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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인중고등학교총동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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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 늬우스◈ 스크랩 1907년 국채보상운동과 정미의병, 그리고 관인면
고리아이 추천 0 조회 40 11.03.01 09:47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1905년 을사늑약 전후로 재차 발흥한 의병은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전국화한다. 그런데, 고향 관인에도 이들의 활동이 보이고 있다. 곧, 용담 사금채취장을 중심으로 하여 의병이 활동하여 사금채취장이 습격을 당하였다는 보고가 보이고 있다. 그런데, 1998년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와 포천군이 펴낸 ≪포천군의 역사와 문화≫(59∼62쪽)와 독립기념관 사적지보고서(http://815book.co.kr/sajuk/#list)에서 이와 관련한 자료가 보이지 않고 있으며, 용담 사금채취장의 정확한 위치도 파악되지 않고 있다. 마침 오늘이 3.1절 72주년을 맞아 관인과 인연을 맺은 이들에게 자그마한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정리해 보았다.

이에 앞서 ≪황성신문≫에는 일본의 경제침략에서 벗어나려는 항일 애국운동인 1907년 2월 대구에서 비롯한 국채보상운동에 관인면 중리에 사는 분들이 모금한 사실을 전하고 있는데 사고(社告) 형태로 전하고 있는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漣川郡官仁面中里

姜冕馨 二? 李允秀 張應顯 各一환 姜奎馨 七十五錢 鄭당 鄭鎔 林柄憲 金榮洵 各五拾錢 리 圭哲 四拾錢 任冕準 김 仁植 金靑龍 各?錢 리 鍾德 李應成 各二拾五錢 李鍾萬 金鳳龍 安致植 朴돌 釗 鄭錫 졍 泰漢 申大連 林永吉 各二拾錢 林學鍊 張應魯 各十五錢 李邦寧 文永信 崔萬興 鄭七星 姜元行 리 鳳錫 리 光練 各拾錢 合 新貨 拾一?拾五錢[≪皇城新聞≫ 1907년 6월 5일(大韓光武十一年 六月 五日 水曜) 社告: 國債報償義務金集送人員及額數]

 

대한 광무 11년(1907) 6월 5일자로 발간된 ≪황성신문≫의 <국채보상의무금집송인원급액수>라는 제목으로 된 이 사고에는 강면형(姜冕馨)을 비롯한 31명의 중리 주민이 모두 11환 15전을 국채보상기금으로 모아내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와 매국단체 일진회의 방해로 그 열기가 오래 가지 못한 것(김한종 외 2003 ≪고등학교 한국 근ㆍ현대사≫, 금성출판사, 111쪽)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황성신문≫에서는 1909년 9월 25일자까지 보이고 있다.

 

◇ ≪황성신문≫에 보이는 관인면 중리민들의 국채보상기금 모금 내역

_국립중앙도서관 전자도서관에서 얻음

 

이렇게 전국적으로 퍼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이들은 평민과 천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의병운동의 대열에도 참여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김한종 2003, 윗 책, 114쪽). 그러면 앞서 밝힌 이른바 정미의병의 ‘용담 사금채취장 습격사건’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가> 2月 19日 漣川郡 官仁面 龍澤 砂金採取場에 暴徒 30餘名이 來襲하여 同地 在留 日本人 4名 中 1名이 被殺 1名 行方不明 2名은 其難을 免하였다고 하는 報告에 接하고 目下 調査中…(중략)…[3月 2日字] 一. 2月 19日 暴徒 30餘名은 漣川郡 官仁面 龍澤 砂金採取場에 襲來하여 日本人 1名은 殺害되고 他는 無事하였다는 報告가 있다. 目下 搜索中.[≪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0(의병편Ⅲ)≫ 4. 융희 2년(1908), (1) 3월, 경기도, 개성경찰서장 보고(2월 29일자), 원문은 모두 한자로 숫자만 바꾸었다(아래도 같다).]

<나> 京城憲兵分隊 鐵原分遣所의 報告에 依하면 4月 19日 午前2時 賊徒 100餘名이 漣川郡 官仁面 龍潭砂金鑛 所在地에 襲來하여 同 鑛事務所에 放火하였으나 事務員 坑夫 等이 協力 戰鬪 約 2時間에 이를 擊退하였다. 同所 憲兵 下士 以下 5名이 現場에 急行하였으나 賊은 이미 同郡 南山 冷泉里 方向으로 逃走하여 그 踪跡을 得치 못하였다.[≪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0(의병편Ⅲ)≫ 4. 융희 2년(1908), (2) 4月, 경상도, 통보 발송자(韓國駐箚憲兵隊長 明石元二?) 수신자(警務局長 松井茂)]

 

사료 <가>는 1908년 2월 19일 개성경찰서장 마루야마 시게토시(丸山重俊, 1855∼1911)가 내부 경무국장 마쓰이 시게루(松井茂, 1866∼1945)에게 보낸 공문 가운데, 관인면 용택 사금채취장에 의병(‘폭도’라고 되어 있지만) 30여명이 공격한 사실을 전하고 있고, 사료 <나>는 두 달 뒤 한국주차헌병대장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 1864∼1919)가 마쓰이 시게루에게 보낸 공문으로 관인면 용담 사금광에 의병(‘적도’라고 되어 있지만) 100여명이 공격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 사료 <가>에는 ‘용택(龍澤)’, 사료 <나>에는 ‘용담(龍潭)’으로 되어 있는데, 사료 <가>의 오기(誤記)라 여겨진다.

 

<다> 賊徒 夜襲의 目的으로써 4月 22日 上等兵 5名을 引率하고 京城憲兵分隊 鐵原分遣所를 出發한 大田 憲兵大尉는 漣川郡 官仁面 後洞(鐵原邑의 東南 約 三里)에 至하여 賊徒 約 60名이 間道로부터 鐵原을 向하여 急進하였다는 情報를 得하고 因하여 徹宵 追跡 翌 23日 午前11時30分 鐵原郡 乫末面 沿洞 西方 山中에서 此에 追及하였다. 當時 賊은 山中에서 休?하고 있었으나 我隊가 約 5,6百미터에 近接하자 少毫도 應戰함이 없어 潰亂四走하였다. 我側은 直時 追擊 그 2를 ?하고 午後2時에 至하여 全然 그 隻影을 認定할 수 없었다. 鹵獲品 火繩銃 1 背負袋 2 負傷者 未詳, 我에 損害없다. 憲兵隊長(4月 29日) 4月 20日 鐵原分遣所를 出發한 上等兵 5名은 漣川郡 官仁面에서 賊 約 60名을 追跡하여 23日 同郡 乫末面 沿洞 西方에서 追及 潰亂시켰다. 追擊 그 2名을 ?하였다.[≪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0(의병편Ⅲ)≫ 4. 융희 2年(1908), (2) 4월, 경기도, 통보 발송자(韓國駐箚憲兵隊長 明石元二?) 수신자(警務局長 松井茂)]

 

사료 <다>는 바로 사료 <나>의 이튿날과 나흘 뒤인 22일 또 다시 관인면에 의병 60명가량이 나타나 접전할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의병 모두 갈말면 연동 방면으로 후퇴한 것으로 보아 이들도 용담사금채취장을 습격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용담 소재 사금채취장은 ≪황성신문≫에 따르면, 1906년 12월 농상공부(農商工部)가 광업규칙(鑛業規則)에 따라 일본인 기무라 우이치(木村宇一)에게 허가한 것으로 당시 채취장 면적이 46,812평에 이르고 있고(≪황성신문≫ 광무 10년 12월 21일자), 1908년에 이르러서는 25,625평이 더 확대되었다. 이는 용담사금채취장 광업권자(鑛業權者) 기무라 우이치로(木村宇一郞, ≪황성신문≫에는 ‘郞’자가 없다.)가 경성이사청(京城理事廳)에 낸 <연천사금광 폭동손해진정서 동 견적서 급 일기발췌서(漣川砂金鑛 暴動損害陳情書 同 見積書 及 日記拔萃書: ‘발췌서’로 줄임.)>(≪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6(의병편Ⅸ) 補遺篇≫)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발췌서’에는 의병들의 공격 내용이 자세한데 이는 다음 기회에 살피기로 하겠다. 해를 넘겨 1909년에도 관인면 일대에서는 의병들의 활동이 보이고 있다.

 

<라> 本月 7日 午前11時 金化守備隊에서 派遣한 特務曹長 以下 16名의 討伐隊는 永平郡邑 北方 1里의 곳에서 約 50名의 暴徒와 마주쳐 交戰 約 1時間後 漣川郡 官仁面 上下里 方向으로 退却시켰다. 그리고 此戰鬪에서 賊 1名을 ?하였다.[≪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의병편Ⅵ)≫ 7. 융희 3년(1909) (1) 1月, 京畿道 暴徒의 件 報告 발송자(開城警察署長 警部 楠本茂作) 수신자(內部 警務局長 松井茂)]

<마> 6日 右斬殺當한 것은 暴徒가 아니고 鐵原邑에 一定한 住居가 있는 金知善(金之仙이라고도 한다)이란 者라는 風說이 있어 密告者 金成大를 同地駐在所에 招致하고 取調하였던바 金知善은 暴徒와 氣脈을 通하고 每樣 軍隊의 行動을 偵察하고 或은 其步撥을 하고 있는 者로서 現在 彼와 行動을 共히 한 者가 漣川郡 官仁面 新興洞에 있다고 申告하므로 此의 實否調査를 爲하여 同月 12日 午後七時 守備隊長과 協議後 下士 以下 3名과 共히 金成大를 案內로 出張途中 金成大는 發病하여 步行이 困難할 뿐만 아니라 刻刻 中態에 陷하므로써 不得已 一行은 引返하고 同人實弟에게 命하여 治療케 하였던바 끝내 其夜 死亡하였다.[≪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의병편Ⅵ)≫ 7. 융희 3년(1909) (1) 1月, 江原道 暴徒에 關한 件 발송자(金城警察署長 警部 相澤謙平) 수신자(警務局長 松井茂)]

<바> 또 2月 22日 鐵原郡 葛末面 及 漣川郡 官仁面 附近에 暴徒 4ㆍ50名이 徘徊하였다는 事를 聞知하고 進하여 安峽郡에 入하여 邑內外의 狀況을 視察한 바 同地는 從來 暴徒가 來襲하려 한다는 情報가 屢至하였으나 全然 杞憂者의 訛傳으로 同地의 地勢 及 周圍에 있어서의 守備隊 憲兵隊의 駐屯上 容易히 暴徒가 襲擊할 수 없는 地點으로 또한 偶然히 少數의 暴徒가 同地를 通過한 일이 있을 뿐[≪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의병편Ⅵ)≫ 7. 융희 3년(1909) (3) 3月, 江原道 발송자(江原道警察部長 警視 坂東榮次郞) 수신자(內部 警務局長 松井茂)]

 

위 사료는 모두 1909년 1월부터 2월 사이에 관인면 부근에서 활동한 의병들의 소식을 전해주고 있는데, 이때에 이르러 의병들의 활동은 1908년의 용담사금채취장과 같은 목적 지향적인 전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위축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럼에도 1910년에도 의병들은 여전히 관인면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다.

 

<사> 漣川分遣所에서 派遣한 上等兵 1名과 補助員 3名의 1隊는 漣川郡 官仁面 新興洞에서 賊 2名을 逮捕한 바 이들은 延起羽의 部下라고 함.[≪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8(의병편XI)≫ 융희 4년(1910) (1) 4月, 江原道 暴徒討伐에 關한 件(憲兵聯合討伐의 結果) 발송자(鐵原警察署長 警部 高橋文次?) 수신자(內部 警務局長 松井茂)]

 

의병 두 명이 관인면 신흥동(현 중리)에서 체포되었는데, 그들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은 채, 의병대장 연기우(延起羽, ?∼1914. 한말의 의병장. 일명 봉렬(奉烈)·기호(基浩). 경기도 삭녕출신. 강화진위대부교(江華鎭衛隊副校)를 지냄.)의 부하로 알려졌다. 한편, ≪포천군의 역사와 문화≫(61쪽 표)에는 1997년에 포천군에 펴낸 ≪포천군지≫의 내용을 토대로 관인면 남창(南倉) 출신 의병 진성교(秦成敎)가 의병장 박기복(朴基福) 부대에 소속하고 있음을 유일하게 전하고 있다. 일단 여기에서는 관인면에서의 국채보상운동모금과 의병활동 사실을 전함으로써 역사적 의의를 대신하고자 한다. 다만, 여기서 미처 살피지 못한 내용은 뒷날 꼭 보탤 것을 약속드리면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어제 평화재향군인회로부터 ‘한일군사협정체결반대’를 위한 모임 문자를 받아 시절이 뒤숭숭할 때, 다시 한 번 “대한독립만세”를 외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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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03.01 21:40

    첫댓글 좋은공부가 되었습니다. 역시 중리가 물좋은 동네군요

  • 작성자 11.03.03 06:41

    어찌 물만 좋을런지영
    꾸우벅 고맙습니다영 많은 도움을 바라겠습니다영^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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