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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지난 5월1일 제114주년 세계노동절을 맞아 어김없이 등장한 슬로건이 있다. 바로 ‘비정규직 차별철폐·정규직화’다.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 문제는 노동절 때마다 대표적 구호로 등장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차별철폐 없이는 노동운동에 희망이 없다”며 “모든 노동자가 단결해 동일노동·동일임금 쟁취에 나서자”고 외치고 있다. 물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임금·노동조건 차별과 설움은 더 이상 ‘새로운’ 분노의 대상이 아니다. 추석 선물과 작업복에서까지 신분적 차별을 받고, 동네에서 ‘비정규직 아빠’로 불리는 상황은 누구나 다 아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정규직 노동조합과 조합원들은 비정규직을 어떻게 바라보는 것일까?
△ 정규직 노조는 비정규직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지난 5월1일 세계노동절 집회 장면.(사진/ 박승화 기자) |
현장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화이트칼라 노동조합인 금융산업노동조합(금융노조)을 보자. 금융노조는 올 임단협 교섭을 앞두고 ‘정규직 임금 동결’을 통한 비정규직 차별철폐 및 경영참가 등 사회적 대타협 방안을 꺼냈다. 금융노조 이용득 위원장은 “비정규직 문제와 조합원 고용안정 문제를 일괄 해결하기 위한 노동조합쪽의 유일한 카드는 임금 양보를 통한 사회적 대타협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금융노조는 5% 임금 인상을 양보할 경우 이 중 △2.5%를 신규채용에 배분해 고용을 창출하고 △1%를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배분해 3314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1.5%를 비정규직 임금인상에 배분해 비정규직 1인당 연간 179만원의 임금을 인상할 수 있다는 구체적인 방안까지 내놓았다. 금융노조 지도부가 큰 맘먹고, 올해 정규직 임금 인상을 자제하고 대신 그 부분을 비정규직 임금 인상 재원으로 돌리는 방안을 검토한 것이다.
그러나 비정규직 임금인상 관철을 위해 정규직 임금을 동결하는 이런 시도는 초장부터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지난 4월22일 열린 금융노조 대표자회의에서 지부 대표자들이 이 방안을 거의 만장일치로 부결시켰기 때문이다. 금융노조 문태석 정책국장은 “금융권 종사자들을 고임금 집단으로 보고 있고 그래서 여론이 노동조합에 우호적인 것도 아니지만, 임금동결은 당장 현금을 빼앗기는 현실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은행지부의 노조대표자들이 반대해 채택되지 못했다”며 “비정규직 처우 개선에는 공감하지만 정해진 파이를 분배하는 문제에서 당장 정규직이 양보해야 하는 지점에 들어가면 부담을 느끼는 게 조합원 정서”라고 말했다. 정규직 조합원들의 반발을 미리 걱정한 지부 대표자들이 “현장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았다”는 ‘시기상조론’을 펴면서 무산시켜버린 것이다.
사실 정규직 임금동결이 물건너간 배경에는 노동조합의 ‘조직적 이해’도 깔려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금융노조 산하 상당수 은행 지부들의 경우 올해 노조임원 임기가 끝나고 선거를 앞두고 있다. 따라서 재신임을 위해 조합원들에게 가시적인 ‘성과’를 던져줘도 시원찮을 판인데, “비정규직 처우개선을 위해 조합원들이 임금인상을 자제하자”고 주장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금융노조는 지난 4월29일 △정규직 임금인상률 10.7% △정규직 초임의 85%로 비정규직 임금인상 △당기순이익 10% 노동자 배분(종업원지주제 및 성과급 형태)을 담은 임단협안을 은행연합회에 공식 요구했다.
노동자연대, 왜 안 되나
그러자 금융노조 홈페이지에는 “현장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았다? 이게 말이 됩니까? 자기네들은 연봉 3천만∼4천만원 받아가면서 비정규직은 겨우 1400만원 정도 될까말까한데…. 또다시 비정규직 문제는 임단협 쟁점에서 빠지고 정규직 임금인상과 초과 성과급이 최대 이슈로 등장했다”는 비판이 빗발치고 있다. 금융노조 지도부의 정규직 임금동결 ‘검토’는 ‘또 다른 의도’ 때문이라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노조가 진짜로 야심차게 추진한 게 아니라, 비정규직 차별 문제가 화두인 상황에서 ‘이미지 정치’ 차원에서 그때그때 일회성 비정규직 사업을 꺼내고 있다는 얘기다. 금융노조가 올 초에 출범한 비정규직 특별지부도 비슷한 맥락에서 비판받고 있다. 비정규직 이슈를 선점해 언론 플레이를 하고 있다거나, 지난 총선에서 비정규직 표를 녹색사민당으로 몰아가기 위해 비정규지부를 만들었다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 지난해 열린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조 출범식(맨 위). 정규직 임금 동결을 통한 비정규직 처우개선이 부결된 금융노조 대표자 회의.(사진/ 연합) |
물론 비정규직 차별과 고용불안이 과연 정규직 노동자들의 책임이냐고 물음을 던질 수 있다. 비정규직 문제는 저임금과 손쉬운 해고로 더 많은 이윤을 확보하려는 자본의 욕구에서 생긴 문제인 만큼 그 책임을 정규직에게 돌리는 건 노동자 사이의 갈등과 대립만 유발할 뿐이다. 또 ‘정규직 양보론’은 기업과 정부의 책임을 빼놓은 채 정규직 노동조합에게 모든 것을 떠안기는 쪽으로 본질을 왜곡할 소지가 있다.
하지만 비정규직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정규직 노동조합이 해야 할 역할은 매우 크다. 민주노총 주진우 비정규사업실장은 “사용자쪽이 정규직에 대한 과보호론을 주장하고 있지만, 책임 소재를 떠나 노동자 연대 차원에서 이 문제를 끌어안고 풀어가야 할 주체는 조직된 정규직 노동조합이다”고 말했다. 특히 비정규직 문제는 궁극적으로 정규직 노동자 자신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왜 그럴까? 경상대학교 주무현 교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규모와 임금·노동조건은 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 및 임금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며 “그래서 정규직 노조는 비정규직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최대 노동조합운동 세력인 현대자동차를 보면,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정규직 노동자의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현대자동차에서 직영 정규직 노동자와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는 똑같은 생산라인에서 뒤섞여 일한다. 그런데 나이 지긋한 정규직이 화장실에 갈 때 “나 대신 잠깐 이 일 좀 해주라”고 젊은 하청노동자에게 부탁하면 십중팔구 하청 노동자가 빤히 노려보면서 대놓고 “싫다”고 단박에 내친다고 한다. 그러면 정규직은 “내가 젊은 시절에는 저러지 않았는데, 새파랗게 젊은 놈이…” 하면서 분개하는 살풍경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금속산업노조연맹 조건준 정책국장은 “정규직의 경우 젊을 때 ‘정규직’ 신참이었지만, 지금 일하는 하청노동자는 비정규직이란 신분 때문에 받는 차별이 뼛속까지 사무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비정규직은 정규직의 고용안전판
정규직에 대한 비정규직의 분노는 정규직 노동조합의 ‘모순적 행동’ 때문에 더 깊어지고 있다. 현대자동차노조는 지난 2000년 회사쪽과 ‘완전고용보장합의서’(비정규직 비율 16.9% 이하 명시)를 체결했다. “고용조정할 때는 비정규직을 먼저 해고한다”는 이 합의서에 따라 정규직은 고용안정을 확보할 수 있었다. 정규직이 고용 안전판으로 하청노동자 투입을 회사쪽에 양보한 것인데, 자신들의 힘만으로 고용조정을 막기 어렵게 되자 비정규직을 완충장치로 활용해 상대적인 고용안정을 보장받았다고 할 수 있다.
△ 노동의 역사는 분열의 역사인가. 단결의 역사인가? 울산 현대 자동차 공장 생산라인.(사진/ 이코노미21 황석주 기자) |
반면 회사쪽은 “정규직의 완전고용을 보장한다”는 명분아래 별 저항 없이 비정규직을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게 됐다. “수많은 사내외 하청 노동자들이 없다면 한국 자동차 산업은 망할 것”이라는 말은 비정규직 저임금에 기초한 가격경쟁력으로 국내 자동차 산업이 유지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정규직의 고용안정과 상대적 고임금은 정규직 ‘주변부’에 배치된 수많은 하청노동자들에 의해 보호·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비정규직 규모가 늘어날수록 정규직의 울타리는 축소될 수밖에 없고, 경쟁원리가 도입되면서 정규직의 고용과 임금도 위협받게 된다. 주무현 교수는 “정규직의 고용안전판 역할을 위해 일정한 수의 비정규직은 필요하지만, 비정규직이 더 확대되고 임금격차가 커질 경우 정규직까지 비정규직으로 바뀔 수 있고 자신들의 고용도 불안해진다”며 “따라서 정규직 노조는 한편으로 비정규직 임금·노동조건 처우개선에 나설 수밖에 없는 ‘모순적 위치’에 놓여 있다”고 지적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경쟁관계가 존재하고 있으며, 비정규직이 정규직의 고용을 항상적으로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다.
산업연구원 박태주 연구위원은 “정규직은 비정규직 규모가 줄어들면 고용안정이 위협받고, 반대로 규모가 늘어나면 자신들까지 비정규직으로 대체될 위협에 노출되는 ‘중첩적 자기모순’ 상황에 빠져 있다”며 “비정규직 임금이 낮아야 정규직의 더 높은 임금 인상이 가능하지만, 거꾸로 비정규직 임금이 너무 낮으면 저임금 전략을 추구하는 사용자에 의해 자신들도 비정규직화될 처지에 놓일 수 있다”고 말했다.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 처우개선에 나서는 배경에는 이런 ‘이해’도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비정규직 투쟁에 정규직 노조가 구사대로 돌변한다거나, 왜 우리 조합비를 비정규직을 위해 쓰느냐고 항의하는 조합원은 줄어들고 있지만, 의도적은 아닐지라도 상당수 정규직 노조는 비정규직의 고통 위에 자신들의 이익을 확대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이해의 충돌’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노조 직가입 허용을 둘러싼 논란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현대자동차는 하청노동자를 직접 고용했을 때 발생하는 책임을 회피하려고 사내 하청노동자들을 하청업체와의 계약 형태로 쓰고 있다. 따라서 하청노동자를 정규직 노조에 직가입시키는 건 법률적 제약이 있다. 또 하청노동자를 조합원으로 받아들인 뒤 노조가 그들의 고용을 책임지고 보장해주기 어렵다는 현실적 어려움도 제기된다. 그러나 같은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합법적 교섭권을 갖지 못한 하청노동자들을 위해 정규직 노조가 나서는 건 노동자 연대 측면에서 당연하다. 또 비정규직이 확대되면 노동조합의 노동자 대표성이 취약해지고, 파업에 나서더라도 비정규직이 대체 투입돼 파업 위력이 줄어들기 때문에 ‘현실적 필요’에서라도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복잡한 ‘정치적 계산’이 개입한다.
비정규직 노조 가입을 둘러싼 충돌
무엇보다 비정규직이 노조에 직가입하면 그동안 억압받고 차별받아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내 목소리가 커질 것이고, 이에 따라 기존 노조 지도부가 주도권을 상실할 우려가 제기된다. 정규직 노조 간부들의 기득권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비정규직 조합원들한테 주도권을 뺏길 수 있다는 것이다. 정규직 개별 조합원들은, 비정규직 가입으로 기존 임단협 내용이 판이하게 달라질 경우 옛날처럼 높은 임금인상을 쟁취하기 어렵고 자신들이 챙길 몫이 작아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노조 안기호 위원장은 “하청노동자들을 위해 책임지고 싸울 진정한 의지가 없으면서도 정규직 노조가 말만 비정규직 노동자 처우개선에 노력하겠다고 하는 건 그만둬야 한다”고 말했다.
현대자동차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사내 하청노동자들은 대개 ‘불법 파견’이다. 고용만 형식적으로 하청업체와 맺고 있을 뿐 실제로는 직영과 같은 생산라인에서 일하고 현대자동차로부터 직접 작업지시를 받고 일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법 파견이 횡행하는데도 정규직 노조는 당국에 전혀 고소·고발을 하지 않은 채 묵인하고 있다. 왜 그럴까? 금속노조 관계자는 “현재 상대적으로 힘들고 위험한 메인 생산라인은 하청노동자가 타고 정규직은 서브 작업을 하는데, 불법 파견 하청노동자들을 모두 내보낼 경우 정규직이 직접 메인 작업에 투입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노동조합운동이 당면한 이런 상황은 “자본의 역사가 통합의 역사였다면 노동의 역사는 분열의 역사”라는 말을 실감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