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보리밭의 꿈
고교 친구 셋이서 전북 고창에 있는 청보리밭을 찾았다. 오월의 생명력이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드넓은 청보리밭 물결이 넘실댄다. 백합나무 가로수 길이 산책로의 분위기와 함께 보리밭과 유채꽃이 어울려 해마다 이 맘 때면 엄청난 관광객들의 발길이 멈추지 않는다.
보리밭 사잇길을 걷는 것보다 편리함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이 대형 트랙터로 개조한 탈 것을 이용하여 농장을 한 바퀴 둘러보고 있다. 농장이 워낙 넓어서 자칫 잘못하면 길을 잃어버릴 것 같다. 보리밭의 푸른 물결과 유채꽃의 샛노란 물결이 한 폭의 수채화로 관광객의 눈을 호강시킨다. 내가 좋아하는 가곡인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나를 멈춘다/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라는 보리밭 주제곡처럼 스피커에서 감미롭게 흘러나온다. 보리 이삭이 벌써 패어 나 까실까실한 수염이 날카롭게 뻗혀 한 달 뒤면 누렇게 익어 가리라. 길가에 피어난 하얀 쌀밥 같은 꽃이 ‘이팝나무’로 여겨질 만큼 식량이 부족한 시절에 ‘보릿고개’란 말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나의 소년시절에 세끼 밥은커녕 한 끼의 보리밥도 힘들었다. 주어진 끼니를 하루하루 이어 가는 게 얼마나 어려웠는지 요즘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말해 주면 전혀 귀 기울여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나병 환자이었던 한하운 시인의 ‘보리피리’란 시가 생각나서 친구들과 보리대궁을 뽑아 피리를 만들어 불어 봤다.
보리피리 불며/ 봄언덕 / 고향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 꽃청산 / 어릴 때 그리워 /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 방랑의 기산하 / 눈물의 언덕을 / 피ㄹ 닐니리
언덕 위를 불어오는 바람결에 보리밭 군락이 온통 춤사위에 빠져든다. 보리 낟알이 영글어 가는 꿈이 수런수런 거린다. 풋풋한 젊음. 억제할 수 없는 내면의 열정이 파도가 된다. 마구 흔들리는 물결 속에 나도 풍덩 뛰어들어 함께 휩쓸려 가고 싶다. 고희에 이른 친구들은 저마다 어린 시절의 청보리밭을 그리워하며 한 장의 사진을 남기려 포즈를 잡는다.
보리 이삭들의 날카로운 수염들이 죽창이나 곡괭이, 쇠스랑 같은 찌르는 도구나 농기구를 연상케 한다. 서민들은 무자비한 세금에 시달리며 배를 곯아야 한다. 고부 군수인 조병갑은 선정을 베풀어야 하는 목민관으로서 의무와 책임을 저버리고 오로지 자신의 배를 채우고 향락에 빠져 들었다. 백성들은 죽건 말건 안중에도 없다. 여기에 분개한 전봉준(1855년-1895년)은 동학교도와 함께 민란을 일으킨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듯 정의의 칼을 뽑아들고 나선 그들은 탐관오리인 조병갑을 응징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요즘 방영되고 있는 SBS사극, ‘녹두꽃’이 민중의 저항의식이 무엇인지 깨닫게 한다.
정읍시에 있는 고부면 ‘황토현 전적지’를 찾았다. 도로변에 우람한 바위 비석을 세워 이 곳이 당시의 동학혁명군이 관군을 대파한 자랑스런 승전지임을 보여 준다. 평일이고 오전 10시 전이라 그런지 아쉽게도 박물관이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녹두장군이라 불리우는 전봉준의 동상이 벽화와 함께 우뚝 세워져 있다. 두 눈을 부릅뜬 채 혁명공약을 낭독하는 듯한 그의 모습은 당차고 두려울 게 없는 꿋꿋한 선비의 느낌을 풍긴다, 벽화로 새겨진 농민들의 모습은 흰 옷차림에 죽창과 낫, 쇠스랑, 곡괭이를 들고 있었다. 그들의 분노의 함성이 하늘을 찌르는 듯 했다. 전봉준을 녹두장군이라 부르는 이유는 비록 녹두알처럼 체구는 작지만 아주 단단한 사람이었다. 그의 동상 앞에서 그를 기리는 유명한 전래 동요를 읊조려 본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 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여기에서 파랑새는 전봉준의 전(全)자에서 한자 풀이가 팔(八)자에 왕(王 )자이므로 팔왕새를 뜻했다. 새 이름이 아니고 전봉준을 가르키는 은유인 셈이다. 결국 동학 농민 전쟁의 지휘자로서 성공하지 못하고 일본군과 관군의 합동작전에 패배하여 교수형에 처해진 안타까움을 파랑새 노래가 비유적으로 담고 있다. 전봉준의 부친인 전창혁은 조병갑의 수탈에 저항하다가 모진 곤장을 맞고 한 달만에 죽었다고 한다. 사회개혁의 큰 뜻을 품은 부친의 뒤를 이어 전봉준은 분연히 일어섰지만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끝이 났다. 그러나 동학의 이념인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다)사상은 인간 존중과 평등 정신을 드러냄으로 높이 평가됨이 아니랴. 예나이제나 세상을 바꾸는 건 언제나 힘없는 약자들이란 사실을 역사가 증명하는 듯하다.
고창 청보리밭의 아름다운 군무가 차별 받지 않고 잘 사는 세상을 꿈꾸며 아우성쳤던 우리네 조상들의 모습으로 오버랩 되고 있다.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개혁의 푸른 물결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으로 영원한 청보리밭의 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