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야
한반도 남쪽 대한해협 건너 아주 가까운 일본 섬, 대마도(쓰시마)를 한번쯤은 가보고 싶었다.
마침 이규태 교수의 소개로, 대마도학을 전공한 황백현 박사(랜드 발해투어 대표)가 개척했다는
대마도 역사탐방에 참여하기로 하고 회원들을 모았다.
♣ 제1일
서둘러 아침을 먹고 부산국제여객터미널에 도착해서 출국수속을 마쳤다.
드림플라워에 승선하고 정확히 9시 30분에 출항을 했다.
쾌청한 날씨, 이즈하라항까지 2시간 반쯤. 참 가까운 섬이다. 도착하니 12시다.
대마도는 부산에서 바라 볼 때 두 개의 말이 마주보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상도와 하도를 잇는 남북의 거리가 82km로 제주도의 3/5정도의 크기다.
부산에서 50km, 일본 규슈 본토와는 132km 떨어져 있어 사실상 우리나라와 더 가까이에 있는 섬이다.
대마도는 역사적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의 중계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토지가 협소하고 척박하여 식량을 외부에서 충당해야 했다. 고려 말부터 조공의 형식을 취하여 그 대가로 쌀을 받아 갔다.
이러한 양국 관계로 인해 대마도 주민은 한국어를 제2외국어로 사용했다.
다른 한편으로 대마도는 일본 수군의 중요 근거지이기도 했다.
1281년 몽골의 침략과 1905년 러일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다.
대마도는 이즈하라를 비롯하여 미쓰시마, 토요타마, 미네, 카미쯔시마, 카미아가타 등 총 6개의 읍(마치)이
발달해 있고 이즈하라에 시청이 있다. 그리고 선박이 드나드는 항구가 2개, 공항이 1개다.
우리가 귀국선을 탈 곳은 섬 북쪽 히타카쯔항이다.
가이드의 안내가 시작되었다. 우리를 포함하여 총 34명이 일행이다.
첫날 답사는 이즈하라항을 중심으로 하는 3시간 남짓 걸리는 주변 도보 코스였다.
중심도로는 4차선으로 되어 있고 골목과 골목이 도로 거미줄처럼 연결돼 있다. 비좁다.
그래서 일까? 차는 대부분 소형이다. 길거리를 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다.
골목 집안을 기웃거려 봐도 사람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조용하다. 그리고 아주 깨끗하다.
1488년 명나라 사신이 영조의 명으로 작성한 견문록 ‘조선부’에는 ‘조선팔도총도’라는 지도에 대마도를 조선의 영토로
표기돼 있다하고, 1949년 이승만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하며 반환을 주장했다지만,
그래서 ‘우리 땅’일 것으로 기대했던 문화적인 흔적은 찾기 어려웠다.
건축물이나 장묘문화, 생활문화 등은 일본의 전통 그대로였다.
첫 답사는 항구 근처에 있는 한어사(韓語司)로 1727년 雨森芳洲가 설립한, 조선과의 교역을 위한 통역사 양성을 목적으로
세워졌던 3년제 조선어 학교 건물이다. 雨森芳洲(아메노모리호수)는 대마도에서 일생을 바친 일본의 조선국 담당 외교관이다.
조선어와 중국어에 능통했고 일본이 선린외교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며 <교린수지>라는 한국어 교재를 편찬했다.
대마도 3대 성인의 한 사람이다.
한어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표민옥적 이란 곳이 있었는데, 이곳은 조선인 어부들이 남해안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풍랑 등으로 대마도나 일본해역에 표류하다가 수용되었던 장소이다. 조선 관리가 와서 협상 후에 표류민들을 귀국시켰다.
문제는 이 표류민들을 조선으로 귀국시키지 않고 노예로 팔아먹은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 다음 코스는 백제 비구니 법묘 스님이 창건한 사찰 修善寺다.
이 사찰 경내에는 의병운동의 선봉, 면암 최익현(1833~1906)선생의 순국비(1986.8 건립)가 있다.
74세의 노익장 최익현선생은 홍주 의병 9인과 함께 쓰시마로 유배되어 감금 3년형을 받고
1906년 11월, 대마도 구치소에서 아사 순국하셨다. 수선사는 선생의 유해를 잠시 안치해 둔 곳이다.
수선사 내에는 조선 말기 판서를 지낸 친일파 김학진의 친필 현판과
유두 9개의 조선의 種과 통일신라의 금동보살이 있으며, 대마도 3대 성인으로 꼽히는 ‘수야마토츠안’의 묘가 있다.
다음 행보는 대마도의 또 다른 성인의 한 사람인 國分太郞이 1811년에 제12차 조선통신사의 객관용으로 신축했다는
국분사이다. 국분태랑은 이등박문의 비서였다. 강제병합의 통역과 조약문을 작성한 공로로 훈장을 받은 자이다.
입구에는 ‘조선통신사막부접우노지비’가 있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막부가 이미 저물기 시작한다는 징조도
눈치 채지 못하고 통신사를 일본으로 보낼 만큼 세계정세에 어두웠다.
이 사찰 뒤쪽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국분태랑이 죽은 후에 그의 비문을 매국노 이완용이 썼다고 하여
그곳까지 올라가 확인하였다. 이완용은 오늘날 후손들이 여기까지 와서 침을 뱉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나 한 것일까?
일행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막부말기 ‘사무라이 쿠데타 거리’를 걸었다.
사무라이들이 당시의 위용을 과시하고 있는 듯한 거리를 따라 걸으니 나카라이토슈 기념관에 다다랐다.
나카라이토슈는 근대 일본의 신문기자였고 해외특파원1호라고 한다.
부모를 따라 부산에서 살아서인지 우리말에 능통했고 춘향전을 ‘大阪朝日新聞’에 연재한 인물이다.
일본 화폐 5천앤 지폐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같은 거리에 이즈하라 최초의 관청터인 나카무라 관적도 있었다.
일본 관광에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조상을 모시는 神社들일 것이다. 신사들을 통해서 일본의 장묘문화를 알 수 있다.
이즈하라 거리 중심부에 대마도의 대표적인 신사라 할 수 있는 하치만궁신사를 답사했다.
하치만궁신사는 ‘응신텐노’를 모셨단다. 이 ‘하치만궁(팔만궁)’은 ‘야하타구’로 불리기도 하는데,
야하타는 신라의 가야계인 ‘하타’계통의 씨족을 총칭하는 말이다. ‘한반도에서 온 바닷사람’이라는 뜻을 가졌다.
하치만궁 왼쪽에 마리아신사도 있었다. 마리아는 1575년 임진왜란의 선봉장인 고니시 유끼나가(소서행장)의 장녀로
천주교 신자였다. 마리아는 15세에 대마도 19대 도주에게 시집을 와서 남편을 천주교 신자로 이끌었다.
아버지와 남편 모두 임진왜란 전투 과정에서 희생되었다.
가이드는 신사에 얽힌 이 같은 이야기들을 막힘없이 술술 풀어냈다. 흥미로웠다.
조선통신사를 맞이하던 고려문이 옮겨와 있는 대마도역사자료관쪽으로 도보답사를 계속했다.
고려문은 대마도 21대 도주가 이즈하라에 城을 만들고 성의 정문을 고려문이라 칭하게 하고
조선통신사들이 이 문을 통과하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첫 날, 마지막 코스로 조선의 마지막 황녀, 비운의 덕혜옹주가 일제의 내선일체의 선전용으로 정략적 강제 결혼 당한
덕혜옹주 결혼봉축기념비다. 고종의 총애를 받았던 덕혜옹주는 1931년 대마도로 끌려와
大馬藩主의 아들, 종무지(소다케시)와 정략 결혼했다. 낯 선 땅에서 설움과 고초를 겪으며 살다가 1955년 이혼하고
1961년 귀국하여 1989년 창덕궁 낙선제에서 쓸쓸히 여생을 마쳤다.
가이드는 덕혜옹주와 종무지의 이야기를 소설처럼 풀어냈다.
배정된 숙소로 와서 짐을 챙기고 저녁을 먹으러 시외로 버스 이동했다.
저녁 식사 메뉴는 소고기, 생선, 야채 등을 구워먹는 요리다.