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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심고을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동해의 푸른 이상기
돈암서원
산앙루 주련에 문제가 있다.
충주에서 돈암서원에 가려면 고속도로를 네 번이나 갈아타야 한다. 서충주 나들목에서 평택-제천간 고속도로로 들어선다. 그리고 음성 분기점에서 중부고속도로로 들어선다. 청주를 지나 남이 분기점에서 경부고속도로를 만난다. 그리고 회덕 분기점에서 호남고속도로로 들어가 계룡시를 지나 논산시에 들어선다. 과거에는 계룡 나들목이나 논산 나들목으로 나왔지만, 이제는 양촌하이패스 나들목으로 나와 연산면 임리로 가는 게 가장 빠른 길이다.
길은 탑정저수지 옆으로 해서 1번 국도 계백로와 만난다. 돈암서원을 가려면 논산방면으로 1㎞쯤 가다 임리삼거리에서 U턴을 해야 하는데, 버스라서 불가능하다. 왕복 4차선도로지만 중앙선에 펜스가 처져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한참을 더 가서야 겨우 U턴을 해 돈암서원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돈암서원 주차장 앞에는 한옥단지가 만들어져 행사와 숙박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이 시설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관주도로 만들어지는 문화․관광시설 대부분이 겪고 있는 문제다.
주차장에서 남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가장 먼저 홍살문과 하마비를 만날 수 있다. 홍살문을 지나면 동향하고 있는 산앙루(山仰樓)를 만난다. 산을 우러러보는 누각이라는 뜻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1층 기둥은 화강석으로 하고, 2층 기둥은 나무로 세웠다. 계자난간을 둘러 2층에서 공부를 하거니 연회를 즐길 수 있도록 했다. 2층의 6개 기둥에는 주련을 걸었다. 송나라 학자인 소옹(邵雍)의 오언절구 ‘추운 때(歲寒)’와 ‘맑은 밤에 읊다(淸夜吟)’에서 따왔다.
추운 때 歲寒
소나무 측백나무 겨울 되어 푸르니 松栢入冬靑
비로소 추운 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方能見歲寒
소리는 바람 속에서 들어야 하고 聲須風裡聽
색은 눈 속에서 더 잘 볼 수 있다네. 色更雪中看
맑은 밤에 읊다. 淸夜吟
달은 하늘 한 가운데 이르고 月到天心處
바람은 수면 위로 불어오누나. 風來水面時
일반적으로 맑음의 의미를 一般淸意味
제대로 아는 이 별로 없으리. 料得少人知
이들 시의 주제는 다음과 같다. 한겨울 눈 속의 송백을 보면, 제대로 된 소리와 색을 듣고 볼 수 있다(歲寒). 한밤중의 청풍명월을 통해, 맑음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다(淸夜吟). 서경적인 듯 하면서 철학적이다. 그래선지 두 시는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기까지 지식인들에 의해 수도 없이 인용되고 변형되었다. 그런 연유로 이곳 주련에까지 인용된 것 같다. 그런데 이들 두 시를 하나의 공간에 걸면서 문제가 생겼다.
8행 중 6행만 인용했다. “松栢入冬靑 方能見歲寒 色更雪中看 聲須風裡聽 月到天心處 風來水面時” 내용과 주제가 다른 시를 이처럼 짜깁기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또 다른 문제는 ‘추운 때’의 3행과 4행의 순서를 바꿔 걸었다는 사실이다. 모르고 했다면 고쳐야 하고, 알고 했다면 잘못이다. 산앙루가 지어진 것이 2006년이다. 14년 동안 문제가 고쳐지지 않고 있는 셈이다.
입덕문 지나 응도당으로
산앙루를 지나면 서원의 외삼문에 해당하는 입덕문(入德門)이 있다. 덕을 배우고 실천하러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이다. 입덕문 오른쪽으로 ‘돈암서원지비(遯巖書院之碑)’와 ‘황강김선생정회당사적비명(黃岡金先生靜會堂事蹟碑銘)’이 있다. 황강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아버지 김계휘(金繼輝)를 말한다. 그의 호가 황강이다. 정회당은 돈암서원 안에 있는 건물이지만, 원래는 김계휘가 연산에 낙향해 후학을 가르치던 강학당이었다.
입덕문을 지나면 정면으로 서원 강당인 양성당(養性堂)이 보인다. 강당 앞 좌우에는 동재인 거경재(居敬齋)와 서재인 정의재(精義齋)가 있다. 그런데 이들 동․서재 앞 좌우로 응도당(凝道堂)과 경회당(慶會堂)이 위치한다. 그 중 시선이 자연스럽게 응도당을 향하게 된다. 그것은 응도당이 서원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건물이기 때문이다. 응도당은 원래 돈암서원 강당이었다. 1880년 서원을 현재 위치로 이전하면서 응도당이 이전되지 않음으로 해서 양성당이 강당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응도당이 현재 자리로 이전된 것은 1971년이다. 양성당이 이미 강당으로 자리하고 있어서 강당이 되지 못하고, 독립 건물로 양성당 동남쪽에 위치하게 되었다. 응도당은 북향을 하고 있다. 이것은 응도당이 현재 돈암서원에서 중심건물이 아님을 의미한다. 응도당 맞은편에는 경회당(慶會堂)이 있어 문화관광해설사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경회당은 1997년 고직사로 새로 지어진 건물이다.
응도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바닥에 마루가 깔려 있고 방은 없다. 정면 5칸이 틔어 있고, 측면과 후면에는 문을 해 달았다. 특이하게도 건물 양쪽 박공널 밑에 비바람을 막기 위한 방풍판을 설치했다. 방풍판 아래에는 눈썹지붕(榮)을 퇴칸처럼 달았다.
건물의 길이는 12.6m고, 눈썹지붕을 받치고 있는 기둥까지 포함하면 16m나 된다. 응도당을 받치고 있는 기단은 좌우 길이가 17.2m, 앞뒤 폭이 12m다. 고대 예서에서 말하는 하옥제도(厦屋制度)를 본받아 지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응도당은 기와에 쓰여 있는 명문으로 보아 1633년(인조 11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2008년 7월 보물 제1569호로 지정되었다.
당호인 응도(凝道)는 『중용(中庸)』의 중요개념인 지덕(至德)과 지도(至道)에서 나왔다. 『중용』 제27장에서 덕을 닦아 ‘지극한 덕에 이르지 않으면, 지극한 도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지극한 덕과 도에 이르는 방법이 수덕(修德)과 응도(凝道)가 되는 것이다. 주자는 《중용장구 집주(集註)》에서 ‘응은 모임(聚)이며 이룸(成)이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도를 실천하면서 이루어가는 과정이 응도임을 알 수 있다.
이곳 돈암서원에서는 2020년 서원문화재 활용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응도당이 가장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어서 행사들이 응도당에서 이루어진다. 응도당에서는 어린이 인성교육을 위한 ‘병아리 만인소운동’ 프로그램이 준비되고 있었다. 또 한쪽에서는 ‘우리 마을 문화재 탐험대’가 서원 이곳저곳을 탐방하고 있었다. 이처럼 돈암서원은 어린이들과 함께 탐방과 체험, 교육과 놀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젊은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돈암서원비를 통해 알게 된 사계와 신독재 두 선생
양성당 앞에는 돈암서원의 역사를 기록한 돈암서원비가 세워져 있다. 1669년(현종 10) 8월 송시열이 찬하고 송준길이 글씨를 쓰고 김만기가 전액을 썼다. 송시열과 송준길은 김장생, 김집 선생의 제자다. 그리고 김만기(金萬基)는 김장생 선생의 증손자다. 김만기는 『구운몽』 『사씨남정기』 같은 고전소설을 쓴 김만중의 형이다. 당대 최고의 정치가 문장가들이 합작한 비석으로, 공식명칭은 ‘연산돈암서원지비(連山遯巖書院之碑)’다. 연산은 돈암서원이 있는 현(縣)의 이름이다.
“사계(沙溪) 문원공(文元公) 김선생(1548-1631)이 숭정(崇禎) 신미년(인조9, 1631년) 8월에 사계에서 돌아가셨다. 이미 장사지내고 나서 문인 제자들이 선생을 사모하는 마음을 붙일 곳이 없었다. 그러나 즉시 사계 옛집의 왼쪽에 사우(祠宇)를 건립하여 3년 만인 갑술년(1634)에 낙성하고, 5월 정해일에 의례와 같이 신판을 봉안 배향하였다.”
이를 통해 우리는 돈암서원 사우가 1634년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20년쯤 지난 1656년 김집 선생이 세상을 떠났고, 2년 후인 1658년 9월 돈암서원에 종향되었다. 그리고 1659년 3월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받고, 4월 송시열이 신도비문을 찬했다. 신도비명 중 문경공 김집선생의 자질과 성품을 보여주는 대목을 인용한다. 여기서 그는 도가 응축된(凝道) 사람으로 표현된다.
“자품이 순수하고 교양이 바르기에 資純養正
그 도가 응축되었던 것이지요. 其道以凝
[…]
학문은 전일하게 행실은 독실하게 學專行篤
어질음과 효도 공손과 우애였지요. 仁孝悌友”
돈암서원비에 따르면, 김장생 선생은 장중하고 혼후(渾厚)하며 김집 선생은 자상하고 치밀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도에 이르기 위한 방법으로 다음 네 가지에 충실했다고 말한다. 이 문장의 핵심은 정하고 지키고 밝히고 실천하는(定持明實) 일이다.
“뜻을 세워 근본을 정하고 立志以定本
경에 머물며 그 뜻을 지키고 居敬以持志
이치를 알아 그것을 밝히고 致知以明之
자신을 돌아보며 몸소 실천했다. 反躬以實之”
돈암서원 강당 이야기
그리고 강당인 응도당의 양쪽 협실(夾室)이 거경재(居敬齋)와 정의재(精義齋)다. 경에 머무르고, 의를 정교하게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응도당의 방이 마루로 변하면서 이들 재(齋) 이름이 1997년 신축한 동재와 서재에 붙게 되었다. 이들 동재와 서재를 지나면 강당인 양성당이 가운데 위치한다. 양성당은 원래 김장생 선생이 연산으로 낙향해 후학을 가르치던 서당이었다. 이곳에서 김장생은 30년 동안 강학하면서 수 많은 문인과 교류했다.
양성당에 대한 기록은 김장생 선생이 쓴 ‘양성당기(養性堂記)로 남아 있다. 양성당은 돈암(遯巖) 원림(園林)에 있던 아한정(雅閑亭)에서 유래한다. 임진왜란으로 불탄 자리에 김장생이 작은 집(小堂)을 짓고 양성당이라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벽에 옛 시를 새겨 걸고, 당대의 지식인들과 함께 운을 주고받으며 화답(和韻)했다고 한다.
양성당이 돈암서원 강당으로 기능한 것은 1880년부터다. 돈암서원을 숲말에서 현 위치로 이전하면서 강당인 응도당을 이전하지 않았고, 양성당이 응도당을 대신해 강당이 된 것이다. 양성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세 칸이 대청이고 양쪽으로 방을 들였다. 대청의 앞은 틔어 있고, 뒤쪽은 벽과 문이 있다. 마당에서 대청 앞 양쪽으로 계단을 통해 기단으로 오른 다음, 댓돌을 통해 대청으로 오를 수 있게 되어 있다.
양성당 여섯 개 기둥에는 주련이 걸려 있다. 이 글은 주자의 「경재잠(敬齋箴)」에서 따왔다. 「경재잠」의 내용은 경을 지켜나가는(持敬) 방법론이다. 그리고 지경을 실천하면 ‘동과 정이 어김이 없고(動靜弗違) 겉과 속이 교차하며 바르게 된다(表裏交正)’는 것이다. 방법론 여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 주련은 양성당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읽어나가야 한다.
의관은 바르게, 보는 눈은 존엄하게 正其衣冠尊其瞻視
발은 무겁게, 손은 공손하게 足容必重手容必恭
문을 나서면 손님같이, 일을 할 때는 제사같이 出門如賓承事如祭
입 다물기는 병목처럼, 욕심 막기는 성곽처럼 守口如甁防意如城
일을 할 때는 다른 일에는 신경 쓰지 말고 當事而存靡他其適
오로지 정신을 하나로 해 만 가지 변화를 살펴보리. 惟精惟一萬變是監
사당에 들어가 밖에서 참배하다.
돈암서원 사당에 들어가려면 내삼문을 지나야 한다. 그런데 이 내삼문이 다른 서원과는 많이 다르다. 꽃살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담벼락에 지부해함(地負海涵), 박문약례(博文約禮), 서일화풍(瑞日和風)이라는 전서체 글자가 새겨져 있다. “땅은 만물을 짊어지고 바다는 모든 걸 포용한다. 널리 배우고 예를 지킨다. 상서로운 태양과 온화한 바람이 하늘에 가득하다.” 하늘과 땅의 성질과 특징을 설명하고, 인간이 지켜야할 덕목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사당엘 들어갔는데 이번에는 못 들어가게 한다. 우리가 충주 팔봉서원에서 왔는데 참배하고 싶다고 하니 들여보내 준다. 사당은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당호는 숭례사(崇禮祠)다. 정면으로 한 칸은 전퇴를 두어 사당으로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 4단의 기단 위에 집을 지어 건물이 상대적으로 높은 느낌이 든다. 숭례사의 옛 이름은 유경사(惟敬祠)였다. 숭례는 예를 숭상한다는 뜻이고, 유경은 경을 오롯이 한다는 뜻이다. 예와 경을 숭상하던 사계 김장생 선생의 핵심 사상을 표현했다.
숭례사에는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이 배향되어 있다. 그러므로 김장생으로부터 송시열로 이어지는 호서사림의 으뜸서원으로 여겨지고 있다. 김장생이 세상을 떠난 것이 1631년이다. 이듬 해 김집과 송준길 등이 서원 건립을 주도한다. 『동춘당집』에 나오는 「돈암서원 창건통문」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1634년 3월에는 청음 김상헌이 「사계서원(沙溪書院) 상량문」을 짓는다. 사계서원은 돈암서원을 말한다. 그리고 4월에 송준길과 송시열은 서원 향례의절(享禮儀節)를 간단하게 정리한다.
이어서 5월에 선생이 강학하던 양성당 옆에 돈암서원 사우를 짓고 신판을 봉안했다. 곧 이어 사우 앞에 강당인 응도당이 지어진다. 1656년 김집이 세상을 떠났고, 1658년 돈암서원에 배향되었다. 1659년에는 돈암서원으로 사액을 받았고, 1660년 공식적으로 편액이 내려지고 치제가 이루어졌다. 1688년에는 송준길이 돈암서원에 추가 배향되고, 1695년에는 송시열이 추가 배향되었다.
돈암서원장을 맡은 사람은 송준길, 권상하, 이재 등 기호학파의 중심인물이었다. 이들은 강회(講會)를 통해 교류하고 학문을 토론하면서 당파를 형성했다. 그리고 제향을 통해 사제간의 유대를 돈독히 했다. 1880년 돈암서원이 숲말에서 현재의 위치(林里)로 이전되었다. 1881년 《돈암서원지》가 간행되었고, 1903년 돈암서원이건비가 건립되었다.
1926년에는 김장생의 문집 『사계전서』판각을 보관하기 위해 장판각이 지어졌다. 1927년 양성당 중수가 이루어졌다. 1971년 응도당이 숲말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고, 1974년에는 양성당 바로 앞에 있던 입덕문이 응도당과 경회당 앞으로 나가게 되었다. 1997년 동재와 서재, 경회당이 지어졌다. 2006년에는 산앙루가 지어져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