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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결선생전>을 읽고 이은상
백결선생전(百結先生傳)을 읽고
옛날에 백결선생(百結先生) 낭산(狼山) 아래 막을 매고
안해와 마주 앉아 굶주리고 살면서도
즐거운 거문고 소리 끊일 줄이 없더니라
앞집은 방아 찧고 뒷집에선 다듬이질
있다는 그네들은 근심 걱정 도로 많아
이 세상 어이 살꺼나 한숨 못 꺼 하더니라
풋나물 입에 넣고 괴로워 마올 것이
누더기 몸에 걸고 부끄러워 마올 것이
진실로 마음 곧 편하면 무얼 부러하리오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가고파 이은상
가고파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린 제 같이 놀든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데 간들 잊으리오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
가서 한데 얼려 옛날같이 살고지라
내 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 웃고 지나고저
그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
물 나면 모래판에서 가재 거이랑 달음질하고
물 들면 뱃장에 누워 별 헤다 잠들었지
세상 일 모르던 날이 그리워라 그리워
여기 물어보고 저기 가 알아보나
내 몫엣 즐거움은 아무데도 없는 것을
두고 온 내 보금자리에 가 안기자 가 안겨
처자(處子)들 어미 되고 동자(童子)들 아비 된 사이
인생(人生)의 가는 길이 나뉘어 이렇구나
잃어진 내 기쁨의 길이 아까워라 아까워
일하여 시름 없고 단잠 들어 죄없은 몸이
그 바다 물소리를 밤낮에 듣는구나
벗들아 너희는 복(福)된 자(者)다 부러워라 부러워
옛 동무 노 젓는 배에 얻어 올라 치를 잡고
한바다 물을 따라 나명들명 살까이나
맞잡고 그물 던지며 노래하자 노래해
거기 아침은 오고 거기 석양(夕陽)은 져도
찬 얼음 센 바람은 들지 못하는 그 나라로
돌아가 알몸으로 살거나 깨끗이도 깨끗이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가윗날에 이은상
가윗날에
가을 들 마르는 풀 바람에 흔드는데
반계(半溪) 단풍(丹楓)은 석양에 타는구야
천리객(千里客) 이내 상혼(傷魂)을 뉘게 말씀하리오
북산(北山)에 홀로 올라 누누중총(累累衆塚) 바라보니
가위라 군데군데 곡(哭) 소리 슬프도다
우리 님 누우신 산(山)을 멀리 그려 우노라
유자(遊子)의 돌아감이 기약조차 없노왜라
천리(千里) 향사(鄕思)를 남산(南山) 어이 가리는고
타산(他山)에 뿌리는 눈물 더 쓰린 줄 아소서
뫼와 물 바랄수록 자란 마슬 보고지고
세파(世波)에 불릴수록 님 그리움 쌓이건만
이제야 어느 분 뫼려 옛 땅 찾아가리오
님은 가오시고 기억(記憶)만 남기도다
정녕히 못 오시면 기억(記憶)마저 걷으소서
철철이 더한 쓰림을 어이 몰라 하신고
동봉(東峯)에 달이 솟아 마슬길을 비취나다
중추(中秋) 야흥(夜興)을 사람마다 겨워할 제
어떠타 외로운 한 사람은 눈물 못 금(禁)하나니
아실 이 누구신고 이 가슴 내 진정(眞情)을
천행루(千行淚) 만곡가(萬曲歌)론들 어이 능(能)히 표할손가
상월(霜月)이 죽창(竹窓)에 드니 잠 못 이뤄하노라
시름 잊자 취(醉)한다니 못 믿을 말이로다
잊으려 잊을진댄 님 여의다 슬플 것가
낙엽(落葉)이 어즐은 밤은 더 못 잊어하노라
산(山) 마슬 깊은 밤을 뜰에 가득 달이로다
마음을 둘 데 없어 사립 열고 나와 선 제
귀뚜린 누구를 그려 저대도록 우나니
머문 곳 이러이러 갈 곳은 어드메오
석화(石火) 일생(一生)이 어이 이리 괴로운고
삼경(三更)에 비가(悲歌)를 불러 만리한(萬里恨)을 붙이노라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개나리 이은상
개나리&
매화꽃 졌다 하신 편지를 받자옵고
개나리 한창이란 대답을 보내었소
둘이 다 `봄'이란 말은 차마 쓰기 어려워서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거울 앞에서 이은상
거울 앞에서&
나는 분명(分明)히 나를 속이고 또 남을 속이는 자(者)다. 슬픔이 있어도 기쁜 듯이. 괴롬이 있어도 편한 듯이. 못나고도 잘난 듯이. 약(弱)하고도 강(强)한 듯이. 미움이 있고 사랑이 있어도 이것 저것이 다 범상(凡常)한 듯이. 이리하여 가련(可憐)한 나의 삶이 나를 끄을고 간다. 그러나 다만 한때―벽(壁)에 걸린 거울을 보는 그때 만은 내 얼굴 내 마음 내 그림자가 너무나 소연(昭然)하여 속이지 못하는 정직(正直)한 내가 되는 것이다.
거울 속 저 사람아 바로 뵈는 저 사람아
잘나나 못나나 간에 이제야 바로 너로구나
무삼 일 너 아닌 너로 너인 듯이 사나니
저와 남 다 속이는 이런 곳에 왜 사는고
안 속고 안 속이는 그런 세상 어디온지
있다면 천리 만리(千里萬里)라도 거기 가서 살과저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계월송 이은상
계월송(溪月頌)
뒷시내 흐르는 물 여흘여흘 옥(玉)소리를
네 소리 들을 제면 만단고(萬端苦) 쓸리나니
꿈에도 들리오시라 부대 들리오시라
맑은 물 흰 돌 위에 희영청이 밝으신 달
내 가슴 덮은 그늘 다 열어 주시나니
꿈에도 비치오시라 부대 비치오시라
하늘 땅 온갖 것이 다 흩어져 없어지고
나마저 스ㅣㄹ지라도 청계명월(淸溪明月)은 남기과저
만고(萬古)에 흐르고 밝아 그ㅊ지 마시오시라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고향 생각 이은상
고향 생각&
어제 온 고깃배가 고향으로 간다 하기
소식을 전차하고 갯가으로 나갔더니
그 배는 멀리 떠 가고 물만 출렁거리오
고개를 수그리니 모래 씻는 물결이요
배 뜬 곳 바라보니 구름만 뭉기뭉기
때 묻은 소매를 보니 고향 더욱 그립소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곡성첩 이은상
곡성첩(哭城堞)
어져 이 토석(土石)아 무삼 일 서 있더니
풍마(風磨) 우세(雨洗)로 부질없이 삭단 말가
흙덩이 발 끝에 채어 마저 깨어지더라
백악(白岳)에 높이 올라 만보장성(萬步長城) 둘러 보니
분주(奔走) 반천년(半千年)이 한가(閑暇)한 꿈이로다
꿈이야 꿈일지언정 우일 꿈을 짓다니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구정 이은상
구정(球庭)
수우피(水牛皮) 봉(棒)을 들고 마류구(碼瑠球) 치올 적에
장전(帳殿) 소고(簫鼓)는 천지를 흔들랏다
백마(白馬)의 미쳐 나는 양을 보는 듯이 느껴라
채의(彩衣)를 떨쳐 입고 행구(行球)하던 저 무사(武士)야
광명동(廣明洞) 흐르는 물 물따라 어이 간고
황천(黃泉)에 누워 있어도 예 못잊어하리라
창검(槍劍) 부러지고 향등(香燈)도 꺼진 뒤에
남북(南北) 구정(球庭)이 이랑이랑 밭이 되어
석양(夕陽)에 찾아온 손을 울려 돌려보내더라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귀해심 이은상
귀해심(歸孩心)
길가에 두세 아이 소꼽질에 즐기나다
무심코 지나든들 마음 이리 아프리오
옛날이 눈 앞에 보여 발 머물고 서노라
가든 길 돌아서서 그 문 앞에 다가서니
돌밥에 사긔ㅅ국이 고기도곤 부러워라
어드메 누구 살림이 저만하다 할소냐
다시는 저런 살림 차려보지 못할런가
풍우(風雨) 삼십 년(三十年)을 울어보나 부질없다
이 봄도 또 간다 하니 눈물겨워하노라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그대 대답하시오 이은상
그대 대답하시오
가물에 시들어진 옥잠화(玉簪花) 두어 잎새
물 주고 비 나리면 다시 살아날 것이오
아이는 물 뜨러 보내고 나는 하늘 바라오
저보 바람결에 파초(芭蕉)닢 찢기었소
찢어진 저 잎사귀 붙이는 풀 없는지요
처져서 마르는 반(半)닢 어이할 길 없구료
외롭고 쓰린 내 맘 어느 것에 비기올꼬
시들은 옥잠(玉簪)이랄까 찢어진 파초(芭蕉)랄까
아니오 나는 모르오 그대 대답하시오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그리움 이은상
그리움&
누라서 저 바다를 밑이 없다 하시는고
백천(百千) 길 바다라도 닿이는 곳 있으리만
님 그린 이 마음이야 그릴수록 깊으이다
하늘이 땅에 이었다 끝있는 양 알지 마소
가 보면 멀고 멀고 어늬 끝이 있으리오
님 그림 저 하늘같애 그릴스록 머오이다
깊고 먼 그리움을 노래 위에 얹노라니
정회(情懷)는 끝이 없고 곡조(曲調)는 짜르이다
곡조(曲調)는 짜를지라도 남아 올림 들으소서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금강에 살으리랏다 이은상
금강(金剛)에 살으리랏다
금강(金剛)에 살으리랏다 금강(金剛)에 살으리랏다
운무(雲霧) 데리고 금강(金剛)에 살으리랏다
홍진(紅塵)에 썩은 명리(名利)야 아는 체나 하리오
이 몸이 스ㅣ어진 뒤에 혼(魂)이 정녕 있을진댄
혼(魂)이나마 길이 길이 금강(金剛)에 살으리랏다
생전(生前)에 더러인 마음 명경(明鏡)같이 하과저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금강을 바라보며 이은상
금강(金剛)을 바라보며
금강(金剛)이 저기로다 구름 밖에 저기로다
꿈인지 상해[眞]런지 그림인지 실상(實相)인지
알고도 모를 것이야 금강(金剛)인가 하노라
바쁜 양 몸은 아직 먼 곳에 있건마는
마음은 언제 벌써 금강(金剛) 중에 들었구나
만이천(萬二千) 구구층층(區區層層)이 낯익은 듯하여라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금강귀로 이은상
금강귀로(金剛歸路)
금강(金剛)이 무엇이뇨 돌이요 물이로다
돌이요 물일러니 안개요 구름일러라
안개요 구름이어니 있고 없고 하더라
금강(金剛)이 어드메뇨 동해(東海)의 가이로다
갈 제는 거길러니 올 제는 흉중(胸中)에 있네
라라라 이대로 지켜 함께 늙자 하노라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기봉 위에 서서 이은상
기봉(起峰) 위에 서서
부제: 햇볕 아래 오르고 비 속에 돌아오다
정방산(正方山) 가운데 두고 이백리(二百里) 두른 벌판
벼 향기 무륵무륵 향적불국(香積佛國) 여기로다
이게 다 내 것 아닌가 왜 모르고 울던고
벌 건너 하늘 밑에 월하산(月下山)이 아득한데
아! 장(壯)할시고 비 몰려 오시는 경(景)
어서 와 날 뿌려 주소 먼지 씻어 주시오
이 좋은 기봉(起峰) 위에 장막들을 지어 두고
양식(糧食)에 주린 이 자연(自然)에 주린 이들
번갈아 모시어다가 배부르게 하과저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꿈 깬 뒤 이은상
꿈 깬 뒤
임술년(壬戌年․1922) 5월 한양(漢陽)에서 병(病)을 얻어 마침내 어느 병원(病院)의 구석방에 외로이 앓는 몸을 누이게 되었다. 입원(入院)한 지 삼주간(三週間)이 지난 6월 5일의 밤 기이(奇異)하고도 고마운 꿈은 오히려 깬 뒤에 더한 적막(寂寞)을 남기고 사라졌다.
온 날을 앓은 몸이 잠을 겨우 이뤘는데
꿈 속에 어인 님이 진달래를 병에 꽂아
상(床) 맡에 가만이 놓시고 웃고 돌아가누나
누은 몸 문득 놀라 그 보고 하온 말이
당신이 누구완대 이 꽃을 내게 주오
병실(病室)을 잘못 드셨소 나는 아니오이다
내게는 이런 이 없소 있을 리(理)도 없으니다
외치다 깨어 보니 혼자 던져 누웠구나
눈 돌려 꽃 찾는 마음 더욱 쓸쓸하여라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노돌 이은상
노돌[鷺梁津]
차중(車中). 차(車)가 한강철교(漢江鐵橋)를 지나자 어느 한 분이 바깥을 가리키며 `저기가 노돌이오' 하매 다른 한 분 놀라 보며 하는 말 `아! 역사(歷史) 깊은 노돌이지' 하는지라. 그가 누군지는 알지 못하나 나는 문득 이 노래를 속으로 읊어 드렸다.
노돌이 여기란다고 놀라 보는 저 길손아
오백년(五白年) 옛 풍류(風流)를 어느 곳서 찾으리오
모래요 강물뿐이니 그냥 지나가시소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눈보라 치는 밤에 이은상
눈보라 치는 밤에
내 방도 차건마는 여기는 방인 것이
그 어린 거―지들 어데서 이 밤을 새노
따뜻한 물 한 그릇이나마 못 먹었으면 어이나
옥(獄) 속에 갇힌 이들 이 밤 어이 지나시노
찬 마루에 눕는 몸이 매맞지나 않사온지
눈보라 창 치는 소리에 가슴 덜렁하여라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답우 이은상
답우(答友)
길에서 고우(故友)를 반가이 만난지라 내 부끄러움 없이 우거(寓居)하는 토실(土室)로 뫼셔 왔더니 그이 돌아가 후일(後日)에 글을 보내어 내 토실(土室)의 좁고 누(陋)함을 심히 근심하여 주기로 내 이에 두어 장(章) 노래를 적어 그에게 답(答)하니라.
세존(世尊)은 거리 돌아 걸식(乞食) 아니 하셨는가
인자(人子)도 한 평생을 머리 둘 곳 없었나니
내 이제 드는 데 있음을 부끄러워하노라
강산(江山)을 둘러보소 내 집 없는 아우 형(兄)들
등 지고 서로 헤쳐 가시는 양 보옵시오
해 진 뒤 돌아올 곳 있음을 부끄러워하노라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맹서 이은상
맹서(盟誓)
자비(慈悲)가 님의 뜻이 희생(犧牲) 또한 님의 뜻이
내 몸은 죽사와도 남 도와 사올 것이
님께서 이 길로 예시오니 나도 따라 가오리다
썩어질 몸이어늘 영화안락(榮華安樂) 무엇이뇨
불의(不義)엔 침 배앝고 향기(香氣)로이 살았어라
내 일생(一生) 이 뜻을 지켜 님의 뒤를 이으리다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박연 이은상
박연(朴淵)
불타는 홍엽(紅葉)길에 분별 없이 취(醉)한 몸이
청애(靑靄)로 깨고 나니 앉은 곳이 범사정을
어느새 그리던 선경(仙境)을 저도 몰래 들었더라
성거산(聖居山) 가을 저녁 검고 붉고 누르러고
산(山) 넘어 긴 하늘은 쪽 푼 듯이 푸르른데
떨어진 흰 빛 한 줄기 박연(朴淵)이라 하더라
눈을 날리시나 구슬을 굴리시나
바람을 이루시고 구름을 피우시나
안개와 연기에 싸여 아무 그ㅣㄴ 줄 몰라라
암학(岩壑)에 나린 폭포 선악(仙樂)을 아뢰올 제
유인(遊人)은 소매 들고 사장(沙場)에 나리놋다
송백(松栢)도 풍류(風流)를 알아 그냥 섰지 못하더라
물 나린 푸른 벽(壁)에 위태히 선 저 노송(老松)아
어드메 땅이 없어 구태 거기 심겼느뇨
우리도 심산절경(深山絶景)을 찾아왔소 하더라
야폭경(夜瀑景) 더 좋으이 오르는지 나리는지
우렁찬 물소리도 우에선지 아래선지
다만지 천도용궁(天都龍宮)이 이로 이어졌더라
지화자 달이로다 구룡산령(九龍山嶺)에 달이로다
물만도 족(足)한 것을 달이조차 오르시네
구을다 송림(松林)에 앉으며 같이 놀자 하더라
이 폭포(瀑布) 은하(銀河)라니 아마도 옳은 말이
바위에 올라 앉아 고모담(姑姆潭) 굽어보니
명월(明月)도 은하(銀河)를 못 잊어 함께 내려 왔더라
물 아래 저 용낭(龍娘)아 옥(玉)저 부는 님 데리고
달 밝은 이런 밤에 나와 논들 어떠하리
아마도 진객(塵客)을 끄는가 하여 돌아갈까 하노라
이 승지(勝地) 찾아 들며 바삐 오던 저 사람아
돌아서 가는 걸음 어이 저리 더딘게오
청형(淸馨)이 성관(城關)에 남았기로 넘지 못해 그리노라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밤비 소리 이은상
밤비 소리&
천하(天下) 뇌고인(惱苦人)들아 밤비소리 듣지 마소
두어라 이 한 줄밖에 더 써 무엇하리오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봄처녀 이은상
봄처녀
봄처녀 제 오시네 새 풀옷을 입으셨네
하얀 구름 너울 쓰고 진주 이슬 신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 찾아 오시는고
님 찾아 가는 길에 내 집 앞을 지나시나
이상도 하오시다 행여 내게 오심인가
미안코 어리석은 양 나가 물어 볼까나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비로봉 기일 이은상
비로봉(毘盧峰) 기일(其一)
비로봉(毘盧峰) 오르는 길은 `금(金)서들'이라 부르는 푸른 이끼 앉은 돌무더기와 `은(銀)서들'이라 부르는 흰 이끼 앉은 돌무더기로 되었는데 `서들'이란 말은 `뢰(磊)'의 뜻이며 혹 이를 `사다리'라고도 하니 이는 `서들'의 와(訛)일 것이나 밟고 오르는 층계(層階)라는 뜻으로 보면 그 역(亦) 무방(無妨)하다.
금(金)길 은(銀)길 밟고 올라 상청궁(上淸宮)에 높이 서니
일성(日星) 운한(雲漢)과 벗하는 오늘이라
천풍(天風)은 무수(舞袖)를 날리며 몸 가으로 돌더라
백운대(白雲臺) 여기로다 청벽(靑壁)을 만지노라
팔황(八荒) 운물(雲物)이 발 아래 다 깔리니
내 몸이 어디 섰는지 분별(分別) 못해하노라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사랑 이은상
사랑&
꽃은 진다 하고 달도 이즌다네
어즈버 님 날 사랑은 대일 곳이 없세라
졌던 꽃 다시 피고 이즌 달도 되둥그네
사랑 곧 이러할진댄 끊여 섧다 하리오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산 위에 올라 이은상
산(山) 위에 올라
안개 싸인 산(山)을 헤히고 올라선 제
새소리 들리건마는 새는 아니 보이오
안개 걷고 나니 울던 새 인곧 없고
이슬만 잎사귀마다 방울방울 맺혔소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산전을 지나며 이은상
산전(山田)을 지나며
산전(山田)에 저 농부(農夫)야 빈고(貧苦)를 울지 마소
세상에 허다우부(許多愚夫) 마음 팔아 낙(樂)을 사오
넋 없는 허수아비들 웃어준들 어떠리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삼개에서 이은상
삼개에서
찾으니 장강(長江)인데 강(江) 건너 은(銀)모랫벌
벌 지나 뫼이온데 뫼 넘어 구름일네
천지(天地)에 봄바람만이 불어 왕래(往來)하더라
돌길이 좁고 험(險)해 홑몸도 어려워늘
무거운 세상 시름 지고 안고 무삼 일고
강문(江門)에 다 부려 두고 몸만 돌아 들까나
푸른 물 검은 돌에 흰옷 빠는 저 아씨들
옷 치는 방치 소리 뱃노래에 절로 맞네
이따금 아미를 고치는지 장단(長短) 흐려지더라
바위벽(壁) 돌아드니 한마당 백사(白沙)로다
거니는 이 발자옥 물이 밀면 쓸리려니
진객(塵客)에 더러힌 자취 남겨 무삼하리오
물새의 노래 듣소 이 분명 거문고를
흰구름 물에 드니 이 정녕 그림일사
소리 빛 한데 모이니 승경(勝景)인가 하노라
봄바람 노는 양을 이 강(江)에 와 보완제고
가벼운 노(櫓)소리를 붙여 함께 듣노매라
사람은 승지(勝地)를 찾아 멀리로만 가더라
청류(淸流)에 낚시 던져 놀이하는 저 분들아
고기야 네 것이냐 취적(取適)이나 하올 것이
어조(魚鳥)도 봄을 아나니 같이 논들 어떠리
언덕에 올라 앉아 봄바람에 눈물 지고
돌아서 새소리에 혼자 웃는 내 모양을
저 물도 흘러가나니 전할 뉘를 몰라라
해는 지려 하고 애는 더욱 끊이랴ㄹ제
한가락 미친 노래 석벽(石壁) 넘어 들려오네
저 분은 무슨 한(恨)으로 목에 피를 올리나니
두세 돛 강풍(江風)을 띄어 포구(浦口)로 바삐 드네
석양(夕陽)에 돌아서니 진환이 고대로다
강두(江頭)에 취객(醉客)이 모여 오락가락 하더라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삼태동을 지나며 이은상
삼태동(三台洞)을 지나며
삼태동(三台洞)은 고향(故鄕) 합포(合浦)에서 서(西)으로 칠십리(七十里)를 나가 있는 곳이다. 1925년 7월 2일 내 그 산촌(山村)을 지나다가 서숙(書塾)을 찾아 강선생(姜先生)이란 이와 인사하고 이 노래를 지어 드리고 가다.
삼태산(三台山) 깊은 골에 먼지 없는 이 마슬은
차움의 세상 밖에 따로 베푼 평화(平和)동산
내 길이 바쁘건마는 쉬다 갈까 하오
고목(古木)선 우물가에 물 긷는 저 아가씨
동이를 이기 전에 한 모금만 마셔 주오
타는 목 그 생명수(生命水)로 축여 볼까 하오
옷 벗은 아이들아 천사(天使)의 후신(後身)들아
풀 한 줌 흙 한 줌을 쥐고 옴은 무삼 일고
옳아 참 상처 난 내 몸에 그 약(藥) 발라 다오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선죽교 이은상
선죽교(善竹橋)
충신(忠臣)의 남긴 뜻이 돌에 스며 붉었으니
하마배(下馬拜) 하온 이들 몇 만(萬)인지 모르리만
돌아가 행(行)하신 이는 몇 분이나 되는고
충신(忠臣)의 타는 넋이 홍엽(紅葉)에 배어들어
용수(龍岫) 송악(松岳)에 두루 심겨 천만수(千萬樹)를
유객(遊客)이 헛보고 지나니 그를 설워하노라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설야음 이은상
설야음(雪夜吟)
삼경(三更)이 넘어서야 거리를 벗어나서
눈빛에 길을 찾아 산(山) 마슬로 돌아오니
등잔불 그무는 저기 내 집인가 아닌가
눈보라 휘불리어 얼굴을 치는구나
찬 뺨에 흐르는 물 눈녹음만 아니오나
이 한밤 외진 산길에 어느 분이 알리오
지게에 다달아서 언 고리 잡다 말고
타는 애 끌 길 없어 되나서 산모루로
송림(松林)에 눈비 맞으며 돌아올 줄 몰라라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성불사의 밤 이은상
성불사(成佛寺)의 밤
성불사(成佛寺)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 소리
주승(主僧)은 잠이 들고 객(客)이 홀로 듣는구나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
댕그렁 울릴 제면 더 울릴까 맘 졸이고
끊인 젠 또 들리라 소리 나기 기다려져
새도록 풍경 소리 데리고 잠 못 이뤄 하노라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소경 되어지이다 이은상
소경 되어지이다
뵈오려 못 뵈는 님 눈감으니 보이시네
감아야 보이신다면 소경 되어지이다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어포 달 밝은 밤에 이은상
어포(漁浦) 달 밝은 밤에
어포(漁浦) 달 밝은 밤에 모래 위를 거니노라
밀물을 피(避)하는 걸음 깨달으니 초제(草堤)로다
무심(無心)코 풀 위에 앉을 제 반디 놀라 날더라
청도암(淸濤岩) 밤 물결에 띄우노라 조각배를
시원한 바람 따라 흘리노라 백마도(白馬島)로
새벽만 넘는 달빛에 갈밭 돌아 오리라
빈 배에 몸을 맡겨 달 더불어 누웠거늘
어즐은 세상 일을 생각하여 무삼하리
밤고기 뛰는 소리에 그만인가 하노라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옛 강물 찾아와 이은상
옛 강(江)물 찾아와
옛 강(江)물 그리워서 봄 따라 나왔더니
물도 그도 다 가시고 봄도 그 봄 아니온데
호을로 아니 간 것은 내 맘인가 하노라
물 건너 하늘가에 떠도는 구름같이
뭉쳤단 바람 따라 헤어지고 마는 것을
지금도 고개 돌리니 곁에 선 듯하여라
그 옛날 이 모래 위에 서로 쓴 두 이름은
흐르는 물에 씻겨 길이 길이 같이 예리
몸이야 나뉘시온들 한(恨)할 줄이 있으랴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옛 동산에 올라 이은상
옛 동산에 올라
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의구(山川依舊)란 말 옛 시인(詩人)의 허사(虛辭)로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버혀지고 없구료
지팽이 더저 짚고 산(山)기슭 돌아나니
어느 해 풍우(風雨)엔지 사태(沙汰)져 무너지고
그 흙에 새 솔이 나서 키를 재려 하는구료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오수 아닌 오수 이은상
오수(午睡) 아닌 오수(午睡)
안두(案頭)에 놓인 책은 저대로 펴어 있고
나는 나대로 눈감고 앉았으니
이 사이 무한(無限)한 고요를 어느 뉘가 알리오
이윽고 눈을 떠서 깨달으니 황혼인데
아이는 내 그 동안 졸은 줄만 알았든지
대야에 물 떠놓으며 세수하소 하더라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옥류동 이은상
옥류동(玉流洞)
옥석을 씻어 나려 옥류(玉流)가 되옵든가
옥류(玉流)로 닦아 내어 옥석(玉石)이 되옴인가
두 옥(玉)이 씻고 닦이니 어느 그ㅣㄴ 줄 몰라라
금강(金剛) 계상석(溪床石)이 다토아 희올 적에
백석담(白石潭) 저 바위야 참으로 희옵도다
희고서 아니 검으니 그를 좋아하노라
옥류(玉流)면 옥류(玉流)이오 옥석(玉石)이면 옥석(玉石)이지
구태어 이 동(洞)안에 향(香)내는 어디선고
앞선 이 한 곳을 가리키며 천화대(天華臺)라 하더라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이 마음 이은상
이 마음
거닐다 깨달으니 몸이 송림(松林)에 들었구나
고요히 흐른 달빛 밟기 아니 황송한가
그늘져 어둔 곳만을 골라 딛는 이 마음
나무에 몸을 지혀 눈감고 섰노랄 제
뒤에서 나는 소리 행여나 그대신가
솔방울 떨어질 적마다 돌려 보는 이 마음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인생 이은상
인생(人生)&
차창(車窓)을 내다볼 제 산(山)도 나도 다가드니
나려서 둘러보니 산(山)은 없고 나만 왔네
다 두고 저만 나가니 인생(人生)인가 하노라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임진강을 지나며 이은상
임진강(臨津江)을 지나며
임진강(臨津江) 밤 물결이 달 아래 굽이치며
여대(麗代) 풍류(風流)를 아뢰려 드는구나
송경(松京)이 남아 있으니 잠잠한들 어떠리
대(對)하여 말할 뉘 없고 조수어별(鳥獸魚鼈) 다 자는 밤에
강월(江月) 강풍(江風)이 빈 하늘에 깨어 있어
한(恨) 품은 나그네 하나 지나감을 보더라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자하동 이은상
자하동(紫霞洞)
선인교(仙人橋) 나린 물은 예같이 흐르는데
중화당(中和堂) 삼한국로(三韓國老) 그들은 어디 간고
자하곡(紫霞曲) 남은 장단(長短)만 추풍(秋風) 속에 들었더라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장안사 이은상
장안사(長安寺)
장(壯)하던 금전벽우(金殿碧宇) 찬 재 되고 남은 터에
이루고 또 이루어 오늘을 보이도다
흥망(興亡)이 산중(山中)에도 있다 하니 더욱 비감(悲感)하여라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절름발이 이은상
절름발이
길 가다 문득 보니 어이한 절름발이
절―룸 절―룸 빈정대며 걸어가네
세상이 아니 고름을 비웃는 것 같구려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진달래 1 이은상
진달래 1
수집어 수집어서
다 못 타는 연분홍이
부끄러워 부끄러워
바위 틈에 숨어 피다
그나마
남이 볼세라
고대 지고 말더라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태자궁지 이은상
태자궁지(太子宮址)
혹자왈(或者曰) `마의초식(麻衣草食)한 이가 무슨 정(情)에 궁(宮)을 세웠겠느냐. 이는 전설(傳說)이요 사실(史實)은 아니라'고 한다. 답왈(答曰) 그는 잘못이다. 궁이 반드시 화려굉대(華麗宏大)를 뜻함이 아닐지니 일간두옥(一間斗屋)도 태자(太子)가 거(居)하시매 사람들이 말하되 궁(宮)이라 하였으리라.
마의(麻衣) 초식(草食)하되 님이시니 님인 것이
님이 계오시니 막이라도 궁(宮)인 것이
높으신 그 뜻을 받들어 섬기올까 하노라
풀이 절로 나고 나무가 절로 썩고
나고 썩고를 천년(千年)이 넘었으니
유신(遺臣)의 뿌린 눈물이야 얼마인 줄 알리오
그 모른 외인(外人)들은 경(景)만 보고 지나가네
뜻 품은 후손(後孫)이라도 해만 지면 가는 것을
대대(代代)로 예 사는 새들만 지켜 앉아 우나니
오늘은 비 뿌리고 내일은 바람 불어
계오신 대궐은 터 쫓아 모를노다
석양(夕陽)에 창태(蒼苔)를 헤치니 눈물 앞서 흐르네
궁(宮) 터를 홀로 찾아 초석(礎石)을 부드안고
옛날을 울어내어 오늘을 조상(弔喪)할 제
뒷시내 흐르는 여울도 같이 울어 예더라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포은구거 이은상
포은구거(圃隱舊居)
계옵던 옛 집터를 절하고 굽혀 드니
벽상(壁上) 영정(影幀)이 사신 듯 말하실 듯
맞추어 울 밑 황국(黃菊)이 서리 속에 섰더라
묻노라 저 읍비(泣碑)야 네 눈물 얼마완대
이토록 흘리고서 상기 아니 마르나니
만고한(萬古恨) 맺힌 눈물이니 그칠 날을 몰라라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할미꽃 이은상
할미꽃&
겉보고 늙다 마소 속으로 붉은 것을
해마다 봄바람에 타는 안 끄지 못해
수심에 숙이신 고개 알 이 없어하노라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화원 이은상
화원(花園)&
화원(花園) 터 어드매오 왕자공손(王子公孫)은 누구시오
팔각전(八角殿) 화초 향기 끊인 적이 오랜 이제
빈가(貧家)에 낙엽(落葉)져 날리니 아무덴 줄 몰라라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