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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마감은 살짝 버거웠어요. 단속이 있었고 코스피 7500p, 코스닥 1200, 환율 1470 시대를 살고 있는데 6년 전 퇴직금(300만)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웬 떡이냐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에에공도 육 남매도 누구 하나 치열하게 살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비가 돈 천만 원 쏴주면 좋을 텐데 염병, 줄 돈이 없네요. <어머니날> 결석한 것이 걸려서 바리바리 싸 들고 택시를 탔어요. "아침 어때?(지금 일어났어... 진접 왔어?) 어... (어딘지?) 장현 사우나 (사우나 언제 왔는데)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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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고 먹자... 엄마도 뵈얀디...같이 만날까?)어 (몇 시?) 10시 어때? (넘 빠듯한 듯... 11시) 그리하시라 (어) 휴대폰 기종이 뭐야? (왜... 삼성 노트 20...) S23? (아녀) S26? (이거라고... 씻는다... 희정이 있어서 같이 갈게)ㅇㅋ(나/명옥)" 희정아! 기다렷! 오빠가 간다. 사우나가 주인이 바뀐 후로 싹 바꼈네요. 25.000원짜리 세신을 하고 2701 에쿠스에 조인해서 우리 동네 동태찌개로 의기투합했어요. 야곱과에서의 형제 상봉이 떠올랐고 예서(나)를 의식해 인사도 못 건네는 두 여인을 보니 순간 울컥하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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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담이가 졸업을 했고 사랑이가 고1(17세)이랍니다. 만종이(59)가 잘난 딸내미 데리고 다니면서 길거리 캐스팅 당하는 재미가 쏠쏠한 모양입니다. 만종이가 부럽긴 처음입니다. 어머니표 생태찌개만큼은 못해도 다들 먹을만한 한 표정들입니다. 이름에 'ㅇ'자 들어간 이정애-아이유-임영웅 이야기로 우리는 한참을 까르르 걸렸습니다. 간장 게장 세 항아리 사서 하나씩 건네주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이번 추석 때는 보는 거야(희정)" "너무 기대하지 마시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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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를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씨발 다 까먹었어요. 니체-하이데거-마르크스-프로이트를 열공하고 있는데 <차이>가 튀어나와 들뢰즈를 재소환했어요. 내가 아는 오남리 맛집 중 하나는 '항아리 갈비탕' 집인데 맛집이라기보단 보양식이 더 적당할지 모릅니다. 황제 갈비탕을 주문하면 산낙지와 전복이 추가됩니다(25.0) 산양삼 3뿌리의 존재감도 만만치 않아요. 그러고 보니 3일 연속 술 먹는다고 흉보거나 무슨 나쁜 일이 있냐고 물어보지 마시라. 낫싱, 노프러브럼입니다. 분명한 건 술도 먹을수록 느는 것 같긴 합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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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지 탕탕이-낙지볶음-낙지 숙회의 차이를 아시나요? 생물, 매운맛, 담백한 맛 아닌가요? 들뢰즈는 서양 철학 전통 중심의 사유 모델을 뒤집고 <생성으로서의 차이> 개념에 주목합니다. <차이와 반복>은 이러한 철학적 기획의 일환이며, 차이 자체, 반복에 대한 통념 비판, 니체의 영원회귀, 그리고 시간의 세 가지 종합 등을 통해 독자적인 형이상학의 기반을 구성합니다. 들뢰즈가 우선 주목하는 것은 <차이>입니다. 역사적으로 철학자들은 동일성만큼이나 <차이>에 주목해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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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차이>를 이해하는 방식은 항상 어떤 것이 다른 것과 어떻게 다른 것인지 파악하는 것입니다. 즉, <차이>는 이미 존재하는 자기동일성을 전제한 후에 덧붙이는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어요. 가령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종차(diaphora)라는 개념을 제시해요. 종차는 어떠한 종이 다른 종과 다르다는 <차이>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노노. 여기서의< 차이>는 유개념과 종개념이라는 동일성을 전제로 하는 <차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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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자기 동일적인 실체가 아니라 매 순간 변화하며 달라지는 과정으로 바라봐요, 이러한 들뢰즈의 차이를 드러내는 사례로 '루앙 대성당'연작이 꼽힙니다. 모네는 2년에 걸쳐 매일 루앙 대성당 앞의 카페에 앉아 반복적으로 성당을 그렸어요. 그렇게 그려진 것은 서로 같지 않은 30여 점의 대성당 그림들이었습니다. 들뢰즈는 차이가 기존의 시각처럼 동일성들 사이의 관계로 이해돼서는 안된다고 주장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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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차이>는 모든 개체, 개념, 사물들의 기저에서 끊임없이 펼쳐지는 창조적인 과정에 가깝다고 봤어요. 존재는 어떤 동일성 간 <차이>를 줄여가며 하나의 점으로 수렴하는 것이 아니며, 끝없이 스스로를 <차이>화해가며 발산하는 운동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쾅! 쾅! <차이>가 생성으로서의 과정이라면, 반복은 어떻게 가능할까? 모든 순간은 저마다 독특하고 매 순간과 다릅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인식 체계는 그러한 미세한 차이들을 담아내기에는 한계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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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한계처럼 말이에요. 따라서 인간은 각각의 <차이>나는 것들을 동일한 것으로 여깁니다. 반복은 끊임없이 생성 변화하고 예측할 수 없는 세계를 인위적으로 붙잡는 시도입니다. 가령 인간의 경우, 세포가 일정 주기마다 죽어 없어지고 새로운 세포로 교체됩니다. 1년이 지나면 몸을 구성하는 모든 세포는 대부분 새로운 것으로 바뀌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같은 이름으로 부르고 동일한 존재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들뢰즈에게 반복은 동일한 사물이나 사건을 재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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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적으로 무엇인가 '반복'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현재의 맥락에서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재구성하고 재연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이를 '재청원'(re-petitioning)이라는 표현으로 묘사해요. 이에 대비되는 것이 '옷 입은 반복'으로 끊임없는 <차이>자체가 되돌아오는 생성의 과정입니다. 들뢰즈에게 전통적인 반복, 즉 헐벗은 반복은, <차이. 가 새로운 것을 생성하는 과정을 멈췄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부차적인 동일성이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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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우리는 시간에 대해 과거-현재-미래라는 선형적인 구도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시간이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함께 종합하면서도 서로 분리되어 상호 연관되는 공존으로 보았어요. 들뢰즈는 이러한 시간 속에서 주체가 어떻게 형성되는가 탐구하는 존재론으로 나아가며, 시간의 세 가지 종합 이론을 제시합니다. 비가 내리는 상황을 가정해.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에 세심히 주의를 기울이면, 각각의 빗방울이 가볍게 표면을 두드리는 소리를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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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는 그 고립된 소리를 하나하나 듣는 대신, 연속적이고 일정한 패턴으로 엮어 하나의 빗소리로 인식해요. 빗방울이 떨어지는 작은 순간들을 하나의 끊임없이 흐르는 비라는 연속적인 감각으로 통합하는 것이지요. 시간의 첫 번째 종합은 독립적인 순간들을 하나의 연속적인 흐름으로 수축시켜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입니다. 앞서 언급했듯 들뢰즈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하나로 연관되었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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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현재라는 기본적인 경험은 수축을 통해서 방금 지나간 과거를 유지시키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습관이나 기대를 통해 끌어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지나간 현재-지나가는 현재-도래할 현재라는 일의적인 구도로 종합되며 '살아있는 현재' 혹은 '시간의 정초'로 불립니다. 살아있는 현재는 고정된 시간 단위가 아니며 지속적으로 과거와 미래를 하나의 흐름으로 엮어내는 수축의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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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시간의 두 번째 종합은 과거를 중심으로 이뤄져요. 위에서 제시한 비의 예시로 돌아가 보면 비가 그친 직후, 우리는 비가 내렸던 경험을 과거에 있었던 일로 기억하고 그것을 회상할 수 있어요. 아마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상상하거나, 연속적인 비의 패턴이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좋아하는 음악을 다시 듣는 과정을 예시로 들 수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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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는 구간이나 후렴구가 들려올 때, 우리는 과거의 순간을 종합적으로 떠올리게 돼요. 동시에 그 기억을 바탕으로 다음에 나올 부분을 예상하게 됩니다. 시간의 두 번째 종합은 습관이나 기억을 통해 회상할 수 있는 과거와 이전의 경험에서 종합된 기대를 통해 예상되는 미래 모두를 구성하는 방식입니다. 즉, 첫 번째 종합을 통해 즉각적으로 살아있는 현재를 얻는다면, 두 번째 종합은 그 현재의 일부를 과거의 기억이나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투영으로 종합하고 투영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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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세 번째 종합은 항상 다른 두 가지 종합과 공존하며, 어떠한 현재와 구성된 과거/미래도 결코 완전하거나 안정적이지 않아요. 첫 번째 종합의 살아있는 현재, 그로부터 구성되는 두 번째 종합의 과거/미래의 표상들은 결코 완전하게 포착될 수 없는 잠재성 의해 끊임없이 파괴되고 분열되며 재생산됩니다. 다시 한번 음악에 대한 예시를 들어봅시다. 좋아하는 음악에 심취해 익숙한 구간이 들려오리라 마음에 준비를 하고 있을 무렵, 갑자기 전화가 울리거나 전원이 꺼진다고 상상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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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는 이를 위해 니체의 영원회귀 개념을 가져옵니다. 앞서 언급했듯 들뢰즈의 반복은 동일성이 아닌 차이 자체의 반복이며, 영원회귀에 대해서도 차이 자체의 회귀로 해석합니다. 살아있는 현재→기억의 회상→미래에 대한 예측이라는 안정적이고 선형적인 구도는 세 번째 종합이 가져오는 예측할 수 없는 변이를 통해 파괴되며, 이는 끝없는 역동성을 지닌 채 차이를 발산합니다. 알쏭달쏭 조금씩 감이 잡혀가지 않나요? 구조주의 사각지대를 탈 구조주의(포스트모더니즘)가 <차이>로 박살 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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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데리다-푸코는 모두 니체의 새끼들로 '헤겔의 동일성'이 틀렸다고 냅다 까는 것 같아요. 우리가 사물을 보고 대갈통에 입력할 때 낙지는 모두 다 같은 낙지라고 해석(헤겔) 하는데, 노, 노! 낙지는 절대 똑같은 낙지가 없다는 겁니다(둘 레즈). 우리가 아는 대로 언어가 먼저 있고 사물이 나중에 있는 것부터 시작해, 언어와 사물의 독자성을 일일이 분리하는 것 자체가 언어의 한계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고? 사물은 개별성과 고유성이 있다 해서 어쩌라고? 언어의 폭력성을 반성하라는 얘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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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나의 거리 46회>입니다. 기억을 잃어가는 도끼 영감에게 이웃들의 따뜻한 손길이 모아졌습니다. 어느덧 또렷하게 돌아온 기억을 붙들고 도끼 영감님은 마지막 춤을 추는데 들러리로 가득 채운 스테이지는 맞춤 환상입니다. “오빠, 이제 나랑 춤추는 거 마지막이야 내 발등 밟지 말고 정신 바짝 차려서 잘 춰야 돼 대답만 응하지 말고. 우리네 한평생 춤 생 춤 사야 멋지게 추고 가야 돼(짱구 엄마)“ 제가 아는 가장 아름답고 슬픈 라스트 댄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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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스클럽에서 만난 엄마는 유나에게 세 가지를 요구합니다. “1. 꽃뱀 언니를 들이지 말라 2. 소매치기와 단절하라 3. 착하게 살아라(엄)“ 유나는 이제 제 갈 길을 가겠답니다. 엄마를 만난 게 자랑스럽지만 자신들이 알고 지낸 사람들을 버릴 수 없다며 자동차도 아파트도 다 놓고 나갑니다. 창만도 허전하긴 매한가지입니다. 나는 또 왜 기분이 이리도 쓸쓸할까요? 한 밤중에 깨어 장 노인의 방을 확인한 맘보가 놀란 가슴을 안고 창만에게 전화를 했는데 아닌 밤중 홍두깨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을 줄 몰랐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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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나는 낄 때 안 낄 대 모르고 다 끼는 애에요(홍)” 이젠 일장춘몽을 끝났으니 귀가할 시간입니다. 짱구 엄마가 쌈짓돈을 구깃구깃 꺼내 창만에게 건네고 고시촌으로 들어가는데 눈물이 핑 돌더이다. “할아버지 참 착하게 주무신다(유)” 누구나 착하게 자는 건 아닙니다. 착하게 안 자는 저는 착하게 잔다는 유나의 말속에 착하게 살고 싶은 유나의 예쁜 마음씨가 보입니다. 이제 둘만 남았고 둘도 떠나야 합니다. “엄마한테 아파트 안 들어간다고 했다며?(창)”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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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사실 엄마한테 가기 싫어. 창만 씨 하고 헤어지기도 싫고(유)“ ”나랑 헤어지기 싫다고 말해줘서 고마워. 이 밤하늘을 잊지 못할 거야(창)” 다영이 창만과의 생일 데이트가 궁금한 홍 여사가 다 영에게 선물(반지)을 받았냐고 물었는데 뜻밖의 다 영의 반응에 사태의 추이를 감 잡아요. “여자를 못 보는 시골에서 자라서 그런지 여자 보는 안목이 없어(홍여사)” “제 눈에 안경이란 말이 있잖아요. 그 오빠가 여자를 어떻게 보든지 우리가 섭섭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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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섭하기보다 안타깝지(홍)“ “창만 오빠에 대해 엄마도 미련 갖지 마세요(다)” “그래, 너만 괜찮으면 엄만 괜찮아...(홍)“ ”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번에 알았어요. 근데 엄마가 나보다 더 가슴 아파하는 건 싫어요. 창만 오빤 김 먹을 줄은 몰라도 참 좋은 오빠예요(다영)“ 이 일이 맘보에게 전해지고 맘보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창만을 두들겨 팹니다. 저는 맘보를 충분히 이해합니다. 물론 나는 이런 식으로 일 처리를 하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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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오늘부로 콜라텍 지배인 해고야!” 혹시 해고당해본 경험이 있나요? 공교롭게도 제가 며칠 전에 해고 통고를 받았습니다. 기분 더럽습니다. 권고사직을 먼저 받았는데 징계위원회가 무산되자 하루 만에 해고통지서를 보낸 것입니다. 해고 사유는 이렇습니다. <<1. 근거 규정“근로기준법 제26조 2. 해고 일자:2021년 2월 06일 3. 해고 사유: 폭행, 업무상 지시 불복... 2020년 12월 30일 오후 대표 유 0주가 T-스테이션 1층 창고에 있던 김 0석을 발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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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창고이니 영업부 사무실에 대기하라는 지시를 하였으나, 김 0석은 이 지시에 불복하고 “갑 질하지 말라"라며 대표 유 0주의 멱살을 잡아 수차례 흔들고 벽으로 밀치는 폭행으로 풍기 및 위계질서 문란, 작업지시 위반 등을 저지름. 2021.1.7. 코 00 대표 이 0희, 유 0주>> 졸지에 직장을 잃은 창만은 때마침 일거리가 없어 허탕치고 돌아오던 칠복을 만납니다. “예전에도 사장님한테 맞지 않았어?(칠)” “그때는 다 영이를 좋아하지 말라고 때렸고, 이번에는 왜 좋아하지 않느냐고 맞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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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떠날 때가 됐어요(창)“ 기사(창만) 없이 출근한 맘보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 홍 여사에게도 창만의 해고 소식은 아쉽기만 합니다. 연병, 전 누구 하나 아쉬워하는 사람이 없어요? 물론 유통기한 3년을 채웠고, 회사에 미련은 1도 없습니다. 잘 먹고 잘 사시라. 리틀 꽃뱀 진미가 가게 오픈을 하는 날 쓰리 풀 우먼이 떴습니다. 진미와 곽 사장은 각자의 위치에서 놀래는 표정이 아무래도 고름 좀 받을 것 같습니다. 윤지는 진미의 천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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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리도 공갈을 실감 나게 치는지 제가 다 감동할 지경입니다. 통유리 전용 도 함마로 카페 담장을 모조리 깨부숴놓기 전에 미선 언니 돈 2,000만 원을 책임지고 받아주라는 내용입니다. 윤지 리스펙트! “윤지가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모르긴 해도 돈 안 주고는 못 베길 거야(유)” 화해의 손길을 1번으로 잡은 건 밴댕이와 칠복이입니다. 둘이 노래방에서 나오더니 형님 동생이 되었네요. 지금은 노래방 경기가 바닥이긴 하지만 10년 전만 해도 방 5개로 하루 매상 200도 찍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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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모든 공은 연상의 여인을 부르던 꼰대들 때문입니다. 밴댕이와 칠복이 부르는 ‘연상의 연인’이 반갑습니다. 나는 음치라 부르는 건 못해도 듣는 건 좀 합니다. 추억 소환을 하는데 가요 만금 빠른 것은 없질 않나요? 오해는 마시라. 연상의 연인에 대한 추억은 1도 없습니다. 앗, 미술학원 해숙 누나! 한편 정보 통 양순에게 유나가 엄마에게 가지 않겠다며 아파트 키와 자동차 키를 돌려줬다는 말을 듣고 유나에게 전화를 겁니다. 타이밍이 딱 맞은 것 같습니다. “보고 싶어(유)” 엄마보다 창만을 선택한 유나에게 앞머리가 5:5가 되도록 눈썹 휘날리고 달려가는 창만을 보니 왜 내 다리가 움찔거리는지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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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잊어야 할
당신의 얼굴에서
수~줍던 지난날의
내 모습을 봅니다.
내 젊음을 엮어서
내 영혼을 엮어서
사랑했던 여인
연~상의 여인
못다 한 사~랑~
못 다한 내 노래가
그~리운 마음에서
당신 곁을 스치네.
내 젊음을 엮어서
내 영혼을 엮어서
사랑했던 여인
연~상의 여인
못 다한 사~랑~이
못 다한
내 노래가
그~리운 마음에서
당신 곁을 스치네.
당신 곁을 스치네.
2.
<차이>는 우리를 더 외롭게 만드는가, 더 인간답게 만드는가? 이 글은 참 이상합니다. 퇴직금 300만원 이야기로 시작했다가, 사우나 세신과 동태찌개를 지나,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으로 돌진하더니 결국 《유나의 거리》의 마지막 춤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이 모든 조각들이 따로 노는 게 아니라 하나의 정서로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은 끝없이 변하지만, 그럼에도 서로를 기억하려 한다”는 슬픈 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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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초반의 가족 상봉 장면은 참 한국적입니다. 장현 사우나, 25000원 세신, 동태찌개, 간장게장 세 항아리. 거창한 화해도 아니고 눈물의 포옹도 아닙니다. 그냥 “같이 밥 먹자” 수준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래서 더 찡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가족은 대단한 선언보다 이런 생활의 디테일 속에서 살아남기 때문입니다. 특히 “에서(나)를 의식해 인사도 못 건네는 두 여인”이라는 표현이 강렬합니다. 여기서 사용자는 자신의 가족 상봉을 성경 속 야곱과 에서의 재회에 겹쳐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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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감정과 현재의 어색함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지요. 가족은 완전히 화해하지도, 완전히 끊어지지도 못하는 독특한 관계라는 걸 보여줍니다. 그런데 갑자기 분위기가 바뀝니다. 갈비탕과 술 이야기에서 느닷없이 들뢰즈가 튀어나옵니다. 많은 사람이 들뢰즈를 어렵다고 말하지만, 이 글은 의외로 핵심을 잘 잡고 있습니다. 들뢰즈에게 중요한 건 “같은 것은 없다”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낙지를 보고 그냥 “낙지”라고 부르지만, 사실 단 한 마리도 같은 낙지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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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달라지는 생성의 과정이라는 것이지요. 모네의 ‘루앙 대성당’ 연작을 끌어오는 대목도 탁월합니다. 같은 성당을 수십 번 그렸지만 단 한 장도 같지 않습니다. 빛이 다르고, 공기가 다르고, 시간의 결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들뢰즈는 바로 그 “달라짐 자체”를 존재의 본질로 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들뢰즈가 단순히 “개성 존중합시다” 수준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는 동일성을 중심으로 세계를 분류하려는 서양철학 자체를 뒤집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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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이 세계를 하나의 통일된 체계로 수렴시키려 했다면, 들뢰즈는 세계가 오히려 끝없이 발산한다고 봅니다. “반복은 동일한 사물이나 사건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매일 같은 하루를 사는 것 같지만, 사실 단 한 번도 같은 하루를 산 적이 없습니다. 같은 술자리도 아니고, 같은 가족도 아니고, 같은 나도 아닙니다. 세포가 바뀌고 감정이 바뀌고 기억이 바뀝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불안을 견디기 위해 “같은 것”이라고 이름 붙이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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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유나의 거리》가 들뢰즈 철학과 묘하게 연결됩니다. 도끼 영감은 기억을 잃어갑니다. 창만은 직장을 잃고 떠날 준비를 합니다. 유나는 엄마도 아파트도 자동차도 거절합니다. 모든 것이 해체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순간 사람들이 가장 인간다워집니다. 짱구 엄마는 “마지막 춤”을 추자고 말하고, 유나는 “착하게 자는 사람”을 바라보며 울고, 창만은 “이 밤하늘을 잊지 못할 거야”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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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들은 모두 들뢰즈의 “차이의 존재론”과 닿아 있습니다. 삶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흩어지는 과정이고, 사랑도 영원한 소유가 아니라 잠깐 스쳐가는 생성의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글 후반부가 그렇게 쓸쓸합니다. “나 사실 엄마한테 가기 싫어. 창만 씨 하고 헤어지기도 싫고.” 이건 단순한 멜로 대사가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나 “정착”보다 “머무름” 속에서 살아간다는 고백처럼 들립니다. 우리는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관계 사이를 떠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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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지막 ‘연상의 여인’ 노래 이건 단순한 추억팔이 트로트가 아닙니다. “내 젊음을 엮어서 / 내 영혼을 엮어서”라는 가사는 결국 지나간 시간 전체를 다시 붙잡고 싶다는 절규에 가깝습니다.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보다 “사랑했던 자기 자신”을 더 그리워하는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결국 이 글은 들뢰즈 철학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는 셈입니다. 삶은 안정된 집이 아니라 끝없이 흔들리는 춤이다. 사람은 동일한 존재가 아니라 매 순간 달라지는 흐름이다. 그러므로 사랑도 가족도 우정도 “소유”가 아니라 잠시 함께 추는 라스트 댄스에 가깝다. 그래서 더 슬프고, 그래서 더 아름답습니다.
2026.5.11.mon.악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