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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황제로 취임할 때, 선제 트라야누스의 적극적인 정책에 의해 제국의 판도는 최대에 이르렀었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일찍이 다키
아를 속주로 삼았고, 파르티아 전쟁에서 메소포타미아, 아시리아, 아르메니아를 속주로 삼았으며, 치세 말기에는 로마 제국 역사상 가
장 넓은 판도를 실현시켰다. 그러나 동방에 인접해 있던 파르티아와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하드리아누스는
외교 기조를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하고, 유프라테스 강 동쪽의 메소포타미아와 아시리아, 아르메니아 속주를 포기하는 대신 동방의
변경을 안정시키는데 힘썼다.
하드리아누스는 제국의 통일을 위해서는 평화가 필수불가결한 것임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고, 제국의 동부 이외에도 제국의 방어력
을 정비하는데 힘썼다. 군사적인 요충지에는 방벽(리메스) 구축으로 천연의 요새를 지어 제국을 방비했다. 그 중에서도 칼레도니아인
과의 분쟁이 있었던 브리타니아 북부에도 방벽을 구축하였다. 보통 「하드리아누스 방벽(하드리아누스의 벽)」이라고 불리는 것이
다. 게르만인과의 경계였던 라인 강이나 도나우 강 지역, 북아프리카에도 방벽이 지어졌다. 그리고 황제 스스로가 순찰 여행 도중에도
현장에서 병사 훈련을 사찰했고, 직접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또한 군단에 현지 병사를 채용함으로써 군단의 규모를 안정시키고 군비
를 절약하였다.
파르티아 문제를 수습한 뒤, 하드리아누스는 제국 내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데 주력하였다. 우선 속주를 대하는 자세를 바꾸어 속주
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이탈리아와의 일체화에 노력을 기울여, 하드리아누스 자신도 두 차례에 걸친 장기간의 순찰 여행에 나
섰다. 여행 목적은 제국 방비의 재정비와 제국 행정의 조사, 통합의 상징으로서 황제 자신을 주지시키며 제국 각지(특히 길리시아화
된 지역)의 순찰에 있었으며, 건설 관계자를 동반하는 등 공공 부분의 공사도 함께 행해졌다. 20년간 3차례에 걸친 제국 전역을 시찰
하여 제국 영토의 방위나 각지에서 일어나는 반란에 대한 대처, 통치 기구 정비 등 제국 내부를 튼실하게 만드는 데 충실하게 노력하
여 제국을 재구축한 황제로 불린다. 특히 통치 기구 정비가 매우 철저하여 그가 구축한 관료 기구는 제국의 기초를 마련하고 후세의
모범이 되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정치적으로도 뛰어난 업적을 이룩했지만, 군사면에서도 우수하였다. 군대의 규율 개정에 의한 군 내부를 개혁시켰으
며, 용병술에 뛰어난 하드리아누스 덕분에 로마군은 연전 연승이었다. 또 전투 상황일 때는 앞장서서 지휘를 하였기 때문에, 군대의
사기를 크게 높였다.
하드리아누스는 법 제도의 정비를 추진하여 사르비우스 율리아누스에게 명하여 『영구고시록(永久告示錄)』이라 불리는 법전을 편
찬하게 한다(완성은 131년경으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인 6세기까지 사용되었다). 이것은 법무관이 내리던 기존의 고시(속주 총독
이나 심판인의 법의 근원)들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훗날 동로마 제국 유스티니아누스의 시대에 이들을 토대로 『유스티니아누스 법
전』(『로마법 대전』)이 편찬되었다
130년에는 제1차 유대-로마 전쟁 때에 파괴되어 방치되어 있던 예루살렘을 로마풍의 도시로 건설하여, 자신의 씨족명 「아일리아」
를 붙인 식민도시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라 명명하였고, 132년에는 유대인들의 할례를 금지했다. 이에 유대인들은 조직적인 대규
모 반란을 일으킨다(바르 코크바의 반란). 하드리아누스는 다른 속주로부터 군단을 동원하여 3년 만인 135년에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러한 반란의 결과로 유대 지방은 「속주 시리아. 팔레스티나」라 명칭이 바뀌었고 유대라는 이름은 사라졌으며, 유대인들은 제국
각지로 대규모 이산되고(디아스포라) 이후 예루살렘 시내에 거주하는 것이 제한되었다(예루살렘에서의 야훼 숭배도 금지되었다).
황제와 원로원의 관계
치세 동안 하드리아누스는 국내, 외적으로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지만, 로마 원로원에는 하드리아누스의 정책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존재했다. 일단 하드리아누스 치세 초기에 집정관 경력이 있었던 원로원 의원 네 명이 살해된 것이 이를 보여준다. 하드리아누
스는 방위에 필요한 병력과 유지비 등의 부담이 늘어나 결국 제국이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고, 그러한 판단 아래 메소포타미아
와 아시리아, 아르메니아에서 철수한다는 현실 노선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당시 원로원에는 실제로 전장을 누비며 영토 확장에 공헌
한 자들도 있어, 하드리아누스의 온건한 대외 정책을 비판했던 것이다. 원로원 일부의 거센 반발에 하드리아누스의 지지자들은 반대
파 거물 네 명을 숙청하는 강경책으로 대처했다.
치세 말기 후계자를 선출할 때에도 의견이 맞지 않아, 황제의 의형제 율리우스 우르수스 세르비아누스와 그 손자 페다니우스 푸스쿠
스를 자살로 몰아갔다. 황제의 치세 말기 하드리아누스와 원로원의 관계는 긴장 상태에 있었다(그러나 몇몇 그룹과의 관계가 긴장 상
태였을 뿐이라고 보기도 한다).
말년에 그는 병상에 누워서 안토니누스를 양아들로 삼아 자신의 후계자로 결정했다. 황제가 서거한 뒤에는 하드리아누스를 신격화하
여 국가신(國家神)의 반열에 올리는 것조차 반대하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이 경우 신격화되지 못한 채 도미티아누스처럼 「기록 말살
형」에 처해져 하드리아누스의 통치에 관련된 모든 기록이 말소될 수 있었다. 황제의 후계자가 된 안토니누스는 눈물을 흘려가며 필
사적으로 원로원 설득에 힘썼고,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신격화에 대한 원로원의 동의를 얻어냈다. 이후 안토니누스는 「경건한 안토니
누스(안토니누스 피우스)」라 불리게 되었다. 로마 황제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이 많이 세워졌던 로마에서 5현제의 한 사람으로 알려
진 하드리아누스의 순행을 기리는 비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기타
문화적으로는 118년, 로마 근교의 티볼리에 대규모의 별장 빌라 하드리아누스의 건설을 시작하였고 동시에 후세의 신고전주의(新古
典主義) 건축에 큰 영향을 준, 로마에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판테온 신전의 재건에 착수했다. 그 외에도 로마의 베누스와 로마 신전
등 각지에 많은 건축 사업을 벌였다. 사생활의 면에서 비티니아의 미청년 애인 안티누스를 총애하여 속주 아이깁투스(이집트) 시찰
중에 그 미청년이 나일 강에서 사고사한 뒤에는 그를 신격화하여 신전을 세우고 도시 안티누폴리스를 지었으며, 제국 내에 안티누스
의 상을 세우고 천공에 안티누스가 거할 자리를 짓게 했다고도 전한다.
몸이 튼튼했지만 만년에는 컨디션 불량에 시달렸고,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성공 직전에 늘 노예에게 들켜 제지되곤 했
다). 또한 자신의 후계자로 처음 지정했던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Lucius Aelius)가 138년 1월에 사망하기도 했는데, 다음 달
에 다시 안토니누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그리고 138년 7월에 바이아이(Baiae)의 별장에서 62세로 서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