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시작하면서
옛일을 돌이킴은 대개 우울하거나 쓸쓸한 일이다. 화사하고 빛나는 날들의 회고가 한줄기 빛처럼 환하기도 하지만, 빛바랜 추억의 자태가 회한을 자아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묵연(黙然)히 지난날을 반추함은 거기 담긴 시공간과 인과율을 더듬어 오늘을 헤아릴 요량일 터. 과거에는 현재를 구성하는 연기(緣起)의 근본이 담겨 있는 때문이다.
1959년 출간된 이범선(1920-1982)의 단편소설 <오발탄>을 동명 (同名) 영화로 만든 이는 당대제일의 감독 유현목(1925-2009)이었다. 두 사람 모두 월남자(越南者)로 이범선은 평안도 신안주 출신이고, 유현목은 황해도 사리원이 고향이다. 약빠른 독자는 짐작하고 있겠지만, <오발탄>은 고향을 버리고 월남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1961년 4월 개봉된 <오발탄>은 관객들의 호응을 받지 못했으며, 곧이어 들어선 군사정권은 영화 상영을 금지한다. 심각한 사회문제를 가감 없이 그려낸 감독의 문제의식에 반감을 가진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오발탄>은 1963년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 출품됨으로써 한숨을 돌리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필름은 영화제 출품작을 손본 것이다.
확장된 인간관계
원작 소설에서 우리는 여섯 명의 가족을 만난다. 가장인 철호와 아내, 다섯 살배기 딸, 실성한 노모, 남동생 영호와 여동생 명숙이다. 그런데 유현목은 여기에 신문팔이로 고학하는 막내 민호를 등장시킨다. 민호의 동선은 영호와 근접하며, 그들 사이의 갈등과 대화는 전체사건의 흐름과 아무 연관도 없다. 민호는 빈곤을 강조하는 소품처럼 보인다.
감독은 여기 멈추지 않고 영호와 명숙을 둘러싼 인간관계 확장을 시도한다. 그것은 소설에 부재하는 멜로드라마의 요소를 강화함으로써 객석의 흥미고양을 목적한다. 예컨대 영호는 영화배우 미리와 연인관계지만, 군복무 중 알게 된 간호사 설희와 관계한다. 또한 영호의 친구이자 상이용사인 경식은 명숙과 장래를 약속한 사이다.
여기 추가되는 것이 설희를 애면글면 사랑하는 무명의 열렬 시인이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설희 집을 찾아오며 한 맺힌 얼굴과 원망어린 눈빛으로 설희와 영호를 직시한다. 인과성도 설득력도 없는 영호의 이중적인 삼각관계는 원작 <오발탄>의 의도 상실을 결과한다. 그것은 가난에 찌든 철호 일가의 반듯한 입성처럼 관객의 몰입을 저하시킨다.
영호와 소영웅주의
제대한 이후 2년 넘도록 실직상태인 영호는 아직도 새파랗게 기가 살아있다. 무일푼이지만 그는 카페에서 친구들과 만나고, 거기서 술과 양담배와 치기어린 담화로 자위(自慰)한다. 그는 언제나 자신만만하며, 때로는 폭력적이기도 하다. 막내 동생 민호가 돌리는 신문을 발기발기 찢어버리는 영호의 가학성은 민호의 닭똥 같은 눈물과 대립한다.
그는 친구들을 인솔하는 보스 격이며, 영화의 사변적(思辨的)인 성격을 완수하는 인물이다. 양심, 윤리, 관습, 법률 같은 덕목이나 가치를 파기하고자 하는 그는 열에 들뜬 철부지이기도 하다. 영호는 미리가 제안한 영화의 주연배우 자리마저 거부한다. 뱃속에 박힌 총탄을 그런 일자리에 팔아먹을 수 없다는 도고한 자존심의 소유자 영호.
하지만 그에게는 현재의 절박한 가난이나, 미리와 함께할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어떤 방도도 없다. 도무지 얻을 수도 꿈꿀 수도 없는 거액을 위해 그는 거사를 준비한다. 설희와 영호의 관계는 이런 음모를 위한 예비 작업으로 드러난다. 흥미로운 점은 영호의 행동이 불러오는 신파적인 결말이다. 경찰차에 동승하여 자수를 권고하는 미리를 떠올리시라!
양공주 명숙과 실성한 모친
명숙은 대체 무슨 이유로 양공주가 되었을까, 생각한다. 경식의 오랜 애인이자, 소박한 결혼의 꿈을 가진 여인 명숙. 그녀는 경식에게 말한다. “정안수 떠놓고 오늘이라도 결혼해요!” 이토록 순박한 여인 명숙이 창녀의 길을 걸어야 하는 이유를 감독은 말해주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영호의 넋두리를 통해서 그녀가 창녀가 되었음을 확인할 따름이다.
사랑하는 남자를 기다리다 지쳐 홧김에 몸을 팔게 되었는지, 아니면 빈곤한 살림살이를 돕기 위한 것인지는 오롯 관객의 판단 몫이다. 이런 명숙과 나란히 자리하는 모친.
그녀는 언제나처럼 “가자, 가자!” 하고 외친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가 내뱉는 대사는 그것뿐이다. 어디로 어떻게 왜 가자고 외치는지 알기란 어려운 일이다. 감독은 이 장면에서 침묵한다. 하기야 제한된 시공간을 활용하는 예술매체로서 영화의 제약은 이해 가능하다. 그렇지만 <오발탄>의 출발점이 본디 월남이었음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철호의 과부하와 중력상실
영화 <오발탄>은 영호의 종횡무진 활약상으로 사건진행 과정에서 주인공 자리가 철호에서 영호로 급속도로 이동한다. 아마도 이것이 원작과 영화의 큰 차이점일 것이다.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이자 소영웅주의에 사로잡힌 사상가이자 행동가 영호의 존재부각은 압권이다. 이에 비해서 소설의 주인공 철호의 존재는 미미하기 짝이 없다.
아주 작은 회사의 서기이자 계리사로 일하면서 온갖 궁핍과 궁상을 연출하는 철호. 나일론 양말 한 켤레 사지 못해 언제나 구멍 난 무명양말을 신고 다니는 철호. 치통으로 고통 받으면서도 치료하지 못하는 철호. 점심을 굶고 보리차로 속을 달래는 철호. 전차요금이 없어서 곧잘 걸어 다녀야 하는 곤궁한 가장 철호.
하지만 영화 끄트머리 10여 분은 철호의 시공간으로 도배된다. 영호의 권총강도 행각과 검거, 아내의 난산과 사망, 어금니 두 개의 발치에 따른 대량출혈을 확인하고 몸소 경험하는 철호. 갈 곳 없이 방황하는 택시 승객이 된 그를 운전수는 급기야 ‘오발탄’이라 부른다. 이 지점에서야 비로소 철호에게 부여되는 주인공의 하중은 지나치게 무거워 보인다.
이런 연유로 그의 독백은 인생의 낙오자가 내뱉는 허무한 넋두리처럼 들린다.
“아들구실, 남편구실, 애비구실, 형구실, 오빠구실, 계리사 사무실 서기구실, 해야 할 구실이 너무 많구나. 네 말대로 난 조물주의 오발탄일지도 모른다. 정말 갈 곳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그는 실성한 노모처럼 외친다. “가자, 가자!” 그렇게 택시는 밤길을 질주한다.
영화에 그려진 1960년대 풍속도
유현목의 영화 <오발탄>은 우리의 지난날을 맨살 그대로 보여준다. 서울거리에 넘쳐났던 그 많은 ‘스탠드빠’와 철호가 들어간 설렁탕집 식단은 정겹기까지 하다. ‘기계국수, 복끔국수, 게란덥밥’. 택시에 조수가 운전사 옆자리에 동승하여 행선지를 묻고 요금을 계산하는 60년대 풍경은 또 얼마나 새롭고 흥미로운가?!
해방촌 미군기지 부근에 자리한 ‘스탠드빠’를 중심으로 부나비처럼 떠돌던 허다한 양공주들의 흐느적거리는 몸짓은 적잖게 우울하다. 사건사고를 신속하게 알려주던 신문호외를 배달하던 그 많던 소년들은 어디로 갔을까! 잘못 발사된 탄환, 오발탄처럼 지난 세기 60년대를 이리저리 부유했을 수많은 ‘철호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영화 <오발탄>은 아쉽다. 이범선은 찢어지게 가난했던 질곡의 1950년대 말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독자는 그들이 얼마나 가난하고 희망이 없으며, 출구 없는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잘 안다. 그러나 유현목은 등잔 대신 백열전구를 보여주고, 짝짝이로 꿰매진 아내의 남루한 바지나 철호 와이셔츠를 잘라만든 딸의 치마를 가려버린다. 명숙의 뚫린 스타킹을 보고 그녀와 화해하려는 철호의 내면풍경을 헤아리지 못한다. 이런 것이 마음에 걸린다.
그렇게 우리는 가난과 우울과 슬픔이 교차하는 60년대를 건너왔다. 하지만 사랑 하나에 목숨을 걸고 동반자살까지 꾀하는 맹목과 충동의 시인이 거리를 떠돌고, 의리와 순정을 중시했던 60년대였다. 21세기 물질적 풍요가 불러일으키는 현란하고 요란한 행복과 만족의 착시는 비단 나만의 생각인지, 그것이 궁금한 시각이다. 그러하되, 가자,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