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인혜의 책읽기 24 / 황량한 들판에 서서 / 최진석 《인간이 그리는 무늬》

[류인혜]

연재수필 /  《문학시대》 류인혜의 책읽기 24 / 2024년 신년호

황량한 들판에 서서

-최진석, 《인간이 그리는 무늬》, 소나무, 2014.

류인혜

집을 탐구하는 프로그램을 가끔 본다. 무심히 켠 텔레비전에 나타난 사람은 철학자 최진석 선생이다. 유능한 건축주가 되어 자신이 지어 놓은 집을 이야기한다. 지혜로운 삶에 필요한 인문학을 얘기하는 철학자답게 주거의 좋은 환경을 이루고 있다. 나는 당신을 알고 있다는 반가움에 연예인을 보듯 흥미롭다.

내친김에 최진석 선생의 《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서가에서 뽑아 들었다.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느라 여러 번 읽은 책인데, 새롭게 읽는 듯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이미 한 편의 독후감을 썼지만, 이번에는 다른 시선으로 정리한다.

철학자 쓴 인문학 이야기인 이 책은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철학적으로 해석해서 높은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라는 지침을 준다. 부제로 <욕망하는 인문적 통찰의 힘>이다. ‘욕망’, ‘인문’, ‘통찰’, ‘힘’이라는 네 단어의 확장되어가는 느낌에서 책 내용의 철학적 사유를 짐작하게 한다.

최진석 선생은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로 1959년 전남 신안의 하의도에서 태어났다. 모든 면에서 완숙한 인생의 길을 걸을 수 있는 나이이다. 사단법인 ‘새말새몸짓’ 이사장이다. 서강대학교 철학과에서 학부와 석사 과정을 마치고 중국 헤이룽강대학교를 거쳐 북경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탁월한 사유의 시선》, 《경계에 흐르다》,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도덕경》, 최진석의 노장 철학 독법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등이 있다.

인문학이란 단어를 모두 좋아한다. 그 정도는 이해해야지만 완벽한 현대인이 되는 느낌이다. 이 책을 만난 것이 책을 열심히 읽는 사람으로 보람된 노릇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저리 모아놓은 자료들을 질서정연하게 줄을 지을 수 있는 기준을 얻었기 때문이다. 옳은 것이 이것인가, 저것인가 줏대 없이 흐트러지려는 정신을 바로잡아 단속할 수도 있다.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가, 그 내용으로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는 항상 책을 읽을 때마다 갖는 기준이 된다.

평소의 버릇대로 목차에서부터 관심을 가진다. 책 전체를 파악할 수 있다.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인문학적 통찰이라는 과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지, 인문학적인 정신으로 살아가려면 어떤 상황에 도달해야 하는지, 내가 지금 바라보는 시선이 정당한 방향인지를 알고 싶은 욕망을 가졌는가. 넉 장으로 나눈 인문의 숲 입구에서 망설인다. 지금까지 접해 보지 못한 생소한 풍경이다.

첫 번째 인문의 숲

인문적 통찰을 통한 독립적 주체되기

두 번째 인문의 숲

인간이 그리는 무늬와 마주 서기

세 번째 인문의 숲

명사에서 벗어나 동사로 존재하라

네 번째 인문의 숲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서문을 자세히 읽었다. 저자는 긴 서문에서 사람 말한다. 일단 인문학적인 사고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람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는 것을 이해한다. 어떤 성향의 사람들을 내 곁으로 끌어당길 것인가와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가는 중요한 과제다.

저자가 말하는 사람의 처지와 내면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그들에게 저자만큼 관심을 가지고 싶다. 나는 지금 어떤 사람을 보고 있는가, 저기, 내게 걸어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인가. 저자가 주시하는 스물두 유형의 사람에게 가깝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들을 가까이 당겨본다. 한 사람씩 그 상황을 적어가며 각각의 사람됨의 특성이 나의 의식에도 적응되는지 알고 싶어진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어려웠던 일이 사람들과의 교류였다. 만나서 내 속을 여과 없이 들어내 보이며 친하게 지나다가 깊은 후회를 지닌 채 헤어진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이 무섭다는 충고가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지만, 다시 다른 성향의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견디며 정신이 성장해왔다.

어느 때는 깊은 상처를 받은 후 사람들과의 관계 형성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 심각한 고민을 하기도 했다. 이 책을 읽으며 다른 사람도, 철학자가 제시하는 유형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고민할 것이라는 점에서 위로를 받았다.

저자가 말하는 저기서 걸어오는 첫 번째 사람은 “측량도 안 된 황량한 들판에 서서 땅과 자신의 관계를 근본적인 차원에서 다시 고민하는 우직한 자”이다.

여덟 번째 사람은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고 참을 수 있는 자”이며, 다음은 “들은 말을 여기저기 옮기지 않을 수 있는 자”이다. 인간에게 말이란 어떤 내용으로 존재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말하지 않는 것도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가린다.’라는 속담이 무색하다.

살아오면서 얼마나 쓸데없이 많은 말을 흘리고 다녔던지, 어떤 때는 그 말들이 돌아서 올무가 되기도 한다. 말하고 나면 잊어버리는 습관이기에 누군가 “네가 전에 이런 말을 했어”라는 것이 가장 혼란스럽다. 기억이 나지 않아서 책임을 질 수 없는 말의 남용은 자신을 부끄럽게 한다.

저자가 열일곱 번째로 주목하는 사람은 “이성으로 욕망을 관리하지 않고 오히려 이성을 욕망의 지배 아래 둘 수 있는 자”인데 좀 어렵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무섭기 때문이다. 마지막 스물두 번째 사람은 “편안한 어느 한 편을 선택하기보다 경계에 서서 불안을 감당할 수 있는 자”라고 한다. 이 주장이야말로 가장 철학적인 결론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람 중에서 나와 가장 친해질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이 모든 항목에 합당한 단 한 사람이 있는가, 아니면 서너 사람으로 확대될 것인지, 누구에게 당신은 어떤 사람인지 물어볼 수도 없다. 아니면 구체적인 대상이 아니라 저자의 정신세계에서만 활동하는 사람일 것이다. 쉽게 말해서 마음에 근본적인 도덕심과 선량함이 있어야만 가능한 ‘자’들이다.

사람다운 삶을 이루어가고 싶은 길에서 만나는 사람 가운데, 완벽하게 선량한 사람은 없다. 선량함에 대한 기대는 일찌감치 접는다.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자신마저 통재하기 어려운 어두움의 실체는 상상하기 어렵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상반된 인성에 그럴 수 있다며 공감하지 아니하였던가. 저자가 기대하는 ‘자’는 이상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인간상이라고 이해해두는 것이 편하다. 이렇게 단정하고 나니 슬퍼진다.

인간이 그리는 무늬! 인문학의 완성은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일에 대한 긍정의 기운을 갖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긍정의 기운은 인간의 원초적인 슬픔을 상세 시킨다. 우리는 어떤 무늬를 그리고 있는가, 어떤 무늬로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가. 무늬는 바탕에 그려지는 것이다. 인성의 바탕이 어떠해야 어울리는 무늬를 그릴 수 있는가, 책을 읽으며 깊이 성찰할 수 있다.

얼마 전까지 수필잡지 《좋은수필》에 ‘최진석의 철학에세이’ 《인간이 그리는 무늬》 가 39회 동안 나누어 연재되었다. 일반으로는 연재 글이 먼저 나간 후 모여서 책으로 엮어지는데 이 경우는 반대이다. 책의 내용을 연재해준 덕분에 건성으로 지나간 부분도 있지만, 책을 다시 읽을 기회가 되었다.

마지막 글(2023년 4월호)의 제목이 <이성에서 욕망으로, 보편에서 개별로 회귀하라>이다. 저자는 이 글에서 “인문학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 인간의 결 혹은 인간이 움직이는 동선을 파악하는 학문”이라고 다시 강조한다. 그 “무늬와 동선을 일거에 알아채는 능력을 통찰”이라 정리한다.

“인문적 통찰은 우리 앞에 등장하는 사태나 사건을 인간이 그리는 무늬 위에다가 올려놓고 볼 수 있는 능력”인데 “보고 싶은 대로 보거나 봐야 하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이다.

필자는 다행히 ‘보이는 대로 보는’ 훈련을 해왔다. 이면에 숨긴 다른 것이 있는가, 생각하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그대로 믿었다. 저자의 말대로 이미 개별의 삶을 사는 것이다. 모든 사물의 본질 그대로 보기를 원했었다. 보고 있는 것이 정답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다. 그런데 보이는 대로 보는 그 능력이 어디에서 오는가?

철학자는 일반적인 사고를 뛰어넘는다. “종합적이며 근본적이며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능력”에서 오는데 이 “통합적인 힘이 욕망”이다. “자신에게만 있는 비밀스러운 충동”이며, 이 “충동의 충격에 의해 자신이 비로소 자신이 된다.”라고 정리했다. “보편과 집단과 이념에서 벗어나 개별적 자아의 욕망을 회복”하여 “오직 자신에게로 돌아가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에 집중하라!”라며 저서의 마지막 글이자 연재 글을 마쳤다. 필자의 책 읽기는 독후감이거나 책을 소개하는 것이기에 조금씩이라도 인용이 필요하다. 글을 쓰는데 저작권에 상관없이 자유롭기를 바라고 있다.

비로소 지금까지 필자가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의 시선이 아닌 자신의 주장(욕망)에 집중하여 모든 것의 결과에 책임을 지려고 애썼던 이유를 알아챌 수 있게 되었다. 책임감으로 무거울 때가 많았지만, 철학자가 주장하는 인문학적 삶을 살고 있다는 자존감에 부듯해지고 있다.

《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읽은 후 나에게 묻는다.

나에게는 이성을 지배할 어떤 욕망이 있는가, 내가 성취하고 싶은 욕망을 체계적인 계획 속으로 밀어 넣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저자는 “욕망은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라고 한다.

내가 나를 책임지며 욕망을 지배하여 내 인생을 경작하는 힘! 그 일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서 있는 땅의 갈무리를 잘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첫 번째 사람, “측량도 안 된 황량한 들판에 서서 땅과 자신의 관계를 근본적인 차원에서 다시 고민하는 우직한 자”를 마음에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