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왕후 민씨
태종의 정비 원경왕후 민씨는 본관은 여흥이며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로서 1365년 여흥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382 년(우왕8년)에 방원에게 출가하였으 며 1392년 조선 개국 후에는 정녕옹주에 봉해졌다. 그녀는 1400년 2월 에 방원이 세제에 책봉되자 세제빈으로 정빈에 봉해졌으며 이 해 11월 에 방원이 조선 제3대 왕에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어 정비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태종보다 두 살이 위였던 민씨는 태종의 집권에 여러 방 면에서 도움을 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398년 8월 그녀 는 정도전 세력의 공격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태조가 몸이 불편하여 여러 왕 자와 숙직하고 있던 방원을 몰래 불 러내어 정도전 일파의 급습 가능 성이 있다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 정보 덕분에 방원은 선수를 쳐서 정도전 일파를 제거할 수 있었다. 또한 왕자의 난 10일 전에 정도전 일파가 왕자들이 거느리고 있던 시위패를 혁파하고 그들의 군 장비를 불태울 때 그녀는 몰래 무기를 숨겨두었다가 거사 직전에 방원의 군사 에게 내어주어 선수를 치도록 했다.
그러나 왕비가 된 후에는 태종과 의 불화가 그치지 않았다. 불화는 우선 궁녀 문제에서 출발하여 태종 의 후궁 간택 문제로 이어졌다. 이 문제는 더욱 악화되어 결국 왕비 의 동생 민무구 형제 사건으로 불화의 극치에 이르게 된다. 태종은 외 척의 권력 분산과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후궁을 늘려나갔고 민씨는 이 에 노골적인 투기와 불평으로 태종 의 비위를 건드렸다. 그것이 곧 그 녀의 동생 민무구 형제에게 영향을 미쳐 태종과 틈이 더 벌어지는 결 과를 낳았고 급기야 민무구 형제가 죽게되자 그녀는 그 일로 태종에 게 불손한 행동을 계속해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날 처지에 직 면하기 도 한다. 하지만 태종은 세자와 왕자들에게 끼칠 영향을 생각해 끝내 그녀를 폐비시키지 않았다. 원경왕후 민 씨는 1420년 56세를 일기로 죽었다. 민씨는 4남 4녀를 낳았으며 양녕, 효령, 충녕, 성녕 등의 왕 자들과 정순, 경정, 경안, 정선 등의 공주가 그녀의 소생이다. 그녀 의 능은 헌릉으로 태종의 묘와 함께 쌍을 이루며 현재 서울 강남구 내 곡동에 남아 있다.
양녕대군
1394년 (태조3년)에 태어난 양녕은 태종 이방원의 장남으로 이름은 제, 자는 후백, 부인은 광주 김씨 한로의 딸 김씨였다. 양녕은 1404년 왕세자 에 책봉되었으나 자유분방한 성격 탓으로 궁중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 했다. 그는 궁중을 몰래 빠져나가는 일이 잦았고 사냥이나 풍류를 좋 아해 자주 태종의 화를 돋우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1418년 세자에서 폐 위되고 말았다. 그가 스스로 왕세자 자리를 거부해 기이한 행동을 일삼았다는 말도 있으나 정확한 내막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동생 충녕이 왕이 된 이후에도 감찰 대상이 되긴 했으나 별다른 문제를 일 으키지 않았고 세종과는 지극히 우 애가 깊어서 수십 차례에 걸쳐 탄 핵된 바가 있었지만 세종에게 한 번도 처벌받은 적이 없었다. 그는 천 명을 누리다가 1462년 67세를 일기로 죽었다. 시호는 강정이 다.
효령대군
효령은 1396년(태조5년) 태종 이방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보, 자는 선숙이었다. 부인은 정역의 딸 예 성부부인으로 그녀와 슬하에 6 남 1녀, 측실에게서 1남 1녀를 두었다. 효령은 양녕이 세자에서 폐위 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한 때 자신이 세자 자리를 넘겨받을 것으로 생 각했으나 동생 충 녕이 세자에 책봉되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 는 1407년(태종8년)에 효령군에 봉해졌고 1412년에 효령대군으로 진봉 되었다. 이 후 출가한 뒤에는 불도에 전념하여 1435년 회암사 중수를 건의하였으며 원각사 조성도감도제조로 활 동하기도 했다.
1465년 엔 '반야바라밀다심경'을 언해하고 그 해 '원각경'을 수교하기도 했 다. 그는 효성과 우애가 지극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세종, 문 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등 여섯 왕을 거치며 91세까지 살았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여섯 왕의 연고존친으로서 극진한 존경과 대우를 받았으나 불교를 숭상하고 선 가에 적을 두면서 많은 불사를 주관하였 기 때문에 유생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왕 들의 보 호 아래 꾸준히 불교 발전에 기여했다. 그의 시호는 정효이 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