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은사님
필자는 박달재 아래, 첫 동네 연박에서 태어나 봉양 초등하교를 졸업하고, 제천중학교와 고등하교에
입학 하면서 학교까지 30여리를 도보로 통학을 했다.
소장수 돈 가방으로도 애용되던 미군용 방독면 주머니를 책가방으로, 어깨에 둘러메고 이른 아침 5시
반경에 출발하여, 비포장도로 돌부리 차며, 타박타박 걸어서 등교하면 지각하는 날도 적지 않았다.
제천고 교문을 떠 난지 어언 57개성상이 지나고, 올해로 모교 개교 70주년을 맞았다. 어느새 우리도
인생의 가을을 맞이한 듯 아련한 추억이지만, 지난 세월 속에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누구나 중. 고등학교 학창시절 스승님 중에는, 나름대로 뚜렷하게 생각 키워지는 은사님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교육은 자신의 인격 형성에 미치는 영향이 클 뿐만 아니라, 그 배움은 몸에 배어
생활의 길잡이가 되고, 기억 속에 오래오래 남아있기 마련이다.
중. 고등학교 6년 동안 배움을 주신 스승님 중에는, 학과시간에 성우의 틀 잡힌 억양으로 현장감 나게,
입체적으로 삼국지를 읽어주시던 서상휴 선생님, 릴 테이프 대형 녹음기에 성당 신부님의 원어민 발음으로,
교과서 당일 배울 교재를 녹음하여, 영어시간에 들려주시던 정세화 선생님, 등 많은 분이 기억 되지만
그래도 가장 뚜렷하게 각인된 은사님 한분을 꼽으라면 서슴없이 박지견 선생님이 떠오른다.
황해도 신계 출생으로 연희전문(현 연세대학교)을 나오신 선생님은 중학교 국어문법을 가르쳐 주셨는데,
학과를 떠나 인성 교육과 문학적 스승이 되셨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외모는 전형적인 예술가의 그런 모습으로, 언행과 일상을 닮으려고 몸소 애쓰시는 분이었다.
검은 뿔테안경 너머 개심 치레한 눈매와 콧수염, 헝클어진 곱슬머리를 감싸는 꼭지달린 베레모를 쓰신
모습이 앙상블이었다. 가끔은 깊이 빨았다가 길게 뿜어내는 파이프 담배 하얀 연기 속에, 선생님의 시(詩)
세계를 그리는 것 같이 보여 지기도 했다. 그럴만한 선생님만의 독특한 멋은, 그분의 캐릭터가 되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수업 시간에도 헝클어진 장발의 곱슬머리를 다섯 손가락으로 빗질 하며, 창밖을 바라보시던
옆모습을 보면서 시인의 모습을 느끼곤 했다.
시는 인간의 사상과 정서를 운율적인 언어로 압축하여 표현한 언어의 예술이며, 무한한 상상의 추상적
세계를 표현하는 시어(詩語)의 그림이다. 그래서 시인은 독특한 영감의 세계를 그리는 화가라고 한다.
선생님의 시(詩)사랑은 수업시간에도 가끔은 눈을 지그시 감고, 이상의 날개, 하이네의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오월에, 폴 베를렌의 가을의 노래를 읊조리시며, 시심에 흠뻑 젖어들곤 하셨다.
선생님의 강의는 특유의 느릿하고 또렷한 억양으로 “움직씨란 사람이나 사물의 모~든 움직임이나~ 상태를
나타내는 품사를 말한다.” 라고 하시던 그 여운이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선생님은 어린아이 꽃고무신을 분필통으로, 삼원색 분필을 가지런히 담아 애용을 하셨는데, 꾸벅꾸벅
졸거나 학습태도가 좋지 않으면, 분필 토막을 잘라서 정조준 하여 던지곤 하셨는데, 필자도 그 분필의 타켓이
될 때도 있었다.
선생님은 문학 작품 활동을 열심히 하시면서, 당시 문인의 등단 관문인 현대문학을 수차례 노크했으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당시는 그 꿈을 이루지 못하셨지만, 열심히 노력하신 결과 마침내 1980년 현대문학을
통하여 늦깎이로 등단의 꿈을 이루셨다.
선생님은 많은 제자를 양성하시고, 34년 동안 정들었던 교단에서 정년퇴임 하신 후, 제천을 제2의 고향으로
정착하시고, 1976년 제천문학 창립동인으로서, 제천문학 회장과 한국예총 제천지부장을 역임 하시며, 향토
문학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우셨다. 술과 시를 즐기시는 선생님은 아름다운 노후를 향유하시면서, 마지막
시집 “어제 다시”를 2003년에 출판하시고, 그해 영면의 세계로 떠나 가셨다.
필자는 2004년 봄 제천문학 회원으로 입회 하였는데, 이미 선생님은 저 제상으로 떠나 가셨어도, 선생님이
닦아놓은 제천문학의 발자취를 포근하게 느끼며 흠모할 수 있었다.
그런 연유로 필자의 시 유형과 이미지도, 선생님의 그림자를 닮으려고 많이 노력했다.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 철학을 중시하셨던 선생님은, 교과목 외에도 올바른 인생을 사는 인성교육을 하셨다.
하루는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칠판에 “나 하나만이라도” 라고 크게 쓰시고 바로 그 글 밑에 “나 하나쯤이야”
라는 두 줄의 글을 쓰셨다. 그다음 선생님의 엄숙한 말씀은 다음과 같이 이어졌다."옛날 서당에 학동들이
설 명절을 맞이하여, 훈장님께 선물하기로 마음모아, 각자 막걸리 한 되씩을 갹출하기로 하였다. 학동은
가가호호 술통을 들고 다니면서, 통을 가득 채워 훈장님께 드렸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술통을 열고 보니,
그것은 술이 아니라 맹물이었다.“ 라고 하시고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하셨다. ”나 하나 쯤 맹물을 담아도
그 누가 알겠는가? 하는 나 하나쯤의 마음을 담은 맹물 통을 훈장님께 선물한, 학동들의 마음도 어이없이
맹물이 되고 말았다. 만약 그 누구 하나 만이라도 막걸리를 부었다면, 그 맹물은 부옇게 보였을 것이다.“
라는 교훈이었다.
그 후 필자는 선생님의 교훈을 본 받아, 어떤 행사나 모임에서 그 말씀을 인용하는 한편, 행동의 기준을
나 하나만이라도 법규와 규범을 준수하며, 올바르고 성실하게 살겠다는 신념은 생활 습관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박지견 선생님은 인성교육뿐 아니라 문학의 싹을 틔워주신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은사님으로
마음속에 자리매김 하게 되었다.
故 박지견 선생님
황해도 신계출생, 현대문학으로 등단(1980), 중등교사 34년 재직, 제천문학 창립동인(1976)
제천문학회장, 한국예총 제천지부장,
수상경력 : 제천시 문화상 수상, 충북 문학상 수상,
저서 : 청동경(1984), 깜부기(1994), 도 아니면 개(1994), 어제다시(2003)등.
2016년 10.3일 제천고 70주년에 붙여 윤준섭 씀
출처 ☞ 윤준섭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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