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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희 시인론.
-「‘악령’을 잉태한 산모여!」
-박소원
김종희 시인은 1937년생이다. 1982년『시문학』지로 등단하였다. 그리고 1986년 첫 시집『이 세상 끝날 때까지』, 1995년 제2 시집『물속의 돌』, 1998년 제3 시집『시간 밖으로』, 2003년 제4 시집『S부인이 넘어지다』, 2011년 제5 시집『나는 너무 멀리 있다』 2012년 영시선집『Adam Is Sad』, 2015년 제6 시집『빛과 어둠』을 출간한 바 있다. 시인의 탄생년도와 등단년도 및 시집 출간 년도가 김종희 시인의 시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된다. 왜냐하면 김종희 시인이 ‘정의’가 무너지는 역사를 통과하며 얻게 된 것이 ‘악령’이기 때문이다. 이 ‘악령’은 개인적 일상이 아니라 국가권력에 저항하다 죽음으로 내몰린 ‘열사’들의 삶과 죽음에 기원들 두고 있다. 시인은 스스로를 ‘거울 속에 든’ 자로 인식하며 죄의식을 갖게 되는데, 이 ‘죄의식’은 ‘악령’을 끌어들이는 에너지로 작동하고 있다. 이 글은 시인이 출간한 6권의 창작 시집을 묶은 『김종희 시선집』(시문학사, 2019)을 대상으로 삼았다. 필자에게는 시선집을 압도하는 단어가 ‘악령’이었다. 이 악령은 외부 세계에서 밀려왔으나, 내면세계에 침투하여 시인을 조종하고 있는 에너지 같은 것이었다. 시 「새벽 종소리 」는 그 ‘악령’의 존재를 다음과 같이 그려내고 있다. ‘맞으면 맞을수록 더욱 크게 울리는 피멍든 소리’와 ‘마비된 양심’이 ‘아, 찢기고 바스러지는 아픔 속에서/ 살아나는 혼이여!’ 시인은 ‘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돌려놓으려는/ 어지러움 뿐’(시「삶의 역군」56쪽)인 세계에 서 있다. 시인에게 세계는 ‘사치하며/안락한 삶을 누리며/남의 자유를 박탈하고/가두고 고문 고문하다가/멋대로 이웃을 처형하는/저들’로 가득 차 있는 그런 세계다.
예컨대 시인은 ‘죽임당하고/ 주리고 목마른 삶을 견디며/ 정의와 진리를 사랑해서/ 몸을 불사르며 죽어가는 저들(시「어디서 온 누구인가」,58쪽)’의 고통을 예민하게 느끼고 있다. 하지만 저들의 억울함에 분노하고 있으나, ‘나는 거울 속에 있는 것이 세상 편하(「거울속에 나.1.76쪽)’는 나약한 존재임을 자각하고 있다. 시인은 ‘거울 속에만 있으려는 내가 걱정’이 된다. 즉 ‘남을 위하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딱한 노릇이다’. 나는 ‘언제나 나만 보고 바라볼 뿐 말이 없다’는 것이다. ‘말이 없으니 영혼도 없고/ 영혼이 없으니 사랑도 없다/사랑이 없으니 그 무슨 생명이 있겠는가’라며 자신을 자책하는 시적 주체로 탄생한다.
시선집 말미에 수록한 김종희론에서 박두진은 김종희의 시세계를 어떤 깊고 본원적인 삶에 대한 회의와 공허에 빠져 있는 듯하며, 시인의 고민과 번뇌는 생활과 가정 등의 현실적인 문제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인간의 본성, 정신과 영혼의 가장 깊은 내면에 자리했거나 거기서 울려나오는 순수한 회의로 보인다는 것이다. 인생의 근원, 인간 존재의 의미 자체를 근저로부터 뒤흔드는, 이른바 죽음에 이르는 ‘부정적 허무’와 그 ‘불안’이었다고 보았다. 문덕수는 시에 도입된 수수께끼 어 차용을 자기를 얽매고 있는 근원적 존재 조건에 대한 저항 의지이면서 그 의지의 한계를 상징하는 비유적 도구로 보았다. 자기의 의지가 한계를 부수고 넘어서려고 할 때, 한계를 부수려고 하는 자기 의지가 오히려 부메랑처럼 자기에게로 역습해오는 모순의 무서움이 있다. 박찬일은 종말론에 대응하는 김종희의 내공을 “인생론적 탄력”이라고 하고, ‘탄성’은 구부러지는 정도를 말하는데 한계탄성은 구부러지는 정도의 끝을 말한다고 하였다. 김종희는 구부러지는 정도의 끝, 즉 한계탄성까지 갔다고 본 것이다. 조신권은 김종희 시인이 일명 이데아의 시인이라 불린다고 한다. 이루어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형이상학적 진리를 찾아가며, 고뇌하고 몸부림치고 있는 ‘근원적인 형이상학시인’이라는 것이다.
이 글은 김종희 시인이 주목하는 인물을 중심으로 작품을 선정하였다. ⓵「군인과 포로,20쪽」⓶「김세진,66쪽」⓷「임수경,65쪽」⓸「떨며 사는 빌리 엄마,54쪽」⓹「매장,19쪽」⓺「자화상,31쪽」⓻「당신이 임하소서,32쪽」등이다.
⓵
포로와 군인들이 파괴된 도시를
뒤로 하고 한데 어우러져 있다
포로들은 순한 양같이 앉아 있다
흰 수건으로 두 눈을 가리고
두 손이 묵인 채 저항 없이
군인들은 푸른 나무같이 서 있다
긴 총을 어깨에 둘러메고
서로 마주보고 이야기하며
그들의 머리 위에서 멎은 하늘
더 나아갈 수 없는 대지에
바람에 실려 온 낙엽처럼 모여 있는
목숨들
바람이 불면 또 어디로 실려 가려나?
수갑이 차인 포로들의 손목에도
소매를 말아 올린 군인들의 손목에도
다 같이 시계를 차고 있다
-「군인과 포로」전문,20쪽.
군인은 국가와 국민 등을 보호하기 위해 공인된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군인은 전쟁이 일어나면 무조건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죽이거나 죽어야 하는 의무를 가진 존재다. 더 나아가 군인은 명령이 있다면 자기가 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싫다 하더라도 남을 해쳐야 한다. 이에 비해 포로는 군사상의 이유를 가지고 있는 적국인으로, 즉 포로는 승자가 모든 권리를 지니는 취득물이었으며, 승자의 가학성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포로 학살이 자행되거나, 강간, 거세 후 노예화 내지는 그들이 모시는 신을 위해 산 제물로 바쳐지곤 하였다. 군인이 ‘명령’에 의해 움직인다면 포로는 적국의 이익에 의해 ‘목숨’이 달려 있는 위태로운 존재인 것이다.
김종희 시인은 전쟁의 희생들을 주목하며, ‘파괴된 도시’를 뒤로 하고 모여 있는 군인과 포로들을 통하여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존재들을 서사화한다. 특히 총을 메고 있는 군인 앞에서 죽음에 상시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존재들, 즉 신변이 누구로부터도 보장되지 못한 존재들의 비극성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젊은이들을 군인과 포로라는 분류 기준으로 나누어 놓는 것은 극단적인 대치이다. 이 대치상황은 고요하다. 격돌장면이 없는 고요성은, 두 존재 모두를 에워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폭력성을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 시인은 시「군인과 포로」의 ‘전쟁’이 어떤 전쟁인지,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이 시의 군인과 포로들은 어떤 전쟁에 의해 희생되는 존재들일까. 이 시는 1982년에 등단한 시인이 1986년에 출간했던 첫 시집『이 세상 끝까지』에 실린 작품이다. 그러므로 여기의 군인은 5.18 광주에 동원되었던 진압군이고, 포로는 시민군이나 학생 운동에 참여한 학생일 가능성이 높다. 아니면 전쟁 다큐를 보고 쓴 작품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라도, 일반적으로 포로는 정치적 목적이나, 승리 국가의 이익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 비극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바람이 불면 또 어디로 실려 가려나?’ 국가의 전략에 따라 포로들의 운명은 ‘낙엽처럼 모여 있는/ 목숨들’ 이 될 것이다. 자기의 생사를 보장받지 못하는 불안정한 상황은 개인의 자존감을 훼손하기 마련이다. ‘두 손이 묶인 채 저항 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내맡길 수밖에 없는 포로들의 조건들,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모른 채 강제 이송되어야 하는 순간을 시적으로 형상화하며 시인은 저항한다. 이 저항성은 자연물을 끌어와 ‘하늘’과 ‘대지’가 중지된 상태로 등장하게 하였다. 하늘이 놀라고 땅이 놀란 상황이다. 이를 테면 시인은 군인이건 포로이건 존중받고 사랑을 나누어야 할 인간이라고, 동시에 국가의 이익에 갇혀서 일방적으로 인간적인 유린을 당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근원적인 폭력에 저항하고자 하는 시인에게, 무엇보다 군인과 포로 모두 ‘다 같이 시계를 차고 있다’는 사실이 아프게 눈에 박히고 있다.
⓶
춥고 어두운 길을 오래 걸어온 그는
두 길 앞에서 혼란에 빠졌다
두 길이 갈라지는 사이에
신부님이 서 있다
그는 두 길을 번갈아 가리키며
똑같은 목소리로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이 길은 정의로 가는 길이요”
“이 길은 불의로 가는 길이요”
끝없이 밀려오는 저 수많은 사람들!
두 길 앞에서 약속이나 한 듯이
의심도 망설임도 없이
앞서가는 사람들 뒤를 따라
불의라고 말하는 길로
끝도 보이지 않는 넓은 길로
가득히 밀려가고 있다
정의를 부르짖던 민주투사 K선생, R시인도
그 속에서 보였다
이상한 일이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또 하나의 길
정의라고 말하는 길
가는 사람 아무도 없고
앞서간 사람 흔적도 보이지 않는 길
멀리 환히 보이는 길 끝에선
영원히 꺼지지 않을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으며 타오르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신부님은 왜 분명히 말해주지 않는 것일까?
“정의의 길로 가시오”
“불의의 길로는 가지 마시오”
어찌하여 단호히 말하지 않는 것일까
사람들은 내가 모르는 그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일까?
어찌하여 사람들은 모두 불의라고 하는 길로만 가는 것일까?
이 혼란! 이 공포!
언제나 정의를 사랑하고
정의가 승리한다고 믿고 있던 나
이제 와서 이런 혼란에 빠지다니
그는 타오르는 불길을 응시하며
사후에 대한 어떤 암시를 받고자 정신을 모았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주님!
오직 한 분뿐인 당신은 나의 아버지!
길을 열어주십시오!
그는 사람들에게 밀리고 밝히며 엎드려 울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가?
왠지 그의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이제 죽음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일어나
사람의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 정의라고 말하는 길로 홀로 걸어갔다
그는 불길 앞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간절히 주님을 찾았다
--아버지! 이 영혼을 받아주십시오.
불길은 삽시간에 그를 에워쌌다
그는 활활 타는 불이 되어 공중 높이 솟아올랐다
*1965년 2월 20일~ 1986년 5월 3일 분신자살한 학생운동가
-「김세진*」-나는 불이다. 나를 품는 자는 그 몸도 태우리 전문,66쪽.
1986년 김세진, 이재호 열사 분신투쟁, 분명한 것은 두 열사가 결코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아니라는 점. 명백한 타살, 척박한 조국의 현실과 군사독재정권의 폭력으로 인해 죽음으로 내몰렸다.는 것이다. ‘춥고 어두운 길’은 의식이 있는 학생들을 불행한 선택을 종용하기에 이른다. ‘두 길’이 놓여 있고 시적 주체는 스스로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는데, 이 선택은 강제성이 부여되고 있다. 그것은 군사독재정권의 폭력성이었다. 하나는 정의로 가는 길, 다른 하나는 불의로 가는 길임을 뻔히 알고 있기에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두 길 사이에 정의의 사도인 ‘신부님’이 서 있다. 이 신부님은 어떤 길을 가야 한다는 말을 결코 하지 않는다. ‘똑같은 목소리로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의와 불의로 나뉘어진 길.
당혹스러운 것은 ‘불의라고 말하는 길로’ 사람들이 간다는 것이다. ‘정의를 부르짖던 민주투사 K선생, R시인도’ 불의의 길로 가고 있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의심도 망설임도 없이’ 사람들이 가는 길로 밀려가고 있다. ‘앞서가는 사람들 뒤’를 따라간다. 자신의 사유와 성찰을 갖지 않는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이에 비해 ‘정의라고 말하는 길’에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앞서간 사람 흔적도 보이지 않는 길’이 되어 버렸다. 길은 텅 비어 있다. 그 길 끝에선 ‘영원히 꺼지지 않을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으며 타오르고 있다’. 시적 주체는 ‘신부님은 왜 분명히 말해주지 않는 것일까?’ 안타까워한다. ‘ “불의의 길로는 가지 마시오” 어찌하여 단호히 말하지 않는 것일까’요. ‘이 혼란! 이 공포!/ 언제나 정의를 사랑하고/ 정의가 승리한다고 믿고 있던 나/ 이제 와서 이런 혼란에 빠지다니’ 시적 주체는 믿음을 상실하여 질서가 붕괴되는 고통을 겪고 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주님!/ 오직 한 분뿐인 당신은 나의 아버지!/ 나보다 더한 나로 높여주시는 아버지!/ 길을 열어주십시요!’ 절규하던 기도의 응답은 ‘이제 죽음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에 이르렀다. 삶에 대한 애착이 끊어졌다. 오직 한 길. 그 길을 따라 걷는다.‘-아버지! 이 영혼을 받아주십시오.’ 드디어 ‘그는 활활 타는 불이 되어 공중 높이 솟아올랐다’ 김세진 열사는 사랑하는 조국과 부모형제, 친구들을 뒤로 한 채 죽음으로 내몰렸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아왔고, 또 미래에 대한 강력한 희망을 가지고 투쟁했기에 그의 삶은 너무 소중했다. 김세진 열사는 자연대 학생회장으로서 총학생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총학생회가 반미투쟁에 나서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이처럼 이타주의에 의한 사회적 증여(social gifts)가 의무라기보다는 이타적 동기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김종희시인은 김세진 열사가 걷는 길을 직접 걷는다. 그가 느낀 심리적 혼란과 갈등을 직접 느껴가며 뜨거운 불길 속으로 들어간다. 폭력적 상황에 노출되어 있는 삶을 시로 형상하여 세상에 보여줌으로서 시인은 시인으로서의 사명을 실천한다.
⓷
그림자 없는 밝은 대낮
무거운 짐 혼자 지고 걸어서 오네
바람 한 점 없는 맑은 날
강물에 떨어져 흘러가는 푸른 나뭇잎 같이
그렇게 가볍게 걸어서 오네
37년 동안 그 누구도 건널 수 없는
무섭고 질긴 길을
혼자 걸어서 가볍게 넘어오네
햇빛 밝아 눈부시어 머리 숙이고
한 발 한 발 걸어서 가볍게 넘어오네
그녀의 짐 점점 더 무거워지네
*판문점 북측에서 남으로 걸어서 통과하는 T.V. 화면을 보고
-「임수경林秀卿」전문,65쪽.
김세진열사가 죽음을 통해 이타주의적 증여를 하는 것처럼. 임수경은 판문점 북측에서 남으로 걸어서 통과하는 용기를 보여줌으로써 자발적 봉사자의 면모를 드러낸 사람이다. 임수경은 ‘무거운 짐 혼자 지고 걸어서’왔다. 누구도 할 수 없는 걸어서 ‘판문점 통과’를 하며 남북 통일의 물꼬를 트고자 했다. ‘37년 동안 그 누구도 건널 수 없는/ 무섭고 질긴 길을/ 혼자 걸어서 가볍게 넘어’ 왔다. 하지만 ‘그녀의 짐 점점 더 무거워’ 진다. 마지막 시행은 남북통일의 어려움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다. 아울러 통일국가를 위해서 새로운 실천이 뒤따라 일어나기를 바라며 한편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용기 없는 주체들을 향한 질책이기도 하다.
⓸
누구에게서 태어났는지를 모르는 빌리 엄마
군산에 고아원에서 자란 빌리 엄마
고아원 보모가 오줌 싼다고 물을 주지 않아
걸레를 비틀어 물을 짜먹던 기억을 가진 빌리 엄마
초등학교 3학년 때 농사짓는 집으로 입양 가
고된 농사일로 12년을 보낸 빌리 엄마
양아버지에게 강간당하고 그 집에서 좇겨나
오갈 데 없이 거리를 떠돌다가 고아원에 와서
초콜릿 주던 착한 헤레로우 아저씨가 생각난 빌리 엄마
누군들 에이즈 무서운 줄 모르나요
안 걸리겠다고 발버둥 치면 먼저 굵어죽는 걸요
착한 미군 만나 결혼해서 한 많은 이 땅을 떠나
미국으로 가는 것이 소망이었던 빌리 엄마
영어를 못하니 안 통하죠, 운전을 못하지 꼼짝할 수가 없죠
TV라도 볼까 하면 영어로만 지껄이니 알아먹을 수가 있어야죠
완전히 감옥이더라구요
게다가 걸핏하면 헬로우 남편은 나를 개같이 패죠
그리하여 한 많은 고국 기지촌으로 돌아온 빌리 엄마
돌아와서 지금은 굶어죽지나 않을까
에이즈에 걸리지나 않을까 떨며 사는 빌리 엄마
-「떨며 사는 빌리 엄마」전문,54쪽
김종희의 시에 나타난 폭력성은 인물시편에서 구체성을 갖는다. 시「어느 사인死因」(17) 은‘ 더욱 명백한 사인 규명을 위해/ 시신에게 수색영장 발부, 시신 압수’를 하는 고발성 작품이다. 시「매장」(19)에서는 ‘아버지를 꽁꽁 묶어서 땅 속에 깊이 묻었다’는 자책하는 시적 주체의 윤리성이 두각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리고 시 「군인과 포로」(20)에서는 ‘군인’과 ‘포로’라는 대척점에 위치한 분류를 함으로서 세계의 폭력성을 노출하고 있다. 박종철 열사, 김세진 열사, 임수경등 국가를 위해 자발적 희생을 한 이타적인 인물들을 호명하기도 한다. 또한 친구들도 작품에 호명이 되고 있는데, 가령 친구 경자는 ‘노예처럼 산다고’ 고백을 하는가 하면 친구 영애는 ‘말이 없음’으로 자신의 처지를 포장한다. 친구들 중에서 ‘선용’과 ‘구영’이 등장하는 시 「선용은 빛을 먹다 」에서는 ‘괴한들이 그녀의 입을/ 강제로 열고/ 빛을 집어 넣은 것이다’와 같은 시행에서는 불온한 폭력성을 함유하고 있다.
이처럼 김종희 시인의 인물들은 국가적 ‘폭력성’에 노출되거나 개인사에서의 ‘억울한’ 삶을 살고 있다. 위의 시 「떨며 사는 빌리 엄마 」는 국가적, 개인적인 이유를 모두 함유하고 있는 인물이다. ‘빌리 엄마’는 부모를 모르고 고아원에서 자랐다. 고아원에서 입양을 간 곳은 고된 농사일이 많은 집이었다. 그곳에서 ‘양아버지에게 강간당하고 그 집에서 쫓겨나’는 불행이 연속된 삶을 살았다. 미군과 결혼을 해서 한 많은 조국을 떠났다. 하지만 영어도 못하고 운전도 못하는 미국생활은 감옥이 따로 없었던 것이다. 빌리는 ‘남편에게 개같이 맞고’ 살아야만 했고, 자기가 싫다고 떠난 조국으로 다시 되돌아왔다. ‘조국 기지촌으로 돌아온 빌리 엄마’는 ‘에이즈’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을 하며 두려움에 떨며 사는 여성이다. 자기의 몸을 밑천으로 살아야 하는 불행한 여성으로 시적 주체로 삼은 작품이다.
⓹
숨을 쉬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아버지를 꽁꽁 묶어서 땅 속에 깊이 묻었다
발로 꾹꾹 밟아가며 단단히 묻었다
삽으로 때려가며 봉분도 만들었다
우리는 향을 피우고 두 번 절했다
“부디 안녕히 계세요”
나는 작별인사까지 했다
아버지를 등지고 산을 내려올 때는
몇 번이나 뒤돌아보고 또 보며
아버지의 무덤을 확인했다
무섭다, 우리는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아버지를 메어다 산에 묻어버린 자식들-
나는 몸을 떨며 차에 올랐다
그러나 아버지는 우리보다 먼저 와 계셨다
우리는 모두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아버지와 함께
지난날을 그리며 어둡기 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매장」전문,19쪽.
시「유년의 집.1」에서 김종희의 유년시절은 어느 집의 풍경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인다. ‘술을즐겨마시는 아버지와아들하나낳기를하나님께/간구하는병약한어머니와앙드레지드이좁은문을/읽는큰언니와음식만들기를좋아하는작은언니/술만취하면어린나를불러앉혀놓고밤이깊도록/인재명이호재피라유관순간치/살아라다짐하는아버지앞에졸음에눈비비는나/그집에있네’라며 시를 형상화하였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큰언니와 작은언니와 더불어 단란하게 살고 있는 ‘나’가 등장하고 있다. 시「시간 밖으로」의 시적 주체인 ‘남동생’은 단란한 풍경 안에 없다. 아직 남동생이 태어나기 전의 풍경인 것 같다. 아들 하나 낳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뒤늦게 어머니는 남동생을 낳았고 남동생은 41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 같다.
바로 다음 페이지에 수록된 시「유년의 집.2」에서 보이는 집은 앞의 풍경에서 보이는 단란함과는 거리가 있다. 무슨 까닭인지 ‘도야지’와 ‘자작나무’가 상징적으로 등장하는데, ‘검은 새끼도야지 움직이지 않고’,‘날이 갈수록 자작나무 잎은 말라서 비틀어졌다’. 그리고 ‘저쪽 깊숙이 어두컴컴한 부엌에서/어머니가 서서 조리대 위에 수북이 쌓인/ 노란 짠지 무를 썰고 있다’며 작품이 끝나는 것이다. ‘시간 밖으로 떠밀린 몸뚱이를/ 완전히 벗어버린 너는’을 통해 죽음이 오기 전, 아버지를 ‘매장’하고 돌아오는 길에 ‘무섭다, 우리는 무슨 짓을 한 것인가’라며 자책을 하는 시적 주체로서 면모를 보이고 있다. 매장 장례문화가 일반적이었던 시절의 풍습인데, 이를 테면 시인은 지나치게 자신을 책망하고 있다. ‘아버지를 등지고 산을 내려올 때는/몇 번이나 뒤돌아보고 또 보며/아버지의 무덤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시인은 생과 사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⓺
날마다 악령들은 바람같이 달려와
나의 가슴에 창을 겨눕니다
머리에 못질을 하고
입에는 재갈을 물리며
눈을 무겁게 내리 덮고
발목에는 쇠뭉치를 달아서
깜깜한 골방에 가두어버립니다
나는 숨이 가쁘고 넋이 나가
문짝이 부서진 묵은 장롱처럼
빈 가슴을 드러내고
죽은 사람처럼 서 있습니다
-「자화상」전문,31쪽.
자화상이란 말 그대로 자기가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이다. 예술가들의 ‘자화상’은 유명한 예가 있다. 그가 바로 한쪽 귀를 자른 고흐의 자화상이 있고, 시문학에서는 1937년 가을「자화상」을 쓴 서정주와 1939년 9월「자화상」을 쓴 윤동주가 바로 그들이다.김종희는 특히 ‘폭력성’에 노출된 ‘인물’에 주목하는 시인이다. 불의와 정의에 대한 예민한 촉수를 가지고 있는 시인이다. 시「자화상」은 그가 자신의 정신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작품이다. 자아는 외부 세계와 관계를 맺고 다른 사람들과 상호 작용하는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고, 사회. 문화적 환경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날마다 악령들은 바람같이 달려와/나의 가슴에 창을 겨눕니다’의 시행을 통하여 외부 세계가 ‘나’에게는 ‘악령’으로 비춰진다는 것을 표출하고 있다. 왜냐하면 외부 세계는 정의의 길이 아니라, 불의의 길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것을 엄중하게 다뤄야할 ‘신부님’마저 불의의 길로 가는 사람들을 무책임하게 방임하는 사회에서 ‘나’는 매우 혼란스러움을 겪고 있다.
이 혼란! 이 공포!
언제나 정의를 사랑하고
정의가 승리한다고 믿고 있던 나
이제 와서 이런 혼란에 빠지다니
위의 4행은 시「김세진」에서 김세진의 입을 통하여 절규했던 고백이다. 그 과정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생성되었다. ‘머리에 못질을 하고/ 입에는 재갈을 물리며’라는 시행에서는 그리스도와 같은 고통을 겪는 주체로 나타나고 있다. ‘발목에는 쇠뭉치를 달아서/ 깜깜한 골방에 가두어버립니다’ 시적 주체를 가해하는 주체는 누구일까. 국가 권력자들일까. 폭력을 방임하는 사도들일까. 불의의 길로 몰려가는 군중들일까. ‘내가 날마다 악령들을 만남은/ 신이 날마다 나를 살려놓기 때문이다’란 시행에 이르면 가해자의 존재가 드러난다. 그것은 그 누구도 아니었다. ‘살아 있는 존재’인 나이다. 나를 살려놓는 신이다. 자신을 관찰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일은 본인 이외의 타자가 할 수 없는 행위이다. 자신을 살펴보는 여정에서 ‘나’와 ‘너’를 구별하는 기준을 인지하고, 자기만의 가치를 파악하며 자기를 알아가게 된다. 김종희 시인에게 ‘신’은 절대적인 대상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나를 살려놓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가령 ‘신’에게 선발되지 않는 주체라면 ‘죽음’에 이른 감각을 가진 주체라면 ‘자화상’에 등장하는 ‘악령’을 감각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⓻
별들은 우주의 신비를
다 마셔버린 후
강위에 쏟아져 흘러갔다
달은 죽어버리고
태양은 눈이 멀었다
시간은 꽥꽥 비명을 내지르며
구름들을 이끌고
황급히 우주 밖으로 달아났다
바람이 울며불며
나무를 앞질러 갔으나
무너지는 하늘을 보고 기절했다
강가에 서 있는 나무, 땅에 뿌리박은 나무
두 팔 벌려 무너지는 하늘을 떠받치려다
무한으로 쏟아지는 악귀들을 보고
고꾸라지며 외쳤다
하나님!
당신이 임하소서
-「당신이 임하소서」전문,32쪽.
시「당신이 임하소서」에서의 ‘하나님!’은 정의이다. 불의가 쉽게 용인되는 것을 보며 ‘악령’에 시달려온 시인은 ‘달은 죽어버리고/ 태양은 눈이 멀었다’는 세계 인식을 갖고 말았다. 태양(부성)과 달(모성)의 죽음은 현실에 대한 비극적 인식이다. 바람, 나무, 하늘 등 김종희 시인이 호명한 자연은 ‘울며불며’ 결국은 ‘무너지는’ 대상으로 ‘기절’을 하고 만다. 시인의 내면으로 침투하여 시인을 장악한 ‘악령’(시「악령」)은 결국 ‘무한으로 쏟아지는 악귀’의 모습으로 덮쳐오고 있다. 시적 주체는 대재앙을 맞이하여 ‘고꾸라지고’ 말았다. 하나님!. ‘당신이 임하소서’ 이 기도는 자기 체념 끝에 토해내는 간절함이다.
‘별들은 우주의 신비를/ 다 마셔버린’다. 그래서 달과 태양을 죽게 하였고 세계는 암흑천지가 되고 말았다. 무고한 인간의 고통의 문제를 신은 도대체 바라만 보고 계실 것인가. 인간의 고통을 위로하는 치유자로서의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주기를 요청하고 있다. 신이 응답할 차례이다.
시인의 악령의 기원이 시인 자신과 시인이 요청하는 절대자인 신(당신)사이의 커다란 간극에서 비롯된다. 정도를 말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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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기본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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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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