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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책을 읽기 위한 방법으로 도서관을 이용하기로 했다. 1개월에 20권의 책을 마음대로 빌려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60만권의 장서를 돌아보며 관심 있는 영역에서 골라낸 책은 평소 존경하던 윤재근 교수님의 문화전쟁(한국문화 현실, 이대로는 미래가 없다)이라는 책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우리 문화를 체계적이고 깊이 있게 정리해 놓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우리나라 역사를 통해서 축적된 한문화에 대한 개념을 통해 우리가 앞으로 한문화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한문화를 강문화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명제를 얻게 되었다.
평소에 내가 가졌던 생각이 존경하는 교수님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는 기쁨이 무엇보다 크다.
다만, 남북통일을 대비한 생활문화의 공유를 남북분단 이전의 도덕주의를 공유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은 무리수라고 본다.
내 생각에는 남북한 생활문화의 공유를 위해서는 도덕주의 공유보다는 북한주민의 경제적 생활수준이 업그레이드 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본다.
기록해 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본문을 적어 보았다.
명사는 존재를 해석한 사고를 기표하고, 동사는 그 기표에 따른 사고의 행위를 해석한다.
한민족의 정신세계를 최치원은 풍류정신이라 하고 이것으로 온 백성을 접촉하여 교화했다고 해석하고 있다.
접화군생(接化群生)은 단군신화의 홍익인간(弘益人間)과 같은 정신이다.
접화군생- 온 백성이 접촉하여 교화했다.
일연의 단군신화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교합해야 인간의 세상이 다스려진다는 것이 단군신화의 요체이다. 이러한 요체에서 한민족의 정신세계를 이루는 원형을 찾게 된다. 하늘이 땅으로 내려온다는 생각은 몹시 구체적이다. 햇빛이 내리고 비가 내린다. 그러면 땅에서는 온갖 생물이 솟는다. 이것이 생명의 순환이다. 한민족은 이러한 순환의식을 갖고 있었음을 단군신화에서 읽어 낼 수 있다.
고려 말기인 충렬왕 때 일연이 삼국유사를 남겨야 했던 것은 한민족의 자아반성과 한민족 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여기에는 문화변동의 주도권을 타문화가 장악한 것에 대한 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삼국유사보다 이승휴의 제왕운기는좀더 명확하게 그러한 의식을 보여준다.
이승휴(1224~1301) 일연(1206~1289)
고려 말의 한민족은 주체성을 원나라에 저당 잡히고 있었다. 그렇게 착잡했던 시대상황을 고려한다면 이승휴의 찬송은 한민족의 자문화가 타문화의 침식에 중병을 앓고 있었음을 문제의식으로 제기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신라때 최치원이 보여 주었던 한민족의 자문화가 형성한 정신세계에 대한 자신감이 고려를 거치면서 쇠퇴한 것이다.
지금도 한민족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문화정신을 확대해야 할 문화의지가 여전히 위기상황에 놓여 있다. 이러한 문화적 위기를 극복하려면 신라 때 최치원이 보여 준 자문화에 기준을 둔 문화변동의 자신감과 아울러 일연과 이승휴가 보여 준 한문화의 위기의식을 동시에 수용하면서 21세기 문화변동을 향한 주체적인 문화의지를 갖추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균여는 신라 경명왕 7년(923)에 태어나 고려 광종(973)때에 입적한 대사이다. 균여는 원효와 의상 등이 정립한 신라의 화엄정신을 이어받았고 이두로 향가를 잘 지었다. 한문으로 한시를 능히 창작할 수 있었던 균여가 왜 향가를 지어 불도를 설파하려 했을까? 균여는 한민족의 말로 불교를 전파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서(漢 書): 한민족(韓民族)에 대한 내용
-그 백성은 도둑질을 결코 하지 않아 문을 잠그어 두는 일이 없다. 그리고 부인은 마음이 곧고 미더워 음란하지 않다
원광법사의 세속오계는 유불을 융합하고 있다.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고 효도로써 부모를 섬기며 벗을 사귀는데 믿음이 있는 것이고, 전쟁에 나아가서는 물러나지 않는 것, 살생하는데 가려서 하는 것.
도가의 말 -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만둘 때를 알면 위태하지 않다.
부족공동체에서 국가체제로의 변화는 통치관성을 변혁시킨다. 그러한 변혁의 이념을 불교가 제공해 줄 수 있었다. 이처럼 불교유입의 초기상황이 정치성을 간직하고 있었음을 검증할 수 있다.
불교는 제도권에 치세이념을 제공해주고 동시에 한민족의 다신적 토착신앙에 영합하면서 백성의 의식구조를 변동시켜 갔다.
삼국시대는 왕권의 통치권을 강화하기 위해 타문화 수용에 적극성을 보였다. 한문화(漢文化)는 문자와 사상을 통해 한문화와 쉽게 접근하면서 한문화(韓文化)의 제도문물을 한문화적(漢文化的)인 것들로 점진적으로 변모시켜 갔다. 철학의 사상보다 종교의 신앙이 더 강력한 전파력을 갖는다. 사상은 이성을 토대로 하지만 신앙은 의지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새로운 신앙은 의식의 형질을 변화시킨다. 불교는 종교였으므로 토착신앙에 의해서 구축되었던 의식의 형질을 변화시키려고 했다.
타문화의 소산들끼리 자문화 안에서 주도권다툼을 한다는 것은 자문화가 약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왕건의 훈요와 최승로의 시무로 10세기 한민족의 지배층이 형성했던 문화정신을 살펴볼 수 있다.
왕건의 훈요십조는 9세기 최치원류에 속하는 문화정신을 담고 있다. 이에 비해 최승로의 시무 이십팔조는 김후직류에 속하는 문화정신을 드러내고 있다.
김후직은 신라 진평황 2년(582)에 왕에게 무일과 직간을 주장했다. 무일(無逸)과 직간은 유교적 치세의 요체이다. 그러니까 6세기의 김후직은 노자의 치세관을 포함하면서 유교적 치세를 왕에게 직간했지만, 10세기의 최승로는 시무 이십팔조를 통하여 유교만을 앞세워 치세에서 불교를 추방할 것을 직간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조선조의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실학파가 등장하게 되었다. 실학파는 반 주자학파로서 조선조 지배세력의 주자적 시대정신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학파의 정신은 폐쇄된 사고방식을 탈피해 자유로운 입장과 실제적인 입장에서 공맹의 치세정신을 재검토함으로써 질식돼 있던 한문화(韓文化)에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이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써 신분계층 사이의 문화적 이질성을 극복하려는 정신으로 볼 수 있다.
조선조는 제국주의로 변신한 일본에게 한문화(韓文化) 말살정책을 당해야 했다. 이러한 한문화의 비극은 결국 조선조 지배세력이 자문화 정신을 무시하고 한문화B를 모화사상(慕華思想)으로 획일화함으로써 다양한 타문화와의 교접을 통한 자문화의 문화변동을 유지하지 못한 결과였다.
조선조에 이르면 한민족의 상층부는 한자에 의해서 사고방식을 정복당하는데, 한자는 처음부터 그런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문자는 한문화(漢文化)의 강력한 무기였다.
고려의 과거제도는 한자의 독서능력을 넘어 한자에 담긴 한문화적(漢文化的) 여러 사상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였다. 이러한 과거제도는 12세기에 이르러 거의 정비되어 어명에 의해서 시험과목이 정해지기에 이르렀다. 고려의 과거제도에서 제일 중시했던 제술업과 명경업의 시험과목을 보면 한민족 지배층이 한문화적(漢文化的)으로 의식변동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한문화A에서는 한민족의 상하구조 사이에 하나의 공통된 언어밖에 없었다. 이는 한민족의 응집력을 확보해 주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한문화 B에서는 한민족의 언어가 한민족의 문자를 만나게 되었다. 한민족의 상층부는 한자의 해독능력을 독점하게 되고 한자의 독해능력이 없는 하층부는 B에서 문화변동의 소외계층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다. 이처럼 한민족의 문화변동에서 한문화의 문자인 한자는 한문화 A를 약문화로 밀어내는 절대적인 수단이 되었다. 이러한 수단을 통하여 한문화 B는 한민족의 언어문화 A와 신앙문화 C를 약문화로 밀어내면서 문화전쟁의 패권을 행사할 수 있는 발판을 고려 초기에 마련했다.
인간이 문화능력을 극대화하면서 생존의 목적과 방법을 구축하려는 것이 곧 문화변동의 정신이다. 이러한 문화정신이 하나의 사상이나 가치체제의 이념으로 굳어질 때 문화는 사고방식의 편식과 편집에 의해서 영양실조에 걸리고 만다. 이는 문화변동의 정체를 불러오고 결국 문화전쟁에서 패자의 몫을 면할 수 없게 된다. 한문화B는 조선조를 통하여 문화변동의 정체가 얼마나 자문화를 약문화로 전락시키는가를 보여 주는 과정을 밟았다.
어떠한 이념이든 문화변동에는 극약이 아니면 독약처럼 영향을 미친다. 문화변동이 단세포적 사조에 매달리게 되면 변동의 호흡은 정지되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서 문화변동의 주역은 민족집단 내의 지식층이다. 지식층의 형성이 다양화돼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변동의 호흡진작이 좌우된다. 그러한 지식층이 집단 전체에 분포되어 있어야 문화변동의 자생능력이 제고된다. 조선조의 한문화는 이러한 문화변동의 여건을 허용하지 않는 지배체제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조의 지배층을 점유했던 지식층의 사고방식은 주자주의로 단일화되었고 철저하게 한자문화에 종속되면서 모화사상의 주자가 되었다. 반면에 피지배층인 상민의 문화정신은 동공화되어 노동력공급의 수단에 불과했다.
문화변동은 자문화를 기준으로 타문화를 취사선택하는 문화정신에 의해서 자문화를 강문화로 변화시킨다. 문화발전은 문화변동의 호흡에 의해서 성취되는 강문화의 결과이다.
조선조 주자주의 지배층은 한민족의 자문화에 대한 모화인식이 결여되어 있어던 탓으로 모화사상이 곧 자기 비항의 사대성으로 연계되었다. 정치적 패권주의에 의한 사대외교는 체제유지를 위해서 필요할 수 도 있다.
그러나 문화의 사대성은 자문화의 생장점을 약화시키는 오류를 범한다. 조선조 지배층의 절대적 주류요 실세였던 주자학도들에게 자문화정신이 결여되어 있었던 탓으로 문화사대에 대한 비판정신이 부족했던 것이다. 민족집단의 자주성은 그 민족의 자문화 정신에 의해서 형성되고 성취된다는 문화정신이 있었더라면 조선조의 지배층은 한문화가 한문화(漢文化)에 종속되는 문화위기를 방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보면 조선조 지배층의 주자정신에는 자문화에 대한 위기의식이 매우 희박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조선조 문화정신에 자문화 의식이 전무했던 것은 아니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와 실학의 대두, 그리고 조선 말기 동학운동 등은 정치 사회적인 의미뿐만아니라 문화변동의 차원에서도 자문화 의식의 표출로 해석할 수 있다.그렇지만 이러한 자문화 의식이 조선조 지배층의 시대정신을 주도할 수는 없었다.
독자적인 문자의 확보는 문화변동을 자문화 기준으로 이끌 수 있는 절대장치이다.
실학정신은 철저하게 소외된 상민을 국력의 기조에 참여시켜야 한다는 사상이었다. 이는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공감대 형성과 더불어 신분계층 상의 문화적 이질성을 극복하려는 정신으로 볼 수 있다. 문화변동 정신의 입장에서 본다면 조선조의 주자주의는 한문화의 통시적 문화변동을 중단시키고 한문화(漢文化)쪽으로 조선조의 지배세력을 이주시켰다고 할 수 있다.
○한문화(韓文化) A 의 원문화적 변동인자는 홍익인간이다. 최치원의 접화군생
○한문화 B의 변동인자는 무위.수기이다.(유가적 인자+도가적 인자)
A의 문화변동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B를 주체적으로 수용했음을 삼국시대 A의 문화정신에서 살필 수 있었다. 이러한 한문화 B가 문화변동을 일으킨 양핵을 다음과 같이 추상해 두기로 한다.
한문화(韓文化) B(B1)의 변동인자- 무위자연
한문화(韓文化) B(B2)의 변동인자- 수기치인
소나 말에 달려 있는 네 다리가 자연이다. 말의 입에 물린 재갈이나 소의 코에 걸려 있는 코뚜레가 문화이다.-장자 추수편
이처럼 도가는 문화, 즉 문치를 통하여 인간을 교화한다는 유가의 사상을 배격하고 무위자연을 통하여 천하가 자화자정을 스스로 이룬다보 본다.
군자의 도는 인간세상을 사리사욕의 혼란에서 벗어나게 하여 대동사회를 건설 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군자는 중용을 따르고 소인은 중용을 버린다. 군자의 중용은 때에 맞춰 거슬리지 않는 것이며, 소인의 중용이란 것은 스스로를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것이다.-중용 2장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인간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인간으로 교화하여 태평을 이룩하는 것이 군자의 달도이다. 그러한 달도는 곧 명덕으로써 성취된다고 유가는 본다.
○한문화 C의 변동인자는 불생불멸이다.
한문화C는 한문화가 인도문화의 불교에 교접한 다음 이루어진 문화변동의 인자이다.
불교는 모든 인간이 각자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군자와 소인으로 분별한 유가와 다르다. 신분제도에 철저한 힌두교에 대항하여 출발한 불교는 평등사상을 지녔다. 신라의 혜숙, 혜공, 원효 등이 주창했던 대중불교의 지향은 불교사상이 한문화정신을 변동시켰던 사례이다.
제법무상과 제행무상을 깨우쳐 멸도의 열반에 드는 것이 불교정신의 목표이다.
○한문화 D의 변동인자는 자유평등이다.
1세대 한문화의 변동인자 A
2세대 한문화의 변동인자 A B C
3세대 한문화의 변동인자 A B C D
한국인의 정체성을 나타내주는 정신의 핵심은 홍익인간, 불생불명, 수기치인, 무위자연, 자유평등이다.
조선조 지배세력의 의해 구축되었던 문화정신은 왜 그 정체성을 확립할 수 없었던가?
조선식 사고와 행동의 창출보다 주자적 이념에 종속되어 사고와 행동의 교조화를 추구했던 까닭이다.
문화의 종속화와 의존화는 결국 생존의 터전인 나라마저 망하게 한다는 교훈을 주었다.
조선조의 망국은 한민족의 소멸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제의 침략앞에 민초의 항쟁은 민족력이었지 국력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민족력은 문화의 힘이다. 이는 곧 한국인이 한국식 사고와 행동을 전제로 그 정체성을 확보해야 하는 이유의 한 예가 될 것이다.
각각의 원문화가 지니고 있는 내적 근원 때문에 정신구조의 상이성을 간직하게 된다.
문화사대는 문화변동을 부정하는 것이므로 20세기 한문화를 비틀고 있는 문화사대는 제거되어야 할 사항이다.
서양문화의 과학문명은 한문화가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할 문화변동의 학문적 인자이다.
약한 경제력은 자문화를 타문화에 종속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주지만 강한 경제력은 타문화를 수용하는 자신감을 마련해 준다.
한국문화의 정체성
1.문화의 정체성은 자문화에 대한 자신감에서 비롯된다.
포용력을 지닌 한문화의 핵인 홍익인간의 정신을 토대로 한문화의 변동인자를 상호융합하여 부단히 재해석하려는 문화의지를 견지한다면 한문화의 정체성은 확보될 것이다.
2,환골탈태식의 문화변동은 자문화의 정체성을 약화시킨다.
환골탈태는 새 술은 새 포대에 넣는다는 사고를 불러들여 신구를 교체하려고 한다. 이러한 환골탈태적 문화변동에는 자문화에 대한 정체성 인식이 없다.
문화정신은 신앙적 사고, 철학적 사고, 도덕적 사고, 창조적 사고, 과학적 사고 등으로 드러나고 일상적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자문화의 정체성은 곧 문화변동의 주체성이다.
3.온고지신식의 문화변동은 타문화를 한국화한다.
온고지신이란 그동안 미처 몰랐던 것을 일깨워주는데 그 참뜻이 있다. 타문화를 통하여 자문화의 강점과 약점을 발견하면 문화변동은 자문화의 생장점을 우성으로 변용시킨다. 온고지신적 문화변동은 문화의 변동인자들을 유기적으로 융합하여 주체적이며 자생적인 가치로 확대한다. 이러한 가능성을 성취하려는 지적 능력의 수행을 문화적 창조력이라 한다. 창조력은 신사고의 생산능력이다. 이러한 생산능력은 문화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발휘된다.
옛것에서 새것을 찾아내는 것이 가치의 재발견이다. 가치의 재발견은 가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그러한 해석은 창조적 변동을 뜻한다.
창조력은 소수문화의 토양에서 자라는 정신의 열매와 같다. 즉 창조력은 자문화의 정체성에 의해서 성장되는 사고의 개체성에 속한다.
어떠한 지식이든 창의성을 얻으려면 상상력과 동거해야 한다. 지식은 가르치고 배울 수 있지만 상상력은 개체적 체험의 통로를 따라 일어나는 종합적인 지적 능력이다. 상상력을 떠난 신사고(idea)는 없다.
4.한국 문화변동의 버릇은 어떤가
A 한민족의 토착신앙 형성-다신신앙-홍익인간
C 한민족에게 불교신앙을 갖게 함-불생불멸
D 기독교신앙 -한문화를 개조하려는 성향
홍익인간이란 원문화정신과 불생불멸의 타문화(불교)의정신이 교접해 한문화의 정신세게를 넓혀 자문화했던 것이다. 이것은 곧 한문화의 정체성을 말해 주는 증거이다.
한문화가 서양문화를 접근했던 초기의 통로는 주로 기독교의 신앙정신에 의해서 구축되었다. 그리고 조선조의 망국과 더불어 한문화를 영위해 왔던 한민족은 일제 식민지탄압 앞에 민족의식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히브리문화의 소산인 기독교를 서양문화의 것으로 완성시킨 다음 한문화에 접근한 기독교는 서양문화의 소산이 되어 있었다. 그러한 기독교의 전파는 한문화 속에 서양문화를 이식시키는 전령구실을 하였다.
5.자생적인 이론의 창출은 정체성을 확고히 한다.
실학사상 속에는 한문화의 변동인자들을 자유롭게 활용하려는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실학사상은 주자주의 이념철학에 의해서 배척당했다. 결국 조선조 지배세력이 구축했던 주자주의 사상은 실학사상을 통해서도 한문화의 철학적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주체적이며 자생적인 사고능력도 창출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조선조의 주자주의와 유가정신은 망국과 더불어 냉대를 받게 되었다. 이는 자문화의 정체성을 획득하지 못한 첡학은 결국 배척당하고 만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삼국시대 중에서 특히 신라문화는 한문화의 정체성을 확보했다는 사례들이 원광의 화랑오계, 신라의 대중불교 운동과 더불어 원효의 기신론, 그리고 설총의 이두 창안정신 등으로 나타난다. 이는 한문화의 한 줄기였던 신라문화가 자문화적 정체성 확보를 바탕으로 타문화를 수용했다는 진단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삼국 중에서 신라가 통일을 이룩하고 고려에까지 그 문물제도를 물려 줄 수 있었던 것도 문화변동의 차원에서 본다면 한문화의 정체성을 고구려와 백제보다 더 강력하게 확보했다는 판단이 가능하다.
정약용의 아언각비(雅言覺非)정신은 한문화의 철학적 정체성 확보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기했다. 만일 조선조의 실학정신이 없었더라면 조선조의 시대정신은 주자주의 종속화로 그치로 말았을 것이다. 아언각비의 아언은 진실 또 진리 그 자체를 말한다. 그리고 각비는 그릇됨을 터득하고 깨우쳐야 한다는 주장이다. 정약용은 이러한 주장을 펴기 위하여 모바으이 학(學)이 아닌 창조의 학을 제시하였다.
-배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배운다는 것은 터득한다는 것이다. 터득한다는것은 무엇인가? 터득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을 터득해 낸다는 것이다. 그 잘못된 것을 터득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성현의 말씀을 통해 잘못된 것을 깨우쳐 터득하는 것이다. 이미 터득한 것에 머물지 않고 뉘우치고 깨우치며 고쳐 가는 것을 두고 배우는 것을 학(學)이라고 한다. 하나를 들어 셋을 돌이켜보고 하나를 물어서 열을 알아내는 것이 배우는 자의 책임이다.-정약용 아언각비 소인
실학사상은 타문화의 철학을 수입해 지식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생존상황을 관찰하고 생존의 부정과 부조리현상을 극복하려는 철학적 사고였다. 이러한 철학적 태도는 곧 자문화적 정체성 확보를 위한 철학적 사업으로 진단할 수 있다.
6.21세기 한문화의 과제, 도덕적 혼란의 극복에 있다.
조선조와 한국 사이에는 모든 체제가 혁명적으로 변동하였다.
이에 따라 한문화의 문화변동 역시 혁명적이다.
왕조와 권위의 종속에서 민주와 자유의 평등으로
사상의 유일화체제에서 사상의 다양화체제로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대가족제도에서 핵가족체제로
정신중심에서 물질 중심으로
혁명적인 변동에 따라 한문화의 도덕적 정체성이 확립했던 도덕관의 변질은 어쩔 수 없었다.
중용정신의 회복이 21세기 한문화의 도덕적 정체성 확보를 위한 단서이다.
중용정신의 확보는 곧 성기(成己)와 성물(成物)의 보합(保合)으로 이루어진다. 성물에만 치우치고 성기를 등한시하고 있는 것이 20세기 한문화의 도덕적 위기이다. 따라서 그러한 보합은 분명 21세기 한문화의 도덕적 정체성을 확보하는데 철학적이며 윤리적인 바탕을 제공할 것이다.
7.문화적 정체성의 과제는 무엇인가
한문화A의 예술은 노래와 춤으로 자연과 인간사이의 생존문제를 표현했다. 그 뒤 삼국시대부터 조선조까지 한문화 A는 한문화(漢文化)B와 인도문화 C에 의해서 격심한 문화변동을 겪었다. 한문화(漢文化)를 통해 예악정신과 아울러 불교의 적멸사상이 들어오면서 한문화의 예술적 정체성은 서서히 계층적인 변동을 겪게 되었다.
21세기 한문화의 예술적 정체성은 D의 의존성에서 탈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적 사고와 미적 체험을 통한 한국화=세계화라는 시대정신을 예술적으로 형성할 수 없다.
한문화의 예술정신은 상호순응, 천명순종, 극락왕생, 미적창조 등으로 혼합되어 있다. 21세기 한문화의 예술적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서양문화 D의 예술관을 수용할 때 한문화 B의 유가적 예술관이 보였던 오류를 반복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연에 없는 것을 맨 처음 만들어낸 것이 예술의 원초적 속성이다. 그러므로 몹시 낯익은 의식주이지만 그것들을 맨 처음 시도했을 때는 필요한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미적 의식의 소산이다. 저마다의 개성을 간직하게 하는 것 또한 예술의 원초적 속성이다.
한복에서도 한문화의 예술적 정체성이 인간과 자연 사이의 상호순응에 의한 생명력의 표현임을 헤아릴 수 있다.
인간이 만들었으니 자연스러움을 간직한다는 것은 노자적인 관점과 통한다. 한문화의 흰옷은 노자 19장의 견소포박(見素抱樸)을 생각나게 하고, 초가는 노자28장의 복귀어박(復歸於樸)을 연상시키고, 한식의 요리솜씨는 노자 28장의 박산위기(樸散爲器)와 통한다.
한민족은 의식주와 언어를 통한 생활문화로써 한문화를 원문화적으로 확보해 왔다.
특히 한민족이 모국어를 잃지 않았다는 것은 한문화가 자문화의 총체적 정체성을 확보했다는 반증이다.
고려속요의 후렴구에서 한문화가 시가무를 통해 간직했을 예술적 정체성은 정적인 속성보다는 동적인 속성을 간직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문화를 통하여 예악정신과 아울러 불교적 적멸사상이 들어오면서 한문화의 예술적 정체성은 서서히 계층적인 변동을 겪게 되었다. 예악정신과 적멸사상은 인생이정(人生而精)의 가치관을 갖추고 있다. 특히 지배층의 정신을 공략하는 한문화의 침투성향에 의해 지배층의 예술성은 인생이정의 가치관 쪽으로 기울어져 갔고 한문화A, 즉 원문화가 이룩했던 인생이동의 예술성은 상민의 생활문화 속에 정체되면서 한문화의 변동인자 A,B,C가 원문화 A의 예술적 정체성을 변동시켰다.
漢文化B의 예술관은 철학적이었고 도덕적이면서 문자를 지니고 있었다. 예술을 감성적 차원보다 사유의 차원으로 옮겼던 B의 시서예술은 한문화 지배층의 절대적 호응을 얻어 예술사대의 착각을 갖게 하였다.
한시가 조선조문학에서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는 것은 한문화의 예술적 정체성이 위기를 맞이한 것을 뜻한다.
조선조 지배세력의 유교예술관이 비천한 것으로 규정했던 민속예술이 한문화의 예술적 정체성을 투사해 주는 예술로 자리바꿈을 한 것이다. 이러한 유교적인 미의식의 퇴조와 더불어 토착적인 미의식의 회복현상은 서양문화 D의 인간중심적인 예술관에 자극받은 것임을 부인 할 수 없다.
한문화의 변동인자 A,B,C,D는 한문화의 미의식을 다양하게 변동시켰다. A는 상호순응 을 통하여 인생이동의 미의식을 형성했고, B는 천명순종을 통하여 인생이정의 미의식을 제공했으며 C는 극락왕생을 통하여 역시 인생이정의 미의식을 제공했다. 위와 같이 한문화의 복합적인 예술정신에다 D는 미적 창조를 통하여 인생이동의 미의식을 접근하게 하였다.
한문화의 예술적 정체성은 A,B,C,D의 예술관을 융합하려는 미의식을 요구한다. 극히 한국적인 예술이 세계성을 얻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한국적인 예술이란 A,B,C,D의 예술관을 융합하려는 정신을 떠나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21세기 한문화의 예술적 정체성 확보는 漢文化B의 유가적 예술관이 보였던 오류를 서양문화D의 예술관으로 그와 같은 오류를 반복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야 가능할 것이다.
8.과학적 정체성은 신사고를 요구한다.
자연을 정복하려는 인간의 의지가 자연과학을 낳는다.
한문화의 과학적 정체성 확보는 자문화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사고방식의 과학화에 있다. 말하자면 과학정신 역시 자문화에 대한 정신을 갖고 있어야 한다.
21세기 한문화의 과학적 정체성 확보는 자연과학의 이론과 지식만을 응용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정신의 전 분야와 연관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과학적 인식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조선조 한문화가 의학을 통해 과학적 정체성을 확보했던 사실을 다시 환기할 필요가 있다. 즉 허준, 서암도인, 이제마의 독창적인 과학정신은 조선조 한문화의 의학이 漢文化의 한의학을 그대로 수입해 모방하는 것에만 만족하려는 시류를 극복하고 한문화 안에서 창출된 것이다. 여기서 21세기의 한문화가 과학적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는 단서를 찾아낼 수 있다.
조선조의 한문화는 의학분야에서는 자문화적인 정체성을 확보했다. 허준의 동의보감과 서암도인의 서암침구결 그리고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에 의해서 조선조의 한문화는 의학적 정체성을 확보했다.
한국문화의 응전과 도전
1.한국문화가 겪은 20세기
한문화의 미래지향적인 도전과 응전은 결국 북한이 아니라 문화변동의 대처능력과 적응능력을 겸비한 남한의 한문화에 달려 있다.
한문화는 매몰의 수난기를 변즉통의 계기로 삼았다. 한문화의 변동인자 A,B,C들은 저마다 한민족의 자각심을 환기시키는 방향으로 정신무장의 핵심을 제공해 주었다.A,B,C의 정싡들은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구축하는 문화의 힘을 발휘했다.
A는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여러 가지 자생종교를 발생시켰고
B는 귀천의식을 버리고 민족대동의 정신을 찾으려고 했으며
C는 일본불교에 대항하여 한국불교의 재건을 확대했다.
그리고 A,B,C의 변동인자들은 공통의 합의점으로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구축하면서 얻게 되었다. 그 합의점이 바로 한문화가 서양문화D를 수용해야 하는 새로운 문화의식이었다.
일제의 수난기를 통하여 한문화가 보여준 변즉통은 한민족의 응집력과 신지식의 열망으로 해명할 수 있다. 만일 한민족에게 강한 자문화가 내재해 있지 않았다면 이민족의 지배에 대하여 저항정신을 형성할 수 없엇을 것이다. 일제하의 저항운동과 독립운동은 민족자존의 문제였지 국권회복의 문제는 아니었다. 한민족은 귀천의식으로 한민족의 내적 갈등을 쌓았던 조선왕조를 위하여 일제에 저항했던 것이 아니라 한민족 자존의 복권을 위하여 일제 36년간 투쟁하고 저항했다. 그러므로 한문화의 일제수난기는 새로운 문화변동을 위한 태동기로 볼 수 있다.
이른바 자유주의 권역과 사회주의 권역이란 양분이 바로 20세기 이념적 분열이다. 이에 한민족은 희생양처럼 이념에 따라 양분되었고 이러한 비극이 20세기의 한민족을 수난에 처하게 했다.
6.25는 양대 이념의 대리전 양상을 띠었다. 소련의 충복이었던 김일성의 남침은 적화통일의 야욕이었고 그런 야욕은 인민해방이라는 구호로 미화되었다. 반면에 남한은 자유주의를 앞세워 반격했다. 그리고 삼팔선이 휴전선으로 대치되는 민족분단의 현실을 맞이하였다. 이런 상황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남북의 적대상황 밑에서 한문화는 양분된 상태로 상호이질화가 심화되면서 한문화의 동질성유지를 어렵게 하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문화현실을 초래했다.
민주화운동에 매진했던 남한의 학생운동이 1908년대 중반에 주사파의 투쟁으로 돌변한 사실은 남한의 산업사회에 자문화 의식이 결핍되어 있었다는 반증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학생운동이 주사파로 변신한 것을 북한의 통일전선 전략에 의한 공작으로만 돌릴 것이 아니라 왜 그들이 시대착오적인 김일성 주체사상에 매료되었는가의 동기를 파악하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역에서 말하는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가 인간의 생존문제에서도 통할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는 창의력이 있기 때문이다.
궁(窮 )은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은 절벽 때문에 멈춰 서 있는 상황과 같다. 궁한 것을 그대로 두고 체념할 때 변(變)은 기대할 수 없다.궁한 것을 극복하려고 사고할 때 궁은 변을 얻게 된다. 궁은 정체된 것이며 변은 변화하는 것이다. 절벽 밑에서 체념할 것이 아니라 밧줄을 타고 절벽을 넘어가려고 한다면 그것이 곧 변이다. 밧줄을 타고 넘어갈 수 있다는 사고와 행위가 곧 창의력이다. 이처럼 변은 인간의 새로운 생각과 행동을 실현하는 발상의 전환을 전제로 한다. 문화변동은 정체된 문화의 절벽(窮)을 넘어가는 변이다.
한문화가 자문화적으로 강화되는 것을 가로막는 절벽 같은 것이 곧 문화사대의 착각이다. 20세기 말 한국화를 실현하지 못하면 경제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자각은 곧 문화사대의 착각을 극복해야 한다는 전제를 말한다. 한국화는 한문화를 통하여 자문화적으로 강화될 수 있는 변화를 가로막고 았는 문화사대의 벽을 허물자는 발상이 곧 한국화이다.
한국화는 결국 한민족의 창의력을 극대화한다는 개념이다. 타민족의 창의력에 의존해서는 경제전쟁에서 주도권을 쥘 수 없다는 상황인식에서 한국화의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나 경제의 한국화는 한문화의 한국화를 떠나서 불가능함을 한민족은 자각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자각은 경제적 의미에서 첨단과학의 기술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서 도출된 것이다.
선진국은 경제력과 정치력만으로 성립되지 않고 문화력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1980년대 이후 한문화를 자문화로 인식하는 문화의식이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절대빈곤의 극복과 전자문명의 전개로 자문화의 강력한 배경이 없으면 경제전쟁의 전선을 형성할 수 없다는 의식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는 중이다.
2.한국문화가 겪을 21세기
21세기의 전자문명이 몰고 올 문화전쟁에 대처하고, 미래의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정신력과 경제력의 융합이 필요하다.
중용정신을 간직한 극동문화권은 21세기에는 문화적 발언권을 확보하고 전자문명 아래에서 서양문화의 패권적 독주를 저지할 수 있을 것이다.
창의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부터 개혁해야 한다. 교육은 문화력을 창출해 내는 근원이므로 교육을 통하여 한문화를 한국화해야 한다. 이는 자문화를 강문화로 변동시킬 수 있는 지름길이다.
전자문명은 과학문명의 속성을 혁명적이며 예술적으로 변화시킨다.
서당식 교육이 조선인을 한족(漢族)으로 변경하려는 것이었다면 학교식 교육은 한국인을 서양인으로 변경하겠다는 것에 불과하다.
교육은 문화력을 창출해 내는 공장과 같다. 교육의 문화공장은 자문화의 제품이 되도록 만들어내야 자문화를 강문화로 변동시킬 수 있다. 교육이 생산하는 제품이 곧 문화의 원동력인 인재이며 두뇌이다. 문화의 견인차인 교육이 아류근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한문화는 아류의 늪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
3.분단에서 통일로 가게 될 한국문화
한문화의 통일과업은 생활문화를 통해 접근해야 한다. 분단에서 통일된 한문화로 변동시키는 것은 문화적으로 완성해야 하는 것이지 정치나 경제적인 통일의 부산물로 파생되는 것은 아니다. 한문화의 통일정신은 지배논리가 아닌 한민족의 동질성 확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한문화 A,B,C의 생활문화를 관장해 온 가치관의 기조인 도덕주의는 한민족의 창의력을 제고할 수 있는 철학적 바탕이자 21세기 한문화의 통일을 위한 기초철학이 될 수 있다.
북한의 한문화는 정치문화이므로 한시적이다. 반면에 남한의 한문화는 조선조 계층문화를 벗어나 시민문화로 변동했으므로 통일된 한문화의 모체가 될 수 있다. 이에 의하면 한문화의 통일은 남한의 시민문화가 북한의 한문화인 관제문화를 흡수하는 양상이 되리라는 판단이 가능하다. 이러한 가능성을 더욱 구체화시키려면, 한문화가 지니고 있는 문화변동의 여러 인자들 ABCD을 융합하여 한문화가 형질화를 추구하는 문화정신을 확립해야 한다.
생활문화의 표출형은 의식주로 드러나고 그 잠재형은 상식과 정서로 드러난다.
한문화의 통일접근 방법은 수천년 동안 축적되어 온 한문화 A,B,C의 변동인자들이 형성한 생활문화의 상식과 정서를 살려내는 쪽에서 탐색되고 개발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
한문화의 분단을 통일로 변동시킬 수 있는 과업은 통일 후에 단행할 사안이 아니라 통일 전에 준비해야 할 사안이다. 한문화는 통일전에 준비작업을 착실히 추진했던 서독의 교훈과 그러한 준비작업을 무력전쟁 탓으로 추진하지 못했던 북베트남의 교훈을 주목해야 한다. 동서독의 상이한 지배체제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생활문화의 상식과 정서를 유지했던 서독의 노력은 남한의 한문화에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북한의 지배세력의 완강한 폐쇄정책 탓으로 민간 차원의 접촉이 두절된 상태로 20세기를 보냈지만, 21세기 남한의 한문화는 통일지표를 생활문화에 두고 그 바탕을 확고히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