을 몸소 느끼고 싶었을 것이다.
■넷. 혼인제도의 급변
신사임당은 남귀여가혼(男歸겿家婚·친정에서 혼인 후 친정에서 삶) 풍습에 의
해 혼인했고 난설헌은 남귀여가혼은 유교적 남존여비 사상과 배치되고 남자가 주
눅든다하여 조식의 반친영제(처가에서 혼인하고 시댁에서 삶)로 혼인한다. 결국 그
녀는 삼일우귀(三日于歸·혼인 후 삼 일만에 시댁으로 감)하게 된다. 혼습의 변화
는 그녀 한(恨)의 또 다른 시작이다.
2012년 3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29
■다섯. 도가와 유가의 충돌
시어미니 송씨의 강력한 유교적 사고와 화담, 아버지로 이어지는 난설헌의 도가
사상이 부딪혔다. 임진란을 예언하는 시, 페미니스트 사상을 표출한 시, 선계를 동
경한 시 등은 유가 도가의 충돌에서 나온 고뇌의 산물이다. 허난설헌이 꿈꾸었던
도가적 이상은 현실에 파멸되고 스물일곱 젊은 나이, 이승에 한(恨)만 남긴 채 선계
로 올라간 뒤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
(2010년 12월 강원일보에 실린 글 중에서 절록)
3월 탐방 자료
최 항[崔恒, 1409~1474]
본관 삭령(朔寧). 자 정부(貞父). 호 태허정 (太虛亭)·동량(梁). 시호 문정(文靖).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으로 급제, 집현전 부수찬(副修撰)이
되어 정인지(鄭麟趾) 등과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참여했다. 1444년 집현전 교
리(校理)로서《오례의주(五禮儀注)를 찬진(撰進)했으며, 1445년 응교(應敎) 때《용비
어천가(龍飛御天歌)》창제에 참여했고, 《동국정운(東國正韻)》, 《훈민정음해례(訓民
正音解例)》, 《용비어천가보수(龍飛御天歌補修)》를 찬진했다. 1447년 문과중시(文
科重試)에 5등으로 합격하였고 집현전직제학 겸 세자우보덕에 임명되었다. 1450년
(문종 즉위) 선위사(宣慰使)로 명나라 사신을 맞았으며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로
서 춘추관동지사(春秋館同知事)를 겸임《, 세종실록)》편찬에 참여했다. 1451년 좌사
간대부(左司諫大夫)로서 수사관(修史官)을 겸임, 정인지 등과《고려사(高麗史)》를 개
찬했으며, 집현전 부제학(副提學) 때《통감훈의(通鑑訓義)》를 편찬한 공로로 가자
(加資)되었고, 이어《문종실록(文宗實걧)》편찬에 참여했다.
1453년(단종 1) 동부승지(同副承旨) 때 계유정난(癸酉靖갺)에 공을 세워 정난공신
(靖難功臣) 1등에 책록, 도승지가 되었다. 1454년 이조참판으로 영성군(寧城君)에
봉해지고 1455년(세조 1) 대사헌이 되어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458년 형조·공조 판서, 1460년 이조판서를 지내고, 1461년 양성지(梁誠之)의
2012년 3월
30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잠서(蠶書)》를 국역 간행하고《경국대전》편찬에 착수, 조선 초기의 법률제도를 집
대성했다.
1463년《동국통감(東國通鑑)》수찬(修撰)을 시작하고, 신숙주(申叔舟) 등과《어제
유장설(御製諭將說)》을 주해했다.
1464년《사서오경(四書五經)》에 구결(口訣)을 달았으며, 1467년 우의정·좌의정
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1469년(예종 1)《 경국대전》을 찬진했고, 이어《무정보감
(武定寶鑑)》을 수찬했다. 1470년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 1471년(성종2) 좌리
공신(佐理功臣) 1등에 녹선되고 춘추관감사(監事)로《세조실록(世祖實걧)》과《예종
실록(睿宗實걧)》의 편찬에 참여했다.
조선 초기의 훈구파(勳舊派)의 대학자로서 세조를 도와 문물제도 정비에 크게 공
헌했으며, 역사·언어 등의 분야에 정통하고 문장이 뛰어나 명나라에 보내는 사신
의 표전문(表箋文)은 거의 도맡아 썼다. 문집에《태허정집(太虛亭集)》,《 관음현상기
(觀音現相記)》등이 있다.
연재 3회
1779년 정조의 능행과 남한산성
김문식(단국대 사학과)
2) 본 행사
1779년 정조의 능행은 창덕궁에서 남한산성, 이천, 여주를 거쳐 창덕궁으로 되돌
아오는 7박 8일간의 일정이었다. 이하에서는 날짜별로 방문지와 현지에서의 행사
를 정리한다.
8월 3일, 행차가 창덕궁을 출발했다. 정조는 출발하기 전에 훈련대장(홍국영)을
불러 행군 중의 군율을 엄격히 단속할 것을 명령했다. 이 날의 경로는 창덕궁 인정
전→東關王廟→華陽亭→馬場→廣津(晝停所)→船艙所→괻木亭(迎接所)→남한산성
2012년 3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31
(남문)이었고, 정조의 복장은 戎服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율목정 영접소에서 수어
사 이하 營將들을 만난 이후 남한산성에 입성할 때까지 황금 장식이 달린 갑옷과
투구를 썼다. 남한산성 正堂에서 정조는 수어사, 광주부윤(宋煥億), 수어청 교련관
을 불러 남한산성과 광주부의 현황을 물었다.
8월 4일, 정조는 남한산성을 출발하여 이천행궁에 도착했다. 경로는 남한산성(동
문)→慶安驛(晝停所)→雙嶺川→慶安橋→이천 西峴→이천 행궁이었고, 정조의 복장
은 융복이었다. 이 날 정조는 국왕 행차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백성들이 길
가를 메운 것을 보고 놀랐으며, 이천 입구에서 儒賢(山林) 金겮궋을 보았다. 이 날
정조는 민심을 파악하기 위해 현지에 파견했던 史官(金勉柱)를 만나 보고를 받았
고, 행차로 인한 民弊가 크지 않음을 확인하고 안심했다.
8월 5일, 정조는 여주에 도착하여 두 영릉을 참배했는데, 경로는 이천 행궁→곻
겓→英겓→여주 행궁이었다. 정조의 복장은 융복이었는데, 왕릉을 참배할 때는 翊
善冠과 얡袍로 바꿔 입었다. 정조는 곻겓에서 왕릉과 비각, 정자각을 奉審한 후 酌
獻禮와 辭겓禮를 올렸고, 英겓에서는 봉심과 사릉례만 거행했다. 국왕이 여주에 행
차한 것은 100년 동안 계유년(1693, 숙종 19), 경술년(1730, 영조 6)을 이어 세 번
째였다. 정조는 여주 행궁의 淸心걹에 앉아 효종과 송시열을 추모하고, 信砲를 쏘
아 각 營의 旗를 점검했다.
8월 6일, 정조는 여주 행궁을 출발하여 이천 행궁까지 이동했다. 여주 행궁에서
정조는 儒賢인 호조참판 宋德相과 부사직 金겮궋을 만났다. 이 때 김양행은 나이는
65세였는데, 정조는 자신과 함께 서울로 가자고 권했다. 정조는 대신들과 합석한
자리에서 사관(김면주)이 감찰한 내용을 보고하게 했고, 여주 행궁와 이천 행궁에
서 백성들을 만나 민폐를 물은 다음 백성들에게 경제적 혜택을 내리는 諭書를 발표
했다.
8월 7일, 정조는 이천 행궁을 출발하여 남한산성으로 이동했다. 경로는 慶安驛
(晝停所)→攀川小峴→남한산성(左翼門)이었고, 남한산성에 입성할 때 정조는 황금
장식이 달린 갑옷으로 갈아입었다. 이 날 정조는 남한산성에서 백성들을 만나 민폐
를 물었고, 행군 중에 군율을 어긴 사람을 처벌했다. 그리고 수어사와 광주부윤을
만나 남한산성과 광주부의 현황을 상세히 물었다.
8월 8일, 정조는 남한산성 곟兵館에서 別試를 보았다. 시험장에서 정조와 근신들
2012년 3월
32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은 모두 융복을 입고 唱榜괋를 거행했다. 같은 장소에서 정조는 僧軍들이 方陣, 圓
陣을 이루는 것을 참관했고, 紅夷砲의 유제로 알려진 埋火의 발사 시험을 했다.
8월 9일, 정조는 남한산성 서장대에 올라 城操와 夜操를 참관했다. 이 날 정조는
황금 장식의 갑옷을 입고 훈련에 임했으며, 평상시 성벽을 잘 관리하고 군사 훈련
을 거르지 않는 것이 유사시를 대비하기 위한 것임을 강조했다. 정조는 남한산성의
西城, 南城, 겗城을 돌아보며 병자호란 당시를 회고했고, 正堂에서 백성들을 만나
債錢을 탕감하는 특별 조치를 내렸다. 밤이 되자 정조는 다시 서장대에 올라 야조
를 참관했다. 남한산성의 城操는 15년 만에 거행되는 행사였다.
8월 10일, 정조는 남한산성을 출발하여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경로는 남한산성
(남문)→廣津(晝停所)→船廠所→살곶이[箭갅]→仁明園→興仁之門→돈화문이었고,
정조는 융복을 입었다가 인명원을 참배할 때 翼善冠에 얡袍로 갈아입었다. 아침에
정조는 남한산성 연병관에 가서 행차를 수행한 군사들에게 음식을 하사했고[캚饋],
살곶이 앞길에서 11세의 어린아이가 擊錚하는 것을 보았다.
원명원에 참배한 후 큰 길이 墓穴과 가깝다고 400년이나 뚫려있던 길을 막으려
한 좌의정(徐命善)을 나무랐고, 창덕궁에 도착한 후 계엄을 해제하여 진을 치고 있
던 군대를 해산했다.
다음호에 계속
2012년 3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33
2012년 4월
모임스케치
이른 봄날 역사 나들이
정 완 길
3월의 마지막 일요일(25일), 날씨가 쌀쌀하다는 예보로 아침 마천동 산행이 부담
스러웠으나 막상 최종섭 부회장과 산에 오르니 생각보다 춥진 않았다. 산성 종로
로터리가 공사로 인해 크게 파헤쳐져 예전의 모습이 아닌 산성 광장의 형상을 드러
내기 시작하였다. 오늘은 예정대로 산성밖 광주 인근의 역사 인물과 현장을 찾아
나서는 남.사.모 역사 나들이가 있는 날이다.
남문관 옆 빈 공터에서 서로 인사를 나누고, 두 분 고문님을 비롯한 27명의 남.
사.모 회원들이 예정대로 오늘의 첫 탐방지인 충정공 정뇌경의 묘가 있는 광주시
오포읍을 찾아 나섰다. 미니버스에 함께 탄 회원들은 오랜만의 산성밖 나들이라 들
뜬 채 회보에 적힌 탐방자료를 보면서 목청 좋은 박용규 회원의 낭독을 들었다. 이
달의 산성인물이기도한 정뇌경은 소현세자와 함께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 처형을
당했는데,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옷을 벗어 염을 하였다고 하고, 그 후 경기 광주
경안 왕능 예정지인 이곳에 묻혔다. 바로 성종의 태가 묻힌 태봉을 바라다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오늘의 두 번째 탐방지로 광주시 초월읍 대쌍령 고개에 있는 정충묘는 광주문화
유산 유형문화재 제 1 호로써 병자호란 쌍령 전투에서 순국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허완장군을 비롯한 4명 장군들의 위패를 봉안하여 제향하는 작은 사당이다. 3번
국도변이라 다소 시끄럽고 관리가 부실한 것 같아 방금 다녀온 정뇌경의 묘와는 대
비되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쌍령 전투에서 패한 수천의 장졸들이 처참하게 희생되
어 남한산성 행궁에 피신한 인조의 마지막 지원군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 중부고속도로변에 있는 허난설헌의 묘를 찾아가는 도중
쌍령 전투에서 패해 오갈 데 없는 부녀자들이 한 떨기 꽃처럼 흩어졌다는 경안천의
34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낙화암 전설’은 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병자호란의 슬픈 이야기였다. 이어서 4
백 년 전 자신의 시집이 중국 사신에 의해 중국에서 발간될 정도의 문장가였던 허
난설헌의 묘역을 찾았다. 묘역 입구에 있는‘난설헌 시비’와 허난설헌의 묘와 시댁
식구들의 묘역들이 현대식으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 자신이 낳은 두 명의 아기 무
덤을 곁에 두고 남편과는 다소 떨어져 있어 묘역을 찾는 이들로 하여금 살아 생 전
자신의 재주를 마음 것 펼쳐보지 못했던 불행한 한 여인의 아픔을 지금도 보고 있
는 것 같아 마음이 안되었다. 묘역에서 바라다본 중부고속도로상의 차들은 무심히
갈 길을 가고 있었다.
예정보다 다소 늦은 시간에 김진원 작가의 소개로 퇴촌에 소재한 매운탕집에 도
착하였다.‘ 엄지 매운탕’이라는 허술한 간판을 하고 있었지만 우리 일행을 맞는 식
당 분위기가 만만치 않았다. 둘러앉은 식탁엔 잡고기매운탕(잡탕), 메기메운탕(메
기탕)이 순서대로 끓기 시작하자, 매운탕 먹으랴 오늘의 나들이 얘길 나누랴 열띤
분위기속에 남사모 회원들은 막걸리 잔을 앞에 두고 오늘의 역사 나들이 피로를 풀
고 있었다.
식사 후 우리 일행을 실은 역사탐방 미니버스가 마지막으로 찾은 최항의 묘역은,
광주 팔당호수를 지나 경안I.C 방향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세종 때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던 최항은 조선 초기 훈구파 대학자로써 칭송은 받았으나 세속적
인 부잣집에 아들딸들을 출가시켜 재물에 관심이 많았다는 세평이 남아있다고 한
다. 묘역에 새로이 중수한 비석이 눈에 띈다.
산성으로 돌아오는 미니버스 안에서 졸리는 눈을 감고 생각해 보았다“. 병자호란
때 대쌍령 전투에서 실패하지 않았으면 인조대왕의 굴욕적인 항복은 없었을까?”
이달의 산성 인물
소현세자(1612-1645년)
인조의 맏아들. 1637년 병자호란 당시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이 있자 자청하여 봉
림대군 및 척화파 대신들과 함께 심양에 인질로 잡혀 갔다. 그는 단순한 인질이 아
2012년 4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35
닌 외교관의 소임도 맡아 청이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하면 담판을 짓거나 막기도
했다. 때문에 청은 조선과의 문제를 그와 해결 하려 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조선의
왕권이 둘로 나누어지는 양상을 가져왔다. 1645년 그가 귀국 했을 때 인조는 철저
한 친청주의자로 돌아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청에서 가져온 서양 문물조차도 수
용하지 않는 용렬한 모습을 보였다. 입국 후 두 달 뒤에 병으로 드러누웠고 3일 만
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인조의 주치의인 이형익이 3차례나 침을 놓았고 그 뒤
3일 만에 죽었는데 그의 온몸은 새까맣게 변해 있었고 뱃속에는 피가 쏟아졌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에 따라 그가 인조에 의해 살해됐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세자
빈도 이듬해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세 아들도 제주도로 귀양 가 두 명은 풍토병에
걸려 죽었다.
봉림대군
그는 청나라에서 형 소현세자와 함께 지내며 그를 적극 보호 하였으며, 청나라가
산해관을 공격할 때 소현세자의 동행을 강요하자 이를 극렬 반대하고 자신이 대신
가게 해 달라고 고집 하여 청의 요구를 막았다. 8여 년의 볼모생활 동안 많은 고통
과 고생을 겪으면서 반청사상을 정립시킨 그는 1645년 먼저 귀국한 소현세자가 죽
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그해 9월 세자에 책봉되고, 1649년 5월 인조가 죽자 31
세의 나이로 조선 제17대 왕으로 등극했다.
효종
(조선 제17대왕 1619-1659년.재위 : (1649-1659년 5월. 41세를 일기.)
소현세자와 함께 오랫동안 볼모 생활을 하며 반청 감정을 강하게 키웠던 효종은
왕으로 등극하자 곧 친청세력을 몰아내고 척화론자들을 중용하여 북벌계획을 강력
하게 추진하였다. 이같은 계획은 끝내 실행에는 옮기지 못했지만 그 덕택으로 국력
이 강해져서 사회 안정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게 된다.
제1차 나선 정벌 : 1654년 6월 청은 조선 조총군사를 뽑아 영고 탑에 보내 줄 것
2012년 4월
36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을 요청했고 청나라 군사와 함께 나선 병력을 흑룡강 이북으로 후퇴시켰다.
제2차 나선(러시아)정벌 : 1658년 청은 나선군이 10여척의 배에 군사를 싣고 당
당한 기세로 다가왔는데 청군은 겁을 먹고 감히 그들에게 대적할 생각을 하지 못했
다. 그러나 조선군이 화력으로 적선을 불태우자 나선군은 흩어졌고 이후 흑룡강 부
근에서 활동하던 나선군은 거의 섬멸됐다. 두 번의 나선 정벌은 조선군의 사기를
한껏 높여 이후에도 나선정벌을 핑계로 조선은 남한산성을 정비하고 군비를 확충
하여 북벌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또한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을 훈련도감에 수
용하여 조총, 화포 등의 신무기를 개량, 보충하게 하고 필요한 화약 생산을 위해 염
초 생산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효종은 북벌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659년. 5월 41
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효종이 확립한 군사력은 조선 사회의 안정을 위한 기
반이 되었다
연재 4회
1779년 정조의 능행과 남한산성
김문식(단국대 사학과)
3) 행사 마무리
창덕궁에 도착한 직후, 정조는 능행 중에 허물이 기록된 사람들을 용서하는 은전
을 시행하고, 동관왕묘와 남관왕묘에 將臣을 보내 제사를 올리게 했다. 이튿날 정
조는 능행을 수행한 관리 및 군사들을 포상했는데 그 내역은 다음과 같다.
정조는 능행에 참여한 軍官들을 포상했는데, 남한산성에서 국왕의 질문에 응대
를 잘한 山城敎鍊官延德雨를 특별히 邊將에 임명하도록 했다. 정조는 능행이 진행
되던 중에 행차를 수행한 군병들에게 別試射를 시행하여 발탁하라고 했는데, 능행
이 끝난 뒤에는 武臣가운데 직임이 있던 사람과 장교들도 별시사 응시자에 추가되
었다.
2012년 4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37
정조는 능행 지역에 있던 왕실 가족과 공신에 墓所에 관리를 파견하여 제사를 올
리게 했다. 여주에는 淑敬公主와 興平尉, 金昌集의 묘가 있었는데 지방관이 제사를
지내고, 광주에 있는 淑靜公主와 東平尉, 明安公主와 海昌尉의 묘에는 지방관이,
永昌大君, 明善公主, 明惠公主의 묘에는 내시가 제사를 올리게 했다.
정조는 또한 이 때의 행사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행차를 수행한 장군 및 군사
의 이름과 숫자, 연로의 사실 등을 갖추어 기록한『陪從걧』과 남한산성의 故事를
분류한『南漢山城誌』를 작성해 올리라고 명령했다. 이를 담당한 관리는 수어사 서
명응이었다. 정조의 능행은 기념 비석을 세우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8월 24일,
정조는 서명응을 만난 자리에서 이 일을 의논했다.
이번 남한산성에 행행할 때에 글을 남기려고 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詩文을 쓰
는 것은 긴요하지 않은 일인 것 같다. 내 생각에는 산성의 동문과 남문 밖에 비석을
세우고‘己亥駐챖’이라고 적는 것이 무방할 것 같은데 경(서명응)의 생각은 어떤
가? 서명응은 이에 동의했고, 남한산성의 東門과 南門밖에‘己亥駐챖’이란 御筆을
새긴 비석이 세워졌다.
(다음 호에 계속)
2012년 4월
38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남한산성에 오르니
정 약 용
성 머리에 해가 지고 하늘이 어두워지니
각영의 깃발 내리고 군악소리 멈췄는데
지척의 거리 행궁은 바다처럼 깊숙하고
어두운 연기 푸르른 산빛을 덮어 썼네
갑자기 옹기만한 커다란 불덩이들
동대의 주변에서 어지러이 날아 솟아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가고 날아오네
휘익휘익 흩어져 하늘이 온통 붉은 빛
혜성처럼 빨리 날아 남북이 어지럽네
나갈 적엔 붉은 용이 구슬 토해 거침없이 허공올 날아오르고
돌아올 땐 푸른 매가 날개 접고 쏜살같이 평야를 내리치누나
석가여래가 순식간 찰나경에 상서로운 빛을 쏘아 내니
아란보살이 좌우로 돌아보며 어리둥절하는 정경이로세
어떤 것은 온조궁의 궁터 앞에 떨어지고
어떤 것은 한의봉에 날아가서 불이 식네
화전 화포 나온 지 그리 멀지 않은데
그 제도는 당초에 서양에서 얻어 왔지
네덜란드 호준포가 유별나게 매섭다면
프랑스의 백자총은 더 한층 성능 좋네
효종께서 청나라 정벌하실 일념으로 기발한 무기 만들어
무력을 증강시키고 원나라 왕 구천처럼 복수할 날 고대하니
덕이 높은 후대 임금 그 사업을 이으셨네
2012년 4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39
온 성안 사람들은 장난삼아 구경할 뿐
성인께서 하시는 일 어리석어 알지 못해
2012년 4월
40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모임 스케치
제1 남옹성의 속살을 보면서
손 종 구
작은 가지 끝에 봉긋하게 솟아나던 새싹이 제법 연둣빛을 띄고 산자락을 물들이
는 4월 마지막 일요일 여느 때와 같이 은행동 산성 유원지에서 박용규 사무차장을
만나 남문 쪽으로 오른다.
남문관 뜰엔 벌써 몇 분이 와 계셨다. 오랜만에 뵙는 분들이라 반갑게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열시가 넘어서니 오실 분들이 얼추 다 오신 듯하여 자기소개를 하는
데 전보삼 회장님은 미국 출장 가셔서 못 오시고 또 많은 회원님들도 못 오셨다.
오늘 탐방 코스는 제1 남옹성이다. 2옹성, 3옹성은 발굴 복원이 되었고 이제 1옹
성을 발굴 복원하려고 주변 나무를 다 베어냈다.
제1옹성 치에서 내려다보고 다시 6암문을 통해 내려갔다.
가파른 봉수대까지 올라 설명을 듣고 인증 샷까지 찍고 아랫길을 돌아 검복리 윗
길로 해서 다시 제3 남옹성 옆 10암문 쪽으로 오르는 길은 성의 복쪽면 만큼 비탈
길이라 힘이 든다.
오르는 길에 묘가 있어 잠시 쉬어 가는데 앉아있는 강형옥 회원 옆에 더덕 순이
올라와있다. 더덕뿐만 아니다. 양지꽃. 조개나물. 제비꽃. 애기똥풀꽃, 아기붓꽃도
양지쪽 묘 옆에 피어있고 먼 산은 연초록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연초록빛 산자락
군데군데 햐얗게 핀 산벗나무 꽃이 운치를 더해 산 전체를 뒤 덮은 수채화를 보는
듯하다. 4월이다, 참 아름다운 4월이다.
11암문은 시구문이다.
그 문은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 때 많은 시신이 11암문을 통해 내다 버렸다고 한
다. 다시 남문관으로 돌아오는 길옆 언덕에 늦은 진달래가 힘없이 피어있다. 굵은
가지가 잘라지고 옆으로 새 가지가 나와 꽃을 피우고 있는 모습이 애처롭기 그지없
2012년 5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41
다.
그걸 카메라에 담느라 좀 늦게 남문관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는데 이번 점심 메뉴
가 색다르다. 묵은지에 닭을 넣어 찜을 한 묵은지 닭찜? 새로운 메뉴라 그런지 맛
이 좋다.
점심을 다 먹고 다음 달 남.사.모 16주년 행사를 논의하게 될 임원들은 기다리란
다. 세세한 행사 내용을 토의하고 결의하고 공식 4월 모임은 끝을 맺었다.
회의를 마치고 남[남은]사[사람들의] 모임이 시작되었다. 장소는 검단산 자락 얼
레지 군락지이다. 작은 승용차에 일곱 명이 타고 갔다. 초록빛 융단위에 보랏빛 꽃
들이 피어있다. 그러나 시기가 늦어 많이 졌다. 늦었지만 일 년에 한 번 피는 귀한
꽃 얼레지를 볼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노래하고 시를 읊고 연주를 하고 해가 저물
도록 남한산성을 떠나지 못하다 어둠이 들 즘 산성유원지로 걸어 내려왔다. 행복한
하루였다.
이달의 산성 인물
오달제(吳達濟)
1609년 광해군 1년-1637년 인조15년 졸. 자는 계휘. 호는 추담. 시호는 충렬. 본관은 해
주. 오윤해의 자.
19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634년(인조 12) 26세에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
제하였다. 전적·병조좌랑·시강원사서·정언·지평·수찬을 거쳐, 1636년에 부
교리가 되었다.
이때 후금의 세력이 날로 커져 칭제건원하고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조선을 무섭
게 위협하여왔다.이에 화친을 위하여 주화파 최명길(崔鳴吉) 등의 주장으로 사신을
교환하게 되자, 임금을 속이고 삼사(三司)의 공의(公議)를 위협, 제지하여 임의로
사신을 보낸 최명길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
산성에 들어가 청나라와의 화의를 끝까지 반대하였다. 인조가 청군에 항복하게 되
2012년 5월
42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자, 청나라측에서는 전쟁의 책임을 척화론자에게 돌려 이들을 찾아 처단할 것을 주
장하였다.이에 윤집(尹集) 홍익한(洪翼漢)과 더불어 자진하여 척화론자로 나서서
적진에 잡혀가 청나라로 끌려가게 되었다.
적장 용골대(龍骨大)는 그의 뜻을 꺾기 위하여 처자를 거느리고 청나라에 와 살
라고 회유하기도 하고, 또 협박하기도 하였으나 그는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불의
(不義)라고 하고 저들의 말을 좇으면 오랑캐가 되고 마는 것이라 하여 끝까지 항변
하였다.그는 마침내 심양성(瀋陽城) 서문 밖에서 윤집 ·홍익한(洪翼漢)과 함께 처
형을 당하였다. 세상에서는 이들을 삼학사라고 하여 그들의 절개와 충성을 높이 기
리게 되었다.
그는 묵매화(墨梅畵)에도 뛰어났는데, 어몽룡(魚夢龍)·조속(趙涑)·허목(許穆)의
화풍을 따르면서도 명나라의 묵매화풍 영향을 받아 구도가 조금은 번잡한 감을 준
다.그의 그림은《묵매도(墨梅圖)》2점이 전하며, 이러한 구도의 묵매화는 뒤의 조지
운(趙之耘)·홍수주(洪受疇)·박동진(朴東晉)·조희룡(趙熙龍)·이공우(李公愚) 등
의 묵매화에 영향을 주었다. 좌승지·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광주(廣州)의 현절사
顯節祠, 평택의 포의사우(褒義祠宇), 홍산(鴻山)의 창렬서원(彰烈書院), 영주의 장
암서원(壯巖書院), 고령의 운천서원(雲川書院)에 제향되었다.저서로는《충렬공유고
(忠烈公遺稿)》가 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연재 5회
1779년 정조의 능행과 남한산성
김문식(단국대 사학과)
3. 능행 중의 조치
1) 老걩 山林의 초빙-첫 째~
정조는 노론 山林두 사람을 초빙하기 위해 노력했다. 宋德相(1710~1783)과 金
亮궋(1715∼1779)이 그 주인공인데, 송덕상은 회덕 출신으로 宋時곥의 玄孫이었
2012년 5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43
고, 김양행은 여주 출신으로 金壽恒의 曾孫이었다. 그런데 송덕상은 정조 초년에
홍국영의 지원을 받아 조정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초빙 대상은 김양행
이었다.
정조는 능행 준비가 진행되던 중에 송덕상을 불러 이번에 김양행을 만나기를 희
망했다.
두 儒賢이 함께 陵所에 간다면 또한 훌륭한 일이다. 先正(송시열)의 시 중에‘어
느 곳에서 무릎을 꿇고 진달할지 모르겠네(겘知何處?陳辭)’라는 구절이 있는데, 올
해 경(송덕상)이 능소에 참배하게 되었으니, 이 일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송덕상은 이 자리에서 곻겓 제향에서 사용할 祝文에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말
것을 건의했고, 정조는 이를 흔쾌히 수용했다. 효종의 對明義理를 고려해서였다.
효종대왕께서는 일찍이‘忍痛含寃’네 글자를 잊은 적이 없어, 저 나라를 항상
‘오랑캐 나라[걞國]’라 칭하셨습니다. 그런데 本겓에 祭享할 때의 축문에 저 나라
의 연호를 사용했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온당치 못한 것 같습니다. 곐月과 干支만
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정조가 김양행을 처음 본 것은 8월 4일이었다. 행렬이 여주에 들어섰을 때 김양
행이 동구 밖에 나와 국왕을 맞이했는데, 정조가 지나가면서 얼핏 그를 보았던 것
이다. 이튿날, 정조는 김양행을 이조참의에 임명하고 불렀지만, 김양행은 해직된
다음에 나오겠다고 답했다. 정조는 김양행을 이조참의에서 해임한 다음에야 그를
만날 수 있었다.
8월 6일, 정조는 여주 행궁에서 김양행을 만났다. 오랜 기다림 끝에 김양행을 만
난 정조는 그 기쁨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卿(김양행)을 한번 보려고 하는 나의 마음은 목마를 때 물마시기를 생각하는 정
도를 넘어서, 이전에도 정성을 들여 부른 것이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나의 성의가
부족하여 경이 나를 멀리하는 마음을 돌리지 못했는데, 이제 여기에서 서로 만나게
되니 나의 기쁜 마음을 어찌 말로 형용하겠는가? 당초 이조참의에 제수한 것은 나
에게 다른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경이 간절히 사양했기 때문에, 해임을 허락하여
경의 마음을 편히 하고 나오는 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
경(김양행)은 山林의 宿德이 있는 현자로 泰山겗斗와 같은 명망이 있다. 내가 왕
위를 계승한 뒤 맨 먼저 불러 隱士에 대한 聘禮를 부지런히 했지만 賢士의 수레를
2012년 5월
44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돌리지 못했는데, 이는 나의 정성과 예우가 부족하여 감동시키지 못한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마음에 부끄러움만 절실했는데, 이제 능에 展謁하는 행차가 현자가 사는
마을을 지나게 되었으므로, 이로 인해 서로 만나기를 바랐다. 다행히 나를 멀리하
지 않고 생각을 바꾸어 登對했으니, 바라고 기다리던 끝에 위로가 된다. 이제 서로
만났으므로 계속 자주 만날 수 있겠지만, 車駕가 돌아갈 때 함께 가는 것이 나의 소
망이다. (다음 호에 계속)
남한산성을 오르며
조 한 숙
남한산성에 드나든 지 25년이 되었다.
이른 봄 산성에 처음 들어서던 날, 그 경이로움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아직
도 이런 마을이 있었는가. 남문에서 내려다보이는 산성리 마을의 조용한 아침 정
경, 아침을 짓느라 어느 집 굴뚝에서 피어오르던 연기는 낯선 풍경이었다.
그런 감동이 있은 후 몇 년 동안 우리 부부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일요일 아침이
면 차를 몰고 산성으로 올라갔다. 어떤 때에는 주중에도 올라갔다. 이른 아침 산성
에 올라가서 아침공기를 한껏 마시고 남편은 거기서 바로 출근을 하기도 했다. 소
나무들이 내뿜는 아침공기는 밥 한 공기보다 배가 불렀다. 산성에서 밤새워 촬영하
다가 미처 철수 못한 방송국 촬영 팀과 버스를 만난 적도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우리 부부를 산성으로 이끌었을까.
그것은 매번 신선한 모습으로 맞아주는 변화무쌍한 남한산성의 얼굴일 것이다.
그것은 한없이 깊고, 넓고, 슬픈 산성의 진솔한 모습일 것이다. 사계절 하루도 똑같
은 날이 없는 그 얼굴과 모습이 바로 거기 있기 때문일 것이다.
침괘정 옆에 있는 몇백 년 된 느티나무의 과묵함이 좋아서 달려간 적도 있었다.
장수처럼 위엄을 갖춘 수어장대의 늠름한 모습에 반해서 달려간 적도 여러 번 있었
다. 수어장대 아래 소나무 밭의 청정한 솔바람 소리가 좋아서 여름 겨울 가리지 않
2012년 5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45
고 달려가기도 했었다. 이렇듯 산성의 넓은 품에 안겨 25년이란 세월이 훌쩍 흘러
갔다. 그때 따라다니던 초등학교 3학년 아들이 이제 결혼하여 애아빠가 되었으니
세월이 참 빠르기도 하다.
산성과 친하게 지내다 보니 깊은 속사정도 알게 되었다. 산성이 겪은 병자호란의
슬픔도 가까이 다가왔다. 치욕을 당한 인조의 아픈 가슴도 어루만지게 되었다. 조
선을 멍들게 한 청나라를 향해 울분을 터트리기도 했다.
지금은 이런저런 모든 상처를 침묵으로 덮은 채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밝은 얼굴
로 내방객을 맞이하는 남한산성의 의연함이 참 좋다. 이제 남한산성은 기쁜 얼굴로
찾아오는 시민들의 휴식처요 면모를 제대로 갖춘 도립공원이 아닌가.
우리 내외가‘남사모(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에 입회하기 전에는‘산성회’라
는 등산 팀 회원이었다. 산성회에서는 남한산성의 동서남북 골짜기마다 안 간 곳이
없었다.
남문[至和門]에서 서문[右翼門]으로 북문[全勝門]에서 동문[左翼門]으로, 남한산
과 청량산에 걸쳐 있는 가파른 성곽을 오르내렸다. 조선시대 숨결이 그대로 남아
있는 암문(暗門)도 수시로 드나들었다. 일만이천 미터가 넘는 긴 산성을 나는 듯이
돌아다녔다.
봄이 되면 진달래 꽃길을 따라, 가을이면 낙엽을 밟으며 망월사, 장경사, 개원사,
국청사 등 유적을 찾아 수도 없이 다녔다. 한겨울의 폭설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그렇게 다녔더니 산성의 구석구석이 훤해졌고 우리 집 앞마당처
럼 편안하고 친근해졌다.
그 시절 남문 근처 로터리 부근에 산성호텔이 있었다. 가을이면 호텔 정원에 빨
갛게 익은 감을 바라보며 수어장대 쪽으로 오르곤 했었다. 그 언덕에는 나이를 먹
어서 힘들어하는 수백 년 된 느티나무 서너 그루가 있었다. 침괘정 근처 느티나무
는 나이가 들었어도 건장한데 언덕배기 나무들은 좀 병치레를 한 것 같았다. 그 중
한 그루는 반쪽 남은 몸으로 가까스로 버티고 있었다. 질곡의 세월을 버텨 온 산성
의 역사를 보는 듯 가슴이 저려 오기도 했다.
느티나무가 있는 언덕 중턱에는 주춧돌로 보이는 큼직한 돌들이 여러 개 있었다.
어느 돌은 고개만 내밀고 숨어 있기도 했다. 그 돌들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등산
팀들은 그 돌 위에 제물을 차려 놓고 시산제를 지내기도 했고, 돌 위에 걸터앉기도
2012년 5월
46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했다.
그렇게 십여 년이 흐른 후 1990년대 후반 그곳에 행궁 터라는 표지판이 나붙었
다. 줄을 치고 등산객들의 발길을 금지시켰다. 주변에 있던 산성호텔과 단골식당
박달재도 헐려 나갔고, 그동안 정들었던 옛 등산길도 막혀 버렸다.
발굴 팀들의 오랜 작업이 끝난 후 그 자리에 행궁 복원 사업이 시작되었다. 소나
무 목재들이 들어오고 목수들의 망치 소리가 산성리 마을에 울려 펴졌다. 쩌렁쩌렁
그 소리가 울려 퍼질 때 새로운 나라가 건국이라도 되는 듯 기뻐했다. 조선시대 백
성이 된 듯한 착각과 임금을 모시는 행궁을 짓는다는 기쁨에 가슴이 뛰었다.
임금도 신하도 백성들도 모두 세월을 따라 흘러갔지만 후손들은 옛 모습대로 행
궁을 재현했다.
작년 10월, 하궐 준공식 날, 축하객들이 수없이 모여들었다. 산성리 마을 주민들
과 행궁 복원을 위해 애쓴 사람들, 지나가던 등산객들도 모두 모였다. 드높은 가을
하늘 아래, 행궁 가득 국악 소리가 흘렀고 남한산성의 모든 역사가 구름 따라 천천
히 흐르는 듯했다.
지금도 우리 내외는‘남사모’회원으로 산성에 자주 오른다. 올라갈 때마다 번듯
하게 복원된 행궁을 한참씩 바라본다. 상궐, 하궐을 바라볼 때면 25년 전 옛길도 그
사이로 보이는 것 같다.
“저기 저만큼에서 우리가 냉이 캐고 쑥 뜯던 곳 아닌가요. 초여름에 애기똥풀꽃
바라보면서 뻐꾸기 소리 듣던 곳인데….”
그때는 우리 내외도 25년이나 젊었었다.
수필가 조 한 숙
충북 중원 출생 / 이화여대 국문과·동 대학원 국문과 졸업 / 국민교육신문 기자·기획위원 / 고
등학교 국어 교사 / 한국지역사회교육협의회 강사 역임 / 1990년《수필공원(현《에세이문학》)으로 등
단 / 2004년 수필집《초록빛 은유》로 제 23회 한국수필 문학상 수상 / 現: 한국수필문학진흥회 회
장·《에세이문학》발행인 / 국립 한경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 국제펜클럽·한국문인협회·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 / 수필문우회·에세이문학작가회·이대문인회·송현수필문학회 회원 /
저서: 수필집《초록빛 은유》《네프로네피스가 있는 풍경》/ 논문《우암(尤庵)선생 계녀서(戒女書)의
수필성 연구》
2012년 5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47
창립 16주년 특강
임진왜란과 남한산성
정 구 복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1. 머리말
2. 임진왜란의 경과와 경기도 지역의 피해
3. 전란의 영향
4. 임진왜란과 남한산성의 역할
5. 맺음말
1. 머리말
금년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7주갑(420년)이 되는 해이다. 임진왜란은 역사상
대단히 중요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이 중요한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일본의 침
략은 서양식 총포를 수용하여 분열된 일본 국내를 통일하여 그 넘치는 힘을 풍신수
길이 명나라를 점령하기 위한 야욕을 부렸기 때문에 동서양의 문명이 접합된 결과
라는 점이다. 둘째는 전쟁의 명분은 명나라를 치기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우리나라
를 침입하였고, 전쟁이 무대는 우리나라였으며, 그 결과 전쟁의 피해는 우리나라가
인적 물적 피해를 가장 많이 받았다. 셋째는 명나라 원군이 두 차례 파병되어 지원
한 국제적인 전쟁이었으며, 일본과 명나라는 이 전쟁으로 정권이 교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조선왕조는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 미
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그 영향은 무엇이며, 어떻게 조선왕조가 지속되었는가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현재 임진왜란의 연구는 의병장 중심으로 연구되고 있는 바 승리를 한 의병장을
돋보이게 하려는 문중사학의 경향이 강하다. 그리고 지역사 중심의 임진왜란연구
가 활발하다. 전국적인 파악은 오히려 소홀한 감이 있다. 이는 문헌중심사학의 결
2012년 5월
48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과인 바『선조실록』과『선조수정실록』은 전쟁의 상황을 알려줌에 아주 부실한 자료
이다.
본고에서는 임진왜란을 전반적 상황을 설명하고 그 영향을 살펴보고, 경기도 지
역 중 광주 지역이 임진왜란 시기에 어떤 상황이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명나라 측과 일본 측의 자료도 현대인이 알고 싶어 하는 문제에 충분히 답을 해줄
수 있도록 자세하지 않다. 따라서 역사학은 문헌사학을 뛰어 넘는 이해를 해야 할
것이다.
실제 광주이역의 임진왜란기의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에 새로이 자료를 찾아야
했다. 부족한 점이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특히 광주지역은 전쟁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자료가 충분지 않다. 임진왜란 전체를 조감하면서 이와 관련된 몇 가지 문
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임진왜란의 경과와 경기도 지역의 피해
2.1 전쟁의 경과
임진왜란은 1592년 음력 4월 14일 일본군 15만 5천명이 부산진에 침입하면서 시
작되었다. 조총(총포라고 칭하기도 함)이라고 하는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의 대군이
부산진에 침입하자 수천 명의 군사를 가지고 있었던 부산진은 몇 시간 만에 함락되
고, 다음 날 동래진도 함락되었다. 조선의 방어체제는 중앙에는 5위제도가 있었으
나 번상병으로 채워지도록 편제되었으나 이 무렵 유명무실했다.
또한 지방의 군사제도는 지방에서 방어를 담당하는 진관체제(鎭管體制)로 편성
되었다. 이는 지역의 중심지를 중심으로 이웃 군현이 그 통제를 받도록 짜여 져 있
었다. 이는『경국대전』의 병전 조에 기술되어 있다. 지방의 군사적 책임은 지방관
이 군사적 지휘권을 가지고 있지만 유사시에는 중앙에서 지휘관을 보내 지방군을
지휘하도록 하는‘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가 16세기 이후 적용되기도 하였다. 제
승방략 체제는 북방의 여진족을 침입을 막아내는 데에 사용되기 시작하여 임진왜
란 초기에 작동하였고, 후기까지 도원수, 도체찰사라는 체제로 운영되었다.
진관체제를 경기도로 예를 들어 설명하면 경기도에는 육군을 담당하는 병마절도
사(약칭 병사라 칭함) 한 사람이 배치되고 수군을 담당하는 수군절도사(수사라 칭
2012년 5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49
함) 1명이 배치되었는데 이를 관찰사(감사, 또는 라고 칭하기도 함)가 겸하여 도내
의 군사적 책임을 지며, 경기도에는 병사의 아래에 병마첨절제사(첨사라 약칭함) 4
명이 두어졌는데 이는 경기도내의 광주진, 수원진, 양주진, 장단진에 두어지고, 이
들 진을 주진(主鎭)이라 칭했다. 그리고 광주진에는 여주, 이천, 양근에 병마동첨절
제사가 두어져 그 통솔을 받았는데 이들 진을 거진(巨鎭)이라고 칭하고 이하 예속
군현에‘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6명이 여주, 지평, 음죽, 양지, 죽산, 과천에
두어졌다. 이 직은 수령이 겸하게 되어 있었다. 이를 도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병사(병마절도사). 수사(수군절도사)= 관찰사가 겸함
병마(수군)절제사- 광주, 양주, 수원, 장단 -주진이라고 칭함
병마동첨절제사-광주진관에 여주, 이천, 양근
병마절제도위 광주-여주, 지평, 음죽, 양지, 죽산, 과천- 속진이라 칭했다.
조선왕조가 수립되고『경국대전』체제가 정비된 후 150여 년간 이 제도가 운영될
필요가 없이 평화기간을 가져와 조선시대의 군 체제는 갑작스런 전쟁에 작동이 되
지 않았다. 더구나 군사훈련이 전혀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군대의 정원도 채우
지 않은 상태였다. 대군의 합동으로 공격해 옴에 이를 지방 단위에서 방어할 수 없
었다.
왜란의 공격이 있자 경상좌수사와 좌병사는 도망을 쳤고, 이에 지방수령이 담당
하는 방어체제는 힘없이 저항도 하지 못하고 도망을 치기에 급급했다. 일본군은 승
승장구하여 보름 만에 한성을 장악하게 된다. 중앙에서 신립장군을 내려 보냈으나
당시 군대가 300명을 채우지 못했고, 그 나마 두루마기를 입고 몽둥이를 든 유생이
었으니 이를 가지고 싸운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수령들은 창고의 곡식이 적에
게 이용당한 것을 막기 위해 불 질러 태웠다. 서울은 한강이란 천혜의 지형을 가지
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킬만한 군대가 없어 천혜의 지형지물이 무용지물이
되었다.
5월 2일 서울을 장악한 일본군은 5월 18일에는 임진강 방어망을 격파하고 개성
을 점령하였다. 小西궋長은 6월 8일 대동강 어귀에까지 진격하여 18일 평양성을
점령하자 선조는 의주로 도망을 쳤다. 일본군이 평양을 점령하기 전에 이덕형과 대
동강에서 강화회담이 진행되었으나 일본군은 길을 빌려 달라는 종전의 주장을 되
풀이했고, 조선 측은 무조건의 철병을 주장하여 회담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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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회담은 무혈점령이란 전략의 일부였다. 6월 14일 일본군은 평양을 점령하자 조
선 측은 물론 명나라 측에서도 심각하게 이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함경도의 길주
이남이 가등청정 군에게 점령당하여 왕조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격이었다. 왕은 의
주로 가서 여차하면 중국으로 망명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따르던 승지 겸
사관 4명이 짊어지고 다니던 사초를 불태우고 선조를 버리고 도망을 치는 일까지
벌어졌다.
조선에서는 명군의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요동지방을 지키고 있던 조승훈이
3,000명을 인솔하고 와서 7월 17일 평양성 탈환을 시도했으나 대패하고 겨우 자신
의 목숨만을 구했을 뿐이었다.
일본군은 전 군량을 조선에서 거둬들이라고 풍신수길은 1592년 5월 16일자로 부
친 지시문서에 8도에서 각 장수에게 할당하였다. 총계가 엉터리로 합계되었다. 서
해안으로 군량을 조달하려는 당초의 계획이 이순신의 해전에서 5월 9일 최초로 패
배하여 전라도 지역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경상도 우도 즉 낙동강 이서 지역이 의
병들의 방어로 일본군의 침략을 저지했고, 일본군이 지나친 후방에서 일본 측이 전
혀 예상치 못했던 의병들이 일어나 싸움으로써 북진한 군대에게 군량 수송을 불가
능하게 하여 작전에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다. 또한 조선에 풍신수길이 직접 건너와
작전을 지시하겠다고 천명한 일이 여러 차례 연기되어 일본군은 더 이상 진격을 하
지 못했다. 또한 일본군이 북상할수록 일본정부와의 통신도 어려워졌고 여름에 출
병한 일본군은 보급도 제대로 되지 않아 혹심한 추위에 견디기 어려웠다. 그들은
점령지역에서 식량을 약탈하여 연명했으나 이는 많은 군대의 군량을 조달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명나라 측에서는 요동, 산동지방과 북경의 침략을 막기 위한 조처로 군무와 재정
등을 총괄하는‘경략(經略)’직에 송응창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남북 군을 모군하
여 이여송을 대장으로 45,000명을 이끌고 12월 19일 압록강을 건너와 1593년 1월
5일부터 9일까지 평양성을 탈환하는 전투를 벌였다. 소서행장군은 개성으로 물러
났고, 1월 18일 개성을 탈환하게 되었다.
1월 29일 이여송은 자기의 기병 1000명을 이끌고 벽제관에 왔다가 매복한 군사
에 포위되어 간신히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평양으로 귀환하여 이후 좀처럼 진군하
지 않는 전쟁공포증을 가졌다. 함경도 지역에 있던 가등청정군은 두 왕자를 포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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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51
잡고 혹심한 추위와 정문부의 의병이 일어나 반격을 하자 서울로 후퇴하였다. 그
무렵 2월 초에는 경에 일본군 3만여 군대가 6.000명이 방어하는 행주성을 공격했
으나 이를 점령하지 못하고 서울로 후퇴하였다.
4월 말경 일본군은 서울에서 철수하여 남쪽으로 밀려나기 시작하여 전세는 완전
히 역전되었다. 경상도 지역으로 모인 일본군은 지난해 10월에 진주성을 공격하다
가 실패한 것을 보복하기 위해 6만 군대를 동원하여 2차진주성전투가 벌어졌다. (6
월 20일-29일) 그해 연말에는 일본군은 경상도 부산, 울산 거제 일대에 성을 쌓고
이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추격한 명군이 울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1차 島
山城전투).
2.2. 강화회담의 진행
일본군은 진격하면서 여러 차례 강화회담을 제의했다. 첫 번째 일본 측 제의는
서울을 싸우지 않고 점령하려는 목적으로 침공 초부터 조선 측에 제안했다. 조선
측에서는 이들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이덕형을 보냈으나 이미 충주성을 점령하였
기 때문에 성사되지 않았고, 서울을 점령한 후에는 또 김명원에게 제안하였으나 조
선 측에서 거부하였다. 이는 강화회담의 일본측 요구는 조선과 싸우지 말고 함께
명나라를 치자는 제안을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강화회담은 명 측에
제안을 했다. 강화회담은 선봉장인 소서행장이 주도권을 가지고 진행하였다. 평양
을 점령한 후 명나라는 지연작전을 펴기 위해 병부상서 석성이 추천한 상인출신 沈
惟敬을 시켜 강화회담이 진행시켜 북진을 지연시키면서 군대를 모집하여 이여송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때 강화회담은 상대방의 정보를 입수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
다.
서울로 철수한 일본군의 소서행장과 심유경 사이에 두 차례의 강화회담이 이루
어졌다. 1593년 3월 15일과 4월 초순에 이루어졌다. 명 측의 제안은 일본군의 점령
지 반환과 군대 철수, 포로로 잡힌 왕자의 송환, 풍신수길의 사죄를 요청했고, 이를
수락하면 풍신수길을 봉왕하겠다는 뜻을 주장하였고, 일본 측은 강화사신을 일본
에 보내고, 명군을 요동으로 철수시키면 두 왕자를 송환하고 일본군을 서울에서 철
수하겠다고 제안하여 서로의 제안을 수용하기로 합의를 보아 형식 상 전투가 휴전
되는 상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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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이용해 남쪽으로 철수한 일본군은 6만 대군을 동원하여 작년 10월에 공격
을 했다가 실패한 진주성을 보복하는 2차진주성 공격을 감행하였다.(1593, 6월 20
일-29일) 주위에 있는 명나라 군대가 있었지만 일본군의 진주성 공격을 방어함에
전혀 지원하지 않았다. 이에 진주성에는 남하한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의병장들과
진주성 관군이 이를 지키려는 필사의 전쟁을 하여 마침내 성이 함락되고 수만 명의
시민이 도륙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선조는 1593년 10월에 서울로 돌아왔다. 경복
궁은 백성들에 의해 불에 탔음으로 왕은 별궁인 창경궁에 머물렀다.
명과 일본과의 강화회담은 두 사기꾼에 의한 것으로 양국에 제대로 보고되지도
않고 승인도 받지 않은 희대의 사기극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앞으로 깊은 연구
가 이루어져야할 문제이다. 또한 양국의 강화회담 내용이 조선 측에도 알리지 않은
것이어서 조선 정부에서는 끝까지 강화회담을 반대하게 되었다. 심유경은 자신의
책사인 서용재와 서일관을 강화사로 위장하여 소서행장을 따라 1593년 5월 23일
나고야에 가서 풍신수길을 만나게 되었다. 이에 풍신수길은 명나라의 황녀를 바칠
것, 감합무역의 재개, 명과 일본의 군사에 대한 서약, 한강 이남의 4도를 일본에 할
양하고 이북은 명나라가 점령한다는 등 9개항을 제시했다.
이에 명나라도 완강히 반대를 했다. 그후 심유경과 小西궋長사이에 항복문서를
허위로 작성해 小西飛를 북경에 1593년 12월에 파견하였으니 아마도 이를 빌미로
지리와 명나라 정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때 일본측
문서가 송응창의 {경략복국기략}이라는 책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명나라에서는
이를 허위인줄 모르고 강화사신을 일본에 파견했다. 1594년 연말에는 일본군의 일
부가 잔류하고 본부대는 철병하고 명나라 군대도 모두 철병했다.
가등청정이 포로로 잡은 두 왕자를 송환하였고, 조선 측에서 지금까지 강화를 반
대해오다가 성종의 능인 선릉, 중종의 능인 정릉(靖겓) 등 두 왕릉을 도굴한 자를
잡아 보내라고 요구했고, 형식 상 이를 일본 측에서 보내자 조선 측은 더 이상 반대
할 명분이 없어져 명나라 사신 편에 통신사 황진을 따라 보냈다. 1596년 4월 경 명
나라 정사 이종성은 부산진에 도착하여 일본군의 진영을 방문했는데 그는 지금까
지의 강화회담이 거짓임을 알고 그 곳에서 도망을 쳤다. 이에 명나라에서는 부사로
일본에 이미 들어간 楊方亨을 정사로, 심유경을 부사로 대치하여 풍신수길을 일본
왕에 책봉한다는 칙지를 전달하게 하였다. 이를‘봉공책봉’이라고 하는데 이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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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책봉하고 공납을 허용한다는 것이니 일본 측에서 주장한 감합무역을 재개하도
록 허용한다는 뜻이었다.
사신이 1596년 8월에 오사카에서 풍신수길을 만나보았다. 풍신수길은 그동안 강
화회담이 거짓으로 자행되었음을 확인하고 소서행장을 죽이려다가 그 속인 죄를
앞으로 싸움으로 갚으라고 용서를 했다. 중국과 조선에 전하는 문서에는 풍신수길
이 봉왕은 안중에도 없고 왜 명나라 황녀를 바치지 않느냐고 호통을 치고, 조선 측
사신에게는 사신의 지위가 낮다고 하면서 두 왕자를 송환하였는데 왕자들이 왜 와
서 감사를 표하지 않느냐고 트집을 부렸다. 그러나 심유경은 사비로 선물을 사서
일본이 바친 것으로 거짓 보고하였다. 이로 인해 그 후 명나라에서는 심유경과 이
종성은 사형에 처해졌다.
그래서 강화회담은 결렬되고 풍신수길은 재침을 시도했는데 이것이 1597년 초부
터 준비하여 3월에 14만 1500명의 군대가 재침하였고 명나라는 재빨리 군대를 파
견하여 6만 여명이 파견되었다. 정유재란은 작전 계획을 바꾸어 무조건 북상하는
것이 아니라 전라도 지역을 완전 점령하고 전에는 분산하여 장수 개별적으로 진공
하는 정책에서 합동으로 북진하는 전략으로 바뀌었다. 차근차근 북상하려는 계획
을 세웠다. 그리고 조선의 명장인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을 교체함에 성공했다.
이는 소서행장이 간첩 要時갥를 통해 가등청정이 언제 부산항에 당도할 것이니 이
를 사로잡을 수 있다고 정보를 일러주었고, 전쟁을 모르는 선조는 부산 앞바다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이순신에게 내렸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 정보를 믿을 수 없고
또한 小西궋長군이 침입을 했는데 加藤淸正을 잡기 위해 부산항으로 출격하는 것
은 적의 술수에 빠질 것으로 판단하여 이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불충하다는 이유로 이순신을 직위해제하여 백의종군하게 하였고, 그와 견
원지간이었던 원균으로 교체하였다. 원균은 1597년 6월 19일 칠천량 전투에서 완
전 패하여 수군의 전함 500여척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이어서 왜군은 추풍령과 조
령을 넘어 북상하는 침략을 취하지 않고 전라도 진격하여 8월 16일 남원성을 함락
하였다. 남원성에는 이미 선발대로 파견된 명나라 부총병 楊元이 이끈 3,000명의
군사와 조선군이 지키다가 1만여명이 희생되었고, 일본군은 전주 공주를 무혈 점령
하고 북상하다가 직산에서 海生이 이끄는 명군에 대패하여 전세가 역전되어 남하
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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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군은 모병한 군대로서 마병과 보병, 수병이었다. 조선은 산이 많아 서로 연락
이 어려웠고, 지휘관의 현지 사정에 따라 대응하도록 하는 작전을 펴고 전군을 4로
(걟)로 나누어 울산성에 주둔하고 있는 加藤淸正軍(2차도산성전투), 사천에 주둔
하고 있는 島津義弘군 그리고 순천에 주둔하고 있는 小西궋長군을 9월 20일 아침
7시에 동시에 공격하기로 했다. 東걟軍의 지휘관은 馬貴, 中걟軍은 董一元, 순천을
공략하는 것은 西걟軍괢綎과 진린이 이끄는 水걟군이 담당했다. 견고한 왜성을 공
격하였으나 세 군데 모두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사천성의 島津義弘이 수군을 동원
하여 갇힌 소서행장을 구하려는 하자 이순신은 노량에서 싸우다가 11월 19일 전사
하고 11월 20일 소서행장은 퇴각함으로써 전쟁은 끝났다. 순천 왜교성 전투에는 유
정의 군대 15,000명, 진린의 군대 9.000명 권율이 도원수로 1만여 군사를 가지고
참여하였고, 이순신이 참여하였다. 즉 3국의 명장들이 모두 참가한 최후의 연합 전
투라고 할 수 있다. 이 전투에서 조선의 전략은 완전 복수를 하기 위한 전쟁이었고,
명군의 전략은 전쟁을 종결지으려는 것이었다. 정유재란 때에 일본군이 승리한 증
표로 처음에는 군인 및 민간인의 귀를 베다가 코를 베어 이를 소금에 절여 일본에
보내면 전공으로 인정해주었으며 임진년의 전쟁과는 달리 지역을 지배하는 통치정
책을 썼으나 의병과 관군의 공격으로 제대로 점령지역을 통치하지 못하였다.
2.3 경기도 지역의 전쟁의 피해
경기도 지역은 전란 중 왜군이 태풍처럼 지나쳤기 때문에 일본군에 의한 직접적
인 인적 물적 손실은 다른 도에 비하여 더 심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1592년 5월
부터 이듬해 3월말까지 10개월간 서울을 점령하고 있었음으로 서울에 사는 사람들
이 피난을 온 곳은 주로 경기도 지역이었다. 그리고 장기간의 평화를 누리다가 전
쟁이라는 미증유의 사건을 당하여 피난을 하였기 때문에 경상도 지역에서는 농사
를 제대로 짓지 못했고, 다음해 계사년(1593년)에는 흉년이 들어 전국적으로 극심
한 식량난에 시달렸다.
특히 강화도에는 창의사 김천일이 주둔하여 장악하여 지방과 행재소와의 연락을
담당하는 역할을 하였다. 수원의 독산성 전투 행주성 전투가 강화도 군과 수원의
군대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명나라 원군이 서울을 탈환한 후에는 그들의 식량과 말
의 먹이를 대야함으로 큰 부담에 시달렸다. 특히 정유재란 때에는 5만여 명의 명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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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군대가 서울에 4개월 동안 주둔하고 있었음으로 이의 군량과 말먹이 감을 경기
도 주민이 담당해야 했다. 실제로 이 기간 동안 얼마만큼의 피해를 입었는가에 대
하여는 기록이 부실하여 정확히 알 수 없다. 대략적으로 계산하면 우리나라의 식량
사정은 충분하지는 못했지만 자급자족을 했다. 풍년이 들면 곡식을 군자곡과 세곡
을 거두어 비치하였다가 흉년을 대비했다. 그런데 일본군이 15만 여명, 명나라 군
대가 5-6만 명이 전후 두 차례 들어와 그들의 식량이 조선의 곡식이었을 것임으로
국내의 식량 사정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명나라 군대는 초기 2개월의 식량을 가
지고 왔으나 그 이후의 식량은 우리나라에서 대야했다. 더구나 일본군이 지나간 군
현의 곡식 중 불에 태워져 없앤 곡식을 감안하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임진왜란 시에는 남한산성은 물론 이를 포함하는 광주부 일대에서는 전쟁이 없
었다. 그러나 광주부에서 당한 전쟁의 피해로는 국가적으로 중대한 문제를 일으킨
선릉과 정릉(靖겓)이 일본군에게 도굴되는 사건이 1592년 9월에 일어났고, 이는 보
물을 캐기 위한 목적으로 능을 무참히 헤쳐졌다. 이 소식을 접한 정부에서는 1593
년 4월에 유성룡을 야간에 보내 그 현장을 조사한 기록이『선조실록』과『증정남한
지』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이 사건은 조선정부로 하여금 씻을 수 없는 왜적에 대한
큰 분노를 가지게 하였고, 강화회담을 철저하게 반대한 한 이유가 되었음은 이미
서술한 바와 같다.
3. 전란의 영향
임진왜란은 우리나라에 엄청난 피해와 큰 영향을 주었다. 그 영향을 대체로 요약
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평화 속에 살아온 전 국민이 전쟁의 공포에 떨었고, 많은 사람이 일본에 포
로 잡혀가거나 죽었다. 일본에 생포되어간 포로는 약 7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들 중 1만 2천명 정도는 전쟁이 끝난 후 13차에 걸쳐 송환되었지만 나머지 포로
는 일본 땅에서 또는 외국에 노비로서 살아가면서 어려운 고초를 겪었다.
둘째 국가적 행정체제가 마비되어 이를 작동하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
다. 그 구체적인 예는 전국토의 양안이 불에 타고 전국적인 양안을 실시해야 했으
며 대동법이란 공물제도를 실현함에 100년이 걸렸다. 중장의 군제가 5군영체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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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편되었다. 이런 국가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개혁안이 실학사상을 낳게 되는 계
기가 되었다. 이는『磻溪隧걧』이란 개혁안을 30여 년간 유형원이 연구한 대표적 성
과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전 국민이 역사상 최대의 주거지 이동을 하였다. 전쟁과 피난으로 자기가
태어난 곳을 거의 벗어나지 못하던 상황에서 전국적으로 주거지 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수십만 군대가 넓은 지역을 이동하게 되었다. 그 결과는 학자들이 자기 강
산과 지리에 대한 소중한 인식을 하게 되었으니 산을 그 자체만으로 파악되던 데에
서 산맥으로 파악하게 되었고, 강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다. 이는 조선 후기에 역사
를 지리 위에서 파악하는 새로운 경향인 역사지리학을 낳게 하였다. 상세한 지방읍
지가 작성되고 전국의 정확한 지도의 작성 등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많은 사람의 주거지 이동은 지금까지 노비세습제가 붕괴되기 시작하는 도
망노비가 나타났다. 평시에는 노비가 어느 이웃 지방으로 옮겨도 주인에 의해 추쇄
가 되었는데 임진왜란 이후에는 도망노비를 추쇄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해졌다. 그
리고 이는 하층민의 신분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6세기에는
전 국민의 반 정도가 노비로 전락하던 증가 추세에서 노비가 급감하는 새로운 변화
를 가져왔으니 공노비 사노비 모두 급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넷째 임진왜란은 지배층인 사족양반의 지배권을 강화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의병활동을 통하여 국가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향촌사회를 방어 복구함에
주도적 역할을 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의 법제적, 정치적, 행정적
모순은 심각한 정도였고, 그 모순이 폭발하기 전에 외침에 의해 국난을 당하자 모
순에 대한 백성의 반감은 외적의 침입에 우선 돌려지고 전란의 수습은 왕조의 모순
을 봉합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덕천막부로 정권이 교체
되고 명나라는 이 전쟁으로 국가가 멸망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특히 전쟁의 피해가
막심했던 조선왕조는 명맥을 유지했다. 임진왜란 중 왕조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은
왜란 중 잦은 반란사건으로 나타났고, 경복궁이 시민들의 분노로 불태워진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다섯째 왕조를 유지한 조선왕조에서는 수도의 방어를 위해 직업군인 중심의 5군
영제와 수도 주변의 4유수제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는 강화유수, 개성유수, 수원유
수, 광주유수를 두게 되었다. 임진왜란의 경험으로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의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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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 주목되어 축성하게 되고 광주유수는 남한산성의 수어청 수어사를 겸직하게 되
었다. 유수들은 비변사 당상관으로 국가 기무를 논의하는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다.
여섯째 언어 즉 국어에서는 중세국어에서 근세국어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 순경음의 소멸, ‘ㄲ’에서‘ㅋ’으로 격음화 현상, 그리고
첫 소리‘ㄷ'이 'ㅈ’으로 변한 구개음화현상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예술에서는 우리
나라 산을 그릴 때에 추상적인 산을 그리던 데에서 사실적인 산으로 그리는‘진경
산수화’의 출현, 음악에서 한국적인 가곡의 출현 등을 들 수 있다.
일곱째 학문은 정통 성리학이 발전하여 철학에서 주작학적 철학이론이 발달하여
양명학 등 다른 학문 경향을 배격하였으며, 역사에서 주자의 ??자치통감강목??을
본 뜬 명분과 정통을 강조하는‘강목형’의 역사학이 발전하여 종통, 장자세습제,
종법제도의 실현 등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는 학문이 지배층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이런 경향이 비록 지배적이었다고 해도 다른 현상과 길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들은 존명사대사상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특히 성리학과 존명사상은 비록 사
회의 전반적 현상과는 길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이들이 일으킨 문헌기록은 세계 최
고의 수준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후일 한국사회의 발전 동력으로 작동
하지 못하고‘위정척사’라는 다른 견해 다른 문명의 수용을 반대하는 길을 걸어 근
대화에 뒤지는 결과까지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4. 임진왜란과 남한산성의 역할
『선조실록』의 기록이 극히 부실하기 때문에 경기도 지역의 임진왜란 당시의 현상
을 설명하는 자료를 거의 찾을 수 없어 대단히 고민스러웠다. 나는 실학자 홍양호
의 손자 홍경모가 쓴 500쪽의『증정남한지』를 샅샅이 뒤졌다. 이 읍지는 우리나라
에서 상세하기로 대표적인 자료집이라고 생각한다. 이에서 한 가지 예를 찾았다.
즉 경기도의 광주는 서울과 인접한 지방 도시로서 조선왕조의 인재를 배출하는 연
못이었다. 임진왜란의 외교적 임무를 수행한 이덕형의 출신지였다.
또한 임진왜란 시기 7년간 지방 노비신공을 받으러 갔다가 겪은 피난일기를 쓴
오희문의『쇄미록』이 있다. 그러나『쇄미록』은 저자는 광주사람이었지만 담긴 내용
은 다른 도의 이야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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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증정남한지』에는 조선왕조의 200년간 국가적 숙제였던‘종계변무’운동
을 종결짓게 되고 명나라 원군을 파견해준 사연을 찾을 수 있었다. 그 내용인즉 다
음과 같다. 역관 홍순언(洪純彦)이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갈 때 아마도 물건을 살려
고 은 천량을 빌려가지고 갔다. 북경에 가장 아릿따운 여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술집을 찾아 갔다‘( 一夜千갏酒店’). 술집 주인이 한 여자를 데리고 나오는데 과
연 천하일색이었다. 그런데 그 여자의 머리 단을 묶은 곳에 눈물자국이 있어 홍씨
가 그 연유를 물었더니“자기는 강남 사람인데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 왔다가 아버
지가 갑자기 죽었는데 시신을 고향으로 옮긴 돈이 없어 자신의 몸을 팔아 돌아갈
길을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홍씨는 그 측은한 사연을 듣고 천량의 은덩어
리를 모두 주어버렸다.
그리고 홍씨는 귀국하니 돈을 빌려준 사람이 관에 소송을 제기하여 영남지방으
로 귀향을 가게 되었다. 그 후 강남으로 돌아간 그 여자는 석성(石星)에게 시집을
갔는데 석성은 승진하여 예부상서가 되었다(1586-7). 매양 조선 사신이 오면 홍씨
의 소재를 물었다. 그리고 홍씨는 사면이 되어 서울에 올라와 통역관 우두머리로
명나라에 종계변무사 홍성민을 따라 가게 되었다. 석성과 그 부인이 홍순언을 초대
해 옛 은혜를 감사하고 종계변무사를 따라가 융숭한 대접을 받고 문제를 해결지어
주었고(실은 대명회전 한 질을 받아 왔다). 홍씨는 돌아와 선조로부터 1590년 光國
의 공신호를 받았고, 그 부인에게는‘唐陵君夫人’이라는 작호를 내렸다. 그의 부인
은 스스로 비단 여러 필(두 필)을 손수 짜서 ©끝에‘報恩緞’이라는 세 글자를 수놓아
홍순언이 북경에 갈 때 보냈다. 후일 석성은 병부상서가 되었는데 이 때 1차 원군을
보내줌에 기여했다. 이는 인맥을 통한 외교였다. 석성은 심유경을 잘못 등용했다고
하여 후에 처벌을 받아 옥사했으나 조선 측에는 특별한 공헌을 한 인물이었다.
홍순언이 살았던 동네를‘보은단동’으로 칭하게 하였는데 그 곳이 바로 광주 언
주면 청담이니 바로 강남구 청담동이 그 곳이다.
5. 맺음말
임진왜란은 우리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었고, 지방의 군권을 장악하던 수령들은
대군의 침입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한 때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되었다. 일
2012년 5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59
본군은 명나라를 정복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길을 빌려달라는 것이었지만 이는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행위였다. 거의 거침없이 북상하던 일본군은 뜻밖의 장애물
에 부닫혀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후방 점령지역에서 예상치 못한
의병이 일어나 전방에 나간 군대에 군수물자의 수송이 어렵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신등 연락에도 장애가 있었다. 또한 수군의 강한 저항을 받아 일본 수군은 완전
패배를 당하였다. 그리고 조선왕조의 목줄을 죄이고 있었으나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선 측에서는 식량의 지원이 계속되었고 얕잡아 보았던 조선의 문
화능력은 명나라 군대를 동원함으로써 위기를 구했다. 그리고 조선 백성들의 적극
적인 협조를 점령지역에서도 받기가 어려웠다.
이런 결과는 일본군이 철수하여 전쟁은 1년여 만에 소강상태를 유지하여 일본군
과 명군은 1594년 연말 경에는 모두 철수했다. 그러나 강화회담이 결렬되자 일본
군은 전략을 바꾸어 재침을 1597년 1월 시도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전라도 지역을
점령하였으나 곧바로 지원온 명군에 의하여 직산에서 패퇴하여 후퇴하여 1597년 9
월경에는 일본군을 완전 소탕하기 위한 작전이 수행되었다. 그리고 1598년 8월 중
순에 전쟁의 장본인인 豊臣秀吉이 죽음으로써 전쟁은 어느 쪽의 승리도 없이 종결
되었다.
전후 7년간 지속된 전쟁은 전창터였던 우리나라에 많은 인적 물적 피해를 주었
고, 우리나라는 명나라에 대하여‘再造之恩’을 입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곧이
어 일어나 북방의 여진족(후금)의 침입은 일본에 대한 복수를 하지 못하고 말았다.
전쟁의 위기를 극복한 것은 전 국민의 힘으로 이를 막아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즉 홍순언의 이야기를 바로 이를 말해주는 것이다. 광주지역의 임진왜란시기의 역
사는 앞으로 지방의 자료를 더욱 발굴하여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2012년 5월 20일)
정구복(鄭求福)
충남 청양 생 / 서울대학교 학사·석사 / 서강대학교 문학박사 / 계성여고 교사 / 전북대 문리대
교수 / 충남대 문과대 교수 / UCLA 교환 교수 / 국학진흥연구사업추진위원장 / 정신문화연구원 교
수 및 도서관장 / 한국고문서학회 회장 / 국학연구지원심사위원회 위원 / 서울시 문화재위원 / 문
화재 감정위원(전적 고문서)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원장한국문화사 편찬위원서울시 문
화재 위원 임진왜란 연구회 회장 / 뉴질랜드 오클랜드 파견 교수 / 한국사학사학회 회장 / 한국사
학사학회 명예회장 / 한국고문서학회 명예회장 /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2012년 5월
60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2012년 5월
[남사모 창립 16주년]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61
2012년 5월
62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모임 스케치
남사모의 청춘
신현일(남사모 고문)
푸른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초여름 아침 햇살이 남사모의 열여섯 번째 생일을
축하해 주고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드는 회원들로 북적거리는 남문관 앞뜰은 마치
시골 장마당 같았다. 오래간만에 참석한 회원, 오늘 새로 오는 회원, 새 임원진, 모
두들 서로 만나서 인사하기 바쁘다.
늘 하듯 우리는 자기소개를 위해서 크고 둥그렇게 둘러섰다. 평소의 두 배도 더
되는 50여 회원들이 제가끔 누가 더 남한산성을 사랑 하는가 자랑하며 인사를 나
누느라 예정된 시간을 훨씬 넘기니 행사시간표를 세밀하게 짜놓고 진행하던 김진
원 사무국장님은 마음이 바빴다.
이틀 전 낙성식을 마친 행궁을 정식으로 탐방하는 것이 오늘의 첫 행사다. 주춧
돌 몇 개만 나뒹굴던 궁터에서 그동안 수없이 행궁복원을 외쳐댔던 남사모 회원들
은 10년 만에 공사가 마무리 된 행궁을 둘러보며 감회가 벅찼다. 한남루를 지나 외
행전에서 내행전으로 돌아 들어가며 힘들게 나라를 지켜온 역대 임금님과 신하들
을 만나고, 궁을 짓던 목수와 산성을 지키던 병사들도 만난다. 후원으로 빠져 나가
이위정을 지나 언덕에 올라서 기둥에 쓰인 시 구절처럼‘천리에 뻗힌 산성의 기운’
도 가슴에 담았다.
우리는 다시 좌승당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전보삼 회장님의‘남한산성을 가슴에
품고 가자’는 축하 인사를 들었다. 공로상을 받은 신청 전회장님과 이종화 부회장
님은‘회원 모두가 참여하고, 공부하는 남사모가 되자’는 말을 남겼다.
신영수 의원의 축사와 정흥숙 회원의 축시 낭송이 이어졌다. 험난했던 산성 역사
를 말해주듯 먹구름아래 천둥 번개와 소나기가 쏟아지는 속에 정구복 교수님의‘임
진왜란과 남한산성’이라는 주제의 강의를 들었다. 의병을 모아 지역을 지키고 파괴
된 강산을 복구한 풀뿌리 민초와 그들을 이끈 지역 양반계급의 역할로 조선왕조는
2012년 6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63
왜란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설명이었다. 또한 남한산성
이 수도 방위를 위한 요새로 주목을 받아 이후 성을 축성하고 행궁을 건립하는 계
기가 되었다고 했다.
행궁 행사를 마치니 날씨가 다시 개이고 회원들은 남문관으로 내려가서 참살이
막걸리로 축배를 들고 전통 서민음식 왁저지로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오후 일정은 만해 기념관에서 이어졌다. 특별 전시중인 설중매와 설중매를 사랑
한 만해를 이어주는 많은 작품들을 보고 설명을 들으면서 이것을 수집하고 정리한
회장님의 열정에 감동을 받았다.
그 사이에 사무국은 기념관 뜰에 즐거운 놀이마당을 준비하고 있었다. 회원들은
잔디밭 객석에 편히 앉아서 고원예 회원이 준비한 떡과 과일을 들면서 박연주와 사
물놀이패의 춤, 피터의 섹소폰 연주, 장기숙의 시낭송, 임현진의 아기자기한 동화
구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김인섭 회원의 섹소폰, 박용규 사무차장의 기타와 노
래, 왕년의 DJ 최동욱 회원의 노래‘길잃은 나그네’와 나의 어설픈 팬플룻 독주도
회원들을 마냥 즐겁게 해 주었다.
다 함께 즐긴 한마당 공연이 끝나고 사무국장님이 선물한 열대어 한 마리씩 받아
든 회원들은 섹소폰 가락‘섬머타임’을 뒤로한 채 아쉬움을 남기고 산성을 내려갔
다.
창립 16주년의 남사모는 꿈과 이상이 넘치는 아름다운 청춘이다. 남사모는 완공
된 행궁에서 역사를 돌아보며 정체성을 찾고, 산성의 푸른 자연과 맑은 하늘에서
건강한 힘과 용기를 내려 받는다. 그 이상과 용기와 힘을 모아서 역사를 정립하고
미래를 계획하고 산성과 환경을 보존하고 가꾸어 나가는 일을 도와 간다. 우리는
‘남한산성을 가슴에 품고’함께 힘을 모아 청춘의 젊은 꿈과 산성의 기운이 천리만
리에 뻗히도록 꾸준히 노력 할 것이다.
청춘 남사모의 회원인 것은 우리에게 큰 축복이며 자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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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문경 역사 탐방 자료
진남교반 고모산성
정 재 열(남.사.모 문화예술분과장)
경상북도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에 있는 관광지로 경북팔경 중 제1경으로 꼽힌다.
강 위로 철교·구교·신교 등 6개의 교량이 나란히 놓여 있어 자연과 인공의 조화
를 이룬다. 숲이 울창하고 봄이면 진달래와 철쭉, 산벗꽃 등이 절경을 이루어 문경
의 소금강으로 불린다.
진남휴게소 폭포 왼쪽 암벽 위에는 경북팔경지일(慶겗八景之一)이라 새겨진 돌
비가 세워져 있다. 이 일대는 낙동강 지류인 가은천과 조령천이 영강에 합류하였다
가 돌아나가는 지점으로, 봉생정이 있으며 아름드리 노송이 우거진 진남숲 앞으로
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고 레일바이크, 레프팅, 보트, 4발오토바이, 미니카 등
다양한 놀이시설이 있다.
북쪽 고모산에는 길이 1.6km, 너비 4m에 이르는 고모산성이 있다. 삼국시대에
쌓은 성이라고 하며, 천하장사 고모노구와 마고노구가 경쟁하여 하룻밤만에 쌓았
다는 전설이 전한다.주변에 오정산, 고모산성, 불정자연휴양림, 백운대계곡, 선유
동계곡, 용추계곡, 운달계곡 등의 관광지가 있다.
▼ 서낭당 고갯길과 옛 주막
석현성 안에는 길손의 휴식처인 주막거리가 있다. 어릴 적 초등학교 친구들과 시
냇가의 섭다리를 건너서 마성장터를 지난 뒤에 이 곳 성황당 고갯길을 넘었던 기억
이 난다. 영남에서 한양 가는 옛 길에 몇 개의 난관을 꼽는다면 삼강나루 뱃길과 진
남 벼랑길, 그리고 새재 고갯길일 것이다. 지금은 주모 없는 빈집이지만 예전엔 험
한 벼랑길을 지나온 나그네가 이 곳 주막에 들러 잠시 휴식을 취하였을 것이다. 마
을 주민이 지금도 동제를 지내는 서낭당은 석현성 고갯마루 길 옆의 정자나무와 함
께 옛 정취를 더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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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65
▼ 고모산성
출토 유물로 보아 470년경에 처음 축조한 것으로 짐작되며, 이후 여러 차례 증축
과 개축을 반복하였다. '경북팔경' 중의 하나인 진남교반을 사이에 두고 어룡산과
마주보고 있는 천연 요새이다.
서쪽과 남쪽은 영강이 감싸고 있고 동쪽에는 오정산(810m)에서 뻗어내린 험한
산등성이가 있다. 따라서 서쪽은 절벽을 그대로 이용하여 바깥쪽만 쌓는 편축식으
로, 나머지 삼면은 지세에 따라 성벽 안팎을 쌓는 협축식으로 성벽을 쌓았다.
성의 규모는 길이 약 1.6㎞, 성벽높이 2~5m, 너비 4~7m 정도이다. 성벽이 대부
분 허물어지고 남문지와 북문지, 동쪽 성벽의 일부분만 남아 있었는데 근래에 옛
돌을 이용하여 복원했고, 고모산성의 익성으로 불리는 조선시대 관성인 석현성도
학술조사를 통해 원형을 확인한 뒤 문루와 성곽 복원을 끝냈다.
고모산성위에 서면 진남교반의 수려한 풍경이 한눈에 든다. 이 고장에서 가장 높
은 백두대간의 백화산(1,054m)과 그 언저리에 주흘산, 성주봉이 아스라이 드리워
져 있다. 백화산은 성인을 따라 세상에 나타난다는 봉황의 수컷이라고 한다. 그 발
치에 이 곳 봉생리와 왼쪽에 봉황이 울었다는 봉명산, 오른쪽에 신라시대 고찰인
봉암사를 두고 뒤로 이화령과 시루봉으로 날개를 펼친 거대한 봉황새의 형상을 하
고 있다. 고모산성에서 서쪽 성곽을 타고 영강과 진남숲쪽으로 내려오면 이끼 낀
옛 그대로의 허물어진 산성을 만난다. 자취만 남은 옛 성곽이 높고 새롭게 복원 축
조 된 현재의 산성보다 더 어울리는 까닭은 지금도 옛 선인들의 손때와 땀과 숨결
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 진남교반과 신현리 고분군
조령천이 영강에 합류하였다가 돌아나가는 지점에 기암괴석과 깎아지른 듯한 층
암절벽을 이루고 노송이 우거진 강변에는 철교·구교·신교 등 6개의 교량이 나란
히 놓여 있어 진남교반이라 불린다.
신현리 고분군은 고모산성 바깥쪽 산자락에 2세기 중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
다. 고모산성 축조시기인 3세기보다 약간 위에 조성된 것으로 산성과 관련이 있는
고분으로 보인다. 이 곳 30여기의 고분에서는 석실과 석곽묘, 선반 등 다양한 유물
까지 발굴되어 보존되고 있다. 이곳은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고 있어 풍수지리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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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사이에서는 오래 전부터 명당으로 지목돼 왔다고 한다.
▼ 토끼비리 (명승 제31호)
조선시대 영남과 한양을 잇는 영남대로 상의 길 중 가장 험한 구간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을 오고 가는 수많은 발길에 거친 바위가 반지르르하게 닳아버린 모습에
서 오랜 세월을 느낄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고려 태조 왕건이 남쪽으로 정벌하던 중 이곳에 이
르러 길이 막혔을 때 토끼가 벼랑을 타고 달아나면서 길을 열어주어 진군할 수 있
었기 때문에‘토천’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토끼비리의‘비리’란‘벼루’의
경상도 사투리로 강이나 바닷가의 위험한 낭떠러지를 말한다.
▼ 영남의 첫 관문-문경새재
조선시대 영남지역에서 한양을 향하는 중요한 관문이었던 문경새재의 역사는 삼
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시대 초기 새재 길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나 후
삼국 역사의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설화들이 남겨진 이곳은 우리 땅에 국가가 형성
된 이후부터 중요한 교통로였고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문경과 괴산, 충주를
연결하는 국도가 개통된 지금은 교통로로서의 중요성은 사라졌지만 오랜 시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옛 길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문화유적을 찾는 사람들로 붐빈다.
조령산과 주흘산을 넘어가는 길은 임진왜란 이후 만들어진 주흘관, 조곡관, 조령
관의 세 관문으로 가로막혔다. 임진왜란 당시 관문 하나 없이 무방비로 충주까지
왜군을 통과시켜 한양을 적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했던 새재 길은 이후 굳건한 성벽
을 쌓아 방비하였으나 다시 이곳을 통과하려 했던 외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하니
사후약방문이 되고 말았다. 경상도의 선비들이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한양으로 향
하던 중요한 통로였고 영남과 충남을 연결하는 관문이었던 제1관문인 주흘관에서
제3관문인 조령관까지의 6.5㎞ 길은 산책을 즐기듯 걷기에 그만이다.
조선 후기 한글 비석인‘산불됴심비’와 조령원터, 교구정터 등 옛 모습과 높고 험
하였던 고갯길에서 안녕을 기원하는 성황당의 모습이 자연 속의 산책을 더욱 즐겁
게 한다. 새재의 옛 모습을 전시하는 새재박물관도 놓치면 아쉽고, 조령관에서 이
어지는 조령산 등반도 자연 속으로 더욱 깊이 다가가는 탐방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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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2012년 7월
역사투어의 설렘과 다양
정 재 열(문화예술분과장)
하늘은 적당히 흐려 있는 가운데 예약회원 38명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동참하지
못한 회원을 제외한 30명을 태운 관광버스가 문경역사탐방목적지를 향해 구종점
세이브존 앞을 출발한 시각은 8시 46분이었다. 출발예정시각에서 겨우 16분밖에
지체되지 않았으니 일단 순조로운 출발이다.
성남시내를 벗어나자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별 이상 없겠지’하는 마음이었지만
왠지 한 구석엔‘혹시나’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화관광해설사『이상
무!』. 점심식사예약『이상 무!』. 점심식사인원을 38명에서 33명(32+문화관광해설
사)으로 조정하였다.
여주휴게소에서 합류한 최신영부부를 태우니 오늘의『문경고모산성 및 새재역사
탐방단」은 32명으로 확정, 관광버스가 중부내륙간고속도로로 접어들면서 거의 막
힘없이 순항하는 것을 보고 어느 순간엔가 잠속으로 빠져 들었다.
문경IC를 빠져나오는 길을 코치하여 진남교에 도착하니 10시 46분. 정확히 2시
간을 달려 제1목적지에 닿았다. 김선희문화관광해설사와 접선, 회장님과 사무국장
에게 인사를 시키고 오늘의 답사일정을 모두 맡겨버리고 나니 홀가분한 기분이 되
었다.
예전에는 영남지방에서 한양까지 가기 위해서는 3개의 주요 관문을 통과하여야
했다. 삼강나루가 그 제1, 고모산성이 그 제2, 새재가 그 제3인 것이었다. 고모산성
의 토끼비리길을 탐방하며 해설을 들어보니 과연 그 험난한 지세가 읽혀졌다.
일정은 예정시간표대로 착착 진행되었다. 그리고 문화관광해설사가 설명을 아주
잘 해주어서 모두들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문경읍장으로 있는 중학동기에게 특별
히 청을 넣어 문경시에 배속되어 있는 28명 중에서 배정 받은 해설사이기 때문에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69
2012년 7월
당연히 A플러스급이리라 여기긴 했어도 실제로 해설을 들어보니‘과연’이었다.
경북8경 중 하나인 진남교반에 있는‘영남매운탕’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1시 20
분에 문경관문을 향해 출발하였다, 가는 길에 새로 단장한 <청운각>에 들러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문경초등학교 교사직으로 있을 때의 하숙집을 둘러보고 관문주차장에
도착하니 1시 50분이 되었다. 여기서부터는 목적지를 정함이 없이 시간이 흐르는
대로 맡겨두기로 했다. 즉 올라가는 데 1시간 30분, 내려오는 데 1시간 30분으로
하여 어디가 되었든지 간에 1시간 30분 후에는 그 자리에서 걸음을 돌려 내려오기
로 하였던 것이다.
교귀정(交갋亭). 반환점이다. 아쉽다. 그러나 어쩌랴! 오늘 주어진 시간은 여기까
지 뿐인 것을.
5시 4분. 노익장을 과시한 이광섭 부회장님의 도착으로 집결 완료. 『최동욱의 3
시의 다이얼』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멜로디와 멘트를 들으며 아침에 오던 길을
되짚어 올라왔다. 아쉬움이 남는 여행이었지만 그런 대로 잘 익은 남사모의 하루가
파랗게 커 올라오는 들판의 벼 포기 위로 버스안의 노래방열기를 받아 더욱 붉고
선명하게 서녘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강의자료
10년의 복원, 100년의 기다림 남한산성행궁
노 현 균(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 문화유산팀장)
1653년 8월, 대만을 떠나 일본으로 가던 중 폭풍우로 배가 난파되어 표류하게 된
네덜란드 상인 하멜일행은 제주도에 도착하여 한양으로 호송된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1654년 8월 효종의 호위부대에 배치되어 근무하던 중 청나라 칙사가 한양에
오자 북벌에 대한 청의 의심을 피하기 위하여 도성에서 약 50㎞ 정도 떨어진 튼튼
한 요새로 이들을 보내지게 된다.
70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2012년 7월
당시 기록인 하멜표류기에는 이 튼튼한 요새에 대하여‘왕이 전쟁 시 피난하는
곳으로 고위 관직자가 살고 있으며, 3년분의 식량이 저장되어 수천 명의 사람이 지
낼 수 있는데 남한산성이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왕이 피난을 올 때 머물며, 고관대작이 살고 있는 곳, 바로 남한산성행궁이다. 국
가 사적 제 480호로 지정된 남한산성행궁은 병자호란 당시 임금의 피난뿐만 아니
라 조선후기까지 여주로 가는 능행차시 임금이 머물렀던 곳이며, 현재 서울 강남과
성남 판교를 아우르는 너른 광주유수부의 읍치공간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행궁의 공간은 치소로 사용된 외행전 영역과 침소의 공간인 내행전 영역 등으로
구성되어 도성의 궁궐을 축소한 모습으로 이후 숙종 때 행궁 좌측으로 종묘 위패의
임시보관처인 좌전과 우실을 세워 좌묘우사를 이루고, 정조 때는 행궁의 얼굴인 한
남루가 증축하여 3문을 이루었다. 또한 순조 때는 정조 때 통합된 수어사 겸 유수
의 권세를 바탕으로 행궁 좌측으로 좌승당과 일장각 등 광주 유수부의 부속시설들
이 확장되었다.
병자호란이라는 한민족의 쓰라린 역사를 배경으로 굴욕과 치욕의 상징으로만 생
각하던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우리 선조들은 남한산성과 그 중심인 행궁을 더욱
증축하며, 보강해 왔다. 이는 국가의 안위가 위협받을 때 임금을 비롯한 종사의 가
장 단단한 보장처로 남한산성을 믿었던 것이다.
구한말까지 이러한 남한산성의 입지는 부족함이 없었으나 나라를 일제로부터 되
찾고자 모인 의병이 내분으로 무너지면서 남한산성도 무너지고, 나라도 무너졌다.
그리고 흐른 100여년의 세월에 행궁은 간데없고, 빈터에는 호텔이 세워져 유원지
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뜻을 같이한 도민과 경기도의 의지로 100여 년 전의 모습으로 환원하는 복원공
사가 진행된 지 10여년이 흘러 2012년 5월에는 낙성연이 개최되었다. 남한산성행
궁 중건을 완료하고, 100여 년 전의 모습으로 국민에게 되돌려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행사가 끝나면서 복원과정에서 있었던 여러가지 어려운 일들이 머릿속을 스
쳐 지나갔다. 장구한 남한산성의 역사에 한 줄이 추가되는 순간 내 두 눈에는 눈물
이 흐르고 있었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돗음 해야 한다. 내친김에 우리의 유산에서 세계인의 유산으
로 인정받을 가치가 있는 곳이 남한산성이다. 이는 우리에겐 그동안 유원지라는 왜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71
2012년 7월
곡된 남한산성 이미지를 문화유산의 공간으로 바꾸는 계기가 될 것이며, 세계인에
게도 또 다른 한국 문화에 대한 홍보의 장이 될 것이다.
남한산성은 유럽의 여느 세계유산처럼 보는 순간 감탄을 자아내지는 못할지 모
른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내는 것보다 검소함을 추구하였던 우리 선조가 그래왔던
것처럼 남한산성에 와서 찬찬히 곱씹으면, 어느 순간 투박한 원석은 보석으로 바뀌
어 있을 것이다. 진정한 남한산성의 가치를 알기 위한 노력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연재 6회
1779년 정조의 능행과 남한산성
김문식(단국대 사학과)
능행의 의의
1) 국왕의 통치력 과시
1779년의 능행에서 정조는 자신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음을 과시하고자
했다. 먼저, 정조는 자신이 선왕으로부터 이어진 정통성이 있음을 보이고자 했다.
행차가 출발하려 할 때 정조는 군대를 동원할 때 사용하는 信箭을 내주며, 자신의
信箭이 명에서 조선으로, 영조에서 자신으로 이어진 것임을 강조했다.
이 信箭은 예전의 이른바 냰弓(붉은 색의 활)과 냰示(붉은 색의 화살)이다. 우리나
라는 일찍이 皇朝에서 九章의 복식과 九錫의 은전을 받았는데, 이 신전도 하사받은
것이다. 내가 政務를 보던 초기에 선대왕(영조)께서 이것을 나에게 내려주셨는데,
이것은 궁중에 전해오던 물건이다. 옛적부터 매양 군사가 움직일 때가 되면 반드시
車駕앞에 이 신전을 세웠는데, 오직 정벌의 뜻이다. 정조는 효종과 세종의 왕릉을
참배하고 나서, 세종, 효종, 숙종, 영조의 사업을 繼述할 책무가 자신에게 있음을
강조했다.
英廟(세종)와 孝廟(효종)의 盛德과 大業을 어찌 감히 형용하여 말할 수 있으랴마
72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는, 오늘에 있어 繼述하는 방안은 바로 왕위를 계승한 나 小子의 책임이다. 내가 오
늘 두 능을 전배하고 추모하는 가운데, 조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이 더욱 절실했다.
우리 肅祖와 英考께서 孝廟의 포부를 추모하고 중국(明)의 멸망을 통탄하여 繼述
하는 도리를 극진히 하지 않음이 없으셨으니, 이는 왕위를 계승한 내가 법도로 삼
을 만하다. 부덕한 내가 만에 하나라도 聖祖의 聖德과 방불하기를 바라겠는가마는,
구구하게 스스로 힘쓰는 마음만은 선조의 뜻을 이어 계술하고 훌륭한 뜻을 실추시
키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데 계술을 잘 하는 방법은 참된 마음으로 政事를 행하여
실제 효과를 얻는데 달려 있다.
숙종대왕께서 일찍이 하교하시기를‘진실로 백성에게 이롭다면 살갗인들 아끼겠
는가’라 하셨고, 선대왕(영조)께서 늘 이 하교를 絲綸에서 일컬었는데, 나 小子가
곁에서 듣고 지금까지 마음속에 엄숙히 새기고 있다. 내가 왕위를 계승한 이후 늘
두 聖朝의 덕을 생각하여 우러러 체득할 방도를 생각했는데, 백성에게 편리하고 이
로운 일이라면 어찌 살갗을 아끼지 않을 뿐이겠는가? 약간의 國用이 축소되는 것
이야 어찌 돌아보겠는가?
이외에도 정조는 능행을 하는 동안 선왕 때의 관례를 실천함으로써, 선대에서 이
어지는 정통성을 중시했다.
왕위의 계승성을 중시한 정조는 軍令을 확립함으로써 국왕의 권위를 높이고자
했다. 능행을 출발하기 직전, 정조는 병조판서(정상순)와 훈련대장(홍국영)을 불러
능행 중에 군령을 엄격하게 할 것을 당부했다.
이번 궋幸은 길이 매우 멀어 가까운 능에 動駕하는 것에 견줄 것이 아니다. 우리
나라는 文治를 숭상하고 武備를 닦지 않아, 사람들은 병사 일에 익숙하지 않고 병
사는 조련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궋軍할 때마다 비록 1舍(30里)의 거리라도 달리
면 다들 숨이 차서 진정하지 못하는데, 장수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군병들도 예
사로 여긴다. 하물며 훈련대장은 三軍의 司命이고, 元戎(병조판서)은 국가의 重任
임에랴.
예전 唐나라 玄宗의 開元초기에 곇山에서 講武할 때 군법이 威儀를 잃자 병부상
서 郭元振을 처벌한 것을 史家들은 지금까지도 일컫는다. 이 하교는 군대에 誓戒하
는 것과 같으므로 훈련대장은 힘쓰라. 車駕를 扈從하는 일과 衛內를 돌며 경계를
서는 것은 本兵의 임무이므로 병조판서도 힘쓰라. (중략)
2012년 7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73
2012년 7월
74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모임 스케치
한여름의 남한산성
신 창 규
7월 29일 일요일 남.사.모 정기모임이 있는 날이다. 달마다 가장 기다려지는 날
이기도 하다. 열대야 더위에 밤잠을 설치고 아침에 날씨를 확인해 보니 삼복더위에
걸맞게 낮 최고기온이 33℃를 웃돌 거라는 날씨예보다. 간편한 차림으로 집을 나
와 남문관에 도착하니 9시 30분, 부지런한 김진원 사무국장이 먼저 도착해서 반갑
게 맞아준다.
커피 한 잔하며 담소를 나누는 가운데 회원 분들이 속속 도착하였고 10시가 넘어
가자 사무국장의 소개로 회원들이 자기소개와 인사를 하였고, 도중에 신동수 부회
장님 가족이 도착하여 인사를 하고 전보삼회장님의 마지막 인사말이 끝나고 산행
을 시작하였다.
행궁 옆의 침쾌정을 시작으로 영월정에 올랐다. 날씨가 무더워 벌써 이마에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영월정에서 잠시 쉬며 담소를 나누고 단체사진을 촬영하고 숭렬
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숭렬전 약수터에 목을 축이고 사무국장의 숭렬전에 대한 설
명을 듣고 나서 예정했던 수어장대 탐방로가 가파르고 날씨가 무더운 관계로 취성
암과 어정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취성암으로 향하던 중 늦게 도착하신 신현일 감사님과 조한숙 작가님 내외분이
합류하셨다. 취성암은 남한산성 송림숲 20만평의 한가운데 위치하여 술이 잘 깨는
곳에 있는 바위로, 상당한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는 회장님과 손종구 회원님의 설명
을 들었다. 그리고 취성암은 침대크기의 평편한 바위라고 하는데 산성과 행궁복원
사업 이전에는 차량통행이 가능한 길이었고, 누구 하나 관심을 두지 않았던 관계로
이름 모를 양상군자께서 떼어갔다는 이종화 부회장님의 설명을 들으며 씁쓸한 마
음 금할 길이 없었다.
2012년 8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75
취성암을 떠나 아래어정에 도착하였다. 약수터의 대포에서 나오는 약수로 대포
한 잔하며 목을 축이고 삼림욕하기 좋은 송림숲속으로 발길을 돌렸다.
숲속 산성에서 가장 큰 바위가 있는데 예전에 무속인들이 기를 받기 위하여 기도
하던 곳인데 지금은 공원구역내의 무속행위 단속이 있어 사라졌다고 한다. 회원들
이 기를 받는다며 너도나도 바위 위에 올랐다. 부디 좋은 기를 많이 받아 하시는 일
들이 잘되고 남사모도 더욱더 잘되기를 마음속으로 빌어본다.
송림숲 속에서 담소하고 웃는 사이에 선두와 거리가 생겨 세 팀으로 나뉘어져 남
문관으로 향하게 되었다. 비빔밥과 막걸리 한 잔으로 점심을 맛있게 먹고 오후에
예정된 사업단 노현균 팀장으로부터 남한산성 행궁발굴과 복원사업의 경과에 대한
설명을 듣고자 마을회관 회의실에 모였다
노현균 팀장으로부터 남한산성 행궁발굴과 복원 과정에서 있었던 갖가지 희로애
락으로 얽힌 사연과 문화재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우리 남.
사.모가 해야 할, 또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것을 새삼 가슴깊이 새기는 하루였다
강의 자료
등산이란
고 태 우
<등산의 역사적 기원>
알피니즘(Alpinism)이라는 말은 스위스를 가운데 두고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오스트리아 등 다섯 나라에 걸쳐 있는 유럽 알프스의 고산 지대 / 불어의
Alpinisme에서 시작하여 영어 Alpinism, 독일어 Alpinismus, 이탈리아어로는
Alpinismo 등으로 불리며, 오늘날 등산을 뜻하는 국제 공통어가 됨 / 등산가를 '알
피니스트(Alpinist)', 등산학교를 '알파인 스쿨(Alpine school)', 산악회를 '알파인
클럽(Alpine club)', 등산용 지팡이를 독일어로 '알펜 슈톡(Alpenstock)' 이라고 하
는 것도 모두 알피니즘에서 시작된 말. 알피니즘은 등산의 역사적 기원 때문에 생
2012년 8월
76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겨난 말일뿐 '알프스 등산이라는 좁은 뜻이 아니라, 널리 일반적인 등산을 뜻한다'
고 프랑스의 등산가 뽈 베시에르가 그의 저서 <알피니즘>의 첫머리에 밝힘.
<알피니즘, 다시 말해서 등산이란 무엇인가?>
등산(登山)은 산을 오른다는 뜻이지만, 원래 서구인의 사고 방식과 행동 양식에
서 온 서구적 개념이다. 즉 등산은 알피니즘을 번역해서 만든 말이다.
<등산에는 고전적 의미와 현대적 의미>
전자는 모험과 도전의 의미 / 후자는 탈출 수단의 의미 더 나가 정신적 또는 육체
적인 건강운동의 의미 / 알피니즘의 정의 '눈과 얼음에 덮인 알프스와 같은 고산에
서 행하는 등반'
<알피니즘 - 등산이란 무엇인가?>
"등산”이란 소박한 뜻에서 산에 오르는 것을 말한다.“ 등산은 스포츠며 탈출이고
정열이기도 하며 일종의 종교와 같다”고 마칼루(8,481m)를 초등한 프랑스원정대
장 쟝 프랑코가 말했다. 등산은 육체적이면서도 내면적인 요소를 많이 갖고 있다.
<알피니즘의 기원과 정의>
“수렵·신앙·채광 등의 목적으로 산에 오르는 일은 옛날부터 있었던 일이지만 /
등산세계의 등산 즉 알피니즘은 높은 산, 새로운 산, 험난한 산에 오른다든지, 등산
하는 자체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찾고, 기술적이고도 종합적인 지식을 기르며, 강렬
한 정열로 전인격적(全入格的)으로 산에 도전하는 태도를 가리키며, 그와 같은 마
음가짐으로 등산하는 사람들을 알피니스트라고 함 / 알피니즘이란 말은 1786년,
스위스의 학자 H.B.소쉬르가 몽블랑을 등정한 무렵부터 사용하게 되었는데, 실제
로 일반화된 것은 19세기 후반경부터이며 한국에서는 1920년경에 비로소 이와 같
은 풍조가 일어났다.
이 무렵부터 학자와 학생들 사이에 학술조사를 겸한 스포츠로서의 등산이 보급
되기 시작하였으며, 8·15해방 후에는 새로 들어온 등산 기술과 현대장비의 보급
으로 국내뿐만 아닌 해외의 고봉·명산에까지 도전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기도
2012년 8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77
했다.
세계 등산과 한국 등산의 변천과정
1336년 이탈리아의 시인 페트라르카는 프로방스의 몽벤투(1920m)에 올라가 아
버지에게 편지로 고된 등반 가운데의 즐거움을 전함 / 1574년 세계 최초의 등산기
술서가 취리히대학 지물러 교수에 의해 출판 / 18세기 중엽 알프스의 최고봉 몽블
랑(4807m)에 큰 관심을 가졌던 제네바의 자연과학자 오라스 베네딕트 드 소쉬르
가 몽블랑 등반자에게 상금을 걸음 / 1786년 프랑스 샤모니의 의사 파카르와 수정
채취인 팔머가 정상등정 <알프스의 황금시대> - 1855년 알프스 제2의 고봉 몬테로
자(4634m)를 영국의 스마이스 일행이 등정하는 등
영국 등산가를 중심으로 미등의 거봉들이 잇따라 등정 / 1857년 세계최고(世界
最古)의 등산회인 알파인클럽이 영국 런던에서 발족 / 1865년 영국의 판화가 에드
워드 휨퍼가 마터호른(4478m)의 등정(하산 도중 로프가 끊어져 추락) / 1897년 남
아메리카의 아콩카과(6960m)가 영국의 피츠제럴드대(隊) 등정 / 1910년 알래스카
의 매킨리(6187m)가 미국의 테일러 일행 등정 / 1889년 아프리카의 최고봉 킬리만
자로(5895m)가 독일의 마이어 등 등정 / 1936년 틸먼 등 영미합동대의 난다데비
(7817m) 등정 <히말라야의 황금시대> --1950년 제2차세계대전 후 프랑스의 M.
에르조그대(隊)가 안나푸르나(8091m) 등정 / 1953년 영국의 J. 헌트대(隊)가 에베
레스트(8848m) 등정 / 독일대가 낭가파르바트 등정 / 1954년 이탈리아대가 K2 등
정 / 오스트리아대가 초오유 등정 / 1955년 프랑스대가 마칼루 등정 / 1956년 일본
대가 마나슬루(8125m) 등정 / 스위스대가 로체 등정 / 오스트리아대가 가셰르브룸
Ⅱ 등정 / 1957년 오스트리아대가 브로드피크 등정 / 1958년 미국대가 히든피크
등정 / 1960년 스위스대가 다울라기리 등정 / 1964년 중국대가 고사인탄 등정 <세
계의 8000m급 거봉의 초등정 마감> -- 1960년대 등정된 산을 더 험난한 루트에
의한 등반하는 형태. 1970년대부터는 단독등반에 더 많은 가치가 인정 / 위험도가
높은 등반형태로 변화됨
한국의 등산역사
고대부터 숭천숭산사상(崇天崇山思想) - 등산의 뿌리 / 단군신화 - 단군의 강림
2012년 8월
78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은 그 대표적인 예 / 산에 있는 사찰은 산이 신앙의 수련장임을 뜻함 / 삼국사기에
의하면 BC 30년 고구려 동명왕의 왕자 온조(溫祚)와 비류(沸괥)가 부아악(負兒
嶽;지금의 북한산 인수봉)에 오른 것이 최초의 기록 <근대 이전의 등산>-- 등산
의 시초는 신라 화랑도의 활동에서 볼 수 있으며 / 대상지역은 신라 전국토. 혜초
(慧超)가 723∼727년에 중앙아시아지역인 파미르고원·힌두쿠시 일대를 여행한
것이《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에 기록 / 고려 때 정도전의 백두산 등정 / 조선
시대 이성계의 덕유산 등정 / 안평대군의 북한산 등정 기록 / 일손의 지리산 등정
(1480) / 이이의 금강산(1560)과 청학동 소금강 기행(1569) / 이명한(굃明漢)·정곤
수(鄭崑壽) 등의 청학동 소금강 등행(1640) / 김창협(金昌協)의 금강산·설악산 등
행 등의 기행록인《동유기》/ 정시한(丁時翰)의《산중일기(1686)》/ 송진명(宋眞明)의
《백두산지도(1730)》제작 / 남하정(南夏正)의 계룡산 등산(1731) 등은 하나의 등산
사적인 기록 / 박종(朴琮)의《백두산 유록(1764)》에 있는 백두산 집단등정에 관한
기록이 있고 / 특히 김정호(金正浩)의 1860년대《대동여지도》제작을 위한 백두산
등 전국각지의 산천답사는 학술목적의 등산으로 평가 / 1886년에는 영국인 하즈반
드 일행의 백두산 등정과 그 뒤, 미국·일본·러시아·영국인 등의 백두산 등정 기
록 등 <근대의 등산> -- 근대등산의 표본인 암벽등반은 임무(林茂)와 영국인 아처
가 1926년 5월 북한산 인수봉을 최초로 등정 / 1930년대부터는 서울 근교 암벽을
차례로 등반되었고 / 1927년에는 박석윤(朴錫胤)이 알프스 몽블랑 등산기를 발표 /
1920년대에는 한국여성산악부가 설립되고 / 1931년에는 일본인을 중심으로 <조
선산악회>가 창설 / 1930년대부터는 서울 근교 암벽을 차례로 등반됨 / 1934년
김정태·엄흥섭이 도봉산 만장봉을 초등하여 한국인의 독자적인 초등반이 1938년
말경부터 <백령회(회장 엄흥섭)>가 결성되면서 양두철·주형렬 등이 서울 근교
암벽에서 새로운 코스를 통한 초등에 성공 / 1941년 12월부터 1942년 1월까지 마
천령산맥을 종주 등 <현대의 등반> -- 8·15∼1960년 // 8·15 후 <한국산악
회>가 설립 - 주로 학술조사 목적의 등산이 성행 / 6·25 후 대학산악부가 창설
되어, 근교등산에서 설악산 등 원정등산으로 이동 / 한국산악회는 1955년 설악산
등반, 1956년과 1957년의 동계 한라산 등반을 하여 한국등반
운동의 새로운 전기마련 / 학생산악운동으로는 1955년 서울문리대의 설악산 천
불동 초등반, 1956년 서울공대의 지리산 전산종주 등 / 각 지방에 산악단체가 창설
2012년 8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79
됨 -- 1960∼1980년 //1960년부터 한양공대 산악부가 도봉산 선인봉과 북한산
인수봉에서 새로운 코스를 개척하여 초등하면서 암벽등반이 성행 / 각종 산악단체
가 설립되면서 이들 단체를 규합한 대한산악연맹이 1962년 창립됐고 / 등산장비도
국산으로 개량되어 새로운 산의 등반코스가 개척됨 / 1962년 경희대학교의 히말라
야 다울라기리 Ⅱ봉(7751m) 등반을 시작 / 1970년 추렌히말 원정 등의 해외등반이
있었고 / 1977년 대학산악연맹 에베레스트원정대(대장 김영도)는 9월 15일 고상돈
(高相敦)과 셰르파 펨바노루부가 에베레스트등정에 성공 / 1978년에는 한국산악회
의 유동옥(兪東玉)과 셰르파 파상놀브가 안나푸르나 Ⅳ봉을 등정 / 1979년에는 알
래스카의 매킨리를 한국일보대·고령산악회대·고려대학교산악회 등 3개 대가 등
정에 성공 -- 1980년 이후 // 해외원정이 수적으로 급증하고 국내에서는 동계 빙
벽등반이 새로운 한계도전의 등산운동으로 등장 / 1980년 악우회를 비롯하여 4개
대가 알프스의 아이거 등 3대 북벽등정 성공, 동국대학교산악회는 히말라야 마나
슬루를 무산소 등정, 서울문리대산악회는 안데스의 아콩카과를 등정하여 / 1980년
부터 1985년까지 68개 대가 해외원정한 것으로 나타남 / 기타 인접국인 일본·타
이완을 제외한 남아프리카·북아프리카·알프스·남극지역·북극지역 등에도 39
개 대가 도전 / 1981년 에코와 은벽 합동의 알프스 드류서벽 등정, 성균관대학교산
악회의 안나푸르나 Ⅰ봉 남봉 등정도 있으며 / 1982년 대전 자일클럽의 고준바캉
등정은 세계적인 초등기록이 되었고 남선우(南善佑)의 동계 푸모리초 등반은 한국
최초의 히말라야 동기 초등기록 / 1983년에는 허영호(許永浩)의 마나슬루 무산소
단독초등, 남선우의 아마다브람에 동기 무산소단독초등 / 1986년 울산대산련의 이
규진 등이 히말출리 북봉에 세계초등반,홍석하 등의 남극대는 최고봉 빈슨에 등정
/ 1986년 K2 / 1987∼1988년 8611m의 에베레스트 동계 등정 / 1990년 8068m의
가셔브롬 1봉 / 1991년 8028m의 시샤팡마 남벽 등정 / 1992년 낭가파르바트 등정
/ 1993년 한국여성원정대를 비롯한 3개 원정대가 에베레스트 등정 / 1995년 7월
12일 에스파냐의 합동원정대로 등정에 성공 / 1995년 10월 2일 엄홍길이 8516m의
세계 4위봉 로체 등정에 성공 / 1984년 토왕성 빙폭과 좌우암벽 등정 / 1985년 대
승폭포 빙폭을 초등정하여 등반능력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으며 난이도가 높은 볼
더링과 하드프리등반이 시작됨.
2012년 8월
80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연재 7회
1779년 정조의 능행과 남한산성
김 문 식 (단국대 사학과)
[남한산성의 육성]
남한산성을 수축하자는 논의는 임진왜란이 마무리된 직후부터 시작되었는데, 宣
祖는 廣州가 경기도의 巨鎭이고 南道를 왕래하는 요충지이므로, 수원의 독산산성
처럼 남한산성을 쌓고 군대가 지키게 하면 서울을 보호하고 여러 陣들을 조절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일찍이 남한산성의 형세가 우리나라의 으뜸이라고 들었다. 廣州는 畿甸의 巨鎭
으로 남도를 왕래하는데 있어 요충이 되는 곳이다. 만약 이곳에 산성을 수축한 다
음 禿城처럼 군사를 조련하고 수령을 골라 지키게 한다면, 안으로는 京都의 保障이
되고, 밖으로는 諸陣을 控制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선조는 산성을 쌓을 곳의 지형도를 그려오게 했지만, 산성을 수축하지는
못했다. 남한산성이 수축된 것은 인조 대였다. 1624년(인조 2) 굃曙의 지휘 아래 실
제 공사는 승려 覺性이 八道都摠攝이 되어 진행했고, 1626년에 축성 공사를 마무
리했다. 그러나 얼마 후 병자호란이 일어났고, 인조가 이곳에서 抗戰하다가 청에
항복하면서 남한산성은 대명의리론의 상징물이 되었다. 숙종대 이후 남한산성은
수리가 계속되었는데, 이곳은 도성의 남방 방어거점이었기 때문이다.
1779년 능행에서 정조는 7박 8일 가운데 4박 5일을 남한산성에서 보냈다. 영릉
을 참배하기 위해 이동한 시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남한산성에서 보냈던
것이다. 정조가 남한산성에 행차한 목적은 수도를 방어하는 산성의 관리 상태를 확
인하고 군사 조련을 참관하여 환난에 대비하려는 것이었다.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이 우리 조정에 있어 긴요하고 중대한 것은 漢나라 三輔와
唐나라 겱衛와 같을 뿐만이 아니다. 태평한 날이 오래되어 軍務가 폐기되고 해이해
져, 병사는 환난을 대비하기에 부족하고 성곽은 보루가 되기에 부족하다. 생각에
여기에 미치자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이 때문에 내가 왕릉을 전배하고 돌아가
2012년 8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81
는 길에 여러 날의 수고로움을 피하지 않고, 반드시 조련하는 것을 직접 보려고 한
것이다. 이는 편안하고 즐거운데 길들여진 將卒들에게 떨치고 일어나는 부지런한
뜻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남한산성은 정조가 방문하기 직전에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하였다. 이는 수어사
의 지휘 하에 1779년 3월부터 6월까지 진행되었는데, 정조는 남한산성이 수도의
保障處임을 강조하며 보수 공사의 유공자를 포상했다. 또한 남한산성의 서리들이
4천石이나 되는 곡식을 逋欠했을 때도 그 부담이 백성들에게 돌아가지 않게 하여
수도를 보위하는 백성들을 보호하라고 명령했다. 남한산성이 도성의 외곽 방어기
지임을 거듭 확인한 것이다.
정조는 보수 공사가 끝난 남한산성에 행차하여 산성 곳곳을 둘러보며 현장을 확
인했다. 이 때 정조는 사전 학습을 통해 남한산성 및 인근 지역의 연혁, 병자호란
당시의 戰況을 상세하게 파악하였는데, 이를 현장에서 확인하며 산성을 돌았다.
중략
2012년 8월
82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8월 스케치
9월의 산성
보헌 배 윤 옥
마치 듬진 오라버니 어깨처럼 의지하며 오르는 산성
한 발 한 발 근거리의 숲길은 오랜 친구 같다.
울퉁불퉁 솔잎 사이사이로
붉은 근육이 힘차고
충정의 넋이 스며서인가
짙푸른 솔잎은 하늘 품에 안긴 채 깊고 인자하다.
배인 땀에 스미는 바람이 서늘한 골짜기
도심의 심장답게 다 품은 것 같은 우직한 산정이 남성다운데
그 길에 어머니 숨결처럼,
세상의 시름들 겹겹이 낙엽에 재워 양분을 기르느라
발아래 밟히는 흙이 발효된 열기에 미끈거린다.
다람쥐 종종걸음이 시야에서 한참 재롱을 떨다 사라지는 가을 정취에는
거룩하게 가신님들의 한스런 비애도 바람 끝에 스며오는
인적이 없는 숲 속의 기온은 쾌청해서
도심의 소란함도 감히 끼어들지 못하고 달려오다 주저앉았겠다.
잠시 사색하며 오르다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서 솜털이 솟고
비상시를 대비한 호루라기를 생각하고는 혼자 웃다가
순간, 텅 빈 자유로움에 산성으로 다가서는 아직 수줍은 가을을 만났다.
바람도, 산도, 나뭇잎도, 나직한 소리로 만나는
그 몸짓을 눈보다 마음이 먼저 본다.
2012년 9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83
나는 지금도 산성에 오면
보헌 배 윤 옥
처음 서울로 올라와 몇몇 친구들과 함께 식사하러 왔던 기억을 떠올린다.
"남한산성" 이라는 이름이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아 친구에게 물었는데, 대뜸 병
자호란의 치욕을 상기시켜 주던....... 그 뒤 강산이 바뀌었을 만큼의 세월이 지나고
우연히 미사리 시인들 모임에서 지금의 사무국장이 소개해서 호기심에 참석한 것
이 남.사.모와의 첫 인연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그때의 남.사.모는 여타 모임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참 신선했고 그때의 모임은 지금보다 소수의 인원이었지만 정감
있고 즐겁고 유익한 시간들이 많아서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회를 거듭할수록
매력을 느끼다가 우리 땅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다 할까, 아니면 일에서 좀 벗어
나 여유를 즐길 수 있어서 일까, 암튼 나는 남.사.모에서 참 많은걸 배운다. 이런 말
이 어울릴지 모르지만 "애국심"이라는 말 우리는 나라를 위해 정말 큰일을 하신 분
들께 "애국자"라 칭하고, 애국은 감히 보통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말이 아닌 것처
럼 생각하고 살았다.
나만 그런가? 생각해 보면 자국에 대한 애정이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살기 바빠
잊고 있을 뿐이고, 잠시라도 해외로 떠나보면 한국에 대한 작은 무엇이라도 만나면
감동으로 가슴에 와 닿는다.
굳이 애국자까지는 아니어도, 우리가 행복하게 잘 사는 일이 보통 사람들의 소망
이고 보면 그것 또한 한 나라의 존망에 엄청난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
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애국심은 누구나 간직하며 잊지 말고 꺼내 봐야
할 대명제가 아닐까. 위로는 대통령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소명을 잊어서는
안 될,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으므로, 한 개인에서부터 집단에 이르기까지 밀알 같
은 마음으로 주변을 맑게 밝게 가꾸는 노력을 해 간다면 그 또한 애국일 것이다.
그리고 그 작은 힘들이 모여 큰일을 이루는 소위 국력이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정도의 상식은 아마도 초등학생도 알고, 가르치고 있을 것이지만, 실천되지 못함
으로 심한 개인주의에 안주하다 요즘 세상이 자꾸 무서워지고 있다.
차별이 만들어낸 이기와 욕망을 자제하고 개선하여 배려하고 대화하고 서로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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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중하며 타협하는 사회가 되면 많은 불행들이 해소되지 않을까,
나는 우리 땅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남.사.모 에서 키웠고, 덕분에 한발 더 나아
가 우리 땅을 두 발로 걷는 모험을 시작해 어언 5년이라는 세월을 걸으면서, 내 나
라, 우리 땅의 소중함을 몸소 배워간다. 사계를 엮어내는 금수강산의 풍경과 그 정
취에 취해 옛 선인들의 숨결을 더듬기도 하고, 더러는 시간을 거꾸로 옛날에 서 보
기도 하면서 지난 세월의 힘들었던 순간들도 반추하는 시간이 되기도 하면서, 올
여름 그 지독한 무더위에도 무주 구천동계곡을 따라 라제통문까지 걸었는데 너무
시원하고 아름다운 계곡이라 우리 회원님들께도 권해 드리고 싶은 곳이다.
그리고 여행을 떠나기 전에 자료를 찾다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었다. 대충, 무
주의 설천면에서 무풍면으로 가는 길목에 작은 굴이 하나 있다. 이름하여 `라제통문
(갥濟通門)`이다. 과거 신라와 백제의 경계와 동시에 교류의 역할을 수행했던 곳으
로 알려져 있다. 역사 속에는 이곳에 얽힌 의자왕의 딸 비화공주와 무열왕, 김유신
에 관한 얘기가 전해 오는데 백제와 신라의 전쟁이 끝날 즈음 의자왕이 사망한 뒤,
라제통문에 머물러 있던 신라진영에 의자왕의 딸 비화공주가 찾아가 스스로 백제
의 궁녀라 속이고 무열왕 앞에 가서 무열왕을 죽이려 했다가 실패했다. 하지만 비
화공주의 기품과 기개를 높이 산 무열왕은 백제군사에 의해 죽었던 자신의 딸을 떠
올려 비화공주를 살려주고 다시 백제로 돌려보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숨 가쁜 전시
상황에서 나타난 용서와 화해, 그리고 두 지역의 화합을 상징하는 곳이다.
그런데 위 이야기가 사실과 다르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한다. 라제통문은 삼국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일제시대에 일본이 착취를 위해 인위적으로 조성했
다는 것이고 즉 1910년께 일본이 근처의 금광에서 채굴된 금을 쉽게 운반하기 위해
굴을 뚫었다는 것이다. 그 기록은 군 행정을 기록한 일지에도 나타난다고 한다. 당
시‘기니미굴’이라고 불리다가 1960년대 무주구천동 33경을 설정하면서 이름을
바꾸고 백제와 신라의 관문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역의 자원을 알리는
과정에서 왜곡과 포장이 가미된 셈이다. 지금 라제통문을 사이에 두고 무풍면 사람
은 거창이나 대구로, 설천면 사람은 무주읍이나 대전으로 향하는 생활이 정착됐다.
그들은 라제통문을 일제시대의 아픔보다 삼국시대의 화합으로 기억되기를 원한
다.(자료인용) [갥濟通門] 앞에 서서 보니 이 이야기가 생각나서 내 나름대로 해석
을 해봤다. 신라와 백제 때부터 있었던 통문을 일제가 확장 내지는 보수를 했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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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85
도 있었을 것이라고, 함께 있던 도반들 왈, 맞아요, 맞아~!지금 우리는 부끄러움이
뭔지도 모르는 일본과 거대한 중국을 이웃하고 있어 간간이 불편한 소식들을 접하
면서 한국인으로서 작은 관심이라도 공유해 가고자 이 이야기를 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남한산성" 하면 병자호란을 먼저 떠올리기도 할 것이다. 세계 어느 땅인
들 중요한 몫이라면 피로 물들지 않은 곳이 드물다.
이제 우리는 남한산성을 임금이 국정을 살피기 위해 머물던 행궁이 있던 중요한
터로, 나아가 소중한 문화재와 아름다운 충의가 서린 성스러운 곳으로 새롭게 재인
식해야 하며 남한산성은 이제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를 기다리는 소중한 우
리의 유산이기도 해서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으로 더욱 아름다운 산
성으로 가꾸어 가기를 기원하면서 그동안 남한산성을 지키고 가꾸어온 많은 사람
들의 노력과 결실에 감사드린다.
9월 강의 자료
과거 급제 기록을 통해서 본 선조들의 삶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의 내용과 활용 -
양 창 진(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 정치학 박사)
사극(史劇)이 시청자들을 TV 앞으로 모으고 있다. 현대적 감각이 가미된“퓨전
사극”이라는 장르가 출현하여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바야흐로 사극 전
성시대이다. 최근의 사극에는 과거와 다른 특징이 있다. 첫째, 과거에는 주로 조선
시대를 다루었는데 이제는 시대를 거슬러 고려를 지나 고대(古代)까지 올라간다.
둘째, 왕실의 싸움이나 전쟁 등 이 주된 소재였으나 이제는 노비, 상인, 백정, 하급
무사 등 우리와 친숙한 사람들의 삶을 많이 다루고 있다. 셋째, 고증(考證)이 매우
치밀해 지고 있다. 이렇게 내용과 형식 등이 신선하기 때문에 시청자들로부터 사랑
을 받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은 깊숙한 서고에서 잠자던 전통문화 자료들이 디지
털 지식 정보로 탄생하여 대중과 소통하면서 가치를 새롭게 인정받게 되었기 때문
에 가능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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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이런 현상의 바탕에 우리의 기록문화가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 장서각
(藏書閣)은 조선 왕실이 소장하던 10만여 점의 고문헌과 명문가에서 기탁한 50만
여 점의 고문서를 소장하고 있다. 왕실 비빈이나 궁녀들이 보던 한글 소설과 각종
고문헌 등 다른 곳에 볼 수 없는 희귀자료들은 중요한 기록 유산들이다. 이 기록 자
료 중에 과거 급제관련 기록인 방목(榜目)이 있다.
한중연은‘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people.aks.ac.kr)’라는 최대의 역대인물 정
보를 제공하고 있다. 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 26,000여 명을 수록한 인물사
전과 고려 및 조선의 과거 급제자 명단, 성씨와 본관정보 등 인물 관련 정보들이 종
합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전체 수록 인물은 약 10만여 명이다. 이 중 과거 급제자
정보의 출처가 바로 방목이다. 방목은 모든 과거 시험이 끝난 후 만들어졌고 급제
자들은 이것을 베껴서 평생의 영광으로 알고 보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방
목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조선은 문치주의 국가여서 문과급제자의 기록인 문과
방목은 모두 남아 있다. 하지만 무과방목은 약 20%, 생원·진사시 급제 기록인 사
마방목은 약 80% 정도만 남아 있다.
방목은 과거 급제자들의 신상명세서이다. 방목에는 합격자 본인의 생년, 본관 및
아버지, 할아버지, 합격 당시의 거주지 등 다양한 가계 정보까지 같이 수록되어 있
다. 방목이 전산화됨으로써 다양한 통계가 가능해 지게 되었다. 가장 많은 과거 급
제자를 배출한 가문, 최연소 과거 급제자, 최고령 과거 급제자, 과거 급제 후 합격
이 취소된 사람 등 매우 흥미 있는 통계가 산출될 수 있다. 집현전 학사로 유명한
정인지(鄭麟趾, 1396∼1478)는 과거에 두 번 장원한 천재였음을 기록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흥밋거리 외에도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조선시대 문과에서는 보통 33명을 선발한
다. 그런데 어떤 해 무과에서는 5천 명 이상을 선발하기도 했다. 특별한 사정이 있
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우여곡절 끝에 과거가 치러졌는데 합격자 전원이 합격 취소
된 사례도 볼 수 있다. 정종과 예종 대에는 1번의 과거만 시행되었지만 영조 대에는
126번이나 과거가 시행된 기록도 볼 수 있다. 과거 시험은 한 번 한 번이 드라마라
할 수 있다. 역사는 인물이 만들어 왔다. 따라서 시대를 주도한 인물들의 출세의 출
발을 기록한 방목은 역사 그 자체의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주위에 이런 자료들
이 있고 인터넷을 통해 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이 자료들을 이용하여 역
사 속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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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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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9월 모임 스케치
자비로 세상을 항해하다
김 진 원
아침 바람이 청량하다. 남문관 야외 정원에 초가을 아침은 다소 쌀쌀하기까지 하
다. 물레방아가 쉼 없이 돌고 있는 풍경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감미롭
다.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한 회원들의 얼굴이 매우 밝아 보인다. 건강하다는 증표
다. 연세가 있으신 회원 분들이 많다 보니 모임 때만 되면 내심 걱정을 했다.
모두 27명의 회원들이 모였다. 모임 때마다 하는 인사돌리기가 끝나고 공지사항
이 전달됐다. 원래 30일 마지막 일요일이 우리 남사모 모임 날이다. 하지만 추석날
과 겹쳐 일주일 당긴 23일 오늘 하게 되었다.
오늘 오후 마을회관 세미나실에서 있을 강의가 소개되었다. 한국학 중앙 연구원
양창진(정치학 박사)교수의 역사 강의다. 회원들의 기대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한
분이 내 곁에 와서 오늘 올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역사 강의가 있다고 해서 굳이 왔
노라고 했다. 일을 진행하는 사무국장 입장에서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일행은 오늘의 탐방코스인 망월사로 향했다. 개천을 따라 내려가 동문에 이르러
망월사, 장경사 푯말을 따라 가파른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토록 시원하던 바람
에 햇살이 들어 이마에 땀이 송송 맺히기 시작했다. 외투를 벗는 회원들이 늘어갔
다. 한 번을 쉰 뒤 우리를 맞이한 일주문이 보인다. 새로 지은 듯 고운 자태에 싱싱
함이 묻어났다.
일체의 모든 글씨를 이곳 큰스님이신 비구니 법성스님이 직접 쓰신 거란다. 자항
문이란 뜻 모를 글씨가 일주문의 명패다. 비구니 스님이 주인인 절간이라 주변에
곱게 단장된 꽃들이 많다. 우리는 요사체로 발길을 옮겼다. 먼저 큰스님을 알현하
기 위해서다. 마침 법성 큰스님이 마당에 계셨다.
전보삼 회장님의 소개로 우리를 맞이한 큰스님은 인자한 노구를 가지고 계셨다.
올해 세속 나이로 84세. 그렇지만 정정하시다. 당신이 겪어온 비구니로서, 망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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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89
주인으로서 후일담을 이야기하신다. 일주문에 써있던 자항문
이란 의미를 설명하신다. 『자비로 세상을 항해한다』는 뜻이
란다. 젊었을 적 글씨체는 봐줄만했는데 이젠 늙어서 손이 떨
린다는 말씀에 잠심 웃을 수 있었다.
큰 스님과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대웅보전으로 자리를 옮
겼다. 화려한 색체의 대웅보전 안은 웅장했다. 닷집과 모셔진
불상들의 위엄이 대단했다. 대웅보전 옆에 서있는 13층진신
사리탑을 부처님이 바로 볼 수 있게 창으로 연결해 놓았다.
인연과 운명은 하나의 의식 속에서도 교류할 수 있어야 함이
다. 바로 옆 13층진신사리탑의 위용도 대단했다. 하늘을 찌를
듯하고 정교하게 세공되어진 조각들에 감탄을 연발한다. 그
탑을 에워싸고 있는 돌에 새겨진 불교 관련 조각들의 정교함
에도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전보삼 회장님의 끊임없는 설명에 모두가 귀를
열고 경청했다. 마지막으로 망월사 산신각으로 향하는 가파른 계단을 올랐다. 산신
각에 설치되어있는 보시함이 자주 도둑들에게 털린다는 회장님 말씀을 듣고 기분
이 씁쓸했다.
늘 고요한 시간 짬을 낼 시간이면 고운 목소리로 시낭송을 해주는 정흥숙교수님
의 시 낭송 목소리가 망월사 산신각 뜰에 아름답게 울려 퍼졌다. 일행은 산신각을
내려와 13층진신사리탑을 배경으로 단체 사진을 찍고 망월사를 떠나 점심 장소인
남문관으로 돌아왔다.
묶은지 닭도리탕으로 맛난 점심을 먹은 회원들은 기대하던 역사강의 세미나실로
자리를 옮겼다.
오후 2시. 강의는『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라는 거대한 자료를 하나씩 펼쳐가며
우리의 조상들 특히 족보에 관해 새로운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냈다. 또한 과거제도
에 관한 상세한 설명과 그 장단점 또 가장 많은 과거시험에 합격한 인물과 가문을
소개하며 회원들의 알고자하는 욕구를 충족시켜나갔다. 강의 막바지 회원들의 질
문이 끊임없이 이어져 열의가 대단했다. 우리는 9월의 정기모임을 남사모의 또 다
른 한 페이지로 남기며 행복한 하루를 함께했다.
2012년 10월
90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강의록
남한산초등학교의 잊혀진 역사를 찾아서
김명섭 박사((강남대, 문학박사, 한국근대사 전공)
평소 남한산성의 근현대사에 관심을 갖던 차에 남한산초등학교 동문회로부터 백
년사 편찬을 의뢰받고 지난해 10월부터 즐거운 역사여행을 떠났다. 남한산성과 관
련한 옛 신문을 뒤적이고 졸업동문 연락처를 찾아 그들의 추억담을 들으면서 새삼
남한산성의 뿌리 깊음을 실감했다. 그중 지금껏 1912년 3월 1일으로 알려진 초등학
교 개교역사에 마땅한 근거자료가 없음을 확인하고, 그 이전부터 광주소학교-광흥
학교-공립광주학교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광주학교(廣州學校)’라는 명칭은 대한제국(광무) 4년째인 1900년 처음 등장한
다.《 황성신문》1900년 10월 27일자 보도에 의하면, 당시 광주부윤을 맡은 정인석
(鄭寅奭)씨가 지금의 교육부에 전 승지 이윤종(굃胤鍾)의 집에 소학교가 설립되었
고, 국한문과 역사지지 등을 가르친다고 보고하였다. 대한제국 정부는 이 학교를
공립소학교로 인정하고 1901년 1월 17일 심승덕(沈承悳)을 광주부 공립소학교 교
원 판임관 6등으로 임명하였음이 ≪관보≫제1788호에 실렸다.
근대적인 학교는 1906년 당시 광주부윤인 오태영(吳泰泳)이‘성중(城中)’에 세운
광흥학교(廣興學校)로 시작되었다. 《황성신문》1906년 3월 31일과 7월 16일~24일
자 기사를 보면, 산성동 내 광흥학교는 교실을 새로 지을 수 없어 옛 경영의 영고
(營庫) 터인 영부청(營府廳)을 빌렸다고 한다. 이곳이 곧 오늘날의 남한산초등학교
터인데, 규모는 201칸으로 성내 건물 중 가장 장대하여 그 면모를 대강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설립 당시 광흥학교에는 학도가 60여 명에 달하였고, 교사로는 권태형(權泰珩)을
초빙하였다. 광흥학교는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성금모금에 열성이었는데, ≪황
성신문≫ 1907년 5월 16일자에 실린 학교성금 기부자 명단에 광흥학교 임원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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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91
지역유지, 학도들의 이름이 나타나 있어 매우 흥미롭다. 학교는 여름과 겨울 두 번
학업평가시험을 치루었는데, 2년 과정을 마친 학생들이 드디어 1908년 3월 10일
제 1회 졸업의 영광을 갖게 되었다. 역사적인 광흥학교의 첫 졸업생 명단과 졸업식
풍경은《대한매일신보》과《황성신문》에 잘 나타나있다. 이날 졸업 우등생으로는 석
송환(石松煥) 등 15명이며, 박치은(朴稚殷) 등 7명이 3학년으로 진급하였고 이호용
(굃浩괟) 등 2명이 2학년생으로 각각 진급하였다.
광흥학교 생활 중 눈에 띄는 점은 당시 광주군내에 설립된 광성(廣成)·수서(水
西)·한산(漢山)·광명(廣明)·광릉(廣겓) 등 5개 학교를 초청하여 열린 연합운동회
이다《. 황성신문》보도에 의하면, 1908년 5월 12일 광흥학교 옆 연무관에서 열린 5
개 학교 연합운동회는 다양한 체육행사를 열었는데, 대한제국에 대한 충군애국 정
신과 자주독립을 강조하는 운동가를 널리 불려졌다는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5개
교 초청 연합체육대회는 1930년대에도 열린 것으로《동아일보》보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광흥학교는 이후 1910년 4월 2일 보통과 제4회 졸업증서 수여식과 보습과
제2회 수여증서 수여식을 거행한 것으로 신문자료에서 확인된다.
하지만 1910년 일제의 강제병합으로 전 국토가 유린된 상황에서 광흥학교 역시
수난을 겪게 되었다. 조선총독부의 데라우치총독은 1911년 7월 1일자로 공립보통
학교의 설치를 허가한다고 고시하면서, 경기도 광주군 군내면에 위치한 공립광주
보통학교(公立廣州普通學校)를 명시하였다. 이로서 사립 광흥학교는 일제에 의해
이름이 사라지고 학교 명칭을 바꿔야 했다. 일제는 산성마을에 민족의식이 높은 점
을 두려워하여 1917년 12월 10일 광주군청을 산성 밖 경안동으로 이전하면서 경찰
서와 우체국 등 관공서 기관도 모두 옮겨 버렸다.
더욱 기가 막힌 일은 초등학교의 이름조차 빼앗아 간 것이다. 1918년 4월 11일자
총독부 관보에 의하면, 광주공립보통학교를 남한산공립보통학교(南漢山公立普通
學校)로 개칭하였고, 4월 23일자 관보에는 경안리(京安里)에 위치한 "광주공립보통
학교(廣州公立普通學校)의 설치를 허가한다”고 고시하였다. 즉 4월 1일자로 남한산
성내에 위치한 학교의 이름을 먼저 바꾼 다음, 23일만에 원래 학교 이름을 이전한
곳으로 가져가 버린 것이다.“ 동생이 생겨 형의 이름을 동생한테 주고 형의 이름을
다시 지어준 격”인 것이다.
산성동 마을은 일제에 의해 군청 소재지와 학교 이름마저 빼앗기게 되자, 마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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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모나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교통조차 불편한 산촌마을의 주민들은 곧 생계를
위협받게 되었고, 이로써 조선후기에 4천여 명에 달하였던 마을은 서울 천호동과
광주·여주·이천·양평 등지로 흩어져 400여 호로 줄어들었다.
엄혹한 일제강점기에도 교사들과 학생들의 향학열은 매우 뜨거웠다. 《동아일보》
보도에 의하면, 교사의 인솔 아래 학생 50명이 동아일보사를 견학하였고, 농촌계
몽운동의 일환인 브나로드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야학활동도 활발해 1933년경 어
린이 50여명이 산성내 노동공조회관에서 야학과 학예회를 열기도 하였다.
1938년 4월 1일 남한산공립보통학교는 또다시 일제의 식민교육정책에 따라 남
한산심상소학교(南漢山尋常小學校)로 명칭이 변경된다. 이후 1941년 일제칙령 제
148호 '국민학교령'에 의해 심상소학교는 국민학교로 명칭이 변경되었는데, 이는
황국신민(皇國臣民)을 양성한다는 일제강점기의 초등교육정책을 반영한 것이다.
1941년 4월 1일 남한산심상소학교는 다시 한 번 남한산국민학교로 학교명이 변경
된다. 이 명칭은 해방 후에도 식민지 잔재를 안은 채 계속되다가 1996년에 이르러
서야 남한산초등학교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번 조사를 통해 남한산초등학교의 역사가 1900년 광주소학교를 기점으로 할
때 올해 112주년에 이른다는 사실과 1908년 광흥학교 첫 졸업식 이후 졸업생이 2
천여 명에 이른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남한산초등학교의 자랑찬 역사를 복원하는
일이 세계인이 주목하는 남한산성의 역사문화와 한국 근현대사를 풍부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리란 교훈을 얻은 순간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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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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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10월 모임 스케치
또 하나의 선물
주 미 숙
10월 27일 토요일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하루 종일 계속 되었다. 이 날은
고향향우회 가을 등산 하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내리는 비는 그동안 답사하고 준비
한 선, 후배 임원들의 정성을 무참하게 만들었다. 비는 종일 그칠 생각이 전혀 없는
듯 하늘은 깜깜하기만 했다. 서울 사당역에서 아침 8시에 출발한 버스는 인천에서
배를 타고 들어간 하나개 유원지에 도착해도 여전히 내렸다. 허지만, 우리들은 미
리 준비한 비옷을 입고 계획한 대로 진행했다. 해남 땅 끝 마을 고향의 선, 후배들
은 그래도 오랜만에 만나서 인지 웃음 가득했다. 그 웃음 속에서 낼 마지막 일요일
남. 사. 모. 모임 날인데 계속 비오면 어쩌나 하고 은근히 걱정 되었다.
다음날 아침이다. 하늘은“내가 언제?”라고 말 하듯 그야말로 전형적인 가을날
씨를 자랑했다. 여느 때처럼 나는 일찍이 일어나서 준비를 마친 다음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작년 10월에 김내동선생님께 소개를 받아 처음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그러
나 아직까지 얼떨떨하기만 하다. 매달 만날 때 마다 기존의 선생님들과 새로 오신
선생님들을 만나면서 오늘은 또 어떤 새로운 분이 오실까 하는 기대 속에서 참석한
다. 신청선생님은 언제나 일찍 오신다. 산행을 끝까지 하시지 못 하시고 뒤에 천천
히 오시다가 혼자서 중도에서 멈추신다. 출석은 누구보다 빨리 하시는 선생님을 뵐
때마다, 빨리 건강회복 돼서 어느 산이든 동행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오전 10시
가 되자 어김없이 동그랗게 모든 회원들이 서서 한 사람씩 자기소개를 마친 다음
산행을 하는 순서로 진행했다. 오늘은 다른 모임 날과 달리 문화예술분과장으로 계
셨던 정재열선생님이 10월 11일 별세 후, 모임을 갖는 날이다. 잠시, 그 분을 위해
묵념이 있었다.
10시 30분쯤 인사가 끝나고, 출발하여 남문 앞에 이르자 남문에 대한 역사에 대
해 이미숙 선생님께서 간단히 설명을 해 주셨다, 우리는 그 곳에서 잠시 지나가는
2012년 11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95
사람들에게 실례를 하고 기념사진까지 한 장 남겼다. 남문을 지나 오르는 가을 절
정의 단풍은 저마다의 손들이 일제히 본능적으로 바빠지기 시작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단풍을 보기 힘들어서 일까, 아니 순간의 감동에 사로잡혀서 일 것이다. 사
진작가이신 김태섭선생님을 비롯한 카메라와 스마트폰은 순간의 모습을 담기 바빴
다. 이런 순간 제일 생각나는 분이 한 분 계신다. 등산을 할 때 나의 마음을 안타깝
게 만드는 분. 신청선생님이시다. 다리가 아프신 선생님은 언제나 뒤에서 천천히
오시다가 혼자서 되돌아가시는 선생님. 이 절정의 단풍을 보시면 얼마나 좋아라 하
실까. 선생님의 모습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가을단풍을 만끽하는 순간은 눈
뿐 만 아니다. 우리들의 마음까지 알차게 채워주시는 고운 목소리 주인공이 함께하
신다. 정흥숙교수님의 시낭송은 곱게 물든 단풍아래서 우리들의 마음속으로 스며
든다.
임의 모습
어디고 반드시 계시리라 믿기에
어렴풋 꿈속에 그리던 모습
어둔 밤 촛불인 듯 내 앞에 앉으신 양
아 이제는 뵈는 모습 바로 그 모습이네
아 내마음 어떻게 두어야 하리까
너무나도 작고 더러운 존재오라
영혼의 속속들이 눈 부시는 빛 앞에
화살 맞은 비둘기인양 나래만 퍼득일 뿐
사랑이 되고 안 되고사
오로지 임에 매이었고
마주 앉아 말 주고받은 인연
오백 生깊음이 느껴 자랑스럽네
푸른 나뭇잎나뭇잎 사이로
말간 가을 하늘 우러러보면
어디서 오는 가느다란 바람이기에
꽃잎처럼 흔들리는 임의 모습
2012년 11월
96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들 밖 어둔 길을 밤늦어 돌아오면
허렁허렁한 술기운 반은 취하고
먼 남쪽 하늘가 흐르는 별 아래
산 너머 물 건너 몇백 리 인고
가다가 문득 문득
가슴 하나 월컥 안기는 그리움
해바라기 숨길 확확 달아
가을 석양 들길에 멀리 선다.
맑은 가을하늘아래 이 배경에 잘 어울리는 교수님의 시 낭송을 듣는 순간 우리들
은 모두 시인이 된 느낌으로 가득 찼다.
김달진시인님의 시와 이해인님의 가을엽서 낭송이 이어졌다.
잠시 땀을 식힌 후, 우리들의 행진은 개원사 앞에서 정지 되었다. 여느 때와 마찬
가지로 전보삼회장님은 개원사에 대해서 열심히 강의를 하시고 우리들은 그 강의
를 마친 다음 점심은 남문관에 도착하여 이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무청 지글지글
탕과 그리고 절대 빠지지 않은 막걸리를 맛있게 먹었다.
오후 두시 마을회관. 김명섭 박사님으로부터 남한산초등학교의 잊혀진 역사를
찾아서 이었다. 암흑한 일제강점기에도 교사들과 학생들의 향학열이 매우 뜨거웠
다는 걸 그동안 준비하고, 연구하신 보도 자료를 보면서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남한산초등학교의 역사가 1900년 광주 소학교를 기점으로 할 때 올해 112주년에
이른다는 사실과 1908년 광흥학교 첫 졸업식 이후 졸업생이 2천여 명에 이른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소학교. 국민학교. 초등학교로 명칭이 달라졌으며 처음에는 지
금처럼 6년이 아니라 2년 과정을 거쳐 졸업 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단풍을 찾아서
강의가 끝나자 김진원 사무국장님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해산되었다. 나는 강의
를 마치신 김명섭박사님과 손종구선생님 그리고 박용규선생님과 남한산초등학교
를 찾았다. 교정에 들어서자 와아~! 하는 탄성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나오는 길에 늦게 도착하여 산행을 하지 못한 점을 아
2012년 11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97
쉬워하는 임경미 선생님을 만났다. “난 오늘 어떠한 일 이 있어도 산행을 꼭 하고
말겠다.”는 선생님의 마음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임경미 선생님을 포함한 약 십여 분의 선생님들과 얼마쯤 걸었을 때였다. 난 지
금도 그 순간을 잊을 수 가 없다. 바로 앞에 펼쳐지는 환상적인 단풍이다. 난 그 단
풍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스마트 폰을 꺼내 무밭 주인이 들어가지 못하게 가시로
막아 놓고 끈을 묶어놓은 걸 헤치고 들어갔다. 햇살이 눈부신 가운데 바람이 불어
단풍을 건드려주었다. 작은 바람이 불 때 마다 색색이 변하는 모습. 나도 그 바람을
타고 꽃으로 변해버린 단풍 속으로 구름이 되어 잠시 그들과 함께 했다. 불어오는
바람 따라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잠시 후, 혼자서 신바람이 난 나는 그 사진을 카
카오톡을 이용하여 친구들에게 보내주었다. 잠시 후, 나는 웃음소리를 쫓아서 현철
사 왼쪽 양지를 향해서 걸어갔다. 거기에는 내가 사진을 찍느라 열중하고 있는 사
이에 이미 자리를 잡고 계셨다. 묵사발접시에 미리 준비해 오신 임경미 선생님의
배낭에서 맛있는 음식이 하나씩 나오고 있었다. 종류도 다양했다. 과일주, 오징어
땅콩, 등 안주도 다양하게 다 먹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자꾸자꾸 요술주머니에서
나오듯 다양하게 나온다. 해는 서산에 걸쳐져 산사를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옛날 어린 시절 바다에서 보는 석양과는 또 다른 느낌을 주었다. 잠시 후, 손종구선
생님의 민요가락에 맞춰 막걸리 병을 두드리며 우리들의 추임새도 어우러졌다.
제목 : 사 철 가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어왔건만은 세상사 쓸쓸하더라
나도 이제 청춘이려니 오날 백발 한심하구나
내 청춘도 날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창에 맞춰 막걸리병을 두드리며 얼씨구~! 하고 추임새를 하고 있는디, 너무 신이
나서 이었을까 갑자기 손선생님의 창이 멈췄다. 이유는“흐미야, 으짜쓰까잉, 생각
이 전혀 나지 않는디야”하시며 다시 시작 했다.
2012년 11월
98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
봄아 가거라 니가 가고 여름이오면
녹음방초 승화시라 옛부터 일러있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돌아오면 한로삭풍
요란해도 제 절개를 굽히지 않은
환국단풍은 어떠한 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와서 낙목한천
찬바람에 백설만 퍼얼펄 휘날리어
은세계가 되고 보고 보면은
월백설백 천지백하니 모두가 백발이로구나
무정세월은 덧없이 흘러가고 님의 청춘도
아차 한 번 늙어지면 다시 청춘 어려워라
어화 세상벗님네들 이내할 말을 들어 보소
인간이 모두가 백 년을 산다 해도 병든 날과
잠든 날 근심걱정 다 제하고 나면
단 오십도 못 사는 인생 아차 한 번 죽어지면
북만산천에 흙이로구나
사후에 만반진수도 불혀생전에 일 배 주 만도 못하리라
세월아 세월아 세월아 가지마라
가는 세월 어쩔거나
늘어진 계수나무 끝 끝터리에다
대량 매달아놓고
국곡투식하는 놈과 부모 불효하는 놈과
형제화목 못하는 놈 차례로 잡아다가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버리고
남아있는 벗님네들 서로 모여앉아 한 잔 더 먹소
덜 먹소 하여가면서 거드렁 거리며 놀아보세.
와~아~! 창이 끝나자 우리들은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오고가는
2012년 11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99
담소 속에서 들려오는 종소리가 우리들의 마음을 더욱 충만하게 채워주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산채의 종소리다.
현철사 바로 옆에서 깊어가는 가을의 풍경에 젖어있는 남아있는 우리들은 모처
럼의 여유를 즐기며 웃음 가득했다.
11월 11일 빼빼로의 날
오늘은 일요일이면서 빼빼로의 날이라고 작은 딸아이가 어제 저녁 사온 빼빼로
를 꺼내서 온 식구들에게 하나씩 나눠준다. 친구가 만들어 줬다면서 작은 인형으로
만든 정성이 담긴 초콜릿도 함께 건네준다.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오
후에도 그치지 않았다. 예배마치고, 집에 왔지만 왠지 마음이 불안하다. 이 비가 온
도를 점점 내려가게 한다면 2주전에 본 단풍은 어떻게 될까. 내년에 가서 봐야 된
단 말인가. 나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그 마음은 곧 내 몸을 일으켜 세우고, 드
디어 남한산성 현철사로 달려갔다. 산성에 도착하자 날씨는 우산을 들고 달려온 나
를 비웃고 있었다. 걸음을 재촉하여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현철사 앞으로 갔다. 그
러나 단풍은 간곳이 없고, 얼마 남지 않은 몇 개의 단풍이 매달려 있지만, 그나마
불어오는 바람에 힘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내 주머니속의 스마트폰이 나올 생각도
못한다. 얼마를 서 있었을까 바람이 너무 차가워 손이 시리기 시작했다. 쓸쓸함이
밀려오는 허전함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 져버린 단풍나무 위만 멍하니
바라보다가 어느새 바닥에 눈이 박혔다. 각가지색상으로 바닥에서 꽃처럼 장식하
고 있는 마지막의 가을작품. 그 나뭇잎들을 보는 순간이었다. 내손은 주머니에서
반사적으로 스마트폰을 꺼내서 다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땅바닥에 깔린 낙엽이
었다. 떨어져 있으면서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밟혀가면서도 인간에게 또 하나의
감동을 주고 있었다. 다시 작품으로 장식해주는 낙엽에게 배우며 돌아오는 이 가을
생명이 끝나도 인간에게 또 다른 아름다움 선물하는 자연에게 감사하며 2주전 남
한산성 사진과 지금의 사진을 번갈아보며 다시 한 번 미소지어본다.
남한산성! 우리들의 슬픈 역사 속에서 이제는 세계유네스코에 등재될 수 있는 아
름다운 곳. 병자호란(1636)때 중국(청나라)에 항복하기를 끝까지 반대했던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의 우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현철사 앞에서 또 하나의 선물,
아름다운 가을추억이 나에게 아주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2012년 11월
100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11월 역사외유탐방 자료
수덕사 창건 설화
홍주마을에 사는 수덕이란 도령이 있었다. 수덕고령은 훌륭한 가문의 도령이었
는데,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사냥터의 먼발치에서 낭자를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집에 돌아와 곧 상사병에 걸린 도령은 수소문한 결과 그 낭자가 건너마을에
혼자 사는 덕숭낭자라는 것을 알게 되어 청혼을 했으나 여러 번 거절당한다.
수덕도령의 끈질긴 청혼으로 마침내 덕숭낭자는 자기 집 근처에 절을 하나 지어
줄 것을 조건으로 청혼을 허락하였다. 수덕도령은 기쁜 마음으로 절을 짓기 시작하
였다.
그러나 탐욕스런 마음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절을 완성하는 순간 불이 나서 소
실되었다. 다시 목욕재개하고 예배 후 절을 지었으나 이따금 떠오르는 낭자의 생각
때문에 다시 불이 일어 완성하지 못했다. 세 번째는 오로지 부처님만을 생각하고
절을 다 지었다.
그 후 낭자는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했으나 수덕도령이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하
지만 이를 참지 못한 수덕도령이 덕숭낭자를 강제로 끌어안는 순간 뇌성벽력이 일
면서 낭자는 어디론가 가 버리고 낭자의 한 쪽 버선만이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바위로 변하고 옆에는 버선모양의 하얀 꽃이 피어 있었다. 이
꽃을 버선꽃이라 한다. 낭자는 관음보살의 화신이었으며 이후 수덕사는 수덕도령
의 이름을 따고 산은 덕숭낭자의 이름을 따서 덕숭산이라 하여 덕숭산 수덕사라 하
였다는 전설이다.
해미읍성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곽. 사적 제116호. 지정면
적 194,083㎡, 둘레 2,000m. 현재 남문인 진남문(鎭南門)과 동문·서문이 있고,
성내에 동헌(東軒)·어사(御舍)·교련청(敎鍊廳)·작청(作廳)·사령청(使令廳) 등
의 건물이 있다.
2012년 11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101
본래 해미는 1414년(태종 14) 덕산(德山)에서 충청병마절도사영이 이곳으로 이설
된 뒤 1651년(효종 2) 청주로 옮겨질 때까지 군사의 중심지였다. 이 성은 1491년(성
종 22)에 축성하여 영장(營將)을 두고 서해안 방어를 맡았던 곳이다. 『여지승람』에
의하면, 당시 절도사영은 해미현의 동쪽 3리에 있었으며, 석성으로 둘레 3,172척,
높이 15척, 우물 세 군데, 군창이 설비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읍지에는 읍성의 둘레가 6,630척, 높이 13척, 치성(雉城: 성벽에서 돌출시
켜 쌓은 성벽)이 380첩(堞), 옹성(甕城: 성문의 앞을 가리어 적으로부터 방어하는
작은 성)이 두 곳, 남문은 3칸이며 홍예(虹霓: 무지개 모양의 문)를 틀었고, 2층의
다락을 지었으며, 동문·서문도 3칸이나 북문은 없고, 우물이 여섯 군데이며, 성밖
에 호(壕)는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조선 초기의 병마절도
사영과 읍성과는 별개의 것으로 보이는데, 이 병마절도사영에는 이순신(李舜臣)이
1579년(선조 12)에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로 잠깐 근무한 적이 있다.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읍성으로는 가장 잘 남아 있어서 대표적인 표
본으로 삼기 위하여 성안의 민가와 학교 등을 철거하고 성벽의 보수 등 연차적인
보수공사를 실시하였다.
즉, 1974년에 동문·서문이 복원되었고, 1981년 성내 일부를 발굴한 결과 현재
의 동헌 서쪽에서 객사(客舍)와, 현재의 아문(衙門) 서쪽 30m 지점에서 옛 아문지
가 확인되었고, 관아(官衙)를 둘러쌌던 돌담의 자취가 발견되었다
서산 마애삼존불상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불상. 높이 2.8m. 국보 제84
호. 서산시 운산면은 중국의 불교문화가 태안반도를 거쳐 부여로 가던 행로상에 있
다. 즉, 태안반도에서 서산마애불이 있는 가야산 계곡을 따라 계속 전진하면 부여
로 가는 지름길이 이어지는데, 이 길은 예로부터 중국과 교통하던 길이었다.
이 옛길의 어귀가 되는 서산마애불이 있는 지점은 산세가 유수하고 천하의 경승
지여서 600년 당시 중국 불교문화의 자극을 받아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그
단적인 예가 서산마애삼존불이다.
묵중하고 중후한 체구의 입상인 본존(本尊)은 머리에는 보주형(寶珠形) 두광(頭
2012년 11월
102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光)이 있으며, 소발(素髮)의 머리에 육계(肉?)는 작다.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는 미
소가 있고 눈은 행인형(杏仁形)으로 뜨고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없고 법의(法衣)는 두꺼워서 거의 몸이 나타나 있지 않다.
옷주름은 앞에서 U자형이 되고 옷자락에는 Ω형의 주름이 나 있다. 수인(手印)은
시무외(施無畏)·여원인(與願印)으로 왼손의 끝 두 손가락을 꼬부리고 있다. 발밑
에는 큼직한 복련연화좌(覆蓮蓮華座)가 있고, 광배 중심에는 연꽃이, 둘레에는 화
염문이 양각되었다.
이에 대하여 우협시보살(右脇侍菩薩)은 머리에 높은 관을 쓰고 상호(相好)는 본
존과 같이 살이 올라 있으며, 눈과 입을 통하여 만면에 미소를 풍기고 있다. 목에는
짧은 목걸이가 있고 두 손은 가슴 앞에서 보주(寶珠)를 잡고 있다.
천의는 두 팔을 거쳐 앞에서 U자형으로 늘어졌으나 교차되지는 않았다. 상체는
나형(갨形)이고 하체의 법의는 발등까지 내려와 있다. 발밑에는 복련연화좌가 있
다. 머리 뒤에는 보주형 광배가 있는데, 중심에 연꽃이 있을 뿐 화염문은 없다.
좌협시보살은 통식(通式)에서 벗어나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을 배치하였다. 이
보살상은 두 팔에 크게 손상을 입고 있으나 전체의 형태는 충분히 볼 수 있다. 머리
에는 관을 썼고 상호는 다른 상들과 같이 원만형(圓滿形)으로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다. 상체는 나형이고 목에는 짧은 목걸이를 걸쳤다. 허리 밑으로 내려온 옷자락
에는 고식의 옷주름이 나 있다. 발밑에는 큰 꽃잎으로 나타낸 복련대좌(覆蓮臺座)
가 있다. 머리 뒤에는 큰 보주형 광배가 있는데, 그 형식은 우협시보살의 광배 형식
과 같다.
이 삼존상은 ≪법화경≫의 수기삼존불(授記三尊佛), 즉 석가불·미륵보살·제화
갈라보살을 나타낸 것이다. ≪법화경≫ 사상이 백제 사회에 유행한 사실을 입증해
주는 가장 중요한 사료이다. 따라서 이 불상은 백제 불교사 내지 사상사 연구에 중
요한 구실을 한다. 또한 조선조 사원에 흔히 건립된 응진전(應眞殿) 수기삼존불의
가장 오래된 원조로서의 의의가 있다.
정온(鄭蘊)
1569~1641, 본관 초계(草溪), 자 휘원(輝遠), 호 동계(桐溪)·고고자(鼓鼓子), 시호 문간
2012년 11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103
(文簡), 주요저서《동계문집(桐溪文集)》
1569년(선조2년) 경남 거창군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은 진사 정유명(鄭惟明)
이었으며 어려서 부친에게 글공부를 익혔다. 남명 조식의 학맥을 이었고 한강((寒
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진사로서 문과에 급제하
여 설서(說書)·사서·정언 등을 역임하였고, 1614년 부사직(副司直)으로 재임하던
중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이 부당함을 상소하였고, 가해자인 강화부사 정항(鄭
沆)의 참수(斬首)를 주장하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 제주도 대정(大靜)에서 10년
간 위리안치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 동안《덕변록(德辨걧)》과《망북두시(望겗斗詩)》
《망백운가(望白雲歌)》를 지어 애군우국(愛君憂國)의 뜻을 토로하였고 자신을 고고
자(鼓鼓子)로 불렀다.
그는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제주 사람들에게 글공부를 가르치
는 일에도 노력하였다. 이 때문에 제주에서는 정온을 제주오현 중 한사람으로 추앙
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석방되어 헌납에 등용되었다. 이어 사간·이조참
의·대사간·경상도관찰사·부제학 등을 역임하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이조참판으로서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 결국 청나라에
굴복하는 화의가 이루어지자 칼로 자신의 배를 찌르며 자결을 시도하였지만 실패
하였다. 모든 관직을 사직하고 경남 거창군 북상면으로 낙향하여 은거하다가 5년
만에 죽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 제주의 귤림(橘
林)서원, 함양(咸陽)의 남계(걄溪)서원에 제향되었다. 그가 마지막까지 은거했던 곳
에는 그를 기리는 사당 모리재(某里齋)가 있다. 문집에《동계문집(桐溪文集)》이 있
다.
2012년 11월
104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2012년 11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105
2012년 12월
11월의 스케치
이 연 주
11월 마지막 주말을 맞아 남.사.모에서 역사문화 탐방을 한단다. 탐방코스는 몇
달 전에 내가 다녀온 코스였기에 몇일 전부터 갈까 말까를 망설였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의 역사문화를 좀 더 알고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에 난 평소에 알고 지내던 지
인과 함께 배낭을 둘러메고 거점지인 모란에서 남.사.모 회원님들이 탄 버스가 오
기를 기다렸다.
11월 늦가을 아침이라서 그런지 쌀쌀하고 차가운 기운이 몸속으로 스며든다. 마
침 거점지엔 강현옥회원이 와 있었다. 아직은 남.사.모 신입인 나를 잘 몰라보는 강
현옥회원에게 내가 먼저 다가가 인사를 나누었다. 지인과 나 그리고 강현옥회원 셋
이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담소를 나누었다. 훈훈한 대화에 추웠던 몸이 녹아드는
듯하다. 버스는 약속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열심히 회원님들에게 인사를 드리며 버스에 오른 나는 뒷좌석에 앉게 되었다.
뒷좌석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멀미약부터 먹었다. 입담 좋으신 손종구회원이 마
침 가까이 자리해 앉아 재미있는 이야기로 웃음꽃이 활짝 피어났다. 이럴 땐 꼭 오
늘 하루만큼은 어린시절 수학여행을 가는 듯 마냥 즐거운 세상 속에 내가 존재하는
듯하다. 잠시 쉬었다 간다는 사무국장의 마이크소리가 들리고 버스는 행담도 휴게
소에 도착했다. 휴게소에 내려 화장실을 다녀온 후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안마기에
등을 대고 살포시 눈을 감은 채 어깨의 시원함을 즐기고 있다. 평소에 어깨가 무지
아픈 나는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생각에 얼른 안마기 의자에 앉아 버튼을 눌렀다.
아~ 이 시원함
10여분의 안마를 끝내고 나오는데 손종구회원이 앞에 보인다. 난 얼른 다가가 수
줍은 애교를 부리면서 엿장수 앞으로 안내를 했더니 호박엿을 사 주었다. 엿을 들
고 버스에 올라 회원님들에게 엿 드세요 하면서 아침부터 죄송스럽게 호박엿을 드
렸다. 간간히 전보삼 교수님의 전문가적 해설을 들으며 버스는 충남 예산 덕상면에
106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위치한 수덕사에 도착했다.
덕숭산 아래 자리 잡고 있는 수덕사는 백제 말에 숭제법사가 창건한 대한불교 조
계종 제7교구 불사이다. 대표적인 비구니의 수행도량이기도 했었다. 수덕사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불교를 떠올리는 대중
가요로는 가장 대표적인 곡이자 간판 곡으로 볼 수 있다. 수덕사는 시인이자 수필
가로도 이름을 떨쳤던 근대 신여성 작가인 일엽스님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
석이 머물던 곳이기도 하다. 일엽스님은 미국 유학파 남자와 결혼, 이혼, 두 번째
결혼 실패, 이후 또 찾아온 몇 차례의 사랑을 실패했던 인물이고. 일엽의 굴곡진 애
정과 행보는 당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야기로 전해진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
아온 일엽은 속세를 떠나 수덕사의 여승이 되어 수덕여관에 머물러 지냈던 여승의
시초이기도 하다.
일행은 해설사의 해설을 들으며 수덕사 경내로 발길을 옮겼다. 대웅전의 내부는
천장이 없어서 내부가 그대로 드러난다. 대웅전은 오래된 목조건물로서 맞배지붕
으로 꾸며졌고 기둥은 배흘림기둥으로 소나무를 사용했고 장식적인 요소가 매우
아름다운 고려시대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그래서 보존적 가치가 매우 높은 국보
49호 건축물이다. 수덕사를 돌아보고 내려오는 길에 고암 이응로 화백의 그림과
어느 이름 모를 화백의 그림이 전시중이어서 관람을 하였다. 늦은 가을, 이른 초겨
울이었지만 오고가는 길 아직도 이곳에는 단풍나무들이 내 마음을 예쁘게 물들여
서 보내는 가을을 아쉽게 바라볼 수 있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뱃속이 출출한
시간이었다. 회원님들을 모시고 예약을 해 두었던 ?수덕사도 식후경?이라는는 간
판이 걸린 곳으로 들어갔다. 상마다 가득가득 차려진 수많은 종류의 음식이 손님들
을 기다리고 있었다. 풀코스로 나오는 음식에 모두들 맛있다고 환호성이다. 맛있게
배를 채우고 나오는 시간, 식당주인이 서비스로 수덕사 막걸리 3병을 봉투에 넣고
간단한 나물종류를 싸주시며 차안에서 먹으라고 한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나온
뒤 버스에 올라 두 번째 코스인 해미읍성에 도착했다.
조선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충남 서산의 해미읍성은 조선 태종 때 정해현과 여
미현을 합하면서 두 현의 이름에서 한 자씩 따서 해미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이 금관으로 10개월간 근무한 적이 있다고도 전해진 이곳은 조선말기 천주교
박해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2012년 12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107
교도들을 투옥하고 문초하고 처형하였던 이곳 해미읍성의 회화나무는 파란하늘
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서있지만 한편으로는 슬픈 역사를 지니고 있는 나무이
기도 하다. 해미읍성은 호서좌영으로서 겸영장이 토포화를 겸하여 국사범을 처단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 천주교 신도들을 압송하여 처형하였는데, 1790년
~1880년대 이곳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끌어내 이 나무 동쪽으로 뻗은 가
지에 철삿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하였으며 철삿줄이 박혀있던 흔적이 현재까지
도 희미하게 남아있다고 한다.
가슴 아픈 역사를 간직한 해미읍성을 나오기 전 그 당시를 되새기며 회원들은 성
곽을 올라 차분한 걸음으로 성곽을 돌았다. 성곽은 평지로 둘러있어 걷는 데는 무
리가 없는 곳이었다. 회원들은 다시 버스에 올랐다. 다음 코스인 서산에 위치한 국
보 84호 마애여래삼존불을 향하여 버스는 내 달렸다.
도착 후 용현계곡 다리를 건너 계단을 걸어 올라가니 작은 해설사 사무실을 지나
불이문(겘二門)으로 들어갔다. 해설사가 우리 일행을 맞아 열정적으로 해설을 시작
했다. 해탈문이라고도 불리는 문은 차별 없는 이치를 나타내는 법문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즉 모든 것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의미로 이 문을 들어서는 사람은 두
마음을 갖지 말고 오로지 불도를 닦는 한 가지 마음을 가지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이 작은 문을 지나면서 참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문이 던지는 화두에
나는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할까 한참 시간이 지난 지금도 선뜻 그 답이 떠오르지 않
는다. 백제의 미소라 알려진 서산 마애삼존불상, 보는 사람마저 슬며시 웃음 짓게
하는 마애삼존불이다. 마주하는 빛의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표정은 약간 쌀쌀한 초
겨울의 문턱에서 밝게 웃음 짓고 있었다. 햇살이 그리운 시간이라 그런지 차가운
돌에 새겨진 불상에서 따스한 마음이 느껴진다. 눈으로 보고 그 살아 있음을 온몸
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큰 경험이다. 해설사의 말에 잠깐의 설화
를 듣게 되었다. 부여 박물관장이 동네 사람들에게 산에서 부처님이나 석탑 무너진
것 봤냐고 묻곤 했는데 어느 날 나뭇꾼이 말하기를『부처님은 못 봤지만 저 위 바위
에 환하게 웃고 있는 산신령이 새겨져 있는데 본마누라와 작은 마누라가 다리 꼬고
앉아서 손가락으로 볼따귀를 찌르고 슬슬 웃으며 용용 죽겠지 하고 놀리니까 본마
누라가 장돌을 집어 던지려고 하고 있슈』하더라는 설화를 잠깐 들려주었다. 난 불
교문화에 지식이 없지만 삼존불을 보며 대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백제의 미
2012년 12월
108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소를 자세히 보면 불꽃모양 속에 세 분의 부처가 있다고 찾아보라는 것이다. 한 눈
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서야 내 눈에 세분의 부처가 들어왔다.
백제인들의 뛰어난 과학성과 조각기술은 은은한 가운데 자비로운 미소를 만들었
다. 밝은 가운데 평화로운 미소를 띤 백제인의 모습을 담은 것이 마애삼존불이다.
우리 선조들의 경이로운 역사적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고, 더 깊은 공부를
할 수 있게끔 해주신 남.사.모에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34명이 참석한 역사탐방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루를 알차게 보낸 시간
이 뿌듯하기만 하다. 내가 아닌 다른 남.사.모 회원님들 모두가 즐거웠던 역사기행
을 하셨으리라 생각해 본다.
2012년 12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109
2012년 12월
110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12월 모임 스케치
설경 속 송년 모임
박 연 주
2012년 12월 남사모 정기모임 날이다. 송년회를 겸한 모임이라고 했다. 아침에
문을 열고 밖을 보니 많은 눈이 온 동네를 덮고 있었다. 남한산성으로 올라야하는
데 걱정이 태산이다. 설레는 맘과 걱정되는 맘이 교차하며 등산복을 찾았다. 등산
복이 어디에 숨었는지 몰라 한동안 집안을 뒤졌다. 얼마 후 따뜻하게 옷을 입고 힘
차게 집을 나왔다. 아자아자! 기분이 좋았다. 차를 기다리는데 버스가 정거장을 그
냥 스쳐간다. 길이 미끄러워서 버스가 서질 않는다. 한 정거장을 걸으며 손종구회
원께 전화를 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나를 보았다고 했다. 우리는 남한산성입구
비둘기광장에서 만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버스를 타고 급
히 약속장소로 갔다. 그곳에는 박용규 사무차장이 함께 있었다. 우리는 눈 쌓인 비
탈길을 걱정스레 걸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미끄럽지 않았다.
한참을 오르는데 손종구회원께서 개구리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들리는 듯 안 들
리는 듯 아리송했다. 손종구회원의 참신한 농담에 우리는 크게 웃을 수 있었다. 일
행은 비탈진 길을 조심스럽게 올라 남문에 도착을 했다. 손종구회원은 행궁에서 사
진을 찍고 나중에 합류할 것이라며 우리와 헤어졌고 우리는 남문관으로 들어갔다.
마당에 국장님과 주인장이 눈을 치우고 있었다. 인사를 한 뒤 염화칼슘을 뿌리면
좋지 않냐고 물었다. 염화칼슘은 환경에 해를 끼쳐 환경보호차원에서 뿌리지 않는
다고 했다. 뒤통수를 맞은 듯 쑥스러웠다. 오늘도 남사모의 정신과 환경을 배려하
는 마음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잠시 후 회원분들이 속속 남문관으로 들어오셨다. 새벽 많은 눈이 온 관계로 남
한산성 길이 통제되었었고 그 눈길을 뚫고 오신 분들이 대단히 고맙게 느껴졌다.
열아홉 분이 모이셨다. 한 달만에 뵙는 모임이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눈길을 헤
치며 오신 부용담을 중심으로, 한해의 마지막 모임의 소회를 말씀하시며 시간을 보
2013년 1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111
냈다. 돌아가면서 본인 소개를 하고 덕담을 즐기시는 모습이 화기애애했다. 회장님
의 말씀이 끝나고 사무국장님이 송년모임을 겸해 떡과 과일을 준비했다고 하면서
40인분을 준비했는데 많이 남을 것 같다고 했다. 하얀 설경을 보며 한 줄의 시를
표현하듯 정겨운 인사를 마친 회원 분들이 산성 탐방 길에 나섰다.
먼저 침괘정을 올랐다. 침괘정에서 바라본 한옥마을의 눈을 곱게 덮어 쓴 기와지
붕이 아름다웠다. 조금 더 올라 행궁 뒤편 소나무 숲에 다다라 행궁을 바라봤다. 아
름다운 행궁의 기와지붕이 눈을 이고 있었다. 한편의 동양화를 보는 듯 소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조금 더 올라 취성암에 도착해 도둑맞은 취성암에 관해 이종화 부회장님의 말씀
이 있었다. 눈이 많이 쌓인 관계로 탐방길은 매우 미끄러웠고 일행은 조심조심 눈
길을 밟으며 산을 올랐다. 어정에 도착해 시원한 약숫물로 목을 축인 뒤 우리는 수
어장대로 향했다. 수어장대 옆 소나무에 눈이 곱게 내려 앉아 설경이 매우 아름다
웠다. 수어장대를 중심으로 우리는 단체 사진을 찍고 옆에 있는 무망루 전각으로
자리를 옮겼다. 무망루에 대해 설명하시는 회장님의 말씀은 무망루라고 하는 중요
한 현판은 천정 구석에 매달려 있고 진짜 있어야할 자리에는 무망루 설명 표지석이
서 있다는 지적을 하셨다. 무사안일한 공무원들의 짧은 생각들이 만들어 놓은 웃지
못할 사연이라고 하셨다.
수어장대를 뒤로하고 하산을 하기 시작했다. 조한숙 선생님의 옛날 아이스크림
이야기가 재밌다. 예전에는 고운 눈을 한 그릇 퍼다 사카린을 넣으면 맛있는 아이
스크림이 되었다는 어릴 적 이야기를 하신다. 나도 유년의 세월을 잠시 훑어보는
시간을 가지며 남문관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한방백숙으로 맛난 점심을 먹고 사무
국장님의 2013년 남사모 행사 계획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떡과 과일을 나
눠 먹으며 지난 일 년을 회고하고 앞으로 남사모의 발전방향에 대해 열띤 토론을
했다.
부족한 제가 남사모에서 참 좋은 강의와 덕담을 들으며 마음을 살찌우고 건강을
생각하면서 한 가지라도 더 배우는 남사모. 올 한 해도 그런 기대와 희망으로 송년
모임을 마칠 수 있어 행복했다.
2013년 1월
112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시산제 축문
신 창 규
유 세 차! 단군기원 사천삼백사십육 년 계사년 1월 27일
감소고우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회장 전보삼과 회원일동은
남한산성 청량산에 올라
이 땅의 모든 산하를 굽어 살피시는 산신령님께
정성을 모아 마련한 술과 음식을 진설하고 삼가 고하나이다.
혼란스런 사회의 안녕과 나라의 평화를 돌봐주시고 국운이 번창해 국민이 잘 사
는 계사년 한 해가 되게- 살펴주소서.
먼저 금년 계사년 한 해도 부디 산신령님의 가피아래
이곳 산성리에 살고 있는 주민 또한
건강과 삶의 풍요를 내려주시고
저희 남사모회원들의 원함을 모두 일궈낼 수 있게 도와주시길 간하옵니다.
남사모 회원 가정에 행복과 건강이 항상 함께하고
모든 회원들이 사랑과 화합의 즐거운 마음으로 친목을 도모하고
남사모 활동에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고
남사모 회원은 물론 남한산성을 찾는 모든 이들이
안전한 산행을 할 수 있도록
산신령님께서 관심과 배려를 간절히 바라나이다.
그리고 저희 남사모가
남한산성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사업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하시고 이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2013년 1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113
또한 사단법인으로 거듭나는 일과
새로운 회원들의 영입으로 남사모가 번창할 수 있게
올 한 해를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남한산성 청량산 산신령님이시여!
오늘 저희가 정성껏 준비한 다과주포를 음향하시고
저희의 바람을 가상히 포용하시어 우리의 모든 축원을 이룰 수 있게 간절히 비나
이다.
단군기원 사천삼백사십육 년 계사년 1월 27일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 전원 봉행
2013년 1월
114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2013년 1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115
1월 모임 스케치
계사년 시산제를 올리며
박 용 규
매섭고 야속한 날씨다. 길고 길었던 겨울에 마지막 스크래치를 남기려는 듯 기세
가 사납다.
그래도 37분이나 모이셨다. 지난해 마지막 정기모임 날에 눈이 많이 와서 많은
회원님들이 못 오셨던 걸 비교하면 그래도 추위를 함께 녹이려 오신 듯 많이 오신
셈이다.
신 청 전회장님 모습도 몇 개월 만에 뵐 수 있었고 이흥록 변호사님도 오랜만에
나오셨고 신영수 회원님은 오랜만에 참석하셔서 작년에 시산제 안 와서 낙선의 고
배를 마셨다고 인사를 나누시고 평소 지인을 많이 동반하시는 김내동 부회장님은
또 지인 세 분을 대동하시고 참석. 남문관 안에서 인사를 나누고 시산제 장소인 남
장대를 향해 출발. 눈길을 조심조심 올라 남장대에 도착하니 바람이 매서웠지만 모
두들 경건히 남사모의 발전을 위해서 손을 모았다. 사무국장님이 손수 준비한 떡과
술로 먼저 최종섭 부회장님을 시작으로 신청 전회장님이 산신령께 잔을 올리시고
신영수 회원님 그리고 전보삼 회장님 순으로 잔을 올렸다. 그리고 요즈음 남사모에
서 열심히 활동하고 계신 신창규회원이 축원문을 작성하고 추운 날씨에 직접 낭독
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아 많은 박수를 받았다. 작년 숭렬전에서 지내다가 오해를
받아서 서둘러 끝낸 던 기억에 비하면 올해는 남장대에서 지내니 한결 여유롭게 차
례차례 잔을 올릴 수 있어 아마 올해는 남사모 회원님들이 바라는 모든 일들이 이
루어지겠다는 예감이 스쳐 지나간다. 신현일 고문님은 다른 일이 있으신 듯 조한숙
선생님 혼자서 나중에 시산제 장소로 오셔서 잔을 올리셨고 이어서 시산제에 참석
하신 회원들 모두 잔을 차례차례 올렸다. 잔을 다 올린 후에는 바람이 차 간단한 음
복을 마친 후 또 조심조심 남문관으로 향했다.
2013년 2월
116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남문관에서는 오랜만에 토장국을 준비해 주셔서 공석붕 고문님의 새해 첫 건배
제의로 막걸리를 곁들이며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점심을 마친 후 왕년의 명 DJ 최동욱 회원님이 지난달에 2월 모임 때는 남사모와
함께하는 공개방송을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과 관련해서 요번에 리허설을 하시겠다
고 하셔서 모두들 식사 후 만해기념관으로 올라갔다. 만해 기념관 2층에는 이미 방
송 장비들이 준비되어 있었고 1964년 처음 방송 하셨다는 동아방송의‘세시의 다
이얼’의 추억을 모두 되새기며 실제 방송처럼 돌아가면서 듣고 싶은 팝송 한 곡씩
을 신청해서 듣는 형식으로 다음 달에 있을 공개방송 리허설을 진행하셨다. 라이오
넬 리치의 Endless Love, FR 데이비드의 Words, 배트 미들러의 The Rose,
Eagles의 Hotel California 등 흘러간 팝송의 선율을 들으며 모두들 그 시절로 돌
아가 감회에 젖은 듯 행복한 표정들이었으며 마이크가 전보삼 회장님에게로 넘어
가 만해기념관의 내력을 방송에 직접 소개하셨다. 만해의 사상을 스스로 가꾸고 보
살펴야 된다는 의지를 갖고 만해 기념관을 개관하게 되었다는 말씀으로 만해 기념
관을 소개 하신 후에는 최동욱 회원님의 추천으로 아일랜드 민요‘대니보이’를 색
소폰 연주로 들었는데 듣는 동안 애절한 색소폰 소리가 남한산성 전체를 휘감아 도
는 듯한 숙연한 느낌마저 드는 순간 이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만해기념관을 나서는 순간 새해 첫 모임은 회원님들도 많이
오셨고 시산제도 잘 지냈다는 느낌이 들어 마음속으로 풍요로움을 느꼈다. 다음 달
에는 많이 따뜻하겠지 하는 말을 혼자 마음속에 남기며 남문을 나섰다
2013년 2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117
2013년 2월
118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대보름에 모인 2월 정기 모임
조 한 숙 (수필가)
바람이 쌀쌀하면서도 봄기운이 살짝 감도는 쾌청한 날씨다.
남한산성 산성리 마을은 겨우내 눈 속에서 꽁 꽁 얼어 있다가 봄기운에 땅이 해
토되면서 사방이 질척거린다.
오전 10시, 남문관 식당 앞에서 남사모 회원들이 모였다. 오후에 몇 분이 더 오셔
서 모두 32분이 모였다.
오늘은 남사모 2월 정기모임이 있는 날이다. 1부 행사와 2부 행사로“남사모와
함께하는 3시의 다이얼”공개 방송이 준비 되어 있다. 2부 행사에서 시를 낭송해
주실 두 분 시인, 문효치 시인과 노향림 시인도 모임에 함께 참석 하셨다.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이사장을 지내신 문효치 시인을 반갑게 맞이했다. 나도 국
제 펜클럽 회원으로 활동하던 터라 우리 남사모에서 그분을 만나니 매우 반가웠다.
또 모임에 특별 손님 오세응 의원님이 오셨다. 정무장관과 국회 부의장을 지내셨고
병자호란 때 끝까지 항복을 반대했던 삼학사의 한 분 오달제의 14대 손이라고 하셨
다.
모임에 참석하려고 오전 10시경 남문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데 다른 날에 비해 사
람들이 북적거렸다. 어제가 열나흘, 오늘이 정월 대보름이다. 주차장 안은 벌써부
터 축제 분위기로 들떠있었다. 주차장 한 편에는 대보름‘달집태우기’를 위해서 볏
짚으로 큼직하게‘소원지탑’이 세워져 있었다. 밤이 되면 떠오르는 보름달을 보면
서 달맞이하기 위해 모여든 모든 사람들이 달님께 일 년 평강을 빌면서 달집태우기
를 할 것이라고 했다. 그 탑에는 소원을 적은 하얀 편지 쪽지들이 수없이 꽂혀 있었
는데 오후에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도 달님께 소원을 적어서 그 탑에 꽂기로 했다.
남문관 식당 앞에 모인 남사모 회원들은 각자 자기소개를 하고 2월의 따뜻한 햇
볕을 받으면서 모두 행궁으로 향했다. 행궁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해가 갈수
2013년 3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119
록 행궁은 옛 모습을 되찾아가는 느낌이다.
한남루를 들어가서 외삼문 북행각을 지나고 외행전(하궐)과 일장각을 둘러보고
상궐 북행각을 지나서 임금님이 계시던 내행전(상궐) 앞에 잠시 섰다. 내행전 안에
는 십장생 병풍, 서안, 촛대, 침구류등 전에 못 보던 물건들이 꾸며져 있었다. 격식
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내행전의 모습이 좋아 보였다. 좌승당을 지나 재덕당과 후
원에 있는 이위정까지 올라갔다. 외삼문을 지날 때는 담 아래 전시되어있는 사 오
십년 전의 남한산성 사진전을 보았다. 산성의 옛 모습을 보니 아득한 옛날을 보는
것 같았다.
회장님이 설명하시기를 외국의 다른 성들은 성주가 죽게 되면 성은 그 위력을 잃
게 되는데 남한산성은 이천 여년의 역사를 지나오면서 소멸하고 복원하고 유지하
고 발전하면서 살아 숨 쉬는 곳이라고 하셨다. 그런 여건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
재되는데 유리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다고 했다. 행궁을 모두 돌아보고 다시 한남루
로 내려오는데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회원들은 점심이 준비되어있는 남문관 식당
으로 내려갔다.
점심으로 청국장찌개와 막걸리를 곁들이면서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맛있게
먹었다. 오늘의 점심은 오세응 의원님이 내셨다.
점심을 먹은 후 회원들은 만해기념관으로 갔다. 기념관 2층에서 2부 행사“남사
모와 함께하는 세시의 다이얼”공개방송이 기다리고 있어서다. 60년대 70년대 최
고의 인기 DJ이며 동아 방송“세시의 다이얼”진행을 맡으셨던 최동욱님이 2부 행
사를 맡으셨다.
만해기념관 2층은 사방이 유리로 되어있어서 어느 계절이나 주변 경치가 한 폭
의 동양화처럼 다가온다. 유리창 너머 행궁과 청량산 자락을 바라보면서 회원들은
자리에 앉았다.
모든 방송 장비를 준비하신 최동욱님은 남한산성의 아름다운 풍광과 만해기념관
을 설명하면서 공개 방송의 서두를 떼셨다. 이어서 만해 기념관 관장을 맡고 계신
전보삼 회장님이 남사모 활동과 만해기념관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이제부터 팝송 한곡씩을 신청하는 시간이다. 젊은 시절 따라 부르고 즐겨 듣던
노래들이다. 맨 처음 오세응의원님의 신청곡은 루치아노 파바로티의“La Donna
E Mobile"이다. 다음은 미국에서 보석과 경영학을 접목시켜 사업을 하고 있는 이
2013년 3월
120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칼빈님 신청곡 푸랭크 시나트라의 ”My way". 팝송 선율이 계속 흐르면서 듣는 회
원들의 표정이 행복해 보였다. 모든 분들이 젊어보였다. 최종섭 부회장님은 제시카
심프슨의“Irresistible"을 신청하셨다. 기념관 2층은 팝송의 선율로 가득 메웠다.
다음은 시인 두 분이 자작시 낭송을 하셨다.
먼저 문효치 시인의 시 두 편 <공산성의 들꽃><비천> 낭송을 들으면서 회원들은
감동으로 모두 숙연해졌다. 그중의 한 편 <공산성의 들꽃>을 여기 실어보겠다.
이름을 붙이지 말아다오/ 거추장스런 이름에 갇히기보다는/ 그냥 이렇게/
맑은 바람 속에 잠시 머물다가/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는 즐거움// 두꺼운 이
름에 눌려/ 정말 내 모습이 일그러지기 보다는/ 하늘의 한 모서리를/ 쪼금
차지하고 서 있다가/ 흙으로 바스러져// 내가 섰던 그 자리/ 다시 하늘이 채
워지면/ 거기 한 모금의 향기로 날아다닐 테니/ 이름을 붙이지 말아다오/ 한
송이 자유로 서 있고 싶을 뿐//
<공산성의 들꽃> 문효치
시 낭송이 끝나고 경쾌한 선율의 팝송 서너 곡을 들었다. 김정근님, 박경화님, 황
규준님의 신청곡이다. 다음 차례 노향림 시인도 자작시 <겨울 헬리콥터>를 조용한
목소리로 낭송하셨다. 감동으로 모두 조용했다.
이어서 신청 전 회장님도 한 곡 "Besame Mucho"를 신청하셨고“Let It Be me",
"Don't Forget To Remember", "Yesterday", "You Needed Me", "Take Me Home
Country Roads"등 흘러간 팝송은 들어도 들어도 또 듣고 싶다. 신현일 고문님은
노라 존스의 ”Come Away With Me"를 신청하셨는데 음악을 무척 좋아하시는 분
같다고 최동욱 진행자의 평이 있었다.
신청곡 선율 속에 봄날 오후가 저물어 가는데 다 같이 한 곡 부르자며 최동욱님
은 프린트 물을 나누어 주셨다. “When It's Springtime In The Rockies"를 다함
께 크게 불렀다. 학창시절에 많이 불렀던 노래이다.
봄날은 저물어가고 모두들 팝송에 취하고 시에 취한 채 한 두 사람 씩 집으로 돌
아갔다.
‘라디오 서울 코리아’최동욱 대표님, 좋은 음악 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개
2013년 3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121
방송에서 신청했던 곡은 라디오 서울 코리아 방송을 통해 내일 들을 수 있다고 했
다.
03월 강의 자료
남한산성의 과거, 현재, 미래
최종대 (정치학박사, 평화통일국민포럼)
1. 남한산성의 지리적, 역사적 특징과 의미
남한산성은 한반도의 중앙을 가로질러 흐르는 한강 하류를 통제하는 지역에 위
치하고 있다. 3국시대 초기 백제의 도읍이 들어선 이후 축성이 시작되어 군사적 요
충지가 되었으며 한강유역 쟁탈시부터 수많은 전투의 근거지였다. 고구려의 바보
온달이 아차산에서 전사할 때 신라군의 본영은 남한산성 부근이었을 것이다. 고려,
조선왕조시대 중부권의 조세, 물자운반, 인원수송이 한강을 이용하고 개경, 한양과
영남지방의 교류도 한강, 문경새재, 낙동강을 경유하였으므로 남한산성은 도성으
로 출입하는 길목이었다.
조선왕조는 한양에 도읍을 정한 후 북방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고려의 왕도인
개경, 해상과 남방의 위협에 대비하고 유사시 대피하기 위해 강화와 광주에 유수를
두어 도읍의 외곽을 튼튼히 했다. 남한산성은 광주의 정치, 군사의 중심이 되어 역
사의 풍랑을 지켜보았다. 조선왕조말 집권세력내부의 권력투쟁과정에서 발생한 임
오군란, 갑신정변, 을미사변시 관련된 군부대와 군인들의 애환이 잊혀진 역사에 묻
혀있을 것이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잠실벌 삼전도에 있는“대청황제 공덕비”를 파내어,
한강변에 버렸다. 일본이 물러간 이후 부끄러운 역사도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이 채
택되어 송덕비는 잠실 석촌 호수 주변에 세워졌다. 잠실과 남한산성간의 넓은 들은
2013년 3월
122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용산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의 야외 훈련장이 되었다. 광복이후 군용지였던 송파
일대는 육군의 특전부대가 1970년대초 주둔하기 전까지 월남동포, 서울로 이주한
도시민들의 임시 거주지가 되었다가 이제는 올림픽 공원을 중심으로 최적의 도시
가 되었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의 치욕적인 역사를 잊고 이와 같은 주민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6·25전쟁시 북방세력의 침략을 물리쳤다는 의미를 강조
하기 위해 남한산성을 국민정신교육의 도장으로 활용하였다. 이를 위해 산성과 성
남시 지역으로 내왕하는 도로를 개설하고 호국보훈 행사시 산성을 방문하였으며
수어장대에 기념식수도 하였다. 사관학교를 비롯한 군 간부교육 기관에서 산성을
수시로 방문하여 민족의 치욕을 되풀이 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2. 병자호란과 남한산성
조선은 개국한지 200년 만에 통일된 일본의 침략을 받아 7년을 시달렸다. 조선
을 구원하기 위해 20여만 명의 군대를 출병시켰던 명은 체제 내부의 모순과 조선
지원 부담 등의 문제로 쇠약해졌다. 이러한 틈새를 이용하여 만주의 여진족은“누
루하치”가 중심이 되어 새로운 왕조체제를 탄생시켰으며 군사적 대결시 명은 패퇴
를 거듭했다. 이러한 국외정세에 어두웠던 조선은 선조이후 광해군의 등장, 인조반
정과 이괄의 난을 거치면서 전후 복구를 제대로 하지 못한채 또다시 북방의 침략을
당하였다.
기마병과 경무장으로 신속히 기동하는 청의 군대에 비해 보병과 산성 수비로 일
관한 조선의 군대는 정보, 장비, 전술, 전투의지, 지휘 면에서 상대가 되지 못하였
다. 강화도와 남한산성에 임금과 세자를 비롯한 집권층이 고수 방어를 하면 전국
수령 방백이 보유하고 있는 군대가 근왕병이 되어 청군의 배후를 공격하고 임진왜
란시와 같이 민간으로 구성된 의병이 가세한다면 청군은 철수할 것이라고 안이하
게 판단하였다. 통신이 불비했던 당시 2개월이 지나지 않아 임금이 항복하였으므
로 지방에서는 사전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대규모 군사를 출동시키지 못하였고
산발적인 저항에 그치고 말았다.
청군은 압록강을 비롯한 조선의 강이 결빙하자 12월초 공격을 개시하여 10여일
2013년 3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123
만에 도성에 도달하였다. 초기 선발대는 1만명 미만이었으므로 의주~한양에 이르
는 주요 목에서 결전을 시도하였다면 청의 본진이 명의 배후 위협을 무시하고 출병
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조선군이 신속하게 무너진 이유는“이괄의 난”주모자중
일부가 만주로 피신하여 조선의 내부 사정을 소상히 알려주고 침략군의 선두에서
조선의 취약한 부분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청태종이 대규모의 본대를 이끌
고 친정하였으므로 군사작전과 지원, 부대간 경쟁과 협력이 원활하여 조선군은 정
면으로 대결하기 어려웠다.
병자호란은 국왕을 비롯한 지도층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고충은 더욱 비참하였
다. 청군은 이동 및 주둔하면서 조선인을 살상하고 방치하여 수많은 사람이 얼어
죽었다. 청군은 수만명의 조선인 포로를 끌고 가 몸값을 받고 송환시키면서 경제적
이득을 취하였다. 송환되지 못한 조선인은 노비가 되거나 타지역으로 팔려가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았다. 여자들의 경우 송환후에도 억울한 일을 당할 수 밖에 없었
다. 무자비한 약탈과 인명의 살상은 청군이 지나간 지역을 황폐화 시켰으며 적개심
을 갖게 하여 북벌을 주장하였지만 조선이 중국 대륙을 석권한 청에 대항하기에 역
부족이었다.
병자호란의 치욕은 몇가지 교훈을 남겼다. 첫째, 국제 관계에서 영원한 우방도,
적도 없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지원 등 전통적인 우호관계에 집착하여 지나치
게 명과의 관계를 우선했던 외교의 실책을 되풀이 하지 말았어야 했다. 둘째, 국가
안보 문제는 정파간의 대립보다는 쌍방간 합의한 최적의 선택을 해야 한다. 서북방
어전술 상의 차이와 주전론과 주화론 같은 극한적인 대결은 국익에 불리하다. 셋
째, 안보위협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에 대응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을 강
구해야 한다. 왜군과 달리 북방민족은 몽고군과 같이 기마병 위주로 운영되므로 화
포와 같은 공격무기를 개발하고 주요 길목에 장애물을 설치하고 매복 등의 전술을
구사해야 했지만 산성위주 수비전략을 채택하였다. 넷째, 국가의 기본 책무인 외부
의 침략에 대비할 수 있는 군사제도를 구축하고 군비태세를 확립해야 한다. 상비군
의 규모와 운용, 지방군의 동원 및 훈련체제, 무기와 장비의 준비 등은 국가통치 차
원에서 부단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 다섯째 국가의 주요기밀이 외부로 누설되면 가
장 취약하다. 이괄의 잔당들 간첩 행위는 오늘날에도 흔히 발생할 수 있다고 보아
야 한다.
2013년 3월
124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3. 국가안보와 문화유산으로서의 남한산성
남한산성내에 안보의식을 함양할 수 있는 박물관, 사적지 등 각종 기념물이 필요
하다. 조선시대의 군제를 정리하여 보존하고 병자호란 당시 전황을 상세히 소개하
여 학생들이 견학하게 해야 한다. 조선시대 군복, 장비 등을 전시하고 병자호란 당
시의 상황을 재현하는 행사도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이다. 석촌호수 주변에 있는 삼
전도 비를 성내 또는 성 주변으로 이전하는 것도 검토해볼만 하다.
군사교육기관, 재경지역 부대도 주기적으로 행군, 전술훈련을 산성 인근에서 실
시하고 사적지를 순례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군 주관행사시 민간인이 참관하는
기회를 부여하면 긍정적인 효과도 기대된다. 북방의 위협과 대응 전략에 관한 학술
행사와 정책토론회를 산성지역에서 개최하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
다. 산성 인근 4개 기초자치단체와 2개 광역단체가 한국학 중앙연구원 등 국책 연
구기관, 국방부와 협력하여 추진하면 적절하다.
이승만 대통령의 국난극복을 위한 노력과 남한산성에 관한 치적을 재평가하여
인정하고 필요시 복구할 필요가 있다. 4·19이후 이승만의 국가지도자로서의 실적
과 행위는 철저하게 파괴되고 무시하여 왔는데 당시 보좌했던 각료, 장군 등 주요
직위자들과 국민들의 증언과 국민적 합의를 통해 관련된 사적을 복구시켜 역사를
제대로 알려야 한다.
이와 같은 국가적 차원의 사업을 추진하면서 남한산성의 역사와 전통을 살려 세
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도록 추진해야 한다. 남한산성은 한반도의 중심에서
한민족 역사의 순간순간을 지켜보았으며 생활의 방식이라 할 수 있는 문화의 정치,
경제, 사회적 측면을 망라한 유산임을 전세계가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2013년 3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125
남한산성 아리랑
김 진 원
구비능선 숨 고르는
동서남북 대문 안에
오는 손님 가는 손님
이별 아리랑
수어장대 마루 올라
까치소리 솔바람소리
사백의 해를 넘긴
삼학사의 넋이여
아리랑 혼이 되어
낙엽위에 뒹구는데
광주廣州라 금빛 산수
산성이라 은빛 산수
행궁계곡 다람쥐도
아리랑 아라리요
숭렬전 온조님 옛날 아리랑
현절사 선사님 단잠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산성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님을 찾아 왔구나
행인이 왔구나
나룻배 타고 얼씨구 아리랑
2013년 3월
126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내 혼이 살고 지는
님 보는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만해 아리랑
이슬 먹고 물 마시는
우리네 풍진 세상
살어리 살어리
산성에 살어리라
아리랑 아리랑 산성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2013년 3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127
2013년 3월
128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봄기운을 스케치하다
이 연 주
꽃샘추위가 살랑 이는 봄빛 햇살의 춘삼월, 마지막 날 마지막 주 일요일이다.
어젯밤의 봄비가 땅을 살짝 적신 후 꽃샘의 기온이 쌀쌀하다.
신선하고 청량감 있는 아침공기를 마시며 남.사.모 회원님들을 만나러 가볍게 발
걸음을 재촉했다. 이미 약속된 박연주 회원과 원종순 회원을 만나러 약속장소로 향
하는 나는 풍선처럼 마음이 부풀어 있었다. 그 누군가를 만난다는 자체만으로도 에
너지가 충족되고 또한 즐겁게 상쾌한 아침을 음미하는 시간일 것이다.
우린 셋이 은행시장 앞에서 9번 버스를 기다리는데 사무국장님 전화가 왔다. 우
리를 픽업해 간다고 기다리란다. 사무국장님 덕분에 승용차로 남한산성에 올랐다.
길가엔 아직은 쑥스러운 듯 살포시 몽우리만을 드러낸 채 피지 못한 망울들이 예쁜
꽃으로 자기 몸을 드러내고파서 몸부림치는 듯하다.
한 치의 실수도 용서하지 않을 듯 사무국장님은 자신의 맡은 일을 너무도 완벽하
게 수행을 잘 하신다. 맘속으로 여러 번 박수를 보낸다.
여느 때와 같이 회원님들이 속속 모이고 인사의 자리를 마련했다. 전보삼 회장님
인사말씀은 해외 가셨다가 오늘 아침 9시 30분 도착하셨단다. 말레이시아는 더워
서 힘들었는데 우리나라 오니 춥다고 하신다. 피곤하셔서 산행을 못하시고 점심 식
사자리에 오시겠다고 인사하셨다.
인사가 끝나고 일행은 남문을 지나 수어장대를 올랐다. 그리고 서문을 지나고 곧
바로 국청사 경내에 도착했다. 회원님들은 역사적인 선조들의 애환이 담긴 것들을
보고 들으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시간을 보냈다. 오늘의 남사모 역사를 현실로 받아
들이며 회원님들은 발길을 돌렸다. 조금 내려오니 한경직목사가 생의 마지막을 지
낸 교회 사택이 보였다. 나무가 울창한 숲속 외진 곳에서 인생의 마지막을 쓸쓸히
지냈을 생각에 잠시 숙연해졌다. 이 짧은 시간도 생의 한 조각이구나 생각하니 소
2013년 4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129
중하게 느껴졌다.
일행은 청량산 탐방을 마치고 마을로 내려왔다. 남문관 식당에 도착하니 시골의
맛 토장국이 회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회원님들은 입맛에 맞는 모양이다.
맛있다고 한마디씩 하신다. 어느 정도 식사가 끝나고 담소가 무르익을 무렵 정흥숙
교수님이 낭랑하신 목소리로 시 한 수를 선물하신다. 예전에 모 방송국 성우 이셨
다는 과거가 무색함이 없이 시를 낭송하는 목소리가 내심 부러웠다.
식사 후 회원님들이 세미나가 있을 강의실로 자리를 했다. 남.사.모 회원님이신
최종대 박사님의 강의로서“남한산성의 과거 현재 미래”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하
시는 열정적인 모습에 모두들 귀를 쫑긋 세웠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의 치욕적인
역사를 잊고 북방세력의 침략을 물리쳤다는 의미를 강조하기위해 초대 이승만 대
통령은 남한산성을 국민정신교육의 도장으로 활용하였다고 한다. 석촌호수 주변에
있는 삼전도비를 성내 또는 성 주변으로 이전하는 것도 검토해 볼 만 하다고 최종
대 박사님은 말씀하신다. 남한산성에 관한 치적을 재평가하여 인정하고 국민적 증
언과 국민적 합의를 통해 관련된 사적을 복구시켜 역사를 제대로 알려야 한다고 주
장하시면서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도록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강의
는 끝이 났다. 강의가 끝난 후 여러 회원님들의 열정과 더 많은 것을 알고자 질문하
시는 모습에 찬사를 보내 드리고 싶다.
하루의 소중한 시간들을 남사모에서 회원들과 함께했다. 진취적 사고로 더 많은
것을 알고자 하는 내 욕구가 충족된 귀한 시간을 보냈다. 회원님들께 감사드린다.
4월 강의 자료
사월의 수채화들
최 종 섭 (전국경제인연합회 경영자문위원)
이번 발표 자료는 남한산성에 숨겨진 역사 발자취를 간단히 더듬어 본 후 남.사.
모 회원들이 즐겁고 유쾌한 우리들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마련하였습니다. 동
2013년 4월
130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영상을 통한 다양한 색깔의 詩와 음악들이 남사모 아름다운님들을 잠시나마 힐링
의 세계로 인도하였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1. 자랑스러운 남.사.모
이제 남사모도 하나의 역사다. 한 달 후 5월이면 남.사.모 창립 17주년을 기념하
게 된다. 남한산성 행궁복원에 있어 우리 남.사.모가 그 시발점이 되었고 그동안 한
번도 빠짐없이 매월 남.사.모 정모를 통해 남한산성을 배우고 남한산성을 답사하며
함께 토론도 하면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먼 훗날 남사모는 남한산
성의 역사에서 중요한 한 페이지로 기록되어 질 것임을 확신한다. 2년 전「남.사.모
15년사」의 책자가 발간되었는데 앞으로 50년사, 100년사로 이어져서 남.사.모의
발자국들은 남한산성을 찾는 세계 문화인의 가슴에도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우리 모임 남사모가 자랑스럽지 않은가?
우리 남사모 회원들이 아름답지 않은가?
2. 남한산성에 잠시 머무르다 (동영상)
남한산성은 그 경관이 매우 수려하다. 청정한 소나무, 싱싱한 활엽수들
맑게 흐르는 물, 그 속에 공존하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꽃과 동식물들.......
남한산성을 오르면 우리도 모르게 마음이 정화되면서 무엇으로도 환산할 수 없
는 활기찬 에너지를 충전 받게 된다.
이러한 남한산성은 장구한 역사를 거치면서 이곳을 찾는 인물들의 흔적과
사연들이 켜켜이 쌓여있다. 비록 남한산성의 나무와 돌등 그 모습과 형태가 변하
였어도 그 때의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우리에게 쉼 없이 속삭이고 있다
3. 남한산성의 자취
◆大夫松: 남한산성의 동쪽기슭에 위치, 정조가 종3품 대부의 벼슬을 내림
2013년 4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131
◆以威亭: 추사 31세때 김정희의 글씨
◆松巖亭터 : 황진이와 얽힌 사연
◆駐챖岩: 정조 1779년 8월 영릉 참배길 정조가 들름
◆하멜 체류 : 하멜표류기에 1달간의 기록이 남아 있음.
4. 사랑의 詩와 아름다운 노래들 (동영상)
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 정희 (발표 내용 중 詩한편)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 십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2013년 4월
132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 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리
2013년 4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133
2013년 4월
134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4월 모임 스케치
충절과 소통의 남한산성
신 동 수
계속되는 기상 이변 속에 신록의 계절이 빛을 잃고 있는 4월의 끝 무렵.
오늘은 남사모 정모에 모처럼의 반가운 얼굴들을 뵙고, 남한산의 봄꽃의 화사함
을 맛 볼수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늦지 않으려 서둘렀다. 날이 좋와야 할텐데 하는
걱정을 하면서, 제시간 안에 도착했다. 그러나 날씨는 구름이 하늘에 잔득 머물고
바람은 제법 쌀쌀 했다.
10시가 다되어도 평소보다 회원들의 수가 적어 보인다. 늘 보이시던 회원님들이
오늘따라 많이 안 보이신다. 때가 때인지라 가정이나 개인적 중요한 행사나 경조
사 등으로 많은 분들이 바쁘신가보다.
사무국장의 사회로 20여분이 모여 개인 인사를 나누고, 오늘 분당에서 처음으로
오신 두 분, 이민영, 박익효 님은 활기찬 에너지로 인사 소개를 하고 많은 박수를
받았다. 어는 모임에서나 새로운 식구는 새로운 활력소로 작용하므로, 남사모에서
두 분의 많은 활동 기대를 해본다. 전보삼 회장님의 인사말을 듣고, 현절사 답사를
시작으로 오늘의 일정을 시작하였다.
남사모 깃발을 선두로 남문관을 출발한 우리 일행은 현절사 사당앞에 모여 다같
이 먼저 예의를 갖춰 인사를 올리고, 회장님의 현절사와 관련된 설명을 듣는다.
홍익한, 윤집, 오달제 세분의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
전보삼 회장님의 박학한 지식과 기개가 묻어나는 유수와 같은 언변이 지나가던
등산객들의 발걸음도 멈추고 우리 대열에 빠져들게 만든다.
일제 식민통치에 가장 저항적이었던 광주 지역을 억누르고 남한산성을 굴욕과
패전지로 격하시키기 위해 , 일제는 광주의 관할지역을 당시 안산 시화호 까지 펼
2013년 5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135
쳐졌던 서쪽지역을 떼어내고, 중부면을 포함한 동쪽지역 만으로 광주로 축소시켜,
270여 년 동안 지니고 있던 광주의 역사적인 사실들을 분해 말살 하려는 정책을 폈
다는 사실을 서두로 현절사의 의미를 풀어나가셨다.
병자호란때 20대 청년의 나이로 순절한 오달제, 윤집과 60대의 장군이었던 홍익
한은 60만 포로와 함께 청으로 끌려가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
게 나라를 위해 끝까지 저항하고, 죽음을 선택하였던 조선의 선비정신을 실천하셨
던 충절 정신의 표상이었다.
그 후 조정에서는 후기 조선 왕조의 정신적 지주로서 세 분의 충절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곳 남한산성에 모신 것은 남한산성이 충절의 장소라는 중요한 의미가 있음
을 말해주는 것이며, 남향으로 지어진 일반 사당과는 현절사가 행궁을 향한 서향으
로 지어진 것은 돌아가셔도 세분 영령의 충절을 높이 기리기 위함이라는 것을 말씀
하신다. 이곳 남한산성이 결코 일제에 의해 왜곡된, 굴욕과 치욕의 장소가 아님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것을 재차 강조하신다. 회장님은 이러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조선의 선비정신을 기리기 위해 특별전시를 곧 준비하신다하니 큰 기대가
됩니다..
현재 현절사는 이들 삼학사 외에 김상헌과 정온을 추가로 배향하여 오학사라 칭
하여 매 음력 9월 10일 제향을 올린다는 회장님의 설명이 끝나자, 김진원 사무국장
은 오달제와 홍익한 그분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자 문중에서 문파를 형성하면
서 후손들에게 그 충렬정신이 자손대대로 영광으로 빛나고 있음을 추가로 설명하
였다. 삼학사의 국가를 대신한 장렬한 순절을 뒤로 한 채, 동장대 터로 발걸음을 옮
겼다. 서서히 오르막길속에 큰 바위를 만나니, 이 장소가 장경사, 망월사로 가는 옛
길로 우리 선조들이 등짐 놓고 쉬었다가는 쉼터란다. 우리도 잠시 쉬면서 바람으로
땀을 식힌다.
계속 오름길에 동장대 터에 이르러 남한산의 전망을 조망한다.
멀리 보이는 벌봉을 감싸는 외동장대를 포함하여 유일하게 남한산성에서만 장대
가 5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 방향은 왼쪽으로 틀어 북문 쪽으로 향한다.
오른쪽으로 연주봉이 보이고, 능선을 따라 저 멀리 앞쪽에 수어장대가 숲속사이
로 살포시 언저리만 보인다. 남한산성에서 수어장대의 위상을 살리고자 그 주변의
2013년 5월
136 _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나무들을 정지작업을 통해 어디에서든 눈에 들어올 수 있도록 조만간 작업을 할 예
정임을 회장님의 알려주신다. 수어장대의 당당한 모습이 남한산성을 휘 감고 있는
기운을 느껴본다.
동장대 터에서 내려오면서 만나는 암문. 여기서 회장님의 설명은 계속된다.
성벽은 다친 공간의 개념으로, 암문은 외부와의 열린 공간으로의 소통의 개념으
로 설명할 수 있는데, 보통 다른 성곽에서는 4~ 5개 정도 있는 암문이 오직 남한산
성에서는 16개가 존재한다는 것은 당시 조정에서 닺고 열림을 자유자재로 관리하
고 있음을 말해주는 전략적으로 의미 있는 시설임을 강조하신다.
또한 성곽이 능선 따라 때로는 유선형으로 큰 굴곡을 이루고 있는 것은 적을 유
인해서 양쪽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함인데, 이는 여러사람의 의견을 오랫동안 듣고
여론이 형성된 것을 채택하는 합리적 행위의 결과라는 사실도 덧붙이신다.
남한산성을 통해 소통과 여론의 중요성을 이미 우리 조상들은 오래전부터 실현
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성곽 길을 내려오면서 불과 얼마 전 보수공사 이루어진 곳곳에 훼손된 성벽의 여
장들을 보면서 안타까움과 동시 분노감을 감출 수 없었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유적지를 보전하는 길은 더 애정을 갖
고 누굴 탓하기 전에 나부터 이기적 욕심을 버리고 조그마한 질서부터 실천하는 것
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하고 자성해본다.
북문의 오른쪽 하남지역은 한양의 옛 곡창 창고가 있었으며 전국의 곡물을 유통
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설명을 듣고 나니, 오랜만에 많은 발품을 판데다 벌써
12시가 훌쩍 넘어가고 있어 시장기가 더욱 진동한 듯 여기저기서 배고프다는 탄성
이 나온다.
점심 식사가 끝나고 최종섭 부회장님의 오후 세미나가 시작되었다. 아름다운 영
상과 사진 그리고 음악을 더하여 소중히 만든 자료 화면을 보면서 남사모의 하루를
멋지게 보냈다는 행복감에 늦은 오후 남한산성을 내려왔다.
2013년 5월
남한산성 역사문화 강좌 _ 137
2013년 5월
남사모 제 10대 임원명단
□고문 : 신 청, 문제길, 공석붕, 신현일
□회장 : 전보삼
□ 수석부회장 : 최종섭
□부회장 : 신동수, 이종화, 김내동, 이광석
□감사 : 배윤옥, 정완길
□ 사무국장 : 김진원
□ 사무차장 : 박용규
□총무 : 주미숙
□ 학술분과장 : 이승수
□ 생태환경분과장 : 손종구
▣ 편집위원
전보삼, 김진원, 박용규, 주미숙
남사모 역사문화강좌
2013년 5월 25일 인쇄
2013년 5월 26일 발행
편집인 : 남사모(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간행처 : 남사모(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912-1번지 만해기념관
전화) 031-744-3100 팩스) 031-744-3190
인쇄소 :동진인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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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십 장의 사진이 책자에 실렸는데 복사가 되지 않아 이곳에 넣지 못한 점 아쉽습니다. 계속되는 남사모의 흔적들....영원하라...
고생하셨습니다()()()
근ㅁ데/// 다른 기념 사진은 아직 안 올라 오네요~^^
남사모 화이팅! 참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사무국 모든 분들 참 수고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