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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오카5 - 이즈에서 백석과 나쓰메 소세키에 가마쿠라막부 비운의 쇼군을 회상하다!
2019년 4월 10일 가케가와 掛川(괘천) 역에서 시즈오카 를 거쳐서 도카이도(東海道 동해도)
의 시미즈 (淸水 청수) 역에 내려서 미호노마츠바라 三保松原 (삼보송원) 해변에서
눈을 인 후지산 을 구경하고는..... 후쓰(普通 보통) 열차를 타고 미시마(三島 삼도) 에
도착해 호텔에 체크인 하고는 사철 이즈하코네철도 를 타고 수선사 修善寺 역에 도착합니다.
1번 정류장 에서 버스를 타고 슈젠지온천 마을 에 도착해 슈젠지 절 을 찾으니 대문이
닫혔기로 옆 골목으로 올라가 절 내부를 둘러보며 구경하는데.... 슈젠지온천
修善寺温泉(수선사온천) 은 가쓰라강가에 있는 온천으로 헤이안 시대 불교
승려 였던 고보 대사 (弘法大師) 에 의해 807년에 창건된 오래된 사찰 이라고 합니다.
절에 온천수 가 나오기 때문에 몸의 부정을 씻을 때도 온천수를 이용한다는 슈젠지 修善寺
(수선사) 를 나와 아라이(新井) 료칸 을 지나고 붉은 다리를 구경한 후에
텔레비전에서 이시언씨가 먹은 오마카세 소바집 이라는 사쿠다 소바 를 지나 올라갑니다.
슈젠지 가 속한 이즈(伊豆 이두) 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인물 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몇년 전에 아타미의 호텔 에 숙박하면서 오도리코( 踊子) 열차 를 타고....
이즈 반도 남단의 시모다(下田) 까지 왕복하면서 이즈를 몸으로 겪은 나로서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나쓰메 소세키에 백석 세 사람이 떠오르는데 백석 이야기 입니다!
저녁밥때 배가 들어서 바다엔 배와 사람이 흥성하다,
참대창에 바다보다 푸른 고기가 께우며
배창에 고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즉하니 물기에 누굿이 젖은 왕구새자리에서
가슴앓는 사람은 참치회를 먹지 못하고 눈물겨웠다
- 백석의 가키사키(枾崎)의 바다 -
"이 시는 한국의 시인 백석 이 1930년대에 쓴 시니....... 가키사키(枾崎) 는 이즈
(伊豆 이두) 반도 남쪽에 있는 어촌 마을 로 1854년 미국의 페리제독 이
군함을 이끌고 찾아와 포함외교로 개항을 강요해 일본 최초의 개항장이 된
시모다(下田)항 바로 옆 인데, 백석은 이즈반도를 여행하고 시 를 남긴 것입니다."
"1930년 백석 은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 당선해 문단에 등단을 하는데 이것을 계기로 동향 출신의
조선일보 경영자 방응모의 장학금을 받아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되니 1930년 4월부터 1934년 3월
까지 도쿄 아오야마(靑山)학원 영어사범과 를 다닙니다. 백석의 본명은 백기행(白夔行)인데 일본의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 시를 좋아해 그의 이름 '석' 을 빼와 '白石' 을 필명으로 삼았습니다"
당시 말 1필이 5원이었는데 백석의 시집 "사슴" 이 거금인 2원 정도로 고가였으며 1936년 1월 100부
한정 판매를 하였는데.... 시인 윤동주 는 이 책을 구하지 못해 연희전문학교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이 시집을 베껴 썼고 필사본을 애지중지 해서 항상 가지고 다녔다 합니다.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 와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 을 살펴보면 윤동주가 백석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짐작할수 있습니다.
"위 시는 백석 이 일본 유학 시절 이즈반도를 여행하고 돌아와 쓴 작품이니 현재까지 남아
있는 백석의 글 중에 이즈반도를 소재로 쓴 것은 시 2편과 산문 1편 인데.... 기록만
가지고는 백석이 언제 무슨 이유로 이즈 반도를 여행했는지 구체적으로는 알기 힘듭니다.
시 '가키사키의 바다' 는 백석이 배편을 이용해 이즈 반도로 향했음을 간접적으로증명 합니다"
도쿄에서 이즈반도 로 가는 길은 기차편으로 가는 것이고 다른건 배를 타고 가는 것입니다.
아타미나 슈젠지등 기차를 타고 가야 도달할 수 있는 이즈반도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서 백석은 기선을 탔다고 여겨지는데, 배는 기차 보다 훨씬 낭만적이고
세련된 여행 으로 받아들여 졌으니...... 신문물의 상징인 대형 기선 을 타고
따뜻한 남국의 바닷가를 여행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인기있는 여행 코스 였습니다."
"시모다 에서 조금 떨어진 가키사키(枾崎) 해변은 작은 포구 마을 인데 바닷가 마을
사람들의 삶이 있는 곳이었으니 시에서 드러나듯 백석은 배창에 고기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포구와 가까운 방 에 묵는데..... 죽창에
고기를 꿰어서 말리는 집, 그 작은 집에서 백석은 아프고 연약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녯적본의 휘장마차에
어느메 촌중의 새새악시와도 함께 타고
머ㄴ바다가의 거리로 간다는데
금귤이 눌 한마을마을을 지나가며
싱싱한 금귤을 먹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 이즈노쿠니노미나토카이도(伊豆國湊街道) -
"이즈 반도 의 해안길을 마차를 타고 지나가는 모습이 그려지니 마차 안에서 백석은
금귤을 먹는데 금귤은 식민지 조선에서는 보기 힘든 과일 입니다. 일본의
남쪽 해안지대 에서나 볼 수 있는 과일로 이즈반도의 금귤은 겨울이 제철 이니
따라서 백석이 이즈반도를 여행한 계절이 겨울 이었음을 미루어 짐작 할 수 있습니다."
"백석은 왜 이즈반도로 여행 을 갔을까. 짐작에 불과하지만 그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이즈의 무희' 를 읽었을 것인데 1926년 발표된 '이즈의 무희' 는 십수년간
일본에서 선풍적 으로 읽히는 인기 소설이었으니..... 아오야마학원 학적부에
취미가 독서 라고 적혀 있는 백석이 '이즈의 무희' 를 읽었을 것으로 짐작 됩니다."
"겨울철이라 따듯한 남녘의 유혹 과 새롭게 등장한 기선여행의 낭만,
그리고 야스나리의 소설 '이즈의 무희'… 이런 것들이 유학생
백석의 발길을 이즈반도로 이끌지 않았을까 상상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근대에 들어 다시 이즈의 온천이 유명세 를 타게 된 것은.... 저명한 소설가인
나쓰메 소세키 가 건강이 악화되어 죽게 되었을때 여기 이즈의
슈젠지에서 요양중에 위독 상태에서 회복되는 바람에 매스컴 을 탔다고
하는데 나쓰메 소세키 (夏目漱石(하목수석)) 는 일본의 소설가 겸 영문학자 입니다."
"나쓰메 소세키는 동경제국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영국에 3년간 유학 하고는 교사로 있으면서
소설을 발표 하다가 아사히 신문 기자도 했다고 합니다. 그의 작풍은 당시 전성기에 있던
자연주의에 대하여 고답적, 관상적(觀賞的) 인 입장 이었다고 하는데 주요 저서로는 (두견)),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우미인초), (도련님), (산시로), (피안 지나기까지) 등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저런 회상을 하는 중에 이윽고 치쿠린노고마치 竹林の小道 라는 대나무 숲 에 도착하는데
2년 전에 교토 아라시야마 嵐山(풍산) 에 갔을때 덴류사 天竜寺(천룡사) 절 뒤편에
아라시야마 치쿠린 竹林 の小經(죽림노소경) 이라고 불리는 대나무숲을 보았던 느낌이
되살아 납니다. 대나무 숲 에는 숲 한 가운데 작은 마당에 대나무로 만든 평상 이놓여 있습니다.
누구 처럼 등을 대고 드러누우니 말 그대로 대나무숲 가운데 동그란 푸른 하늘 이 보입니다?
대나무 숲을 지나 올라가서 산책로를 걸어 강에 놓인 우아한 모습의 다리를 구경하고는
내려오다가 슈젠지 갤러리 를 지나 아카가에루 공원 을 구경하고는..... 도로변의 예쁜
가게들을 지나 좀 더 걸어 내려와서는 가마쿠라 막부 장군의 묘 에 올라가서 구경을 합니다.
시케츠덴 指月殿(지월전) 이라는 불전을 구경하는데 가마쿠라 막부 鎌倉幕府(겸창막부) 의 초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源賴朝 의 부인 호조 도키마사 가 아들을 죽인후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
이라네요? 그러고는 돌아서서 히에진자 日技神社(일지신사) 를 지나 히코노유 온천 에 이르는데
가마쿠라 막부 의 2대 쇼군 미나모토 요리이에 는 쇼군 재임 6년만에 여기 슈젠지에 유배 되어옵니다.
이 온천에서 외조부 호조 도키마사에게 목욕중 암살 되었으니 미나모토노 요리이에 (源頼家) 묘 옆에
13 사무라이의 묘 가 있는데 그는 가마쿠라 막부 2대 쇼군(將軍) 으로 초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의 아들 이며 어머니는 호조 마사코(北條政子) 로 아버지가 낙마 사고로 죽자 18세에 정이대장군이
됐는데 권력강화를 꾀하나 외척 호조씨와 막부 창업공신인 고케닌들이 13인의 합의제를 출범 시킵니다.
요리이에는 13인 합의제에 발목을 잡혔으니..... 즉위 3년때 병석에 눕자 동생 사네토모
(實朝)를 옹립해 권력을 잡으려는 외가 호조씨가 친 쇼군파인 히키(比企)씨에게
승리 하면서 그도 와병중에 쇼군직을 박탈당하고 이즈(伊豆)의 슈젠지(修禪寺) 에
유폐됐다가 1204년 외가 친척들인 호조 씨들에 의해 사사 되니..... 향년 23세 였습니다.
가마쿠라 막부는 요리이에의 친동생 사네토모를 옹립한 호조씨 들은 효조슈(評定衆)라는 고케닌
협의체 를조직해 의장 '싯켄(執權)' 자리를 세습해 실권을 쥐는데.... 장남을 죽여야 했던
호조 마사코가 네 손주들만은 절에 출가시켜 살려보려 했으나, 그들도 결국 주살되고
권력 투쟁 속에서 3대 쇼군 사네토모도 자식없이 암살 되니 미나모토씨 직계 는 대가 끊깁니다.
미나모토 요리이에의 어머니는 호조 마사코 로 아버지 요리토모가 다이라노 기요모리 에
의해 이즈에 유배됐던 시절 결혼 했으니 큰 모험을 한 것인데 그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 요리토모의 나이는 36세였고 다이라 씨들을 몰아내고 가마쿠라에 개선한지
3년만에....... 어렵게 얻은 첫 아들 로 태어나면서 부터 주위의 축복을 한몸에 받았습니다.
후계자가 절실했던 미나모토 요리토모 는 마사코의 순산 기원 목적으로 츠루가오카
하치만궁 (鶴岡八幡宮) 과 와카미야대로(若宮大路) 정비를 지시했고....
직접 감독하에 겐지의 유력 고케닌(御家人) 들이 손수 옮긴 흙과
돌로 원래 보다 한층 높여 큰 길을 닦을 정도로 집안 모두의 기대가 컸다고 합니다.
요리토모의 유모였던 히키노아마(比企尼)의 양자 요시카즈(能員) 가 대를 이어 요리이에의
유부(乳父) 로 선택됐고, 히키노아마의 둘째 딸(가와고에 시게요리의 아내) 과
카지와라 카게토키(梶原景時) 의 아내 외에도, 히키노아마의 셋째 딸(히라가
요시노부의 아내), 요시카즈의 아내 등 히키씨 집안 자체가 요리이에의 기반 이 됐습니다.
1193년 요리토모가 후지산에서 고케닌들과 사냥대회 를 열었는데, 12세 장남 요리이에
가 사슴을 쏴 첫사냥에 성공 하자 뛸듯이 기뻐 마사코에게 알렸으니..... 사슴
사냥이 단순한 의미를 넘어 '신이 후계자로 그를 간택했음' 을 부하들에게 각인시키는
정치적 함의 를 갖는데, 마사코는 여장부이기는 했지만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사슴 사냥때 일본 3대 복수극 중 하나로 유명한 소가 형제의 복수 (曾我兄弟の仇討ち)
사건으로.... 요리토모와 가마쿠라 본부와의 연락이 끊어진 사이 다이라씨
교토 조정 을 쳐부수는데 큰 전공을 세운 요리토모의 동생 미나모토노 노리요리
(源範頼) 가 형수에게 말 실수 를 해서는 모반 혐의로 사사로이 유배됐다 살해 됩니다.
1195년 요리토모 는 부인 마사코와 두 자녀인 요리이에ㆍ오오히메를 데리고 교토로
상경하니 어린 요리이에는 입궐하여 요리토모의 후계자 로서 선을 보였고,
2년 후인 16세에 성인 관례 를 올리고 종5위상(従五位上) 품계로 우근위권소장 에
임명됐는데.... 요리이에는 나이에 비해 우수한 무예 로도 그 이름을 알렸었다고 합니다.
1199년 1월 요리토모가 갑자기 서거 하니 요리이에는 제2대 가마쿠라도노 에 오르는데
나이 18세로 세력을 행사 하려하자... 막부 창업 공신 호조씨 등 고케닌들에 의한
13인의 합의제 가 설치되면서 요리이에의 직접 소송 판결이 금지 되자 이에 반발한
쇼군 요리이에는 젊은 측근 다섯명을 통해서만 자신을 알현하라고 명을 내리며 반발합니다.
반년 뒤인 10월, 선대 쇼군 때 부터 중용되고 있던 사무라이도코로(侍所) 장관 카지와라
카게토키가 갑자기 독대 를 청하는데 요리이에의 남동생 센만(千幡)을 옹립해
모반하려는 역도들이 포착 됐다며 고케닌 몇몇을 혐의자로 지목 하니 카게토키의
역모 고변이 새나가 역적으로 지목된 고케닌들이 연판장을 돌리는 등 미리 손을 씁니다.
그들은 곧바로 막부 공신 총 66명의 서명이 된 연판장 을 요리이에에게 제출 하고는 거꾸로
카게토키를 탄핵 하니 카게토키는 수사가 진행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확증을 제시
할수 있을리 만무했고, 뭐라 변명이라도 해보라는 요리이에에게 아무 대꾸도
못하고 근신에 들어간 후에 고케닌들의 압력에 굴복한 요리이에는 추방령 을 내립니다.
카게토키 일문이 암살 된후 1201년 정월부터 5월 까지는 가게토키의 부하였던 죠씨
(城氏)일족이 겐닌의 난(建仁の乱) 을 일으켰다가 곧 진압돼 요리이에의 권력은
더 유명무실 해 지며 병이 나자 신하들의 압박은 심해졌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남동생 사네토모의 지지자이자 자신의 숙부 아노 젠세이를 모반 혐의로 처형 합니다.
궁극적인 목표는 동생 사네토모를 찍어내는 것이었는데......... 어머니 호조 마사코가
한사코 막아서는 바람에 실패 했으며 7월 중순에 접어들자 병이 더욱 심해져
8월 말에는 혼수상태를 반복 하니 가마쿠라 막부의 고케닌 들은 "9월 1일
요리이에가 병사하여 동생 사네토모가 뒤를 잇는다" 라는 보고를 교토 조정에 올립니다.
홀로 고립된 요리이에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이 사건을 알았을 때는 이미 때는 늦었으니
격노한 그가 채 낫지 않은 몸을 일으켜 호조씨 토벌을 명했으나 이미 그를 따르는
가문은 없었으니.... 교토 조정(일왕, 천황)에서 가독 교체 및 직위 전임 윤허 가
떨어진 9월 7일 요리이에는 막부에서의 모든 지위를 잃고 호조씨가 실권 을 잡게 됩니다.
고케닌들의 기록인 “아즈마카가미”에는 "요리이에가 병으로 쓰러져 여섯살
맏이 이치만이 일본국 총슈고직 (日本國總守護) 과 간토 28개국의
총 치토우(總地頭) 를 맡고, 요리이에의 아우 센만(사네토모) 에게는
서일본 38개국의 총 치토우(總地頭) 자리를 준다는 교서가 발표됐다고 합니다.
히키 요시카즈가 센만(사네토모)과 호조씨 토벌을 기획했다" 는 기록이 있고, "병상의
요리이에와 히키 요시카즈가 호조 토벌 계획을 몰래 꾸미고 있었는데, 창호문
너머로 몰래 엿듣던 호조 마사코가 친동생 도키마사 에게 급히 알려 요시카즈를 불러
죽인뒤 히키 일족을 멸하고 난리통에 쇼군의 맏아들 이치만도 화재로 죽었다." 고 합니다.
“구칸쇼(愚管抄)”에는 요리이에 가 히코노유 온천에서 목욕을 하던중 습격을 받아 죽었다
는데 마사코가 아들 요리이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게 시게츠전(指月殿) 으로
에도 시대에 건립된 요리이에의 공양탑 등도 함께 있는데 그리워한 마을 주민들의
유지에 따라 '쇼군아이도-지죠-타루 (將軍愛童地藏尊)'가 세워져 기리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 시즈오카현 미시마시 슈젠지(修善寺) 온천 거리에서는 매년 7월마다
요리이에(賴家際) 마츠리 가 열리고 있으니 도쿄에서 신칸센(코다마)
시즈오카 방향으로 1시간을 타고 가다 미시마(三島)역 에서 다시
이즈 - 하코네 선 으로 갈아타고 30분 정도 가면 슈젠지(修善寺) 에 도착합니다.
요리이에의 네 아들은 모두 호조씨에 의해 죽었고 외동딸 다케노 고쇼(竹御所) 는 할머니 마사코가
손수 데려다 길렀으며, 사네토모의 사후 호조씨가 옹립한 4대 쇼군 후지와라노 요리쓰네의 정실
이 되었으나 출산 도중 난산으로 함께 죽었으니 미나모토 요리이에의 혈통은 완전히 단절 됐는데
호조씨 가 사위 미나모토의 어린 아이들 까지 모두 죽인 것은 처참한 살륙이고 인륜에 반한 것입니다.
하지만 정권을 잡은 타이라(平)씨가 미나모토씨 일가를 죽일때 인정으로 어린아이 셋을 살려 유배
시켰다가 후일 반란이 일어나서 타이라씨가 멸망 했던 것에서... 후환을 제거한 것 입니다!
미나모토 요리이에 축출은 호조씨 집안만의 음모가 아니라 막부를 세운 주축인 도고쿠(東國)
무사들의 쇼군 독재에 대해 축적된 불만 에 있었으니 이후 고케닌들 끼리 권력 투쟁 이 계속됩니다.
슈젠지온천 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는 슈젠지온천역 으로 돌아와 510엔에 표를 끊어 이즈철도
기차를 타고 미시미역 으로 돌아오는데.... 호텔이 자리한 역 북구에는 상가가 드문지라
다시 기차역을 통과해 역 남구 로 나가는데 JR 패스가 있으니 역을 들고 나기가 편한데
미시마역 남쪽으로 호수공원과 콘서트홀 이 있다지만 이미 밤이 되어 어두운지라 포기합니다.
그러고는 근처 식당 으로 들어가서는 우동을 한 그릇 한 후에 호텔로 돌아 옵니다.
내일은 기차를 타고 도쿄 로 가서는 도쿄역 코린로까에 배낭 을 넣고 도쿄
시내 우에노등 다섯군데 공원에서 벚꽃을 구경 하고는..... 다시 기차를
타고 일본의 4대 온천 이라는 군마현에 자리한 쿠사츠 온천 으로 갈 생각 입니다.
첫댓글 시인 백석님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시인 윤동주 백석님의 사슴을 한정판이라서 못 구해서
빼겨서 늘 가지고 계셧다는게 얼마나 감흥을 받앗으면
대단한 시인듯합니다.
허선생님 설 명절 가족분들과 행복하게 잘 보내십시요.
그러고 보니 설 연휴가 시작됐군요?
임인년 새해에도 건강하고
보람있는 한 해가 되길 기원합니다.
네 고맙습니다.
허선생님댁도 항상 건강하시고 행운이 가득하시길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