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과 1953년은 한국전쟁 중이어서 독도 수호의 여념이 없을때 울릉도 청년들이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해 독도 인근 바다로 나가 일본측의 무장 침공에 대응했다. 1953년들어 독도 영유에 대한 도전은 더욱 난폭해 졌다. 울릉도의 청년 30여명은 홍순칠(특무상사 출신)을 대장으로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해 1953년 4월 20일 국기 게양대를 설치하고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민간 청년들이 전 세계에 다시 선포한 것이다.
당시 의용수비대는 부산에서 私費로 기관총 등 약간의 화기를 구입해 갖고 있었다. 일본측이무장한 경비정을 보내 영해를 침범하고 독도 상륙을 시도했으므로 독도의용수비대의 무장은 불가피했다. 이들은 일본 경비정이 1953년 5월28일 독도 해안 150Km까지 접근해 온것을 기관총과 소총으로 사격을 가해 격퇴했다. 이어 1953년 6월 25일 일본 경비정이 가제바위 앞에 침입해 정선하자 기관총 사격을 가해 격퇴시켰다. 3차로 1953년 8월 23일 독도 5000m 지점까지 접근해 오자 船尾에 기관총 사격을 가해 격퇴시켰다. 이때는 1953년 7월 27일 휴전으로 해군과 해병대의 독도 투입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독도의용수비대의 사기는 더욱 충천했다.
독도의용수비대는 4차로 1954년 4월 22일 일본 경비정 3척이 독도의 동-서-남 3방향에서 독도를 향해 몰려오자 그들이 500m 거리에 접근했을때 새로 구입해 온 박격포와 기관총 사격으로 이들을 모두 격퇴시켰다. 일본정부는 매번 항의 구술서를 한국정부에 보내왔으나 한국정부는 이때마다 이를 반박하는 구술서를 駐日 대한민국 대표부를 통해 일본정부에 발송했다. 독도는 한국 영토이고 일본의 무장선박이 한국 영토와 영해에 불법 침입한 사건에 항의한다는 내용이었다. 의용수비대는 1954년 8월 28일 독도경비 초소를 짓고 표석을 세워 재막식을 가졌다. 정부에서 "독도경비대"를 창설해 독도에 파견하자, 1956년 12월 25일 임무를 인계하고 해산했다. 독도의용수비대는 대한민국의 주인인 국민이 독도를 수호한 좋은 선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