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두메산골에
큰 집과 적은 집이 한 마을에 살았습니다.
형과 아우는 제법 논, 밭떼기를 웃대어른으로 부터 서너 마지기씩 받았으나
형은 투전판이다,,술집이다 열 여자마다 않코 놀아나다가 재산을 다 날리고 죽었는데 그의 아들이 해방 전 일본에 들어가 돈을 다시 벌어 와서 이젠 마실 제일 큰 부자로 살었고
동생도 알뜰하게 살림을 늘려나가서 제법 부자 소리 들었으나
그의 외아들이 사범학교를 한답시고 이핑게 저핑게로 천수답을 팔어 가면서 대구에서 공부를 했는데 그만 육이오 때 대구 다부동 전투에서 덜컥 죽었다.
그 바람에 단 한 세대를 거치면서 부자와 가난뱅이를 다 격은 후 이제
큰집은 엄청 부자로
작은 집은 赤貧으로 다시 돌아와 족보관계도 형제간에서 사촌관계로 이격되었다.
그리고 20년 후....1967 년도.
작은집 이야기다,
남편 다부동 전투에서 죽던 해에 겨우 네살된 아들만 키워 초봄에 장가를 보냈고그후 아들이 군에를 가는 바람에 지금은 두 고부가 군불 땔나무도 많이 없어서 같은 방을 사용했다.
그날은 몹시추운 섣달 금날 밤이 였다.
아래채 빈 마구간을 개조해서 만든 아랫방에는 위묵(방윗쪽)에 떠다놓은 사발그릇의 물에 살 어름이 낄 정도로 날씨가 추웠다.
며칠 전 내린 눈은 칼날처럼 왱왱거리는 겨울 서풍에 꽁꽁 얼어붙어서 건드리면 탱탱 소리가 날 정도였다.
물거이댁은(친정이 낙동강 건너 마을이라 “물 건너”에 댁 자가 붙어서 발음상
다들 물거이댁 물거이댁 했다) 며느리 출산 전에 구멍이 숭숭난 문을 헌신문지라도 새로이 발라 찬바람을 막아줄까 했지만 워낙 시골이라 헌신문지 한 장 구하기 힘들었던 시절이다.
며느리는 출산 예정일이 동짓달 보름인데 우짠 일로 어제부터 방안에서 미동도 아니 하고 산통으로 끙끙거리고 있었다.
살림살이라곤 막버지기 찬물로 씻은 듯 가난하여 뒤주에 백미는 한 톨도 없고 보리쌀 서너말이 전부인데 저러다 덜컹 아이라도 놓는다면 우짜나.........그저 걱정이 였다.
저녁에 붉은 수재비(도정을 많이하지 않은 밀가루) 한 그릇 먹고 앞산만한 배를 우여 잡고 고통스러워하는 며느리를 보고 있으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집 뒤쪽 솔밭에서 여전히 겨울바람이 칼날을 세워서 마치 솔잎 하나 하나씩 조각이라 낼듯이 왱왱 거렸다.
며느리가 출산하면 미역국은 못 끓여 줄망정 보리밥에 흰쌀이라도 덤성덤성 넣어서 해주고 싶어 아름아름 남의 논에 눈치 보면서 나락 이삭을 주워 모아서 디딜방아로 찧어서 쌀 한 서너 되박을 마련했지만 그도 지난달 며느리가 하혈을 하고 며칠을 누워서 앓는 바람에 행여 뱃속에 아이가 잘못이라도 될까 흰죽을 써서 며느리에게 다 먹여서 지금은 뒤주에 쌀 한 톨 없다.
그러니 며느리가 아이를 낳는다 해도 큰 걱정이 였다.
왜야하면 새는 날이 정월 초하루라 행여 초하루부터 보리밥만 해서 먹이면 그 아이도 장래도 평생 이밥한번 못 먹는 가난이 올까 두려워서다.
“아이고 어메”
“아이고 어메”
며느리 진통이 더욱 심해져 방안에선 연신 “아이고 어메! 하는 신음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예정일 월씬 앞서 오늘밤 안으로 아이를 낳을 것만 같아
물거이댁은 서둘러 소죽솥에 불을 지피고 버지기로 찬물을 길러 부었다.
그리고 서둘러 무명 이불을 걷어치고 멍석위에 짚을 깔고 며느리를 반듯이 눕게 하였다.
그들은 방안에 멍석을 깔고 살았다.
남들처럼 미제 밀가루 포대종이 들기름을 먹이고 하여 바닥이 반짝 반짝한 종이 장판을 한후에 産달을 맞고 싶었으나 돈이 없으니 니미락 니미락 하다가 결국 장판은 하지도 못하고 급기야 예정일보다 보름이나 빨리 며느리 산통을 맞고 말았는데 멍석위로 짚을 깔면서 물거이댁의 한숨은 힘도 없어 소리도 낮았다.
시집올 때 예단으로 해온 무명 이불이 아직 쓸만하지만 그 이불에 아이를 받아내면 이추운 겨울에 빨래걸이도 문제인지라 방안에 짚을 깔아 놓코 아이를 받아 내기로 작정을 했다.
벼 짚 위에서 끙끙되는 며느리를
“야야 조금더 힘 써래이 조금만 더 힘써래이!” 시어머니도 같이 안간 힘을 다했다.
워낙 착하고 온순한 며느리라 진통을 그져 입만 꼬옥 다물고 덜덜 떨더니만
진통이 너무 오래되니 고통에 겨운지
꼬-옥 다문 입술 사이로 이-익 이-익 허는
고통이 터져 나오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당체 아이는 머리만 보였지 나오질 못했다.
그러기를 서너 시간...그동안 며느리는 두서너 번 혼절을 했고 저러다가 며느리가 죽는 것이 아닌가하여 덜컥 겁도 나고 하여 물거이댁은 바로 옆집 할매집으로 당당 걸음으로 달려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옆집 할매댁으로 가서
“할매 주무시니겨?”
당연히 밤이니 있지만 이마을 사람들 이웃간에
인사로 남자는 헛기침을......여자들은 헛기침 자격이 없으니
“있니이껴?”혹은 계시니이껴?‘ 했다.
“이밤에 누구로!”
“아이고 할매요 울 집에 좀 가시더, 며느리가 애 놓다가 죽게 생겼니이더어”
“이 사람아 이 밤에 우야노? 어서가세”
옆집 할매가 방안에 들어서 늘어진 물거이댁 며느리 아랫도리를 들따 보더니
대뜸
“이 사람아 이러다 며느리 죽이겠네..사금파리 있는가?”
“할매요 사금파리는 왜요?”
“아무래도 자궁이 적어 고생할 것 같아 좀 째야 겠다”
“아이고 할매요 그래도 괜잖을 싯겨?”
“초적녁부터 저래 산통이 와도 못 놓으면 아랫도리를 째도 돼네!”
할매는 경험 많은 듯 말했다.
“째면 産毒은 없을싯이겨?”
‘사금파리는 괜찮네 자네 얼른 울집에가서 잇발빠진 사발그릇 하나 갖고오게“ 옆집 할매가 고함을 쳤다.
아무래도 옥문이 좁아서 애가 못밀고 나오는 것 같아서 사금파리로 그곳을 쫌 째자고 했다.
백자 막사발을 조각으로 망치로 쳐서 그중 가장 예리한 사금파리를 들고 할매가
물거이 댁 며느리 아랫도리를 잡고
“더벌리라 더벌리라” 하자 물거이댁은 겁 먹은듯
“할매요 잘째소”했다.
“걱정마라..지난번 숫시영(숫 新陽:이마을엔 암신양/숫신양이라는 마실이 있다)
들머리집 둘째 며느리도 내가 째서 아를 낳으니 걱정 하지말고 다리나 잘잡게“
할매가 날카로운 사금파리로 며느리 아랫도리를 가르자 샛빨간 피가 튀었다.
얼마나 아리고 고통 스러운지 며느리는 혼절을 거듭 했다.
그때마다 급히 물거이댁은 냉수 한모금을 물고 채반으로 며느리 얼굴을 가리고 훅훅 뿌렸다.
찬물에 며느리가 정신을 차리자 할매가 며느리 상체를 부여잡고 물거이 댁을 보고
책망하듯 고함을 쳤다.
“아이고 이사람아 며느리 아 놓는데 문고리에 끈도 준비 안했나?
“문고리에 끈은 왜요?”
“빨리 자네 속치마라도 벗어 문고리에 묶어라!” 다급하게 할매가 말했다.
할매도 정신이 나갔고
시어머니 물거이댁도 절반은 정신이 없었다.
문고리에 속치마를 걸어서 며느리 손에 묶고는 할매가 고함을 쳤다.
“바짝 당기라! 바짝 당기고 젓먹던 힘 다써야 얼나(아이)놓는다!”
할매가 모질고 다급하게 고함을 쳤다.
그때다 드디어 아이 머리가 옥문을 열고 나오기 시작했다.
“할매요 얼나 나오니이더어”
물거이댁도 흥분를 하고 소리를 질럿다.
할매는 며느리를 안고 “힘더줘라! 더좋라카이! 연신 고함을 쳤다.
“으앙!”
드디어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오면서 첫울음을 터트렸다.
“아이고 할매요 얼나가 고추시더어”
“고추라!”
“아이고 할매요 고추시더어 고추시더어” 물거이댁은 눈물범벅 피범벅으로 소리를 쳤다.
할매가 사금파리로 임산부 자궁 문을 째고 멍석에 짚 깔고 애받는 일로 한바탕 야단을 치루고나니 그재서야 첫닭이 울었단다.
밤새도록 산통에 혼 이난 며느리는 그저 물먹은 홑이불처럼 축 늘어져 미동도 못했다.
--------------------------------------------------------------------
손자 탯줄을 거두고 난후 서둘러 물거이댁은 건너 마실 큰집으로 갔다.
날이 아직 새지 않아서 어두웠지만 눈이 길바닥에 휘끗휘끗하여 그걸 푯대삼아 건너마을
큰집으로 향했다.
큰집에 알리고 또 비록 큰집 식구들이 매몰차기는 해도 마실에서 제일 큰 부자이니 우선 급한되로 쌀 두되만 빌려서 밤새도록 고생한 며느리 첫국밥은 이밥으로 해주고 싶었다.
가는길에 멀리 앞산이 보이자 문득 가던 걸음을 멈추고
물거이댁은 앞산을 향해서
“아이고 고마이더어, 아이고 고마이더어” 몇 번이고 절을 했다.
그 앞산머리 중턱에 중조부와 남편 묘가 있었기 때문이다.
큰집은 감나무가 대여섯 그루 서있는 약간 언덕배기에 있어 멀리서 보아도
마당에 터-억허니 버티고 있는 나락가리가 보였다.
올해도 농사가 잘되어서 지난 가을 한차례 타작하고도 남은 곡식들이 앞마당에 둥그렇케 쌓아올려져 “나는 부자다!” 하고 있었다.
그 만큼 사촌 큰집은 부자다 .
사촌 큰집에 들어서서 며느리 난산을 고하고 어렵게 물거이댁은 입을 열어 쌀 한되박
꾸어 달라고 했다.
이 엄동설한에 손자 보았으나 첫국밥 끓일 양식이 없다는 사정을 알면 아무리 마실
사람들이
“물거이댁 큰집 사람들은 않았던 자리엔 풀도 안난다” 흉을 볼 정도라도 쌀 한되박은
꾸어 줄줄 알았것만 잠에서 깬 큰 안방 어른은 예상 되로 매몰찼다.
“자네는 아무리 손자가 태어나도 그렇치 오늘이 무슨 날인가 엉?
여자가 정월 초하룻날 남의집 문지방을 넘어서도 되는가?
아차! 그렇다......여자는 정월 초하룻날은 어떤 일이 있어도 남의집 대문을 제일 먼저
열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그만 깜밖 했다.
“남의집 남의집” 하는그말 자체도 너무 서러웠다.
“설사 내 집에 쌀이 있네마는 오늘은 정초이니 내일 오게”
말인즉 정초부터 쌀이 나가면 일년 내내 집안의 복이 나간다는 뜻이다.
결국 쌀을 못 꾸어서 물건이댁은 눈 내리는 정월 초하루 새벽을 집으로 돌와 왔는데 그때 눈 맞으면서 흘린 눈물이 홀로 여인네 가슴에 평생 恨으로 남았다.
집에 돌아와 보리쌀을 꺼내면서
“며늘아 배고프지... 조금만 기다려라 내얼른 첫국밥 하마”
“괜찮니이더” 이제 며느리도 한숨 돌리는 듯 낮은 목소리로
“어무이요 지는 초하룻날부터 딸 놓을까봐 시겁 했니이더어”
“안그래도 나도 만약 니가 딸을 놓으면 섣달 금날로 칠라켔는데 고추를 달고
아왔으니 이제 안심이다“
정초부터 딸을 놓으면 재수 없다하여 모진 시어머니들은 며느리를 구박도 하였고
숫제 아이의 생일을 초하룻날로 정하지 않코 날짜를 멋대로 잡아서 출생신고를 하였다.
그런대 터-억허니 고추를 달고 나왓으니 며느리도 시어머니도 엄청 안도 하였으나
그런 고생한 며느리에게 첫국밥을 이밥으로 못해주는 물거이댁은 가슴은 덜익은
토란뿌리처럼 아리고 쓰라렸다.
그때다.
옆집 할매가 또 왔다.
그냥 온 것이 아니고 밥뿌제(밥싸는 보자기 즉 옛날 여자들의 핸드백이다)에 뭐를 들고 오셨다.
“아이구 할매요 아까 고생 많았니이더어,,,안주무시고 왜 또 오니이껴?”
“자네 큰 집에서 산모 첫 국밥 할 쌀은 빌려 왔는가?
“그게....저”
“빌려줄 사람들이 아니지..여기 쌀 있네..두되야
울영감이 아무래도 자네 큰집에서 청초부터 쌀 빌리기 어려울 것 같다 카면서 갔다 주라카네, 어서 쌀 솥에 안치고 국 끓여 산모한데 줘야지! 서드르게“
“아이고 할매요..이거 초닷세날 할배 생신때 쓸라고 마련한 그쌀 아이껴?”
물거이댁은 며칠전 할매 며느리에게 쌀 이야기를 들어서 할매 집에도 달랑 쌀 두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두 가난한 이웃들이라서 서로 잇빨 빠진 종재기 그릇하나도 서로 알고 있는 빤한 살림이 였다.
“영감 생일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저래 하혈도 많이하고 손자 낳준 며느리
첫국밥을 우째 깜동(검은) 보리쌀로만 하노, 어서 이밥으로 하게!“
결국 물거이댁은 부엌바닥에 주저않아 할매 손을 부여잡고
“아이고 할매요,아이고 할매요” 울음을 터트리며 엉엉 울었단다.
70년대 초반만 하여도 이산골에 쌀은 그만큼 귀한 곡식이 였다.
--------------------------------------------------------------------
그때 생일때 쓸려고 고방에 감추어둔 쌀을 물거이댁 손주 첫국밥에 선 듯 내어논 할매가 이 띨띨한 필자의 할매다.
그리고 물거이댁 사금파리로 째고 낳은 손자는 잘커서 경남 고성 어디서 중학교 선생을 하다가 최근 인천 모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그후에 태어난 동생도 사업에 성공하여 다들 넉넉한 살림으로 자리를 잡았다.
아직 고향에 살고 있는 물거이댁은 못쓰는 산비탈 땅을 값싸다는 이유로 사서 고추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는데 대구-춘천간 중앙고속도로 건설때 땅이 편입되면서 보상도 제법 많이 받아서 이제 우리 마을에서도
“돈많은 할마이” 로 소문이 났다.
그리고 큰 부자였던 큰집은 아들 셋에 딸 하나였는데...큰아들이 마누라 둘을 될꾸 살면서 술 노름으로 선친이 일본에서 벌어온 재산을 한마지기 두마지기 야금야금 다팔아 먹고
숫제 알거지가 되었고 본처하고 이혼을 하고 지금은 고향도 떠나서 경남 마산인가 창원인가 하는 곳에서 사는데 이 살기 좋은 자가용 시대에 전세방도 아니고 삭을 셋방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마나 현금이 궁했는지 자고로 자손대대로 건드리지 않는다는 선산 木 즉 웃대 어른 산소에 있던 늙은 소나무 마져 도시 호텔 조경 업자에게 팔어 먹어서 묘주변이 휑허니 드러나고 마을 사람들이
"울매나 조치면(생활이 궁핍하면) 조상 묘터 옆 소나무를 다팔어 먹노!"
한마디로 폭삭 망한 집으로 소문이 났다.
지난 초봄이다.
울어메로부터 한통의 전화 訃音을 듣고 나는A시 도립 병원을 또 내려갔다.
물거이댁 큰집의 어르신이 객지에서 돌아가셔서 고향에 뭍힐려고 도립병원에
빈소를 차렸단다.
늘상 그랬던 것처럼 곧바로 서울을 출발하여 달뜨는 문경세재를 넘어서 A시 도립병원 장레식장에 문상을 갔고 장례 식장에 들어서서 망자에게 곡도 미처 끝나기도 전에 나를 부여잡고
“아이고 정래 아제요 이밤에 서울서 우째 왔니이껴?”
하면서 반기는 분이 계셨다.
물거이댁이 며느리다. 추운 섣달 금날 울할매가 깨진 사금파리로 아랫도리를 째고 아이를 낳았던 그며느리인데 그녀도 세월에 걸려서 이제 백발의 할머니가 되었다
비록 우리와 종파는 틀리지만 성씨가 같으니 학렬로 쳐서 내게는 해라를 하지 않으셨다.
상주들이 나를 오랜만에 보고 반기려고 하는데...
“아제요 일루 않으소..까짓 상주들 보면 뭐하니이껴 조상땅 다팔아 먹고
애비(아버지)묘쓸 자리도 없어 쪼자리난 집안인데“
그러시더니 나를 부여잡고 그날, 눈 내리던 섣달 금날 아들을 놓은 이야기.. 그동안 큰집에 섭섭했던 이야기를 아주 당당한 큰소리로 말씀하시기 시작 했다.
그날 정월 초하루날 쌀 한바가지 빌려주지 않은 큰집 아들이 이제 늙고 병들어 객지를 떠돌다가 망자가 되어
허허로운 사진 한장으로 터-억 빈소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제요..저어른이 동네 부자랏고 소문난 양반 아이껴!
그런대 사촌간에 추분 겨울 얼나 낳아서
울시어머니가 그찬바람이는 새벽에 맨발 짝으로 쌀 한바가지 얻으로 달려갔으면
쌀 한되박 빌려주면 뭐 덧나니이껴?
길가는 거지가 들어와도 한 바가지 안 퍼줘야 되잖니이껴?
그런대 곡간에 쌀을 무데기로 가다놓코 오금에 청솔나도록 잘살낫고 첫국밥 해먹을 쌀 한 됫박도 안 빌려주고 울 시어머니를 문전박대한 사람있시더어!
사람이 천년을 사니이껴 만년을 사니이껴?
우째 사촌한데 그래 박절할수 있니이껴?
겉보리 흉년에 접시물에 코를 박고 죽을지언전 찬물도 나누어 마셔야 할낀데
죽어서 이녁이 누울 미퍼리 땅쪼가리도 안남기고 죽을랏고 그랬니이껴?
나는 이양적(이미) 이때까정(지금까지) 남편 복없이 산 여자지만 남한데 애문소리 한번 안하고 인정머리 없다는 소리 안듣고 살았니이더어!
내가 큰집이 오죽 별나고 매몰차면 초상집에 와서 내가 끌꾸그이싯껴?
나도 남사스런거 아는 여자씨이더어 허나
내가 글꾸그는 것이 아니라 저양반이 논떼기라도 있다고 울집에 얼매나 유세
했니이겨?
울 시어머니 아파 누웠을때 자기 논 웅덩이에 미꾸라지도 못잡게 한 양반있시더.
(겨울에 논가운데 웅덩이 물을 푸면 미꾸라지가 많았는데 아마 그걸 잡아서
시어머니에게 보양으로 드릴려고 사촌 논에 물푸다가 들킨적이 있단다)
그때 우리한데 글꾸그지(그렇케 하지 않았다면) 않았으면 아제도 아다싶이 울 둘째가 몇 년전에 사놓은 山에 묘퍼리(묘)라도 한자리 내가 안줄시이껴?
망자가 갈 묘자리가 없어 상주들이 애를 먹는 모양이다.
물거이댁 며느리는 점점 소리도 높아가고 눈에 눈물도 찔금찔금 비치면서 흥분하기 시작했다.
“아제도 아잖니이껴? 나는 이제 울아들 둘다 잘되서 잘사니더어, 그런대 저넘의
집구석 꼬라지보소”
저래 잘살랏꼬 그리 매정 했니이껴?
조상땅 다팔어먹고 이제 객지로 나갔니더어!
소리가 커서 빈소에 쭈그리고 않아있는 큰집 후손들이 다들을 정도 였다.
나는 묵묵히 술잔만 들이키고 있었다.
자고로 여자가 恨을 토할때는 그저 들어줘야 풀리는 법이길레 그저 듣기만 했다.
한편으로는 비록 못배워서 말씨는 투박하나 어느 대학교 철학교수 강의보다
더 가슴에 와닫는 진솔한 삶의 이야기니 이참에 상주들도 듣고 남은 인생이라도
좀 인정있게 살아라! 그런 바램도 있어 그분의 한소리를 막지를 않았고
이제 살림살이가 당당한 그녀의 恨소리를 상주들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섭섭함 저럼 섭섭함 다털어 놓던 분이 갑자기 손님 술상 준비하는
손아래 며느리,조카,질부 들을 보고 괙 소리를 질렀다.
“봐라 야들아 술 더갖고 온나! 안주도 더주고...도대체 며느리들이 뭐하노 엉?
이양반 누군지 너거들아 아나 모르나..손님 대접 그따위로 하는것 누구한데
배웠노 어이?
이제 물거이댁 며느리도 집안의 큰 어른이다.
큰일에 잘못하는 아랫것들에게 큰소리 칠만도한 나이시다.
그런대 그고함 소리에는 아무래도 똑바로 해라! 하는 심통도 일부 포함되어 있는 목소리 였다.
중간 중간 상주들이 나를 힐끔 처다보기도 했지만 어차피 이래된 마당에 숨죽이고
있어야 고향 지키고 있는 물거이댁 며느리에게 망자 묘터라도 얻을 것이므로 아무도 말 한마디도 못하고 있었다.
결국 그날 시어머니가 쌀 못 빌리고 돌아와서 부엌에서 눈물 비칠떼 울 할배가 생신때 쓸려고 마련한 쌀 두되박을 밥뿌재에 싸들고 할매가 들고 다시 오시었고 그쌀 두되를 부여잡고 시어머니가 엉엉 울었다는 이야기 대목에서는 그만 감정이 폭발하셨는지 훌적훌적 울기 시작 했다.
초상집에 망자를 위해 곡소리는 들어봐도 그망자를 원망해서 우는 소리는
나도 처음이다.
순간 나도 입장이 참 어려워 졌고 상주들에게도 민망 스러워져서 자리를 일어 설려고하니
“아제요, 정래 아제요..그때 할매 생각하면 내가 늘 가슴이 아파서 우리 아들보고 지발 너거들은 정래 아제한데 잘해라 잘해라 카니이어(실제로 아들들은 나에게는 잘한다)
그때 할배가 나 때문에 생신때 곱삶은 보리밥 드신 것 평생 미안코
할매 쌀두되 들고 왔을때 생각하면... 정래 아제 잘되서 부자되랏꼬 내 수없이 빌었니이더어“
그저 절절한 말을 토하면서
한시간이 넘게 울고불고 하시는분을 달래놓코 장례식장을 나서니 하늘에 별이 총총했다.
자고로
“三代 富者없고 三大 가난뱅이 없다” 옛 선조들의 말씀이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울러
부자들에게 쌀 한바가지는
그저 쌀 한바가지일 뿐이지만
가난한 사람에게
쌀 한바가지의 서름과 고마움은
40년도 더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쿠...나도 쪼-옴 사는데, 2-30년후 내가 죽어서 사진한장 걸려있는
빈소에 어느 여인이 엎드려 통곡은 커녕 원망의 눈물 찔금거리며 나에게
恨토하는 친인척 없도록 지금부터라도 잘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