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볼 때 일반 독자라면 쉽게 지나칠 수 있지만, 출판인이나 책 수집가들이라면 주의 깊게 들여다보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책의 이력서라 할 수 있는 판권면(版權面)이 그것입니다(여기서 판권은 출판권을 줄여서 부르는 명칭입니다). 간기면(刊記面)이라고도 불리고 영어로는 copyright page(edition notice)라고 하며, 표제지의 뒷면(즉 2페이지) 혹은 맨 마지막 페이지에 놓이는 부분입니다. 판권면은 크게 저작권과 관련된 사항, 발행 사항, 도서 번호 등으로 구성되어 이 책이 어떤 책인지(책 속의 내용이 아니라 책의 형식면에서), 도서관이나 서점 등에서 어떻게 분류해야 하는지 알 수 있게 해줍니다.
먼저 저작권과 관련된 부분을 보면, 크게 국내 작가가 한국어로 저술한 경우와 해외저작물을 번역했을 경우로 나눌 수 있는데요(국내 저자가 외국 독자를 대상으로 쓴 경우나 해외 저자가 한국어로 직접 쓴 경우 등은 제외하겠습니다), 국내 저서의 경우에는 한글로 저작권 관련 내용을 기재하고, 번역물일 경우에는 원저작권자가 요구하는 형식에 맞춰 저작권 관련 내용을 기재합니다.
저작권
이때 동그라미 C(ⓒ)는 세계 저작권 협약상의 권리, 즉 copyright를 표시하는 기호입니다(때문에 Copyright라는 문구를 삭제하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출판사는 이 뒤에 저작권자와의 협약 사항을 부가하고, 저작권자와 출판사 간의 독점계약에 의해 출간되었으니 무단전재와 무단복제를 금한다는 내용을 밝히고 있습니다. 다만 경우에 따라서는 이러한 전재와 복제를 풀어 두기도 하는데요, 예를 들어 그린비에서 출간한 책 중 『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의 판권면에서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을 경우, 이 책의 내용을 자유롭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책의 지은이가 주장하는 ‘나눔의 삶’을(이 책은 지은이가 캘커타 ‘마더테레사의 집’에서 행려병자와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을 돌보며 친구들과 봉사한 나눔의 기록입니다) 책으로도 그대로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에 협의 하에 이 문구를 집어넣게 된 것이랍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인기만화가 강풀이 자신의 만화를 마음껏 펌질+해도 된다(만화상에 표시를 해둠으로써)는 훈훈한 기사를 본 기억이 있네요.
+ 현재 전 세계적으로 저작권법이 강화되고 있는 추세지만, 반면에 이와 같이 정보의 자유로운 공유를 주장하는 카피레프트(copyleft) 운동 또한 거세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저작물의 독점적 권리를 주장하는 카피라이트에 대해 명시적으로 반대를 표명하여 마크 또한 ⓒ를 거꾸로 표시하고(), 저작물의 재사용과 배포에 대한 규제를 풀어 두고 있는 것이죠. 출판 분야의 대표적인 예로 메이데이 출판사의 책들과 ‘진보평론’이 카피레프트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해외 판권
해외 판권의 경우에는 계약서에 명시된, 원저작권자가 요구하는 문구를 넣게 되어 있는데, 위 예에서 보듯 크게 제목과 저자, 원저작권자 표시, 번역 저작권 표시, 원저작권자의 허가에 의해 번역된 저작물임을 표시하는 내용 등으로 구성됩니다. 여기서 번역 저작권은 원저작권자와 계약을 체결한 당사자에게 있기 때문에 보통은 번역자가 아닌 (저작권 계약을 맺은) 출판사의 명칭이 기재됩니다. 그리고 이때 해외 판권의 위치는 통상 앞쪽(표제지 뒷면)에 배치되는데, 국내 발행 사항과 같이 배치하기도 하고, 국내 것은 맨 뒤에 놓아 따로 배치하기도 합니다.
다음으로 발행 사항을 살펴보면, 먼저 발행하는 책의 제목과 부제, 지은이와 옮긴이를 기재하고, 판/쇄 사항과 함께 인쇄일, 발행일을 명기합니다.
판/쇄 사항, 인쇄/발행일(초판)
이렇게 초판 1쇄 때에는 인쇄일과 발행일을, 2쇄 때부터는 1쇄 발행일과 해당 쇄의 발행일을 함께 기록합니다. 그러나 발행일의 기록을 좀더 정확히 말하면, ‘각 판의 최초 발행일과 마지막 발행일을 함께 기록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해당 타이틀의 발행 사항을 비교적 정확하게 기록함으로써 책의 역사를 남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판/쇄 사항, 인쇄/발행일(재판)
이런 책의 역사를 정확히 읽기 위해서 먼저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판과 쇄의 개념이 아닐까 싶은데요, 사전에서 말하는 판과 쇄의 의미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판(版) 책을 개정하거나 증보하여 출간한 횟수를 세는 단위. 1판은 초판, 2판은 중판 또는 재판이라고도 한다.
쇄(刷) 같은 책의 출간 횟수를 세는 단위.
즉, 판의 변화는 책 내용의 실질적 변화를 말해 주며, 쇄의 변화는 내용의 변화 없이 동일한 판으로 몇 번 인쇄했는지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세부적으로 보면, 개정판은 책 내용상의 변화가 있음을, 증보판은 보충한 내용이 있음을 말해 줍니다. 또한 표지, 본문 판면, 정가 등 책의 핵심 정보(이 정보들은 독자들이 책을 대할 때 가장 먼저, 직접적으로 인지하는 정보들입니다)가 변화되었을 경우에는 신판 내지는 ‘개정’이란 말 없이 2판, 3판 등으로 기록합니다. 위의 예를 보면, 2003년에 처음 나온 『열하일기~』의 경우, 2004년 3월에 책 내용이 개정되어 현재는 그 개정판이 17쇄에 이르렀음을, 2002년에 처음 나온 『철학의 외부』는 2003년에 책 내용을 한 번 바꿈과 동시에 추가하고, 또 2006년 ‘개정증보2판’은 2003년 개정증보된 내용으로 표지와 판면 등이 바뀌어 다시 발행되었음을 말해 줍니다. 한편, 간단한 오탈자의 수정은 쇄의 변화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책 제목과 부제, 지은이 및 발행일 등을 기재한 뒤에는 책을 발행하고 배포하는 출판권자, 즉 발행인의 이름(출판사 대표로 보시면 됩니다)을 명기하고, 출판사 이름과 등록번호, 주소, 전화번호 등을 기재합니다. 여기서 저희 그린비는 발행인을 ‘펴낸이’로, 출판사를 ‘펴낸곳’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펴낸이 외에 책의 출간까지 함께 작업한 사람들의 이름을 각 담당별로 기록하고 있는데요, 보통은 회사의 직원들이지만 때에 따라 디자인 회사(혹은 디자이너)까지 기록합니다. 저희와 다르게 기록하는 출판사들을 보면, 발행인만 기록하는 경우도 있고, 인쇄소·제본소·코팅업체·출력소 등 협력업체까지 기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기재되는 사항은 도서 번호인데요, 먼저 흔히 ISBN이라고 부르는 국제표준도서번호를 기록합니다. 국립중앙도서관 문헌번호센터에서 신청하는 이 도서 번호는 총 13자리에 부가기호 5자리로 구성됩니다. 저희 출판사를 예로 들면, “978-89-7682-123-1 03100”이라 할 때 ‘978’은 접두부(몇 년 전에는 생략했던 거라 책 중에 89부터 시작하는 책도 있습니다), ‘89’는 한국의 국가 번호, ‘7682’는 저희 출판사의 번호, ‘123’은 각 책을 분류/식별하기 위해 (각 출판사 정책에 따라) 매긴 번호, 마지막 ‘1’은 문헌번호센터에서 제공하는 체크기호입니다. 부가기호의 경우 첫자리 ‘0’은 독자 대상(일반 독자를 위한 교양서), ‘3’은 발행 형태(단행본), 마지막 세 자리 ‘100’은 내용 분류(철학 일반)를 나타냅니다.
ISBN
그리고 국립중앙도서관의 CIP 제어번호를 신청하여 그 번호를 기록하는데, CIP는 Cataloging In Publication, 즉 출판시 도서목록이라 하여 해당 타이틀의 정보(기본 서지사항, 표지, 목차, 머리말, 판권 등)를 국내의 출판계 혹은 도서관 및 서점 들에서 손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서비스해 주는 기능입니다. 단순하게 비유하면, ISBN은 여권번호이고 CIP는 주민등록번호라고나 할까요? ^ ^;
판권면
위는 저희 출판사에서 펴낸 가장 최근 책의 판권면 전체입니다. 판권면은 이렇게 책에 대한 물적 정보의 핵심을 수록하고 있기 때문에 편집자들은 작업 때에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제작의 최종 단계 때까지 반드시 확인을 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의미의) 편집의 알파와 오메가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